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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09

307. 남매 Ep – 부인들

아이셀 왕국의 왕자, 비비안 드 이사도라는 성대한 환호를 받으며 오르빌에 입성했다.

전에 아스틴 왕국의 왕자, 아놀프 드 클라우스가 행차했을 때와는 달랐는데, 그때는 야만인의 왕국에서 온 왕자라는 멸시가 섞여 있었다.

북문으로 입성하기도 했고.

어쨌거나 흩날리는 가을 꽃잎들.

동생과 함께 왕자의 행차를 보러 온 레안은 지금의 평화를 즐겼다. 내년 봄에는 시민들이 뿌리는 이 꽃잎이 마른 지푸라기로 변하고, 군대가 행진할 것이었으나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레안이 느긋하게 음료를 머금고, 레리아나는 창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사람이 바글바글해!”

그렇다, 우린 저런 평민들처럼 길바닥에 서 있지 않았다.

창이 넓은 여관의 3층. 동문 대로가 훤히 보였다.

정갈하게 차려진 스테이크.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스프 옆엔 노란색이 선명한 쥬우스가 차려져 있었다. 레안은 사치스럽게도 여관 3층을 통째로 빌렸다.

물론 페테르 백작의 돈으로.

“먹으면서 봐. 왕자가 오려면 아직 멀었어.”

“신기해! 멋있어! 히잉… 티안도 왔으면 좋았을걸. 크세니아 언니도.”

그랬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안은 오늘만큼은 동생과 단둘이 기념하고 싶었다.

왕자의 행차를 이렇게 평온하게 구경하기까지 얼마나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던가. 레리아나는 절대 꿈도 못꿀… 아니,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레안이 동생의 몫을 썰어주었다.

“아- 해. 아.”

육즙이 잘 배어든 살코기를 찍어 내밀었다. 레리아나가 아앙! 맛있게 먹어주길 기대했지만, 동생은 눈을 가늘게 모았다.

“나도 할 줄 알아!”

그래도 기왕 내밀어준 건 받아먹고, 소녀티를 빠르게 벗어가는 작달막한 아가씨는 식기를 제법 익숙하게 놀렸다. 배운 적도 없는데.

레안은 조금 섭섭했다. 그는 동생의 입가를 닦아줄 요량으로 들었던 냅킨을 내려놓았다.

동생이 언제까지나 철없는 소녀로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일그러진 욕망일까. 끼니를 구하지 못해 동생을 굶겼던 과거가 오라비의 가슴에 남았다. 레안은 조용히, 근심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풀이를 하지 못해서는 아니다.

동생의 느리지만 아찔한 성장세 때문이었다. 레리아나는 가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위험천만하게 빛냈다.

{면역}이 잡아주지만, 서서히 쌓여가는 기억들.

‘꿈’이 동생의 피와 재능을 일깨워가고 있었다. 이제 고작 한 달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공주로서 자각한 동생은 탁월하지만, 위험한 장난을 즐겼었다.

인간관계를 비틀고, 이간질하고, 유혹하여 새로운 판을 그리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만약 민서가 동생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협력을 받을 가망도 없고.

과보호라 욕해도 좋다. ─ 작심한 레안은 내려놓았던 냅킨을 집어 끝끝내 반항하는 동생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는 동생이 순진무구한 소녀로, 언제까지나 때 묻지 않은 아가씨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때, “왔다!” 외치며 일어난 레리아나의 몸매가 언뜻 성숙했다.

키가 자라서 젖살의 탱글탱글한 곡선이 아닌 애달프게 완만한 목선, 허리선이 창문을 넘었다. 신이 난 레리아나는 창가로 몸을 뻗어 손을 흔들었고, 레안은 슬며시 동생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왕자님이다! 역시 잘생겼… 어레? 저 사람 어디서 봤는데.”

그와 결혼했었지. 약혼했었고.

레안은 다소 착잡한 기분으로 물었다.

“어때? 왕자님 멋있어?”

“멋있어!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냐. 뭐랄까… 체격이 너무 큰걸.”

희한하게도 레리아나는 덩치가 큰 남자를 안 좋아했다. 안 좋아한다기보단 체구가 작은 사람을 선호했는데, 아직 본인의 키가 작아서 그런 것이라고 레안은 추측했다.

레리아나가 힐끔, 오빠를 훔쳐봤다.

“약혼 준비는 잘 돼가?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응. 열흘쯤 남았네.”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너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순간 목구멍까지 치밀은 말을 내리눌렀다. 그리 말하면 섭섭해하겠지. 레리아나가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레안이 말했다.

