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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96

296

“계약 때문이라지만 많은 편의를 봐주셨다는 것도 알아요.”

처음엔 계약 뿐이었지만 플로리에 대공비와 제이스의 저주가 풀린 후부턴 그뿐만이 아닌 관계가 되었다.

그냥 잘 곳,먹을 것만 챙겨주면 계약대로 저주를 풀어줄 시모네에게 그것 이상의 관심과 지원을 해주었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그들은 살갑지 않은 시모네에게 진짜 부모처럼 모든 것을 챙겨주었다.

“감사하게도 생각하고요.이건 진심이에요.”

“수도의 집으로 간다고 들었다.혼자서 괜찮겠니?사업도, 혼자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더구나 수도지 않니.”

일레스톤 대공령에서 수도까진 거리가 상당하다.심심찮게 들여다보기에도 힘든 곳에서 평생 혼자 살아본 적도 없거니와 사업을 배운 적도 없는 시모네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시모네의 결심이 확고하다고는 해도…….

시모네가 미소지었다.

“걱정마세요.잘 할 수 있으니까요.힘들면 그때가서 말씀드릴수도 있고요.”

플로리에의 걱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시모네의 알맹이는20대 중후반의 서현정 아니던가.혼자 살아가는게 더 익숙했다.

“수도에 올라오시면 이따금씩 방문해주세요.언제든 환영이에요.”

플로리에가 입을 닫고 씁쓸히 웃었다.

사실 조금 더 머물다 가라 설득하려 들렸다만,시모네의 확고한 눈빛을 보니 소용없을 모양이다.

“그래,자주 들리마.본디 사업을 시작하는덴 규모가 적으나 크나 비용이 많이 든단다.그 부분에 대해선 우리가 부담해주마.그 정도는 괜찮지?”

“아이,그러실 필요 없는데.영웅이라고 이리저리 받은 돈도 있고요.”

시모네가 히죽거리며 차를 들이켰다.

“하지만 해주신다면 거절은 안하겠습니다.감사해요.”

“그래,이제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쉬렴.”

플로리에가 사뿐히 몸을 일으켰다.그리곤 미련스레 시모네와 그녀의 방안을 둘러보곤 방을 나섰다.

시모네 또한 적막이 감도는 방안을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보다 차를 한입에 털어넣곤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내일은 남은 귀신들을 처리하고 그 다음 날부턴 짐을 하나 둘씩 수도로 옮기고…….

양을 세듯 할일을 꼽다보니 어느새 서서히 눈이…….

이히히…….

시모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에이…….이건 아니지…….”

진짜야?

이히히힉!!!

시모네의 표정이 심히 고까워졌다.

오자마자 이런 소리를 듣는다고?

물론 여자 웃는 소리가 들린다고 듣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바로?

“쯧.”

시모네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 하루라도 조용히 자고 싶었는데 이런 소리를 들어버리면 잘 수가 없다.

일종의 직업병같은 것이었다.

“……아니다.오히려 잘됐어.”

시모네가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 속 부적을 꺼내들었다.

빨리 해치우고 쉴 수 있으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아나시스의 저주도 아니니 아무리 강해봐야 나보다 강하겠어?

시모네가 별 긴장감 없이 방문을 여는 순간.

“우악!깜짝이야!”

이힉이히힉놀랐지놀랐지놀랐지놀랐지놀랐지놀랐지???

문앞에 새카맣게 썩은 여자가 시뻘건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하게 웃고있었다.

시모네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설마 문앞에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해서 진심으로 많이 놀랐다.

“하…진짜…….”

시모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귀신의 모습을 빤히 관찰했다.

새카맣게 썩은 웃는 여자.

지침서엔 없었던 귀신이다.하지만 아나시스의 저주가 사라진 마당에 외부의 귀신이 새로 들어왔을 리는 없고 원래 있던 귀신일텐데.

그런데 시모네가 모른다는 건 아나시스의 저주가 기승을 부릴 땐 기도 못 펴고 있던 놈이라는 말이다.

시모네가 슬쩍 부적을 꺼내 보였다.

