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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1

319. 소꿉 ep – 지푸라기

콘라드 왕국이나 오른 왕국이나 농한기(農閑期)에 하는 일이 같다는 걸 레아는 체험하고 있었다.

여러 창고에 나뉘어 옹기종기 둘러앉은 청년과 아이들.

누가 오면 좋고, 아님 말고. 심심한 잡담을 나누며 손을 놀리기 바쁜 그들 사이에 레아가 끼어들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논밭의 토지를 갈아엎어서 내년에도 땅이 기름질 수 있게 거름칠 한 그라니아 보육원의 원생들이었다. 그들은 초삭(草索, 새끼줄)을 꼬고 있었다.

레아는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럴 땐 눈치 볼 것 없이 바닥에 널리고 널린 지푸라기를 주워다 꼬기 시작하면 함께하는 동료요, 말 상대인 것이다. 게다가 레아는 새끼줄 꼬기라면 자신 있었다.

본인은 농가의 딸로 태어나 겨울이면 아버지를 도와 새끼줄을 많이 만들어봤으니까.

부모님은 잘 계실까. 돈을 부쳐드리긴 했는데 딸 없이 추운 겨울, 잘 나실지 걱정이다.

레아는 도시에서 돈 벌어 온다며 거짓말하고 떠나온 부모님과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며 지푸라기를 잡았다. 새끼줄을 꼬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름 .5cm 정도의 새끼를 꼴 때는 지푸라기 4개로 시작하면 좋다.

둘러보니 다들 그 정도 두께인 것 같아서 레아도 지푸라기 네 가닥을 주워다가 복숭아뼈로 눌러 잡았다. 자세는 앉은뱅이 자세다.

새끼줄을 꼬아본 적이 없는 초보는 시작부터 막힌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레아는 네 가닥의 지푸라기 끄트머리가 일치하게 하고는 양손에 두 가닥씩 움켜쥐었다.

그리고 비빈다.

물론 요령이랄 게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손바닥을 싹싹 비비듯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른손 소지부(小指部)1)를 다른 손바닥에 대고 미는 것이다. 그러면 하잘것없는 지푸라기가 쓸모 있는 것이 되어간다.

바스락바스락, 그렇게 잠시 밀어 올리면 이내 끄트머리에 당도한다. 새끼줄의 시작점, 그 끄트머리를 꾸부려 묶어주면 시작이 좋다. 레아는 새끼줄을 돌려 아까 묶은 부위를 복숭아뼈 아래에 밀어 넣었다.

새끼줄 꼬기 초보들에게 고하노니, 새끼줄은 고작 몇 가닥의 지푸라기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여태 하던 대로 묶인 반대편을 꼬아 나가다 보면 지푸라기가 얇아지기 마련인데, 이때 얇아진 쪽(양손에 나누어 잡은 왼쪽이나 오른쪽)에 지푸라기 한 가닥씩을 추가해준다.

여기가 매우 중요하다.

추가하는 한 가닥을 성의 있게, 만들어져가는 새끼줄의 갈라진 부분에 딱 맞춰서 넣지 않으면 나중에 튀어나오기 십상이었다.

귀찮다고 대충대충 하다간 느실느실한2) 새끼줄이 되는 것이다. 팁을 더하자면 쭉쭉 꼬아 나가다가 여태 오른쪽으로 꼬던 걸 한 번씩 왼쪽으로 펴주면 좋다. 그러면 새끼줄이 더 촘촘해진다.

레아는 성실하게 손을 놀렸다.

익숙해지면 그 손놀림에선 싹 싹- 싹- 쓰악(왼쪽으로), 싹- 싹 싹- 쓰악, 경쾌함마저 느껴지는데, 손을 비비는 행동이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것과 같다 하여 예로부터 새끼줄 꼬기는 경건한 일감으로 여겨져 왔다.

도란도란한 잡담과 손바닥을 비비는 소리만 울렁이는 가운데 레아는 보육원 원생들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 새끼줄 그렇게 꼬는 거 아닌데…”

“엥?”

근처에 앉은 소년이 시비를 걸어왔다. 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말로만 듣던 텃세인가. ─ 생각했지만, 여기 모인 아이들은 전부 고아들이었다.

서로를 도와가며 도시를 전전하던 거지들이어서 남을 배척하는 심보가 있지 않았다.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충고했다.

“왜 오른쪽으로 꼬아요? 왼쪽으로 꼬아야죠.”

인제 보니 그랬다. 옹기종기 몰려 앉은 보육원의 원생들 전부가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고 있었다. 레아는 조금 당황했다.