“이따 옷 사러 가자. 예쁘게 입고 가야지. 하지만 너무 예뻐도 곤란하니까 잘 골라야 해. 크세니아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구.”

“헿. 언니도 참. 자기도 엄청 예쁘면서 그래.”

“네가 예쁜 건 아는구나?”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

새초롬히 답한 레리아나는 쥬우스를 홀짝, 마셨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왜?”

“오빠 결혼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야?”

차분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레안의 눈과 맞부딪쳤다. 그녀는 집 잃은 아기새처럼 근심이 가득했다.

“크세니아 언니 귀족이라면서.”

동생은 내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자기랑 같이 못 있는 줄 아는가 보다. 레안은 제가 섬세하지 못했음을 미안해하며 평이하게 답했다.

“어떻게 되긴. 같이 가서 살지.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럼 지금 사는 곳은?”

“좋을 대로 해. 라우노 패밀리 사람들이 좋으면 머물러도 되고, 오빠랑 같이 살아도 되고. 거기에 방도 있으니까, 자주 들를게.”

“……”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레리아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정말 배부른 소리지만 오빠랑 같이 집 짓고 살 때가 더 좋았다. 그녀는 짐덩이처럼 이쪽저쪽에 맡겨지는 건 싫어서 작은 머리를 굴려 다른 길을 모색해보았다.

하지만…

‘없네.’

오빠가 장가가는 집에 들어가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 답답해졌다.

언제부턴가 세상이 만만해 보여서 더 그랬다. 내 한 몸 지키고, 먹고 사는 게 어렵지 않을 듯한데…

‘이렇게 말했다간 혼나겠지.’

레리아나는 빙긋, 웃었다. 자신의 속내를 안면에서 싹 지워내며

“알았어! 자주 와야 해! 약속.”

손가락을 내밀었다.

때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저에게 어떤 결정권이 생길 때까지… 오빠한테는 비밀이다.

몰락한 제국, 황금빛 눈동자가 선명한 남매는 발아래로 바글바글한 평민과 왕자의 행차를 내려다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 * *

레안이 바쁘게 약혼을 준비하는 동안 예정된 사건이 터졌다.

비비안 드 이사도라 왕자 앞에서 클로에 드 타탈리아 공주가 길버트와 키스하고, 비비안은 분노에 찬 걸음을 돌렸다.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날붙이의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군대가 야금야금 덩치를 불렸다.

하지만 이는 국가적 차원의 일이라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벨리타 왕국은 아스란 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통의 강국인 것이다.

이번엔 십자교회도 관여하지 않았다. 제롬 신성 왕국과 정 반대편, 동쪽에서 벌어질 전쟁이라 그런지 성녀는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아니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매년 기부하는 돈이 얼만데, 그럼.

전운이 내려앉아 조금은 혼란해진 오르빌, 그 다음 주 페테르 백작의 저택에서 약혼식이 열렸다.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과 에들린 페테르는 문전성시를 이룬 정문에서 하객들을 맞이하기 바빴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날을 이상하게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혜안이 있으셨군요. 못된 놈들! 아이셀 왕국은 동원령을 내렸답니다.”

“벌써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외교적으로 풀어갈 생각은 않고… 에잉 쯧쯧. 아주 혼쭐을 내줘야 합니다. 페테르 백작님도 출전하십…? 아차, 좋은 날에 좋지 못한 말씀을 드렸네요. 하하! 축하드립니다.”

하객들은 숱한 축하를 건네며 정원에 마련된 예식장에서 웃음꽃을 피웠다. 남성 귀족들은 주로 전쟁 이야기를 하고, 부인들은 오늘의 주인공을 궁금해했다.

“그런데 레안이 누구죠? 아시는 분 있나요?”

부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레안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어서 추측이 무의미했다. 다만, 크세니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있었다.

“가출하셨었잖아요. 다들 쉬쉬하긴 했지만, 평민들이나 가는 극장에서 배우로 일하는 걸 저희 딸이 봤대요. 약혼은 물론 축하할 일이지만-”

“어머나~ 다들 여기 계셨네요.”

막 험담 아닌 험담이 시작되려는 순간, 에들린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흐흥,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 분이 계시네요. 따님은 잘 계신가요? 클라라 영애였죠 아마?”

“아… 네네, 백작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클라라가 맞아요.”

“맞죠? 최근 속 시원한 일이 있으셨겠더라고요. 길버트 공자가 근신 처분을 받았다 들었어요. 어쩌면 수도교회로 보내질지도 모른다고…”

아오! 부인들의 복장 터지던 탄성이 울렸다. 그놈의 망나니 공자가 얼마나 많은 영애를 건드렸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문란한 게 죄는 아니다. 귀족들은 대부분 문란하니까.