부적을 봐도 겁먹는 기색없이 히죽이는 걸보면 이미 사용인이 부적을 이용한 퇴치를 시도해본 모양이다.

‘그리고 소용이 없었겠지.’

하지만 만약 부적 사용자가 시모네라면 어떻게 될까?

시모네가 부적에 자신의 마나를 흘려 보냈다.그러곤 챡-간단히 귀신의 이마에 붙였다.

듣던대로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제와서 귀신에게 역겨움이나 무서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부적이 가장자리부터 작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히죽이던 귀신의 웃음이 멎었다.여자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시모네를 쳐다보았다.

부적 사이로 보이는 사시눈.얼핏 살기를 띠는 그 눈을 보며 되레 시모네는 미소지었다.

“네가 뭐라고 사람들을 놀래켜?”

아주 신났지?

신났을 거다.그간 자신을 억눌러왔던 저주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남은 귀신들 중 그나마 강한 귀신이 자신이라서.

저택에 남아있던 죽음의 기운을 삼키자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도망치니까.

공격은 못할지언정 사람들을 놀래키며 뒤늦게 재미를 봤을 테지.

하지만 아나시스를 상대하던 시모네에게 이 정도 귀신은 말 그대로 딱밤 한번 튕겨서 없앨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아……아…….

으,으아…….

꺄아아아아악!!!!!!

이내 고통을 견디지 못한 귀신이 제 이마를 붙잡으며 부적이 붙은 자리부터 산화하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 이렇게 끝나네?”

시모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탈탈 손바닥에 부적뭉치를 털어냈다.

“흠.”

겨우 이 정도란 말이지?

‘이 정도면 한 방에 끝낼 수 있겠는데?’

시모네는 완전히 사라진 귀신이 있던 자리를 보며 또르르 눈을 굴리곤 획 몸을 돌려 도로 방으로 향했다.

퇴치에 꽤 시간을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그냥 내일 이 저택에 있던 귀신들을 뿌리를 뽑아버려야겠다.

***

다음 날,저택의 사람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저게 그거래.전쟁터에서 사람들을 살렸다던 그거!”

“그 기술을 쓰신다고?여기서? 왜?”

“한방에 귀신들을 없애신다나봐!”

“귀,귀신을 없애는데 그렇게 큰 기술을 쓰신다고?”

저택 사람들 뿐이 아니다.국민적 영웅인 시모네의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용감하게 대공의 저택 앞에 찾아온 이들 또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저택의 정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시모네는 괜히 민망해져 바닥을 툭툭 발로 차댔다.

“별 것도 아닌데…….”

단번에 마족들을 일망타진했던 마나안개.

그땐 구척귀신이 빙의된 상태였어서 본래의 힘보다 강하게 나갔지만 원랜 그리 대단한 기술도 아니었다.

다만‘일망타진’이라는 게 워낙 임팩트가 있다보니 제국 내에 퍼진 시모네의 영웅담엔 늘 언급되는 거의 그녀의 대표기술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무튼,시모네는 마지막으로 이 저택에 마나안개를 퍼트려 그나마 남아있는 귀신들을 모조리 없앨 생각이었다.

‘일명…소독이지.’

시모네가 깊게 숨을 골랐다.그러자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오…….”

입구 바깥에서 이를 본 외부인들의 감탄사가 연이어 쏟아졌다.

저게 말로만 듣던 그 루비같이 반짝이는 눈!네크로맨서가 힘을 끌어 쓸 때만 볼 수 있다는!

그들은 언제 네크로맨서를 기피했냐는 듯 네크로맨서의 특징 하나하나에 놀라며 좋아했다.

시모네는 민망함에 저도모르게 웃곤 서서히 저택 전체에 안개를 퍼트리기 시작했다.

느껴진다.저택 여기저기에 숨어있는 영혼들이.그들이 시모네의 마나를 피해 도망치다 하나둘씩 잡혀 서서히 산화되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어…….

