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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2

320. 소꿉 ep – 성과

‘이상한 사람이네.’

돌아오는 길, 엘리카는 생각했다.

이 나라에 시집온 공주로서, 에릭 왕자의 외할아버지인 라퍼트 테르탄 공작님을 찾아가 인사드렸다.

갈 때만 해도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왕자는 어딘가 이상하지만, 그의 할아버지는 어여쁜 손주며느리를 환대해주리라 생각한 것이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테르탄 공작이 본인을 아껴주면 그의 지지를 기반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라퍼트 테르탄 공작은 에릭 왕자보다 더 수상했다.

일단은 환대해줬다.

맛있는 차와 다과가 놓이고, 그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이라면 대화할 때 뱉을 수밖에 없는 ‘주장’이란 걸 하지 않았다.

어떤 논란거리에 대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 갈파하는 것만이 주장이 아니다. 대화의 주제를 선택하는 것도 주장인데, 공작은 그녀가 꺼낸 이야깃거리를 뒤따라올 뿐 본인의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차디찬 얼음물만 꿀떡꿀떡 삼킬 따름이었다.

콘라드 왕국의 문화일까?

대륙 남부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본인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풍습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여자여서, 여자와는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실망하며, 엘리카는 수상쩍은 공작을 뒤로하고 왕궁으로 되돌아왔다. 타국에서 온 공주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당장은 시녀장의 권한이 본인보다 더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기에 왕궁의 대소사에 관여할 권한도 없고, 제가 데려온 한 줌의 시녀들이 부당한 업무에 동원되지 않게 신경 써주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런 답답한 생활은 그녀가 에릭 왕자와 혼인해 이 나라의 적법한 공주로 인정받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후에도…

외국인이라는 꼬리표는 아이를 생산할 때까지 강조될 터였다. 엘리카는 울적해졌다.

– 짝!

아니야. 그래도 여긴 편하잖아.

엘리카는 뺨을 양손으로 두드려 긍정을 심어 넣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히 뱉어야 했던 ‘오프론티스’ 왕성과 비교하면 여긴 버스크(busk)가 빠진 코르셋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어머니가 없지 않은가.

그녀는 걷던 길을 멈춰 서서 억압된 자유를 만끽하였다.

비록 타국에서 온 힘없는 공주라 할지라도 왕족인지라, 그녀가 다소 이상한 행동을 해도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십수 년 전에 쓰러진 왕은 오늘내일하고 계시다니 신경 쓸 것 없고, 가장 크게 눈치 봐야 했을 왕후는 레리아나 공주를 낳다가 사망했다.

게다가 십일 년 전에 난을 일으킨 에릭 왕자는 제 친척들을 궁에서 내쫓아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그러니 누가 나에게 잔소리하리오.

그런데 문득, 엘리카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왕족이 제 친척들을 궁에서 쫓아내는 것… 이건 본인의 자리가 어지간히 위협받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 짓이었다. 정계에서 활약하는 왕족이 많으면 왕권이 절로 강화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에릭 왕자는 그리하였다.

아마도 테르탄 공작을 중심으로 단일화된 콘라드 왕국의 정계 상황과 그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듯한데… 흐음.

엘리카 드 이사도라는 구도를 좀 달리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에릭 왕자와 테르탄 공작이 협력해서 왕위를 쟁탈한 것이 아니라면?

수상쩍은 공작과 십수 년 전에 실종된 어머니의 목걸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에릭 왕자… 그의 어머니는 공작의 딸인데, 잠깐만.

‘왕이 병에 걸려 쓰러진 시기도 그쯤이지 않나?’

왕이 쓰러졌기에 왕자가 난을 일으킬 수 있었다. 또 테르탄 공작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데, 그 혜택은 공작만 본 것 같았다.

에릭 왕자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는…

‘오프론티스나 루티나나… 여기나 저기나 결국 매한가지구나.’

엘리카는 아이셀 왕국의 수도, 오프론티스에 두고 온 제 동생을 떠올렸다.

오스카 드 이사도라.

제1 왕자, 비비안 드 이사도라와 왕위 계승권을 놓고 대립 중인 제2 왕자가 바로 그녀의 친동생이었다.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동생도 거기서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공주는 팔려 가고, 왕자는 이용당하는 게 세상의 원리인 모양이지… 씁쓸해진 그녀는 다시금 걸어 나갔다.

“왕자님을 뵈러 왔어요. 기별을 넣어 주세요.”

이윽고 시종장이 난처하게 답했다.

