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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11

309. 남매 Ep – 남은 일

고고히 만개한 리아트리스 꽃밭과 희기도, 붉기도 한 비단이 곳곳에 깔려 근사하게 장식된 예식장.

이와 대조적으로 장식 없이 단출한 페테르 백작가의 저택 앞 정원이 웅성거렸다. 벨리타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숙덕이는 소리다.

죽었다던 왕자와 왕녀.

아이셀 왕국과의 전쟁이 예정된 지금, 오르빌을 뒤흔들 대형 토픽이었다. 저들의 생존이 알려지면 콘라드 왕국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놀라움으로 시작된 수군거림은 점차 정치적인 논의로 번졌다. 마침 왕당파의 수장인 베나르 타티안 후작도 있겠다, 저 남매를 내버려 둬도 되겠냐는 것이다.

음흉한 저울질.

그러나 레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동생이 먼저라 생각한 그는 레리아나의 여린 어깨를 감싸 쥐며 다그쳤다.

“그게 진심이냐.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이용하려 하는 게… 정말 네가 한 생각이냐?”

실망감이 뚝뚝 묻어나는 어투였다. 덜컥 놀란 레리아나가 턱을 떨궜다.

“아, 아니… 그게…”

“눈 피하지 말고. 어서.”

“그런 게 아니라 실은 꿈에서… 딸꾹. 오, 오빠. 나 무서워.”

“…동생아.”

그래. 그 빌어먹을 업적 때문이란 걸 안다. 허나 단호하게 말했다.

“넌 내게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많이 했지. 난 네가 아주 어릴 적에 공주였던 시절을 기억해서 그런 줄 알았단다. 그래. 넌 공주가 맞다. 콘라드 왕국의 왕녀지. 하지만 네가 꿈꿨다는 것들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말했다.

“현실이 아니란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리될 일도 없는 몽상이다.”

{면역}을 믿자. 레안은 동생의 꿈을 모조리 환상으로 치부하며 말을 이었다. 꿈으로부터 비롯된 과거의 인격을 매도하여 두 번 다시 불러오지 못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네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건 잘못됐을뿐더러 잔인하기까지 한 생각이야. 오빠는 네가 꿈과 현실을 잠시 혼동한 거라고… 믿을게.”

“…”

“물러나 있으렴.”

그때, 크세니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폭이 좁은 드레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온 그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에들린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

“…”

마주했지만,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약혼을 앞두고 서로 근사하게 치장한, 그러나 이렇게 마주하게 된 상황이 어이없어서다.

크세니아는 레안이 약지에 끼워 두고 간 약혼반지가 족쇄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제가 사랑하는 남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러다 분노를 담아 말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거기, 공주님도요. 재미있으셨나요?”

“…크세니아.”

“크세니아 페테르라 불러주세요,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오.”

“그렇겠죠. 전 당신이 저를 무척 사랑하는 줄 알았지 뭐예요. 다가오지 마세요.”

“내가 신분을 숨긴 건 사실이오.”

“저도 그래요. ‘우리 같은’ 평민들, 이라고 제가 말했었죠. 왕자님께서 신분을 숨기신 것도 비슷한 이유일 테죠. 그걸 탓하진 않겠어요. 다만… 다가오지 말라 했어요.”

그러나 레안은 다가갔다. 우리의 관계가, 믿음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당신을 향한 마음만큼은 숨기지 않았소. 거짓도 아니오.”

레안이 크세니아의 손을 뜨겁게 움켜쥐었다. 크세니아는 얼굴을 괴롭게 일그러뜨렸다.

이 남자는 어쩜 이리 이기적인가. 제가 할 말만 하고, 사람을 쉽게 흔든다. 그런 레안이 좋았지만, 그가 왕자인 이상 크세니아의 눈높이도 올라가 있었다. 크세니아는 붙들린 손을 빼내며 말했다.

“저도 거짓으로 사랑하지 않았답니다. 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요, 레안. 하지만 왕자님을 사랑하는지는 모르겠네요.”

거지임에도 당당한 당신이 좋았다. 왕자여서 당당한 레안 드 예리엘이 아닌 오직 나를 사랑해 다가와 준 그대이기에.

그걸 꼬집은 것이었는데, 레안은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녀가 내심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하오. 크세니아 페테르가 아닌, 내게 운명처럼 다가온 연극배우를.”

“…죄송하지만 꼭 제가 귀족이라는 걸 몰랐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몰랐소. 적어도 그때는.”

“그걸 믿으라는 건가요?”

이 오르빌의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줌이 될까 말까 한 귀족과 조우한 것도 드문 일일진대, 그 사람이 콘라드 왕국과 관련이 있는 귀족가의 딸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거지인 왕자가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백할 확률은?

있을 수 없다. 야심을 품은 왕자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면.

지극히 타당하고 논리적인 지적이었으나 레안은 “그렇소. 부디 믿어주시오.” 감정으로 답했다.

화를 못 내겠다.

크세니아는 연지가 곱게 칠해진 입술을 씹었다. 이 이기적인 남자가 미련의 끈을 도통 놓아주질 않아서,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에들린은 복잡한 눈으로 왕자를 바라보다가 딸을 데리고 사라졌다. 초청받은 손님들은 약혼이 깨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럼 페테르 백작가는 이 문제의 왕자, 왕녀와 관계가 없어졌구나. ─ 저울이 한쪽으로 쏠리려 할 때였다.

“오빠 내가 해결할 수 있…”

“가만히 있어.”

죄책감에 우물쭈물하는 동생의 머리를 톡, 쓰다듬어주곤 레안이 베나르 타티안 후작을 쏘아보았다. 그는 레리아나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모양이다.