그러나 딸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좀 조신하게 처신해 줬으면 좋겠는데, 젊은것들이란. 잔소리할라치면 구닥다리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구닥다리는 젠장. 누군 젊었을 때 인기 없었던 줄 알아? 그래도 우리 땐 덜 그랬어!

파티에 참여할 때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건 물론이요, 누구랑 눈이 맞아서 밤을 지새웠으면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게 기본예절이었다.

약혼까진 아니더라도 누구랑 누가 연애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예쁘게 사랑하곤 했는데, 요즘엔 으이그.

그 문란한 신세대의 중심에 길버트 포르테 공자가 있었다.

외모도 번듯하겠다, 그는 이 영애, 저 여자, 신분을 가리지 않고 건드렸다. 그런데 누가 봐도 매력 있는 사람만 고르는 탓에 오르빌의 사교계에선 어떤 풍조가 일었다.

맘에 들면 일단 들이대고 보는 길버트 포르테. 만약 그와 추문이 나지 않으면 그 영애는 매력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돼 놀림 받는 것이었다.

고약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길버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영애가 많았고, 최근 그와 추문이 난 아가씨가 클라라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속을 털어놓았다.

“맞아요! 어휴! 제가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그렇죠? 한 여자만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는 게 최고예요. 저도 참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저희 딸이 괜찮은 사람을 데려왔지 뭐예요.”

“어머나… 그래요? 좋은 사윗감을 얻으셨나 보네요. 어떤 사람이죠?”

부인들의 시선이 쏠렸다. 에들린은 일말의 부끄럼도 없이 말했다.

“평민이에요. 하지만 저희 가문에 들어오면 귀족이니, 문제 될 게 있겠어요? 곧 보시겠지만, 아주, 아주 잘생겼답니다. 제 딸이 눈이 보통 높은 게 아니었더라고요.”

그녀는 살랑살랑 부채질하며 청자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래도 되는 게, 외모만큼은 누구보다 빼어난 사윗감이었다.

내 사위는 내가 지킨다.

에들린은 바쁘게 돌아다녔다.

휘유, 그래도 힘드네. 이이나가 있었으면 많이 도와줬을 텐데.

비비안 왕자와 함께 왔다고 해서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날 생각에 들떴었는데,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이이나 공주는 곤란한 처지가 되어 되돌아갔다.

제 아들이 대형 사고를 쳤으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에들린은 이이나와 타티안 후작 부인과 함께 어울리던 젊은 시절이 그리웠다. 그땐 오른 왕국의 가이단 후작 부인도 종종 방문했었다.

다들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나만 남게 되었는지…

타티안 후작 부인은 언제부턴가 매일같이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더니 심신이 쇠약해져 일찍 죽었다.

가이단 후작 부인은 아들에게 큰 변고가 생겨 쓰러져버리고, 이이나는 남편과 돌연 이혼하더니 아이셀 왕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로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 없었다. 이젠 뭐… 딸이랑 남편만 보고 살아야지, 쓸쓸한 마음을 가라앉혀 왔다. 다행히 데릴사위라 딸을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됐겠다.

사위를 열심히 변호하고 다니던 에들린은 남편에게 되돌아왔다. 게스타브는 마침 타티안 후작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타티안 후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이 사람도 이렇게까지 싸늘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부인의 빈 자리가 크긴 크다고 생각하며 에들린이 잡담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주위가 정적에 휩싸였다.

– 또각

깔끔하게 묶인 금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아가씨였다. 백색의 평범한 원피스. 허나 옷이 볼품없어서인지 사람에게 더 시선이 쏠렸다.

– 또각

정적은 길었다.

인정사정없이 보드라운 입술이 달짝, 순진하게 오므라들어 예식장에 고요를 떨군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에 휩싸인 눈동자는 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남성들은 가슴에서 통증을 느꼈다. 여성들은 벌어진 입을 가렸다. 손이든 부채로든 뭐든.

속눈썹이 길어 콕! 찌르면 감미로운 선율이 흐를 것만 같은 그녀는 쭐레쭐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오빠는 없네, 생각하며 연회장의 배치를 살피다가 본인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척 보기에도 가장 높고, 중요해 보이는 사람.

레리아나는 베나르 타티안 후작을 향해 직선으로, 구두 굽을 또각또각 울리며 다가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사람이 나를 안다는 사실을. 레리아나는 당차게 물어보았고,

“아저씨. 저 알아요?”

“……물론입니다, 레리아나 드 예리엘 왕녀(王女)님.”

타티안 후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폭탄을 떨궈버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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