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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7

305. 남매 Ep – 안경

“오늘 일정은 다 취소야.”

길버트 포르테가 제 시종의 입을 틀어막았다. 금일 모 백작의 영애가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말을 전하던 시종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 벌써 해치우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클라라 영애를 뵈러 가시겠군요?”

“아니. 취소라니까.”

“어? 클라라 영애도 벌써 자빠뜨리셨습니까? 이상하네. 그럴 시간이 없으셨을 텐데요. 잠시만요, 그러면 오늘 가실만한 곳이… 그렇지. 베키 님과 식사하시기로 했던 것 일정을 당겨올까요?”

길버트의 미간에 힘줄이 솟았다. 주인의 연애사에 빠삭해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시종이지만, 지금은 저 입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길버트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취소라고! 취소! 오늘은 따로 갈 곳이 있어.”

하지만 길버트가 누구냐.

오르빌의 호색한, 위대한 포르테 백작가의 못 말리는 탕아다. 시종의 얼굴엔 일말의 기대감도 없었다.

오늘은 창관에 가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시종은 별다른 말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뒤에 남겨진 길버트는 옷을 단정히 차려입었다.

평소 기름을 발라 머리를 말끔히 넘기던 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길버트에게 무척 기대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아버지, 소자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래.”

왕궁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헤르만 포르테 백작은 웬일인지 오늘은 입궐하지 않았다.

그도 아들처럼 옷을 단정히 차려입곤 다소 초조하게 어슬렁거렸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해가 뜨길 몇 번이나 확인한 그는 오랜만에 본 아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오늘은 좀 볼만하구나. 검술은 잘 익히고 있느냐?”

“…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러나 대륙에 하나뿐인 소드마스터, 헤르만 포르테 백작님의 말을 막을 순 없었다. 그는 이 어색한 공기를 새벽의 흔한 고요함으로 인식했는지, 늦둥이 아들을 몰아세웠다.

“그런 것 치고는 몸이 영 시원찮구나. 여자를 밝히는 건… 후우. 그렇다 치고, 검술 훈련에도 시간을 좀 들이도록 해라.”

“……네.”

다시 내려앉은 침묵.

그러나 길버트의 속은 요동치고 있었다.

검술 훈련에도 ‘좀’ 시간을 들이라고? 그는 한때는 쩍쩍 갈라졌으나 이제는 도로 말랑해진 주먹을 움켜쥐었다.

– “어떻게 그 나이 처먹도록 그것도 모르냐.”

열두 살 무렵이었던가.

나름 마음을 다잡고 질문했다가 면박을 받은 기억이 생생하다.

위대한 아버지.

그러나 무신경한 아버지에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빛바랜 기대감이 두 남자의 사이를 공허하게 스쳤다.

이윽고 시간이 됐다.

“가자.”

헤르만 포르테 백작과 길버트 포르테는 말을 타고 저택을 나섰다.

호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네 명의 기사가 따라붙었다. 검을 차지 않은 건 길버트뿐이었다.

지금 출발하면 딱 알맞은 시간에 도착하리라.

오르빌을 나선 그들은 평야를 가로질렀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까지 쉬지 않고 달려간 그들 앞으로 일단의 행렬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방울’이 그려진 무수한 깃발들.

아이셀 왕국의 제1 왕자, 비비안 드 이사도라의 행차였다. 헤르만과 길버트 부자(父子)가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행진할 때 길을 가로막았다면 큰 무례이겠으나 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점심을 챙겨 먹어야 할 무렵이었다.

마침 밥때도 되었겠다, 손님의 등장에 걸음이 멈추고 깃발들이 땅에 꼽혔다.

포르테 백작은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곤 들뜬 걸음으로 왕자를 찾았다. 물론 그들이 왕자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님. 벨리타 왕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비비안이 무어라 대꾸하였다. 허나 헤르만과 길버트는 왕자에게 신경을 쏟지 못했다.

막 마차에서 내린 단아한 중년의 여인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머니!”

두 개의 물방울,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였다.

이 세계에선 보기 드문 안경을 쓴 그녀는 탁한 회색이 섞인 눈으로 아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들아.”

예법에 능통한 길버트가 어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이나는 죄책감으로,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포르테 백작에게도 인사했다.

“여보,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구려.”

이혼당한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와 그녀가 이별하게 된 까닭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야속해 보이지 않았다. 수줍은 기대감이 뒷짐에 묻어있었기에.