섬뜩한 목소리 여러개가 연이어 저택 내부에서 울려퍼졌다.그리고 잠시 후 저택의 활짝 열린 창문으로 거뭇한 것들이 불타오르며 빠져나오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

이를 지켜보던 일레스톤은 사라져가는 영혼들을 보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오늘로서 드디어 길고 길었던 일레스톤 가문의 저주가 완전히 끝이 났다.

‘드디어.’

저주에 당해 일찍이 죽은 제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제이스와 플로리에.

눈을 감으니 그간 있었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꺼풀 아래로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됐다.이제 정말 계약이 끝났네요.”

마나를 모두 거두어들인 시모네가 일레스톤 대공을 보며 활짝 웃었다.그녀 또한 생각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나고 쉴 수 있으리라.

***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편지하거라.”

짐마차를 수십대나 보내고 직접 시모네의 집을 확인까지 했음에도 플로리에의 걱정은 끝나지 않았다.

“시모네니임…….저, 저 진짜 자주 놀러갈 테니까요…….그동안 몸 건강히 지내시고…….”

“알겠어요.알겠어. 제이스 도련님,울지마세요.”

시모네는 살짝 피곤한 얼굴로 제이스를 토닥이다 마차에 올랐다.

오늘은 시모네가 독립하는 날.저택의 모든 식구들이 나와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시모네는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곤 마지막으로 저택을 살폈다.

아마 한동안은 이곳에 올 일이 없게 되겠지.

후련하기도 시원섭섭하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시모네는2층, 자신의 방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다 일레스톤 부부와 제이스,그리고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종종 들리마.”

시모네가 고개를 끄덕였고 일레스톤 대공의 시선을 받은 마부가 마차를 움직였다.

시모네는 끝까지 저택의 광경을 지켜보다 문득 무거워지는 어깨에 고개를 돌렸다.

“와…너는 성불 안하니?시모네.”

구척귀신이 대롱대롱 시모네에게 매달려있었다.이제 아나시스도 죽었고 할일도 다 끝났으니 죽음의 신 곁으로 돌아가 편히 쉬어도 될 텐데.

그간 정이라도 들었는지 꿋꿋하게 곁에 있더라.

‘뭐,얌전해지기도 했고.심심하진 않아서 좋긴 하지…….’

“이렇게 된 이상 이제 너도 내 직원이야.귀신으로서 제대로 일해라?”

참고로 월급은 없고.

시모네가 피식 웃으며 마차의 커튼을 닫아버렸다.

***

Epilogue.귀신 때문에 고통받고 계십니까?

샹들리에와 우아한 선율의 음악,화려함에 취해 춤추는 사람들.

그 속에 단 한 사람,웃지도 즐기지도 못한 채 연거푸 술만 들이키는 여인이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여인,언젠가는 사교계의 나비라고 불리우던 엘리오나라는 자였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보이는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습관적으로 몸을 떨었고 이따금 상처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보이는 상태에 그 누가 그녀와 함께하고 싶겠는가.

모두가 그녀를 꺼려하며 피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단 한 사람,무척 준수한 용모를 가진 이가 다가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드모아젤,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엘리오나의 고개가 획 신경질적으로 돌아갔다.

“누,누구야……. 꺼져…….”

“하하,저는 체일러,체일러라고 합니다.걱정스러운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혹시…….”

“싫어!싫다니까? 꺼져……!”

파티에서 말을 걸어오는 남자는 뻔하지!짜증스레 그를 떨쳐내려던 엘리오나는 뒤이어 나오는 그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을 괴롭히는 유령이라도 있으신지요?”

“…….”

유령…이라고?이 사람 혹시 농담하는 걸까?

그러자 체일러 자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농담이 아닙니다.아무래도 제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군요.”

“그걸…어떻게…….”

그녀의 물음에 체일러 자작이 쉿,입가로 검지를 가져다댔다.

“실은 전 그대와 같은 고통을 겪는 자에게‘그 가게’를 소개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게?”

“네,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들려주시길.”

체일러 자작이 명함을 내밀었다.

[저주에 고통받고 계십니까?-시모네]

엘리오나의 눈이 커졌다.

“시모네,시모네라면…….”

체일러는 그녀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고 미소와 함께 멀어졌다.

