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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8

306. 남매 Ep – 사라질 남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레안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이나 이사도라 이모님이

“약혼 축하드려요. 조카님이 무사하신 건 더 기쁘고요.”

라고 말하며 호감을 내비쳤으나 그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포함한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 일행은 다음 주면 오르빌을 떠나게 될 것이었다.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가 길버트 포르테에게 입맞춤하면서.

비비안 왕자가 초청받아 온 것부터가 국왕의 탈을 쓴 아스타로트의 계획인데, 레안으로서는 이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미 해보지 않았던가.

길버트를 죽였더니 공주는 다른 사람과 키스하고, 길버트를 막았더니 내게 키스해버렸다. 그를 멀리 떠나보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예까지 몇 달을 걸려 온 사람들에게 돌아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왕자가 돌아가라 한들 돌아갈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아스타로트가 있는 한 {전쟁}은 필연적이다.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

더군다나 이걸 막아보겠다고 설치면 자칫 녀석의 눈에 띌지도 몰랐다. 대화할 순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그 고대의 동물은 나를 보거든 몸을 떨며 기뻐할 터였다.

오래도록 기다려 왔노라고.

녀석의 눈에 띄면 끝장이다.

아스타로트에게 잡아먹히고, 동생의 해피엔딩은 물 건너가리라. 레안은 저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다음다음 주에 있을 제 약혼식에 이모님과 외종사촌께서 참석해 주시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약소한 선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두 통의 청첩장과 함께 꺼냈다. 이이나 공주는 아리송한 눈으로 받아든 걸 돌려보았다.

거울이다. 평범한.

레안은 타티안 후작의 눈길이 달라붙는 걸 느끼며 빙긋 미소 지었다.

“가지고 계시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아이셀 왕국에 ‘돌아가셨을’ 무렵에요. 무슨 마법이 걸린 건 아니지만, 궁에 도착하는 대로 검증을 받아보시지요.”

귀족이 귀족에게, 또는 왕족에게 무언가를 선물할 땐 이상한 마법이 걸리지 않았는지 마법사에게 확인을 받는 게 보통이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선물을 받아든 비비안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좋은 거울이네요. 하지만 저는 거울을 쓸 일이 없으니 다른 분께 드리고 싶네요.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님께 선물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리해 주시면 저는 더욱 기쁘겠습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레안은 타티안 후작이 입을 작게 오므리는 걸 보며 볼일을 마쳤다. 이제 남은 건…

비비안 왕자는 시종을 불러 거울을 맡겼다.

역시 아이셀 왕국.

마법 왕국이라 불리는 왕국답게 일행에 마법사가 끼어 있는 모양이었다. 비비안은 무슨 ‘제건’이라는 미들네임을 쓰는 마법사에게 거울을 가져다주라 명하곤 고개를 돌렸다.

“한데 일정에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되면 꼭 참석하지요. 약혼, 다시 축하드립니다. 저도 그리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는 하하!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는데, 당연히,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이나 이사도라가 그 의도를 거들어주었다.

“조카님께서 애쓰셔야 하겠지요. 전 제 조카님께 모자란 곳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클로에 공주님은 대륙의 꽃이라고까지 칭송받는 분이시니까요. 타티안 후작님, 왕녀님이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마치 맞선을 진지하게 준비하는 청년과 어머니 같다.

그러나 왕족의 만남이란 게 그렇게 풋풋한 것일 리 없었고, 정치적으로 지지해달라는 뜻이었다.

음식을 단 한 점도 입에 대지 않고 있던 타티안 후작은 적당히 선을 그었다.

“들으신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이시죠. 제가 알려드릴 만한 게 없군요.”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것만 빼면. 그녀의 신경질로 인해 남몰래 쫓겨난 시종장만 다섯이 넘지만, 베나르는 말하지 않았다. 이 결혼이 성사되건 말건, 내 알 바 아니니까.