“그럼 금줄이 되잖아.”

“금줄이 뭔데요?”

새끼줄은 꼬는 방향에 따라 오른새끼와 왼새끼로 구분된다.

새끼줄 혹은 새끼라 하면 일반적으로 오른새끼를 뜻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오른손잡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잡이들에겐 새끼를 오른쪽으로 꼬는 게 편하니까.

그렇다고 왼손잡이들이 왼새끼를 꼬는 건 아니다. 레아도 왼손잡이로 태어났지만 부모님과 세상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문이든 식칼이든, 모든 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잡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새끼줄도 오른쪽으로 꼬는 것이라고 배웠다.

왼새끼는 특별히 금줄(禁줄)이라 불리며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문이나 길 어귀에 건너질러 매어두는 데에만 쓰였다.

해서 많이 만들어둘 이유가 없는 물건인데… 여기 사람들은 왜?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다른 게 아니고 그라니아 보육원 사람들은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다소 폐쇄적인 생활을 하는 그들 사이에서 어쩌다 잘못 정해진 것이 관습이 되어 남은 셈이다. 소년은 파하하하 웃었다.

“누나 되게 웃기다. 엄청 잘 꼬는 줄 알았는데 반대로 꼬고 있었네.”

루티나에서는 루티나의, 오르빌에서는 오르빌의 법을 따르라. 여기선 줄을 왼쪽으로 꼰다니, 레아는 머쓱해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곤 왼손으로 쓱쓱, 금줄을 꼬았다.

별것 아닌 헤프닝이었지만 레아는 착실하게 보육원생들 사이에 녹아들고 있었다. 레브가 기사를 회유하겠답시고 온 루티나를 헤집는 와중에 그녀는 조용히, 한가로운 농한기를 흘려보냈다.

가끔 성가를 부르며 싹싹, 기도하듯 금줄을 꼬는 아이들의 손길에 하얀빛이 아롱거린 건 아마도 햇살, 또는 신의 장난일 것이다.

* * *

“어서 오십시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구애하는 쪽이 남성이어서 구애받는 여성이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한 경우가 많다지만, 이미 결혼까지 약속한 남녀가 어찌 이럴까. 곧 결혼할 지아비, 에릭 왕자를 보는 공주의 시선이 못마땅했다.

인사가 뭐 저따위냐.

다른 왕족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결혼식이라도 마쳤는지 왕자는 나를 제 부인처럼 대하고 있었다.

엘리카 드 이사도라 공주는 발을 마차에서 내딛기 무섭게 도로 올라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걸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찌푸려진 미간만 정상으로 되돌렸는데, 이게 자신의 운명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셀 왕국의 황족, 개중에서도 공주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소모돼 왔다. 정략결혼의 도구이자 만자문(卍) 황실의 명맥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서.

아카이아 제국이 몰락한 이래 수백 년을 그래왔는데, 나라고 피해갈 수 있겠는가. 각오했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탄식을 숨기며 어쨌거나 조만간 제 지아비가 될 사람을 뜯어보았다.

…그래도 잘생겼네.

말로만 전해 들은 에릭 드 예리엘 왕자는 다행히 미남이었다.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배고프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매가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깨끗한 금발 머리에 갈색이 섞인 건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고… 그녀는 먼 여행으로 피곤해하는 시녀들을 물리치곤 당돌하게 말했다.

“제게 궁을 안내해주세요. 에릭 드 예리엘 왕.자.님.”

“…저에게 한 요청입니까?”

“존함을 다시 불러드릴까요?”

에릭 왕자는 피식, 그녀의 무례를 웃어넘겼다. “따라오시지요.” 말하는 그의 뒷모습이 서늘하다. 성격이 별로 좋지 않은가 보다.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도 엘리카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힘내어 살아야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엘리카가 금빛이 섞인 제 주황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말씀이 없으시군요. 원래 말수가 적은 편이신가요?”

“…”

“다행이네요. 저는 떠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아니… 좀 떠들어 보려고요. 제가 있던 곳에선 왕족도 입을 놀리기 어려웠어요. 와! 샹들리에가 멋지네요. 여긴 뭐 하는 곳이죠?”

질문했지만 입구에 버젓하게 샬롱(salon)이라 적혀 있었다. 에릭 드 예리엘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는데 엘리카는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이건 뭔가요, 저건 뭔가요. ─ 로 시작된 질문들은 간덩이가 부었는지 점차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로 귀결되고 있었다. 에릭은 점점 참기 어려워졌다.