그녀도 부탁할 것이 있었다.

“보기 좋습니다.”

그때 짝, 비비안 드 이사도라가 손뼉 쳐 주의를 환기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지만, 왕자는 무척 다부진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뛰어난 검객일 것이라고 포르테 백작은 생각했다. 뉘 집의 한심한 아들과는 다르게.

비비안이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에게 말했다.

“고모님. 식사를 따로 준비해드릴까요? 한 가족이 모인 자리에 제가 끼는 건 실례일 듯해서요.”

“어머나, 아니에요. 조카님. 그거야말로 저희가 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함께 식사하셔요.”

“네, 왕자님. 객이 주인께 식사를 청하는 것도 우스우나, 함께해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포르테 백작이 거들었다. 왕자는 호탕한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 그러면 다 함께 식사하지요. 실은 저도 소개해드리고픈 손님이 계십니다. 저도 아직 만나 뵙지 못한 분이십니다만, 분명 놀라실 겁니다. 아, 고모님께서는 만난 적이 있으실 법도 하네요.”

“어느 분이 또 마중을 나와 주셨나요? 오르빌은 오랜만이라 뉘실지 궁금하네요.”

“네. 아! 저기 오시는군요.”

비비안 왕자의 시선을 따라 헤르만과 길버트, 이이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키는 그리 크지 않으나 중후한 걸음걸이.

칼처럼 다려진 짙은 적색 슈트가 대귀족의 행차를 알렸다. 길버트와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를 제외한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타티안 후작!”

당신이 여긴 무슨 일이오. 포르테 백작은 뒷말을 삼켰다.

‘저자가 왕자가 말한 손님이군.’

확실히 놀랍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청금발의 믿을 수 없이 잘생긴 청년이 후작을 뒤따르고 있었다.

그때, 이이나가 반갑게 말했다.

“어머나! 타티안 후작님이세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네. 반갑습니다, 이이나 공주님. 하지만 제가 먼저 인사드리면 안 될듯하군요.”

“네? 왜요?”

“음… 고모님. 여기 다른 분이 또 계십니다. 후작님,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죠.”

어리둥절해하는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와 아이셀 왕국의 후계자에게 타티안 후작이 소개했다.

청금발의 청년은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이십니다.”

십 년도 더 전에 죽은 걸로 알려진.

모두에게 놀라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이나 공주만큼 놀란 사람은 없을 터였는데, 레안은 그녀에게만큼은 기꺼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모님. 그리고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외종사촌(外從四寸)께도 인사를 올립니다.”

레안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성함은 ‘아이나스 드 이사도라’로, 아이셀 왕국의 왕 알렉산더 드 이사도라의 작은 동생이자 이이나 이사도라의 여동생이었다.

웬 쌍년의 자식(에릭 드 예리엘)의 손에 죽은 줄만 알았던 조카의 등장에 이이나는 “어머나! 어머나 세상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기뻐했고, 길버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 * *

높으신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아랫것들이 바빠진다.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를 따라온 시종장은 고민에 빠졌다.

누가 가장 윗사람인가.

단연컨대 행렬의 주인이자 왕국의 후계자인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다른 왕자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한쪽은 (비록 쫓겨났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예리엘 왕가의 정통 후계자이고, 다른 한쪽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아이셀 왕국의 후계자다.

비비안과 오스카, 두 왕자가 대립 중인 아이셀 왕국은 정통 후계자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님을 상석에 앉히자니 현실이 걸린다. 레안 드 예리엘은 폐위된 왕자인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이를 고민하는 사람이 만약 시종장이 아닌 예법관이었다면 당장 가계도를 펼쳐보며 시간을 허비했을 터였다.

아마 이사도라 왕가와 예리엘 왕가 중, 어느 쪽이 아카이아 황실의 피에 더 근접한지를 따졌을 거다.

하지만 시종장은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좋은 해결책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만찬의 상석은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의 차지가 되었다. 두 왕자의 만남이 아닌, 근접한 친족의 만남으로 해석한 거다.

그리하면 연장자이자 두 왕자에게 이모, 고모인 이이나 공주가 윗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왕자들은 시종장의 해석에 불만이 없어 보였다. 다만 골치가 아픈 건…

“썩 마음에 드는 배치로군요.” ─ 이죽거리는 타티안 후작이었다.

그는 두 왕자를 양옆에 낀 이이나 공주의 건너편에 앉았는데, 그녀로부터 ‘왼쪽’이었다.