***

딸랑-.

소박하게 세워진 수도의 작은 건물.책이 한가득 쌓여있고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햇볕길엔 먼지가 가득하다.

파티 이후 며칠 간 혹독하게 가위에 눌리던 엘리오나는 결국 체일러 자작이 소개해준 가게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여기가 맞아?

아무도 없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건물의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손님?어서오세요.”

“앗,저기…….”

뭔가 들어와선 안될 곳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

어쩔 줄 모르고 힐끔힐끔 상대의 얼굴을 보던 엘리오나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큰 소리로 내뱉었다.

“시,시모네님?”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틀림없이 루안 제국의 유일한 네크로맨서 시모네이리라.

시모네는 그녀를 향해 다정히 미소짓곤 소파에 앉았다.

“일단 앉으세요.”

“왜 시모네님이 여기에…….여긴 도대체, 아!”

아, 네크로맨서라면. 드디어 상황파악이 된 엘리오나가 곧 울 것같은 눈망울이 되어 시모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는 시모네님의 가게인가요?”

“맞아요.이곳은 귀신이나 저주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가게입니다.당신의 고통은 제가 해결해줄 수 있어요.”

시모네가 손가락으로 동전모양을 만들었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요.”

“하,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얼마나 비싸든 귀족 아가씨에게 목숨보다 치루지 못할 값은 없었다.

절박하게 매달리며 제 사정을 털어놓는 그녀를 보며 시모네가 활짝 웃었다.

아이고 체일러가 드디어 일을 하네!

“당연하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세요. 뭐든.”

시모네의 작고 소박한 가게.

“제가 당신의 저주를 풀어드릴게요.”

그녀의 평온한 일상에 한떨기 도파민같은 가게 [저주에 고통받고 계십니까?]는 오늘도 루안 제국의 저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FIN

제네온은 제 앞에 놓인 성녀의 욕망을 복잡한 감정으로 쳐다보았다.

‘누구 제자인지 머리 한번 잘 썼군.’

자신의 마나를 마석에 담아 전달할 생각은 어찌했는지, 원.

하지만 덕분에 이 끝없이 이동되는 던전에서 탈출하는 건 문제가 없을 듯하다.

‘오래간만에 인간다운 마법을 써 보겠군.’

제네온은 마석에 제 앞발을 올리며 말했다.

“죽음의 마나는 보통의 방법으로 사용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니 제이스, 너는 황태자의 치료를 서둘러라.”

“네!”

제이스의 치유력이 한결 더 강해졌다. 제네온은 자신에게도 미력하게나마 들어오는 기운을 느끼며 마석에 제힘을 흘려보냈다.

‘느껴진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짙고 어두운 기운이. 그것이 서서히 제네온의 마나와 섞여 조금씩 융화되고 정화되어 간다.

참 많이도 꾹꾹 눌러 담았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펼치고도 마나가 한참이나 남았다.

‘마나를 이렇게나 담았다는 건 아마…….’

제네온은 애써 잡생각을 지우곤 마석에 담긴 죽음의 마나를 모조리 받아들였다.

이미 시모네의 마나를 받아들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그다지 불쾌하진 않았다.

제네온은 제 몸속에 충만해진 마나를 느끼며 루이비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너덜거리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 짧은 사이 그래도 스스로 일어날 정도로는 치료되어 있었다.

제네온의 생각을 알아차린 아벨이 퉁명스레 말했다.

“쟤 없어도 괜찮아요.”

“아벨.”

“이깟 던전, 나 혼자서도 부술 수 있어.”

루이비가 정말 괜찮겠냐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아벨은 이를 무시했다.

못 미더운 눈빛은 소드마스터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상대가 마왕이고 마족이라 조금 더디게 싸우긴 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전쟁에선 50개의 군사단과 맞먹는 저력을 보여 주는 게 소드마스터다.

이깟 거대하기만 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던전 따위 혼자서도 부숴 버릴 수 있었다.

“부상자는 나서지 말고 치료나 받아. 아나시스 그 개새끼가 나타나면 같이 싸워야지?”

