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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2

290. 약혼 Ep – 자동 선택

– 카앙!

레라가 찍은 검날은 마르하스의 빼곡한 강철 깃털에 튕겨 미끄러졌다. 레이는 그가 매달린 검에서 재빨리 한 손을 떼어 떨어지려는 레라의 등을 받쳤다.

“내 어깨를 밟고 서! 여기 상처를 찔러!”

레이는 왼쪽 어깨를 내밀었으나, 레라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발을 디뎠다. 레라는 왼발잡이라 디딤발이 반대였다.

날아올랐기에, 칼날이 돋은 절벽 같은 마르하스의 등에서 두 사람은 자세를 잡으려 애썼다. 레라는 오른발로는 레이의 어깨를, 왼발로는 마르하스의 목덜미를 밟아 몸을 바로 하였는데, 볼멘소리가 날아들었다.

“염병들 떨지 말고 죽이라고 이 개 같은 연놈들아! 씨발! 저 새끼를 믿은 내가 병신이다!”

아르펜이었다.

그는 칼날이 돋친 날개에 매달려 욕설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레이 저 새끼가 그냥 땅에 처박혀 뒈지게 냅뒀어야 했다, 그냥 죽이면 되는 걸, 다 죽게 생겼는데 저 약혼한 연놈들이 서로 공을 미룬다는 둥 고래고래 소리쳤다. 레이와 레라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레라는 자세를 낮추어 다시 칼을 잡았다. 어떻게 휘둘러 찌를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레라는 아르펜이 그리하던 대로 검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마르하스의 요동치는 등에서 조준하길 잠시, 푹! 하고 검을 찔렀다.

마르하스는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거대한 덩치에 비하면 바늘만큼 가는 검에 찔려봤자 별 탈이 없을 터라 내버려 두었다. 녀석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데에 집중하였는데, 그건 큰 실책이었다.

레이가 파놓은 상처에 레라의 검, 아보타(A’ bota)가 파고들었다. 라차르의 피가 묻어 하얀색인 검신이 눈부시게 빛나고, 날아오르던 마르하스가 비명을 질렀다.

–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쾅!

막 전당 천장을 뚫고 왕성 위로 날아오른 마르하스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한쪽 날개가 뜯긴 잠자리처럼 빙글빙글 회전하였는데, 아보타가 녀석을 잡아먹고 있었다.

검이 박힌 목덜미로 라차르의 피가 흘러들었다. 줄기줄기 뻗은 혈관이 희게 변색하면서 부풀었다. 마르하스는 환각을 보았다.

= 건방진 까마귀가 돌아왔구나. 내 어깨가 그립지 않더냐?

– 라, 라차르 님.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신의 형상, 칼과 방패를 어깨에 멘 전투와 명예의 신이 하대했다. 라차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 바람이 언제부터 네 것이었느냐? 반짝이는 모든 것 또한 너의 소유라고? 난 경고했다. 네 물욕이 언제고 큰 화를 부를 것이라고. 넌 아즈라에게 벌을 받고도 그 고얀 천성을 버리지 못하였구나. 잘 가거라.

라차르가 천둥이 치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태산처럼 거대한 주먹이 마르하스를 내리쳤는데, 이 모든 건 환각이었다. 온몸의 혈관이 하얗게 변색한 마르하스는 날갯짓을 잃고 낙하하기 시작했다.

[ 퀘스트 : 수호자(守護者), 2/4 – Barbatos MalHas ]

한편, 레이는 배꼽이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본 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650피트(feet, 약 200m) 상공에서 추락하고 있다. 아까 마르하스가 균형을 잃고 빙글빙글 도는 바람에 레라는 레이의 어깨에서 미끄러졌고, 바지춤이 그의 손에 간신히 붙들려 있었다.

레이는 왼손으론 마르하스의 목에 박힌 검을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레라의 옷을 붙든 채로 마르하스와 함께 떨어졌다. 가속이 붙을수록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살아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높이라는 건 차근차근 힘을 들여 낮추지 않는 한, 낮출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고 떨어지면 높이는 가속으로 치환되는데, 허공에 뜬 그는 물리량(物理量)의 세계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레이는 레라가 엄한 곳으로 튕겨 날아가지 않게 붙드는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가만히 곱게 떨어지기라도 했으면 고마울 텐데.

마르하스는 느리게 회전하면서 떨어졌다. 레이는 목에 박힌 검이 뽑힐까 봐 걱정이고, 쏜살같이 다가오는 죽음이 두려웠다. 아니, 더 두려운 건 허리, 바지춤이 붙들려 “으아아아아아!” 크게 회전하는 레라의 생사였다. 그녀는 팔다리를 어찌하지 못하고 바동거렸다.

어지럽다.

뚫고 나온 전당으로 도로 떨어지면서 전당을 둘러싼 회랑들이 돌았다. 어디가 위고, 아랜지 헷갈린다.