또, 레안 드 예리엘 왕자의 말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저놈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래도 조언해주실만한 게 있으시겠지요? 예를 들어 클로에 공주님이 좋아하는 거라던가…”

이이나가 다소 집요하게 물었다. 타티안 후작은 아무렇게나 답했다.

“견과류를 좋아하십니다.”

그녀는 가끔 견과류를 폭식하곤 했다. 화가 난다는 듯이. 이이나는 후작이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눈치채고는 방향을 틀었다.

“견과류라. 고마워요. 조언 잊지 않을게요. 여보, 당신은…”

옅은 한숨.

“잘 지냈어요?”

“…”

레안은 포르테 백작이 팔짱 끼는 걸 눈여겨보았다. 이이나가 코로 뱉어낸 한숨도, 백작의 태도도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참 싸늘한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며, 레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추측했다.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루티나 왕성에서 태어난 레리아나는… (중략) …레안 드 예리엘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추궁했다. 레리아나는 그를 돕고자 분장을 하고 포르테 백작가에 잠입했다. 헤르만 포르테 백작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한편, 왕궁에 뻔질나게 들락이는 백작의 생활패턴을 이용해… +

지난 엔딩에서 뜬 내용이었다.

소꿉친구 시나리오와 두 번의 약혼관계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런데 개중에 독특한 행동이 있었다.

아마 동생이 고집을 피워서 그리된 것이겠지만, 레리아나를 포르테 백작가에 보냈다. 백작의 과거사를 파헤쳤다는 대목이 눈에 걸렸다.

왜 그랬을까.

당시는 소드마스터가 왕위를 차지한 악신을 억누르는 중이란 것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헤르만 포르테 백작은 언제고 한 번은 복수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나’는 백작의 과거를 알고자 했다.

어쩌면 자유의 몸이 된 내가 소드마스터의 존재 이유를 눈치채서일 수도 있고, 포르테 백작이 이혼당한 건 워낙 유명하니까, 이를 알아보려 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이이나 이사도라.

그녀가 나와 워낙 가까운 친족이니 혹시 쓸만한 게 있을까, 찔러본 것이겠지.

어쨌거나 그땐 이이나가 여기에 나타나지도 않았던 때라 별 소득을 올리지 못한 듯했다. 그때 타티안 후작이 말했다.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왕자님, 실례가 안 된다면 데려오신 가신(家臣)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을까요?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예의가 아닐 듯하군요.”

자리를 피해주려는 것이다. 후작은 왕자와 함께 ‘올리버 트루디 남작’을 만나러 가고, 만찬이 고스란히 남은 천막엔 레안과 길버트, 이혼한 부부가 남았다. 레안은 용변을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자네, 혹시 남는 연초가 있는가?”

“저는 연초를 태우지 않습니다만… 이봐, 체이스! 연초 좀 빌려줘.”

“고맙네. 미안한데 같이 피겠나? 불이 없어서 말이야.”

레안은 천막 옆으로 돌아가 지독한 골초로 보이는 기사와 함께 불을 댕겼다.

“향이 독특하군. 이게 뭔가?”

“벨플루아라는 식물의 잎을 말린 겁니다. 향이 진해서 좋더군요. 구하기가 어렵다는 게 흠이네요.”

“하하. 아껴 피는 것을 빼앗아서 미안하군. 고맙네. 언제고 꼭 갚겠네.”

딱히 나눌 말이 없어서 사소한 잡담만 주고받았는데, 레안은 천막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원래 왕족이 쓰는 천막 옆에 이런 식으로 가까이 서 있으면 안 되지만, 내가 저기서 나왔는걸, 제지하는 기사가 없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또 이러려고 왔… 지긋지긋하군. 당신네 황…”

“그래요! 구걸…… 당신은 뭐…”

“하하! 고귀한 황족께서 그리 말씀해주신 것만으로도 대대손손 남을 영광입니다. 장가는 안 갔지만요.”