“왕자님께서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오시랍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세요.”

엘리카는 왕자의 집무실 앞에서 세 시간을 보낸 뒤에야 왕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이고, 다리 아파라. 인사도 없이 털썩, 그녀가 소파에 주저앉았다.

“또 무슨 일로 오셨소?”

“테르탄 공작님을 뵙고 온 길이에요. 참 좋은 분이시더라고요.”

에릭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를 확인한 엘리카는 ‘역시!’ 퍼즐이 풀렸음을 직감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도 많이 부드러워져선 옆자리를 살갑게 두드리고 말았다.

“일하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잠깐 쉬었다가 같이 식사하실래요?”

“…”

“어서요. 아, 그리고 우리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겠죠? 뭐가 막 바쁘던데.”

당신을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에릭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저도 모르게 피해버렸다. 아쉽게도 준비 중인 행사는 결혼식이 아닌 아키넨, 즉위식이었고, 뒤이어 카데릭 드 예리엘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루티나를 강타했다.

* * *

‘제기랄, 이건 말도 안 돼.’

레브는 최근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예상했지만 기사는 회유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뭐 시간이 있어야 암베그리스를 구해오든 말든 하지, 겨울이 채 가지도 않았는데 상대는 왕위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빌어먹을 신이시여, 저더러 뭘 어쩌라는 겁니까.

납치해 오라 한 베르크 추기경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니 레아도 신력을 받지 못해서 아직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고, 보육원 사람들과 놀기 바빴다.

레브는 슬슬 울화통이 터져서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애당초 레안이 아닌 내가 여기에 온 것부터가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싶다.

딱히 그 친구를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솔직히 아주 약간은 원망스럽다. 나한테 일을 맡겼으면 이쪽에 영향이 올 일은 하지 않았어야 할 것 아니냐.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가장 주요한 축이 되는 {혈통}. 그게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에릭 왕자가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본인이 온 것도 아니어서 그 {혈통}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코앞에 닥친 아키넨, 에릭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내버려 두자니… 기회가 많지 않았다.

기사들을 회유해서 우르르 습격하지 못하게 된 이상 기사들이 몰려있는 곳에서 왕자의 정체를 까발려야 싸움다운 싸움을 할 텐데, 즉위식을 놓치면 곤란한 것이다.

‘포기해야겠다.’

─ 레브가 생각할 때 이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오리아스를 건드리는 것보단 다음을 기약하는 게… 우린 엔딩이 나지 않으니까, 좋을 듯하다.

레브도 나름 머리를 많이 굴려서 내린 결정이었다.

현재 회차는 거지남매 시나리오의 것이다. 레리아나가 결혼하든, 꿈을 이루든, 죽든, 어쩌든… 결국 엔딩이 뜰 건데, 엔딩이 떠서 시간이 돌아가는 시점은 ‘번외’로 진행되는 이 소꿉친구 시나리오와 무관했다.

거지남매에서 엔딩이 떠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테니까. 나와 레아가 살아간 삶이 거지남매 엔딩 크레딧에 적히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제발.

또, 좀 비관적으로 보자면 거지남매는 벌써 끝나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럼 오리아스는 늦게 잡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레브는 오늘도 터덜터덜, 허탕 친 걸음을 돌렸다. 겨우내 그가 설득한 기사는 고작 제니아 재커리와 근위기사단장, 두 사람뿐이었다.

그라니아 보육원으로 되돌아왔다.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당장 여길 떠나버릴 생각으로 레아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보육원생들과 노닥거리며 소일하고 있었다.

하하 호호, 난리도 아니다. 원생들은 레아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래, 레아가 즐거웠으면.

그거면 됐지.

레브는 그녀에게 손짓해 무리에서 빼내었다. 한숨을 내쉬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만 떠나자고 말하였는데 레아는 파핫! 웃어버렸다.

“왜 웃어?”

“레브, 이 바보야. 네가 잘못 생각한 게 두 개나 있어.”

“…?”

“먼저 오리아스를 잡아야 하는 까닭이 무슨 퀘스트 때문이라면서.”

“그렇지.”

[ 퀘스트 : 수호자(守護者), 1/4 – Barbatos ]

수호자라는 퀘스트를 깨기 위함이다. 아마 레이가 마르하스를 잡아서 하나 더 추가된 상태이긴 할 건데, 레브는 아직 본 적이 없었다.

레아가 말을 이었다.

“그 퀘스트란 게 엔딩이 난 다음에도 깨지리란 법이 없잖아. 아니면 어쩌려고.”