그때, 레이는 살아날 방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속이 더 붙기 전에 저쪽 회랑으로 건너뛰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한 3층 높이를 떨어지는 중이고, 어떻게 발을 디딜 여력이 없었다. 그는 검과 레라를 팔 양쪽으로 붙들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한 찰나였다. 레이는 이것밖에 없다, 소리쳤다.

“아르펜!! 받아! 받아서 뛰어요!”

“뭐, 뭘…? 으억!”

레이가 레라를 아르펜을 향해 집어 던졌다. 대흉근이 부풀고, 억지로 힘을 짜냈다. 검을 붙든 왼손 팔목이 우드득, 부러졌다.

영문을 모르는 레라는 “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데호르만의 것을 연상케 하는, 아르펜의 폭신한 배에 파묻혔다. 아르펜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칼날이 돋친 날개를 박찼다.

“끄억!”

12층 회랑에 떨어진 아르펜이 신음하고, 레이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뻥 뚫린 천장으로 푸른 햇볕이 쏟아지고 있다. 이를 올려다보며 레이는 쓰게 웃었다.

내가 그럼 그렇지.

뭘 해도 두 마리 토끼는 잡지 못하는구나. 아니, 그 한 마리마저 레라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난 완전히 실패했겠지.

낙하는 지독하리만치 길었다. 차라리 짧았으면 좋았으련만, 레라가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레이!! 레이! 안 돼!!”

“…레라.”

데호르만을 잃고 그녀가 통곡하던 게 기억이 났다. 레이는 차마 레라에게 행복해 달라 말할 수 없었다.

– “난 어떡하라고. 이렇게 죽으면… 내가 어떻게 살라는 거야. 이 나쁜 놈들아. 나쁜, 나쁜 놈들…”

그녀는 도저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 아버지와 데호르만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달려온 회차였다. 어머니를 되살리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레이는 레라를 눈에 담으며 손을 뻗었다. 미안해, 생각하는 순간 쿵! 진동과 함께 시야가 암전했다.

[ 레오가 죽었습니다. ]

[ 사망하셨습니다. 6/6 – 플레이어가 레오와 목숨을 공유합니다. ]

[ 업적 : 여섯 번째 사망 – 플레이어가 레오에게 동화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전당이 삽시간에 멀어져갔다.

뚫린 천장으로 시야가 날아오르며 피바다가 된 바닥과 이를 둘러싼 회랑들을 비췄다. 시야가 지나가는 중간에 난간을 딛고 뛰어내리려는 레라와 그녀를 붙잡는 아르펜, 두 사람의 발버둥이 스치고, 어둠이 깔렸다. 둥그런 구체가 된 민서는 한숨지을 따름이었다.

역시 잘 안 됐구나.

목걸이 없이 회차가 진행된 순간부터 이렇게 될 줄을 짐작하였기에, 민서는 안타까웠다. 그는 어둠에 잠긴, 레라가 통곡하던 방향을 지켜보다 엔딩 크레딧으로 시선을 돌렸다.

텍스트는 늘 그랬듯, 무미건조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레라 아이나르 알바세테 공(公) ]

[ 최종직업 : 알바세테 백작 ]

[ 결혼 상대 : 미혼 ]

[ 레이 덱스터 ]

[ 최종직업 : 무직 ]

[ 결혼 상대 : 레라와 약혼 ]

[ 약혼관계 엔딩 : 영웅담 ]

[ 진엔딩 ]

– 에이브릴 성에서 태어난 레라 아이나르는… (중략) …아버지, 데호르만과 노엘 덱스터, 약혼자인 레이와 함께 아스틴 왕국의 수도 바르나울을 향했다. 거기서 말파스와 조우하였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녀는 복수를 다짐했다. 아르펜 알바세테 남작에게 검술을 배우며 아스터 왕국으로 향한 레라는 레이의 도움을 받아 마르하스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공적으로 레라는 아르펜과 함께 악신을 물리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으나, 한동안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그녀의 배가 불러왔을 때였다. 알바세테 남작가에서 출산한 레라는 몇 년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북쪽 끝에 위치한 얼음섬을 향했다. 그곳에서 수없이 많은 마수를 사냥하던 중, 그녀는 아르펜 알바세테 백작의 부름을 받아 돌아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아놀프 드 클라우스 왕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레라는 통일 아스란 왕국의 백작이 되었으나, 성년이 된 아들에게 백작위를 물려주곤 조용히 어디론가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로 추정되는 무수한 영웅담들만이 레라 아이나르 알바세테 공의 발자취를 가늠케 했다. –

– 수도 바르나울에서 태어난 레이 덱스터는… (중략) …함께 마르하스와 싸우다 사망한, 레라 아이나르 알바세테 공(公)의 연인으로만 그 이름을 남겼다. –

[ 소꿉친구 시나리오 엔딩이 변경되었습니다. ]

[ 거지남매 시나리오 엔딩이 변경되었습니다. ]

엔딩 크레딧은 길었지만, 사진은 한 장만이 떠올랐다.