“베나르 타티안 후작.”

“…”

“당신이 이겼소. 내 그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함을 인정하겠소이다.”

“저와 왕자님이 언제 승패를 다투었습니까? 외람(猥濫, 분수가 지나친)된 말씀, 듣기 거북하군요.”

흥. 레안이 타티안 후작에게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지금은 말이지요. 후작, 당신은 조만간 곤경에 처해 저를 찾아오게 될 겁니다.”

“제가요? 그거 놀랍군요. 제 한평생 곤경이랄 게 없었는데, 왕자님의 말씀이니 어디 기대해보겠습니다.”

“하하하하하.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당신은 아직도 왕이 클로에 공주를 움직인 까닭을 짐작하지 못했군요.”

“…?”

“곧 당신의 아들, 토턴 타티안도 길버트 포르테 공자와 같은 꼴이 날 겁니다. 그는 사랑에 빠지겠죠. 왕은 공주에게 푹 빠져버린 토턴을 이용해 당신과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맞부딪치게 할 것이고요.”

무슨 말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후작이 피식 비웃었다. 레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죠.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 후작님께선 제가 우습겠습니다.”

“네. 이제 알았습니다. 왕자님께선 그냥 떠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고국으로 가시는 길, 배웅하진 않겠습니다.”

후작은 차갑게 몸을 돌렸다. 더는 볼일이 없겠구나. 저 괴이한 왕녀는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하는데…

“이렌느.”

한마디에 몸이 굳어버렸다.

“실력도 좋고, 쓸만한 기사님이죠. 저도 좋은 장기말이라 생각합니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다. 다시 뒤돌아선 타티안 후작은 왕자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마법을 부릴 줄 모르신다더니 제게 거짓말을 하셨군요.”

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전 마법사가 아니니까요.”

“그럼 주술사겠군요. 왕자님께서 이렌느를 어찌 아십니까? 제 아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후작님이 그 사실을 안다는 걸 어떻게 제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신 것이지요? 주술사라… 하하하! 그들도 사람 머리를 뜯어보진 못할 겁니다.”

“질문에나 답하십시오. 대답 여하에 따라 왕자님을 살려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레안이 킥! 웃었다. 남의 장사 밑천을 털어먹으려 드는 동업자를 다 봤다는 듯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작님께서 그런 걸 물어보실 줄은 몰랐네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

후작은 말이 없었다. 한편 레안은 좋은 정보를 건네준 크세니아에게 감사해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렌느가 아들을 짝사랑한다는 걸 후작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9번째 회차, 내가 토턴 타티안을 암살하려 했을 때 그는 이렌느를 중간에 끼워 암살이 무위로 돌아가게 했다.

고약한 취미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용하는. 그렇다면 아들이 이렌느를 내심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니 토턴 타티안이 조만간 클로에 공주를 사랑하게 될 거란 예언이 우습게 들렸겠지.

난 그걸 역이용했을 뿐이고.

후작의 관심을 도로 불러일으킨 레안은 느긋하게 마무리했다. 그는 후작에게 귓속말로

“그럼 며칠 기다려 봅시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 사건이 터질 것이니, 그때까지 잘 부탁드리오.”

말하곤 웅성거리는 귀족들 틈바구니를 동생과 함께 유유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승리감에 취하진 못했다.

엉망이 된 약혼식.

크세니아의 마음은 차차 되돌리면 되겠지만, 어쨌건 고대해온 약혼이 깨진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동생까지… 마차가 덜컹, 흔들렸다.

“…오빠. 미,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레리아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크세니아가 약혼을 깨버린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나 보다.

레안은 저게 또 연기는 아닐까, 잠시 관찰하다가 자책했다.

내가 동생한테까지 타티안 후작을 대하듯, 갖은 머리를 굴려 가며 대해야 하나.

물론 레리아나가 변할 것 같거든 언제든 또 혼내고 훈계하겠지만, 동생에게만큼은 늘 진심이고 싶다.

동생이 이렇게 돼야 하니까 나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계산하고 싶지 않아서 레안은 자리를 옮겨 동생을 안아주었다. 토닥토닥, 레리아나의 등은 아직 작기만 했다.

마차는 잉잉 눈물짓는 레리아나를 태우고 라우노 패밀리의 저택으로 향했다.

레리아나에게 (오베르에게 뺏어온) 사탕을 먹여 달래고,

“앞으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단단히 약속을 받아냈다.

눈물을 닦아낸 동생은 오빠 앞에서 또 한참 우물쭈물, 미안하다 말하곤 산티안 라우노를 찾아 쌩하니 달아나버렸다. 레안은 조금 가슴이 아팠다.

그나저나… 크세니아와 화해해서 관계를 다시 회복하더라도 오르빌에 오래 있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정체가 너무 알려졌다. 이곳의 귀족들도 문제고, 베나르 타티안 후작과의 머리싸움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쫓아낸 에릭 드 예리엘 형님이 나와 동생의 생존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 나올는지… 지금은 초가을, 레브가 콘라드 왕국에 당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여러모로 오르빌을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스타로트한테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것도 없고.

‘그래. 떠나자. 어디로든.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

미루고 미뤄왔던 ‘팔 부러진 거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아이셀 왕국의 왕자도 만났겠다, {전쟁}이 어떻게 터지는지도 확인했으니 오르빌에서 할 일은 끝났다. 길버트 포르테는 레아가 수도교회로 가지 않으니 내버려 둬도 된다.

굴레에서 풀려난 카트리나도 봤고… 카시아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자.

레안은 그렇게 앞으로의 일정을 세우며 라우노 패밀리의 평화롭기만 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아직도 대낮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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