“아니면 진짜 치사한 거지!”라는 불평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런 말은 레아가 싫어할 거다.

“다른 건 아키넨이 유일한 기회가 아니라는 거야. 레브, 잘 생각해봐. 하나 더 있을걸?”

“…레아. 네가 오리아스를 못 봐서 그런데 그놈을 잡으려면 기사가 못해도 백 명은 필요해. 즉위식 같은 큰 행사가 아니면 기사들이 한곳에 모일 일이 없잖아. 내가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없고… 나… 겨우내 고작 두 명 설득했어. 다른 기사들은 말만 걸어봐도 알겠더라. 나한테 그냥 관심이 없어.”

내 쓸모없는 이름값처럼.

제 삶을 무료하게 여기는 제니아 재커리가 그나마 말이 통했고, 아이론 경의 소개로 만난, 과거 레안을 저버렸던 근위기사단장은 죄책감에 휩싸여 레브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기에 회유할 수 있었던 거다.

무턱대고 이 몸이 소드마스터요, 처음 만난 기사 앞에서 오러블레이드를 휘둘러서는 회유는커녕 협박밖에 되지 않으니까.

레브는 제가 겨우내 이룬 성과를 시무룩하게 고백했다. 레아는 “에그.. 그랬구나.” 그런 남자친구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아키넨 말고도 기사들이 몰리는 행사가 하나 더 있잖아. 그것도 조만간.”

“응? 그런 게 어디 있어? 전쟁이라도 터졌대?”

“전쟁은 아이셀 왕국이나 터졌고… 그 왜, 공주님이 결혼하러 왔다며.”

“…!!”

“그러면 그 결혼식 날… 꺅!”

“레아! 넌 천재야!”

레브가 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뺨에 키스를 퍼붓기에 깜짝 놀라서 어푸어푸, 정신을 못 차리던 레아가 외쳤다.

“바보야! 천재는 무슨… 자, 잠깐 무슨 짓이야! 내려놔! 아, 아, 아직 해가 중천인…”

레브가 읏차, 한껏 밝아진 얼굴로 레아를 어깨에 걸쳐 들었다. 저에게 뭔 짓을 하려고 이러는지 지난번의 경험으로 알아챈 레아는 빽! 소리쳤다.

“대낮이라고, 이 바보 멍청아! 나 당장 내려놓지 못해! 안 내려놓으면 소리 지를 거야!”

서슬 퍼런 협박에 찔끔, 레브가 레아를 내려놓았다.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레이의 연인, 레라 아이나르와 달랐다.

마차에서는 레아가 처음이라 운이 좋았다. 그러나 그 직후에 엄청나게 혼났고, 한 번만 더 이랬다간 가만 안 두겠다는 말까지 들었다.

레아가 원하는 연애 스타일이 그랬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팔짱을 끼고 입맞춤도 자주 하던 레라 아이나르와 다르게 손을 잡는 게 평소의 한계인 것이다.

바닥에 내려온 레아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레브를 톡, 쏘아보았다.

“네가 왜 이러는진 아는데, 적당히 해. 대낮이라구. 사람들 한창 일할 시간에 무슨 짓이야.”

“…미안.”

“그리고 나도 바빠. 넌 내가 맨날 놀고만 있는 줄 알지? 네 말로는 내가 베르크 추기경님한테 신력을 얻으면 만사가 해결이라지만 그게 뭐 공짜야? 달라면 그냥 줘? 해놓은 게 있어야 왔을 때 부탁이라도 해볼 것 아니야. 그래, 안 그래?”

“…그래.”

풀이 죽은 레브가 쬐끄매졌다.

레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잔소리는 이만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앞으로는 너도 와서 도와. 여기 일손이 엄청 달린다구. 네가 나보다 훨씬 일 잘하잖아.”

“무슨 일을 하는데?”

“보여줄까? 우리가 새끼줄 꼬아둔 게 있어. 제법 많은데, 너도 같이했으면 두 배는 됐겠다. 넌 손재주가 좋으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두 배가 돼. 내가 무슨 실 뽑는 기계도 아니… 헐! 이, 이게 뭐야.”

뒤따라가길 잠시, 창고가 열리자 레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업적 : 성녀의 세례(洗禮) – 레오에게 {신력 간파} 능력이 부여됩니다. ]

돌돌돌 정리되어 쌓여있는 새끼줄 더미들. 그것들은 하나같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반면 레아는 “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돌아보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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