소꿉친구 시나리오와 거지남매 시나리오는 아스타로트에 의해 변경되기 이전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민서는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진 속에는 홀로 화톳불을 쬐는 중년의 레라가 있었다. 그녀는 제 키만 한 대검, 아보타(A’ bota)를 어깨에 걸쳤으나 조금도 작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아신들의 저주를 받아 얼굴에 여러 개의 문양이 새겨진 그녀가 아보타의 신비로움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착잡하게 바라보는 그때

휙- 레라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레라 아이나르 알바세테 공께서는 저를 훔쳐보는 인간을 주시하다가 “흥!”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 나메르, 장난치지 마. ]

사진의 빛이 바래고, 레라는 도로 화톳불을 쬐는,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충격받아 굳어있던 민서는 문득 서글퍼졌다.

나메르.

주신의 네 화신 중 하나인 인내와 헌신의 신을 친구 부르듯이 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또, 고맙게도 한 가지 궁금했던 사실을 밝혀주었다. 이 게임을 설계한 자가 주신이 아닌 나메르 신인 게 분명해졌다.

지난번에 아스타로트가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는 공간을 때려 부술 수 있었던 게 의아했는데, 그 의문이 해결된 것이고, 메시지가 가끔 앞뒤가 안 맞는 둥 시스템이 어딘가 어설프다고 느꼈던 게 이해가 됐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는 지난 약혼관계 회차 진엔딩이 뜬 순간,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어께서는 게임을 종료하실 수 있습니다. ]

플레이어가 이제 게임을 종료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띄워놓고는

[ 수호자(守護者) 퀘스트가 해금된 상태로 로그아웃하셨습니다. 재진입하시겠습니까? 수호자 퀘스트를 완료하기 전까지는 게임을 종료하실 수 없습니다. Yes / No ]

그 직후에 말을 번복했다. 이것 외에도 완벽 그 자체인 주신이 했다기엔 불완전한 요소가 많이 있었다.

이를테면 병사 열 명, 기사 한 명, 깡패 열 명 등의 살해 업적들이다.

직업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우습지만, 사제 열 명이라던가 성전사 한 명 따위의 업적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치사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단순한 설계 오류이거나 성직자들은 성녀를 통해 주신의 신력을 나눠 받은 이들이기에 나메르 신도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했을 공산이 높았다.

물론, 그렇다고 시간이 반복되는 이 모든 시스템이 나메르만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메르는 어설플지언정 주신의 분신이고, 인격화된 주신의 형상이었다. 그의 뜻이 곧 주신의 뜻이라는 데에는 쟁쟁한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나메르가 이 시스템을 만들고, 이끌어가고 있다면 텍스트들이 저렇게 무미건조한 게 이해가 가지. 성녀가 비나르 신은 잔소리가 많고, 보아르랑 라차르 신은 친근한 데에 반해 나메르 신은 무뚝뚝하다고 했으니까… 아차! 이런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닌데!’

민서는 퍼뜩 정신 차렸다.

엔딩 크레딧이 사라지기 전에 이번 회차를 돌이켜보고, 다음 회차는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민서는 그래도 레이가 마르하스를 잡았구나, 그의 성격상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했지만, 내게 많이 미안해하는구나, 따위의 감상을 누릴 틈도 없이 고민에 돌입했다. 다행히 지난 거지남매 회차 엔딩이 워낙 길었던 탓에 텍스트가 사라지기 전에 고민을 끝마칠 수 있었다.

민서는 일단 거지남매 회차를 선택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먼저 목걸이를 고쳐놔야 하는데, 진엔딩 선택 보상 말고는 고칠 방법이 없어 보인단 말이지. 만약 이번 회차 보상으로 목걸이를 고쳐주면 소꿉친구를 고르고, 다른 게 나오면 아직 클리어밖에 못 한 거지남매 시나리오를 골라서 진엔딩을 보자.’

이게 민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떠오른 메시지는 그의 기대를 보기 좋게 저버렸다.

[ 레나 키우기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하고자 하는 시나리오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 소꿉친구 – 진엔딩 ]

[ 약혼관계 – 진엔딩 ]

[ 거지남매 – 클리어 ]

‘…?’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며 아무리 기다려도 텍스트는 바뀌지 않았다. 민서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회차 보상은! 진엔딩 선택 보상은 아니더라도 이번 회차 보상은 줘야 할 것 아니야!!’

민서는 이대로는 못 간다는 듯이 버텼다. 어둠 속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기를 몇 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민서는 드디어 나메르가 뭐라고 답변해주나보다 하며 반색했지만,

[ 플레이어의 부재로 시나리오가 자동 선택됩니다. ]

그럴 일은 없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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