“…싶어서 그런 줄 알아? 나도…”

“또 그놈의 불안…… 됐어요! 부탁한 제가 멍…”

“그만들 하세요!!”

고요해진 틈에 레안이 연기를 뿜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족이라니?”

“음? 황족이시잖습니까. 아, 벨리타 왕국은 좀 다른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황족이라면 고대 아카이아 제국의 황실을 말하는 겐가?”

“…………뻐요. 그래도 오늘만큼은 두 분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군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건 음… 굳이 칭하자면 만자문(卍) 황실입니다.”

“…아아, 그 아이셀 왕국의 황실 말이군. 나와는 관련이 없네.”

“말씀하시는 걸 보니 그러신 듯하네요. 하지만 머리카락 색에 눈동자 색까지 그러셔서야, 하하하하.”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레안은 거진 다 태운 연초를 땅에 떨궈 짓밟고는 한담을 나눈 기사와 헤어졌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는 꽁초를 주워 담고 있었다.

레안은 곧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시 거닐며 다시 행진을 준비하는 행렬을 돌아보았는데,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임시로 설치된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푸른색 계열의 옷을 입은 마법사가 거울 두 개를 들여다보는 걸 봤다. 이리저리 꼽힌 깃발들에는 공통으로 물방울이 그려져 있었다.

레안은 달각, 깨진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 목걸이 – 예쁜 목걸이다. ]

어머니의 목걸이.

귀속 아이템이 생기면서 이전에 가지고 있던 흰색 목걸이는 사라졌다. 물론 레리아나 건 사라지지 않았으니, 내 것만 대체된 모양이다.

그 흰색 목걸이에도 그랬지만, 이 초록색 목걸이에도 문양이 있었다.

양각으로 솟은 세 개의 물방울과 그 위에 파인 글자들.

차례로 이사도라 왕가와 코르넬 마탑, 제건 학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아이셀 왕국의 복잡한 정치구조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것도 우리가 언젠가는 풀어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이번에 할 일은 아니야.’

거지 남매는 이제 사라질 테니까. 레안이 목걸이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가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가가 모욕을 당하게 내버려 둔 이유이기도 했는데, 어차피 ‘레브’가 모든 걸 바꿔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브가 오리아스를 잡을 것이다. 오리아스가 잡히면 콘라드 왕국의 역사는 아스란 왕국처럼 바뀌게 될 거다. 에릭 드 예리엘 형님은 나를 내쫓지 않을 것이며, 짐작하건대 내 어머니가 되살아나시겠지.

그리되면 ‘거지 남매’는 사라진다. 날 때부터 왕족이었고, 회차가 다시 시작되어도 왕족이며, 엔딩 이후에도 왕족인… 나와 내 동생은 혈통을 잃은 적도 없이 되찾으리라.

그게 이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종착점이었다. 동생에게 어떤 비극도 존재하지 않았던, 완벽한 결말로.

레안이 손을 들어 십자교회의 성호를 그렸다. 고개를 들어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준 도시, 오르빌을 향해 “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이내 우뚝, 웃음이 잦아든 레안은 미련 없이 걸음을 돌렸다. 천막으로 돌아온 그는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길버트와 이이나, 포르테 백작에게 작별 인사하고, 타티안 후작과 함께 오르빌로 되돌아왔다.

아스타로트를 잡을 방법을 알았다.

그 ‘굴레’에 묶이지 않은 덕분에 상황에 맞춰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고대의 동물은 제가 내린 판단으로 인하여 죽게 되리라.

레안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남은 두 번의 회차와 변경될 미래, 시간, 인간관계와 거대한 대륙이 단번에 그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우선은…

“레나야, 오빠 왔다.”

동생이 행복해지는 게 먼저였다. 레리아나가 빽! 소리쳤다.

“난 레리아나야! 징그러우니까 오빠는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싫은데!”

“악!!”

오늘도 레리아나의 볼살은 길게 늘어지고 말았다. 두고 보자.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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