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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0

298. 남매 Ep – 출세

아릴레이 극장에서 열린 엘런의 전시회는 어제보다 오늘 사람이 더 많았다.

엘런의 출세작이 전시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레안은 크세니아와 약속한 대로 이틀째 데이트를 나와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는데, 여느 전시회가 그러하듯, 그림들은 일정한 테마로 분류, 전시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십자교회의 거룩함을 주제로 한 그림을 모아놓았다든지, 위대한 아카이아 제국의 전성기를 묘사한 작품이나 민화로 분류될법한 오르빌의 거리 풍경 따위를 한곳에 모아둔 것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테마 중에서도 이목을 끄는 섹션(section, 구역)이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붐비는 그곳은 ‘포르테 백작가’가 사들인 엘런의 작품을 모아둔 곳이었다.

전시회 주최 측에서 깨나 고생해서 대여해온 만큼 가장 눈에 띄게 꾸며져 있기도 했다.

사람이 붐비는 게 싫은지라, 레안과 크세니아는 다른 곳을 먼저 둘러보았다.

전시회장 중간중간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레안은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있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미뤄두었다.

“레안, 당신은 맛있는 건 아꼈다가 마지막에 먹는 편인가요?”

크세니아는 이런 사소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교제도 허락받았고, 진도를 더 뺄 수 없을 만치 깊어진 사이라지만 만난 기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레안이 빙긋, 웃었다.

“음~ 저도 당신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하나, 둘, 셋 하면 악수하는 거예요.”

“악수요?”

“당신이 맛있는 걸 아꼈다가 드시는 편이라면 오른손을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왼손을… 저도 그렇게 할게요.”

“하하! 재미있겠네요. 좋아요. 그럼 하나.”

“둘.”

“셋! 어머나.”

크세니아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레안은 왼손을 내밀어서 크세니아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저런, 악수는 못 하게 됐네요. 아꼈다간 당신한테 다 빼앗길 것 같아 앞날이 걱정이고요.”

“하하. 악수는 못 하지만 이렇게는 할 수 있죠.”

레안이 왼손을 뒤집어 크세니아가 내민 오른손을 잡았다. 깍지를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것이다.

“갈까요? 사람이 많이 빠졌네요.”

“……네.”

레안의 손에 붙들려 일어난 크세니아. 뒤따르는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발그레, 부끄러이 차올랐다.

* * *

좀 전에 비하면 한결 한산해진 전시회장, 레안과 크세니아는 포르테 백작가 섹션에 발을 들였다.

레안은 휘유- 감탄했다.

성인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캔버스들과 화가로서 물이 오른 엘런의 작품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레안과 크세니아는 손을 맞잡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대작들을 감상해나갔다. 곁에 선 크세니아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비사를 알려주었다.

“길버트 포르테 공자가 엘런의 그림을 마구 사들인 게 시작이었어요. 참 얄궂죠. 그 망나니로 유명한 사람이 어째서 이것들을 사 갔는지 알 것 같나요?”

크세니아의 질문에 레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 포르테가 사들였다는 그림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 소년과 어머니.

첫째로 딸을 가진 엘런이 아들도 갖고 싶다며 무언의 시위를 한 그림들이었다.

카트리나를 닮아 붉은 머리를 가진 딸이 아닌, 저를 닮은 검은 머리의 소년을 카트리나와 함께 그려 넣었는데, 이게 망나니, 길버트 포르테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의 어머니, ‘이이나 이사도라’는 헤르만 포르테 백작과 이혼했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을 그 그림들에서 발견했을까.

길버트 포르테는 엘런의 그림 중에서 소년과 어머니가 등장하는 걸 싹쓸이했고, 그로 인해 엘런은 세간의 주목을 받아 출세할 수 있었다.

길버트 포르테의 지독한 여성 편력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으로부터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매 회차마다 길버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리’해본 레안은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기억해 두었다.

사실 레안은 이번 회차에 들어서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향후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주위를 둘러보던 레안의 눈동자에 한 커플이 들어왔다.

‘데로스랑 소이린이군.’

주황 머리의 꽃집 아가씨, 소이린과 카트리나의 후배였던 데로스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쩐지 소이린이 내게 관심이 없더라니. 데로스와 사귀는 중이어서 그랬나 보다. 무엇 때문에 저런 변화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안은 이것도 기억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저 사람은 오늘도 와 있네.’

타탈리아 왕가의 근위기사단장, ‘햄릿’ 경이었다.

어제 크세니아와 부닥쳤을 때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생각했는데, 그는 오늘도 혼자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뭐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레안은 이것도 기억으로만 남겨놓았다.

머리 아프다.

데로스와 소이린, 햄릿 경 외에도 어디선가 스쳐 갔던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거지남매 회차만 벌써 일곱 번째인 것이다.

정말 어지간해선 한 번쯤 만난 적이 있어서, 하나하나 기억해 두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레안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아두었다.

레브나 레이였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수년에 한 번씩 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메시지를 기억해내는 민서가 그나마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레안은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는 주위를 모조리 살피면서도 크세니아와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었다.

이윽고 레안이 크세니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알 것도 같지만, 입 밖에 내는 건 길버트 포르테 공자께 실례겠네요. ‘우리 같은’ 평민은 말을 조심해야 한답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못 살아. 잊어줘요.”

“하하. 맨입으로는 어렵고… 생각해볼게요.”

레안이 제 뺨을 검지로 두드리며 말했다. 크세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쪽, 그의 뺨에 키스해주었다.

레안은 다소 뜬금없이 빨리 키가 커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슬슬 하고픈 말을 꺼내기 위해 분위기를 잡았다.

“크세니아.”

“네, 말씀하세요.”