아벨의 말에 루이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던전을 부수는 게 중요하던가?

중요한 건 던전이 부서진 뒤 아나시스를 처치하는 일이다.

‘더군다나 전투원도 이게 전부이니.’

시간이 멈춰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은 무리하며 몸과 체력을 낭비해선 안 됐다.

제네온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준비된 모양이구나. 그럼 시작하마.”

일행들이 제네온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곧 검은 고양이의 주변에 거대한 텔레포트가 생성되었다.

***

‘언제까지…….’

시모네가 이를 악물었다.

아벨이라면 분명 시모네보다 빠르게 텔레포트를 이동하며 부탁한 일을 해내 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텔레포트에 연결된 장소가 많다는 걸 알 리 없는 시모네는 아나시스와의 대치가 버거워짐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시모네의 힘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안 아나시스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너 점점 야위어 가는구나. 곧 나에게 잡아먹히겠어.”

“…….”

“옳지, 좋은 생각이다. 너까지 잡아먹으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나는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순간 시모네에게로 쏟아지는 아나시스의 마나 화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화르륵-!

“으윽!”

결국 그녀의 화살이 시모네의 팔과 다리를 꿰뚫었다.

고통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물러서면 죽으니까.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시모네가 이를 갈며 아나시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퍼엉!

시모네의 손에서 마나가 폭발하자 아나시스가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죽음의 신, 이 개새끼야…….’

이게 사는 거냐? 여기서 살아나라고?

이 세상에 맨몸으로 떨어진 뒤부터 인생 자체가 도박의 연속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도박은 없었다.

시모네가 최고의 전투원이자 주인공 버프 토템 아벨을 제 손으로 이 장소에서 내보내면서까지 혼자 아나시스를 상대하고 있는 까닭.

그건 바로 이 던전을 무너트리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늦어!’

생사를 오가며 싸우는 이 순간에도 문득 불안감이 스쳤다.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위험한 상황이면?

내 계획이 허상이어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끊임없이 싸우는 이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러던 찰나 공간이 흔들리고 허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의 끝을 태우고 있는 붉은 오러.

‘드디어!’

진짜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콰앙!!!!

쿵!!!!

삼도천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 그리고 부스러지는 하늘 사이로 선명하게 드러난 균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나시스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무, 무슨…….’

조금만 더 하면 시모네를 잡아먹는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의지가 갈수록 꺾이는 게 눈에 보였고 체력도 마나도 한계에 치달았으니.

그러나 삼도천에 구멍이 생기고 그와 동시에 시모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아나시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더 맹렬히 공격을 퍼부으려 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시모네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나시스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시모네가 먼저 손을 뻗었다.

그러곤 독기를 줄줄 흘리고 있는 아나시스의 팔을 거침없이 붙잡았다.

닿은 피부를 통해 시모네의 마나가 지금까지와는 현저히 다른 기세로 아나시스에게 스며들어 그녀의 마나 흐름을 틀어막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 이……!”

아나시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모네의 힘은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시모네도 무척 버거워하는 모습이었고.

그런데 아직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시모네의 붉은 눈동자는 교교히 빛났다.

아나시스가 당황하며 발악했지만 시모네는 표정 없이 계속 그녀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과 팔은 아나시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독기로 오염되어 새카매져 있었다.

몹시 고통스러울 터인데 붙잡은 손의 힘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더는 공격하지 않고 그저 붙잡고 마나의 흐름만 흔드는 시모네의 행동이 도통 이해되지 않아 이윽고 아나시스가 공격을 멈췄을 때.

까지직- 채앵!!!

그들의 뒤에서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땅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던 삼도천이 깨진 거울 파편 휘날리듯 조각나 사라졌고 시모네와 아나시스는 동시에 허공에 붕 뜬 신세가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아나시스는 어떠한 대처도 못 한 채 추락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당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우, 죽을 뻔했네!”

아나시스를 보며 말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

죽을 뻔했다는 건 이제 죽을 일이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리고 시모네의 말은 지금의 상황과 딱 맞았다.

“아나시스를 발견했다! 전군, 공격하라!”