헤르만 포르테 백작은 공주의 건너편, ‘오른쪽’을 배정받았다.

예나 지금이나 왼쪽은 책사(策士), 오른쪽은 무장(武將)의 자리다.

사실 방향에 무슨 높낮이가 있으리오.

윗사람과의 거리가 중요하지.

그러나 (거리가 같다면) 예로부터 왼쪽 자리를 높게 평가하는 관습이 있었다.

무장은 여럿일 수 있지만, 책사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서 무장들을 오른쪽에 순서대로 앉히고 나면, 왼쪽으론 책사를 비롯한 귀족들이 자리하였는데, 이로부터 왼쪽이 윗자리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즉, 시종장은 ‘백작’인 헤르만을 ‘후작’인 베나르보다 아래로 평가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헤르만 포르테 백작은 소드마스터이니, 이이나 공주로부터 오른편(무장의 자리)에 앉히는 게 시종장에겐 당연하였지만…

적어도 벨리타 왕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벨리타 왕국은 소드마스터파가 득세해 왕을 기준으로 대궐 왼편을 차지한 지 오래였다. 군권까지 틀어쥐어서 포르테 백작은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마음껏 오갈 수 있었다.

제아무리 베나르 타티안 후작이 실리 없이 그럴싸하게만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해서 타티안 후작은 이죽거렸고, 그의 오랜 라이벌인 헤르만 포르테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만난 아내 앞에서 모양 빠지는 꼴이 된 것이다.

가로로 긴 식탁, 그 말미에 배정돼 중앙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두 칸 멀어진 길버트도 인상을 찌푸려서, 나란히 앉은 부자(父子)는 누가 봐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이이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요. 저는 남편이랑 아들이 나란히 앉은 게 정말 보기 좋아요. 타티안 후작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함께 식사하기도 오랜만이네요.”

배정된 자리에 불만을 갖는 사람을 다독이는 건 시종장이 아닌 가장 윗사람에게 주어지는 책임이다.

이이나는 남편과 아들의 불만을 수그러뜨리는 동시에 타티안 후작에게는 옛정을 생각해서 그러지 말아달라 청했다.

다행히 후작은

“함께 식사라… 그렇죠. 누구와 함께 밥을 먹기도 오랜만입니다.”

묘한 표정으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작 음식은 조금도 덜어가지 않으면서.

음식을 남기는 것이라면 모를까, 독살이 빈번한 이 세계에선 무례한 행동이라 비난할 수 없었다. 허나 지나치게 경계 어린 행동이라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맞아서 이이나는 주제를 돌렸다.

그들에게 가장 신선한 것으로.

“레안 드 예리엘 조카님은 어떻게 만나서 데려오신 건가요? 타티안 후작님 이야기부터 듣고, 왕자님께도 여쭤보고 싶네요.”

“하하하! 제가 모셔오고 데려오고 할 수 있는 분이겠습니까. 영광스럽게도 왕자님께서 절 찾아오셨죠. 청첩장을 들고.”

“어머. 결혼하세요?”

“아니요. 약혼하신답니다. 상대가 누군지 알면 공주님께서는 무척 놀라실 겁니다.”

“누구죠, 이 근사한 조카님을 만날 행운을 움켜쥔 여성분이?”

타티안 후작이 레안을 곁눈질했다.

본인이 말해도 되겠느냐, 동의를 구한 것이고, 레안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의 인간관계도 꽤나 복잡해 보였다.

“크세니아 영애랍니다. 크세니아 페테르.”

“어머나! 에들린의?”

레안은 잠자코 지켜보았다.

깜짝 기뻐하며 에들린 페테르를 편히 부르는 이모님과, 어째 묘하게 친해 보이는 타티안 후작, 지금은 그녀와 이혼한 상태인 포르테 백작과 아들인 길버트 포르테, 그리고 조카인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

북부 왕국의 역사가 변경되어 새롭게 등장한 이 아이셀 왕국 일행의 주인공은 비비안 왕자가 아니었다.

이이나 이사도라.

레안은 그녀가 여기에 모인 모든 이들의 핵심임을 눈여겨보았다.

[ 업적 : 비비안 드 이사도라를 만남 – 이사도라 왕가를 섬기는 모든 귀족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비비안 드 이사도라에게 미약한 호감을 얻음. ]

떠오른 업적보다 이런 정보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그녀의 탁한 회색빛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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