그러다 3층, 다른 방들과 독립된 에릭의 방에 도착했을 때였다.

“루티나 왕궁은 구조가 색다르네요. 복도가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게 재미있어요.” 말하던 엘리카가 에릭의 방을 훔쳐보았다.

살풍경한 방이다.

왕자의 방이니 기본적으로 카펫도 깔리고 고풍스런 커튼이 쳐졌지만 개인 물품이랄 게 없었다. 책상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이 필기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싸한 느낌을 받으며 엘리카가 문턱을 넘었고, 에릭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좀 아프다.

“여긴 내 방이오.”

“제 신랑이 될 사람의 방이기도 하지요.”

찰나의 눈싸움 끝에 엘리카가 붙들린 손목을 빼냈다. 기분이 꾸욱, 나빠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난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

첫 만남부터 싫은 내색을 보여 관계를 악화하느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맞추는 게 앞으로의 비참할지 모를 인생을 조금이나마 평탄히 하는 길일 터였다.

그녀는 또각또각, 품위를 잃지 않은 걸음으로 왕자의 방 중앙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데 방이 진짜 왜 이러지?

아이고, 내 팔자야. 동생아, 누나… 아무래도 미친놈한테 시집온 것 같은데 어떡하지?

방이 깨끗한 거야 시녀들이 매일 청소해서 그런 거지만, 사람의 방에 방 주인과 관련 있는 물건이 없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알고 보니 여긴 손님방이고, 저 왕자가 장난을 친 거라면 차라리 기쁘겠다. 앗!

그때, 엘리카가 반색했다.

창가 진열장에 남의 것이 분명한 목걸이 하나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좀 오래된… 사람의 손때가 탄 물건이다.

와씨, 완전 미친놈은 아닌가 보다.

반가움에, 엘리카가 목걸이를 덥썩 움켜쥔 순간이었다. 에릭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꺅!”

“보자 보자 하니까… 넌 네 처지를 모르는군.”

왕국 간의 거래로 팔려 온 공주.

반면 에릭은 콘라드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왕자이자 곧 왕위에 오를 사람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건, 죽이지만 않으면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아이셀 왕국? 한 판 뜨든가. 되려 오리아스 님께선 기뻐하시리라.

에릭이 엘리카의 목 대신 가슴을 움켜쥐었다.

곧 울음, 또는 되도 않은 분노를 터뜨리리라 예상했는데 엘리카는 그를 고요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게 이런 무례를 저지를 정도로 왕자님께 소중한 물건인가요?”

…김이 샜다.

에릭이 그녀의 손에서 목걸이를 빼앗아갔다. 엘리카는 달달 떨리는 팔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답해주세요. 저를 왕비로 들이고 싶으시다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에릭 왕자님. 당신께서는 몇 년 동안이나 저와 혼인하고 싶다며 청하셨잖아요. 이제 와서 이러시는 거, 당혹스럽습니다.”

에릭이 피식, 또 입술을 삐뚜름히 치켜올렸다. 엘리카는 저게 자조적인 웃음임을 알아차렸다.

“난 네 혈통이 필요했을 뿐이다.”

“왜요? 당신의 머리가 완전한 금발에, 눈이 금안이 아니어서요?”

엘리카의 눈이 그의 불행하도록 검기만 한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그의 머리칼은 금발이지만 예리엘 왕가의 청색이 아닌 테르탄 공작가의 갈색이 섞여 색이 진한 지푸라기 같았다.

그게 레안 드 예리엘과 에릭 드 예리엘을 가르는 차이였다. 두 사람이 무섭도록 닮았음에도.

에릭이 답하지 않자 엘리카가 말했다. 그녀는 레안 드 예리엘 왕자가 살아있다는 것과, 그의 머리 색, 눈동자 색을 알고 있었다.

“왕위에 오를 사람은 결국 당신이에요. 뭐가 그렇게 두렵죠?”

“두려워해? 내가, 무엇을?”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에릭이 대소했다. 자신만만하게. 그러나 엘리카 드 이사도라는 그의 웃음에 괴이한 공포가 담겼음을 느꼈다.

광기는 아닌데… 이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엘리카가 재차 질문하였다.

방에 전시돼 있던 유일한 물건. 지금도 그가 꼬옥 움켜쥔 목걸이를 지목하면서,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물건이냐고. 부인이 될 사람으로서 당돌하게 물어보았다.

에릭의 눈이 흔들렸다.

1) 소지(새끼손가락) 아래 손바닥의 볼록한 부위.

2) 듬성듬성하고 보풀이 많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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