“영웅과 아나시스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나시스만을 공격해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시간을 멈췄었는데?’

영원히 멈춰 있어야 할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멀쩡히 서서 아나시스를 향해 공격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저들의 시간이 멈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움직였었다.

뭔가 많이 잘못되었다.

물론 인간들이 퍼붓는 공격의 태반은 아나시스에게 흠집 하나 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나시스의 안색은 땅과 가까워질수록 창백해졌다.

아나시스가 눈을 돌려 시모네를 바라보았다.

다 저 여자가 해낸 일일까? 마왕의 힘을 이용해, 신과 가까운 권능을 사용해 시간을 멈춘 것을 저 여자가 풀어낸 걸까?

무슨 수로?

“대단하네.”

그때 시모네가 중얼거렸다.

아나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모네는 이럴 줄 몰랐다는 듯 매우 감탄하는 눈빛이었다.

“이, 이럴 순 없어!!!!”

승기가 완전히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듯한 그 얼굴에 짜증이 치민 아나시스가 악을 쓰며 시모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묵직한 아나시스의 공격은 시모네에게 닿기도 전에 아벨의 검에 맞고 튕겨 나갔다.

아벨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나시스는 깨달았다.

……그리된 것이었구나.

아나시스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

그래서 시모네만을 공격하느라 함께 온 아벨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가 했다, 새끼야.”

드높았던 던전의 꼭대기에서 시작된 기나긴 추락.

시모네는 마침내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마나 사용이 조금만 서툴렀다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시모네 니임! 으헝!!!”

제이스를 포함한 일행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시모네의 몸을 살폈다.

“세상에. 시모네, 너는 어떻게 멀쩡히 나오는 일이 없어?”

비앙키가 말도 안 된다며 시모네를 질책했다.

입에서부터 몸, 손, 어느 곳 하나 피로 얼룩지지 않은 곳이 없다.

누구보다 죽음이 두렵다던 사람이 왜 자꾸 목숨을 거는 싸움을 하는지, 원.

제이스가 서둘러 치료를 시작했고 그들보다 한발 늦게 루이비, 오르칸, 제네온이 다가왔다.

루이비는 시모네와 별다를 것 없는 넝마 신세고…….

시모네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오르칸과 제네온 님은 다행히 멀쩡하네요.”

“웃지 마라, 이 녀석아!”

제네온이 버럭 호통을 쳤다. 그의 목엔 성녀의 욕망이 줄에 엮인 채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시모네는 얄밉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멀쩡히 움직이며 아나시스를 공격하는 사람들.

아벨과 루이비의 힘으로 던전을 부수는 것까진 시모네의 계획이었지만 저들이 다시 움직이는 건 영문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비앙키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말했잖아! 내 할 일을 한다고.”

제네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르칸과 비앙키가 엘에게서 아티팩트를 받아 왔다. 역시 엘도 시간의 멈춤을 피했던 모양이구나.”

오르칸 또한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일 먼저 던전에서 튕겨 나와 다행이었습니다.”


           


The 100 Curses of Illeston Mansion

The 100 Curses of Illeston Mansion

THCOIM 일레스톤 저택의 100가지 저주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ve been reincarnated into a template fantasy novel.
The problem is that I’m a necromancer supporting character with the world’s strongest setting, sacrificing my life for the protagonist.

‘This is ridiculous!’

With this power, are you telling me I have to sacrifice my life and follow the protagonist like a lunatic?
That’s why I’m here.
To the mansion of Raytance Orr Illeston, the antagonist within the story.
To where I’m needed.
To the place where I can live the most comfortably.

“I’ll lift the curse on this mansion. In exchange, please take care of me.”

To survive, I have to do something a little scary, but I have no choice.

I have to become the savior of this mansion.

[Instructions for Illeston Mansion] First, entry and exit to the mansion are restricted. Don’t approach the entrance closely, and use the back way when going out.
Failure to comply may result in your life being forfe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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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undredth, never enter Grand Duchess Florie’s room. Don’t knock on the door or even pass by nearby.
Also, prepare meals for Grand Duchess Florie twice a day, for two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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