그녀를 불러만 놓고, 레안이 다시 입을 연 건 두 점의 그림을 지나쳐서였다.

그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크세니아.”

“네에-”

…이게 아닌데.

크세니아는 레안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좀 진지해야 할 이야기라 레안은 표정을 굳히며 다시 말했다.

“크세니아. 당신과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가요?”

무슨 말을 하려고 사람을 세 번씩이나 부르는 걸까.

한창 기분이 좋은 크세니아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당신 아버님을 만나 뵙고 싶어요. 이대로 어정쩡한 관계를 지속하느니, 아버님께도 우리 관계를 빨리 인정받고 홀가분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어떻게 생각해요?”

크세니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절대 인정해주지 않을 거예요.”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요?”

“네. 저희 아버지는… 혈통에 집착하는 분이세요. 이건 노력한다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어머니와는 달라요.”

“그렇군요.”

레안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이게 우리 사이에 당면한 문제라는 걸 직시할 때까지, 그녀에게 고민할 시간을 준 뒤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닥쳐야 할 일이에요. 당신은 지금 아버님을 뵙고 있지 않지요? 그러면 문제가 악화할 뿐, 해소되지 않아요.”

“…저도 알아요. 단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크세니아.”

레안이 그녀와 깍지낀 손을 들어 제 가슴에 붙이며 말했다.

“당신은 이게 외길이라는 걸 알아요. 저를 걱정해서 망설이는 것이겠지만, 이대로 있어 봐야 시간만 흐를 뿐이에요. 전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얼마나 절실히 결혼하고 싶은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쿵쾅, 뛰는 심장.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알 수 없는 제안을 해올 베나르 타티안 후작을 대비코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가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단지 시간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을 따름이었다.

또, 타티안 후작의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후작은 의외로 양보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는 교섭하기를 즐겼다.

다만 문제는…

거래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9번째, 뭣도 모르던 시절의 거지남매 회차가 그렇게 끝났다.

크세니아 대신 레리아나가 거래의 대상이었던 그때, 타티안 후작은 상당히 오랫동안 나를 지켜봤었다.

능력도 없는 게 양자랍시고 꼴값 떠는 걸 몇 달이나 방치하였는데, 그게 베나르 타티안 후작의 마지막 상도덕이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동생의 가치가 높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레안은 스스로를 후작과 교섭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오러블레이드를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크세니아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타티안 후작은 내가 크세니아와 연애를 하니까, 다가왔다.

이전 회차에서 내가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와 키스한 직후에는 등을 돌렸는데, 그렇다는 건 나와 크세니아의 관계가 그에게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게 나의 협상 밑천인 셈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레안은 크세니아와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얼핏, 그녀를 이용하는 것 같지만 레안은 되려 자신을 질책하며 웃고 말았다.

‘크세니아랑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별별 핑계를 다 갖다 붙이는구나, 레안 드 예리엘.’

결혼. 이게 문제였다.

우리는 여태껏 결혼을 레나와밖에 해보지 못했다. 소꿉친구의 레아든, 약혼관계의 레라든.

한데 결혼하는 순간 엔딩이 뜨는 관계로 레브와 레이는 기뻐하기보단 매번 슬퍼했다. 평생을 함께하겠노라 맹세하는 그 순간에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는 처지가 달랐다.

내 결혼은 엔딩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늘에 감사하게도. 레리아나의 진엔딩이 뜨기 전까지, 신혼을 누릴 수 있었다.

이게 얼마나 한이 맺힌 욕구인지 아무도 모를 터였다. 오직 쿵쾅거리는 심장만이 알았고, 레안의 가슴에 손등이 닿은 크세니아는 간접적으로 알아들었다.

그녀는 다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정말로 시간이 필요해요. 어머니와도 이야기해봐야 하고… 제가 먼저 다녀올게요. 무턱대고 가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예요.”

“네, 그거면 됐어요. 고마워요.”

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사실 내가 예리엘 왕가의 달아난 왕자요.” 말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일을 이렇게 번잡하게 진행하는 까닭은,

– “왕자님께서는 그럼 제게 왜 고백하신 거죠? 혹시… 아니에요. 제게 왜 고백하셨는지 말해주세요. 제가 왕자님께 ‘필요’했나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그리고 이번에는 {혈통}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내 {혈통}은 크세니아를 만나 결혼하는 데에 쓰일 것으로 족했다.

내 동생의 피도 마찬가지고.

레안과 크세니아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내며 전시회를 마저 관람했다.조촐하게 식사한 뒤, 헤어져 돌아온 레안에게 근사한 정장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그는 옷을 가져다준 카트리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그럼 호위도 부탁할게요.”

“…빨리 타기나 해.”

카트리나가 툴툴거렸다.

그녀에겐 내가 크세니아를 꼬셔서 벼락출세하려는 놈팡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라는 걸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레안 드 예리엘은 스스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여 왕자로서의 마지막 행보를 가다듬었다.

나는 머지않아 ‘레안 페테르’가 될 것이니까. 레안 드 예리엘, 그 지체 높은 예비 데릴사위는 이윽고 페테르 백작가의 문턱을 넘었다.

벌써 소문이 났는지 “저 사람이 영애께서 데려온 평민이래.” 웅성거리는 시녀들의 비아냥 속에서 레안은 고개를 높이 치켜들었다.

다행히 딱 한 사람, 왕자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벌컥 화낼 준비만 하고 있던 장인어른,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이었다.

그는 어찌나 놀랐는지 찻잔을 쥔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고, 레안이 까닥, 인사했다.

“레안입니다.”

– “오랜만입니다.”

그는 뒷말은 입 모양만으로 뱉었다. 아주 옛날에 백작이 그러했던 대로.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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