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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4

322. 소꿉 ep – 파편

– “이게 변주(變奏)고 자유 의지지. 거대한 선택지만이 전부가 아니야. 어때. 이래도 신이 원망스러워?”

피바다가 된 바닥에서 원생들 이백여 명이 바둥거렸다. 그들의 비명 속에서 레브는 생각했다.

원망스럽다고.

시간을 반복시켜놓고는 매번 다른 길을 강요하는 당신을 저주한다고.

그때,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 모를 마법사가 레브의 상념을 방해했다. 그는 자신의 진한 분홍색 눈동자를 레브의 눈과 맞닥뜨리며 말했다.

“좋아요. 이제 검을 버리세요. 그 자세 그대로 손아귀만 벌려 떨구는 겁니다. 어허.”

“꺄, 꺄아…ㄱ!!”

눈이 까닥 돌아가려는 순간 끔찍한 압사음(壓死音)이 들렸다. 레브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방금 저 비명이 레아는 아니겠지? 그래, 아니야. 아니었어. 그, 그럼… 아직 무사할까…? 아!

레아를 떠올리자 {추적술}이 다리 부근을 가리켰다. 살아있다! 레브는 깊이 안도하였지만,

“으… 살려ㅈ… 끄아악!”

“눈을 뜨시죠.”

눈을 감은 대가가 무작위 원생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레브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만!”

“누가 입을 열라 했습니까?”

– 퍼석!

먼발치에 선 마법사는 무고한 소년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단지 저만한 세포질을 압사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마나량을 계산했을 뿐이고, 지금은 다음 차례로 넘어가 있었다.

다음은 소드마스터 옆에 쓰러진 소녀다.

체구가 작으니 92.4 PaL 유량이면 충분하겠다. 점도(P)와 기압은 전과 같고… 저 여자아이의 몸에 마나가 얼마나 쌓였느냐가 변수인데, 기사도 아닌 듯하고 나이가 어려 보여서 경험상의 평균치를 때렸다.

92.4 PaL.

이 한 줌의 마나가 오거튼 백작이 내린 레아의 값어치였다. 저 소드마스터를 마법으로 제압하려면 이것의 수백 배가 필요할 듯하니 이러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 하겠다.

백작이 다시 말했다.

“마지막이외다. 검을 버리세요. 그 자세 그대로 손아귀만 벌려 떨구는 겁니다.”

철두철미하다. 레브는 끄윽, 신음했다.

검을 버려야 하나? 하지만 그런다고 살아날 길이 있을까?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눈알조차 굴리지 못하는 지금 할 수 있는 건 검을 버리거나, 보석을 부수고 저 마법사 놈을 때려죽이는 일이다. 레아가 다음 차례가 아니길 기도하면서. 그리고 오리아스를…

후자가 그나마 나은 선택지였다. 검을 버리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래도 후자는 기대할 확률이라도 있었다. 그것도 179/180이라는.

설마 다음 차례가 레아겠는가. 원생들이 180명이나 남았는데, 설마.

‘…’

하지만 행동을 개시하기엔 레아의 가치가 너무 높았다. 백팔십 명이 아니라 천팔백… 아니, 만팔천 명의 목숨보다 레아 한 명이 귀하다.

이건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갈등하는 그때, 파들파들 떨리는 손이 레브의 바짓자락을 붙들었다. 레브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 캉, 땅그랑!

“그래, 버렸다. 해달라는 대로 해줬으니 마법을 풀어라.”

“아직이지요. 거기. 누가 가서 저 검을 회수해 와라. 아, 저자가 들고 있는 목걸이도.”

홀 정문에서 한 근위기사가 접근해왔다.

아수라장이 된 피바다를 건너온 그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취하곤 레브의 손에서 흘러내린 목걸이 끈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짤막한 줄다리기. 레브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직 안 늦었어.’ 마지막으로 갈등했으나, 기압에 눌린 듯한, 레아의 쥐어짠 신음이 들렸다.

“줘… 그, 그걸 줘야…”

“…하아.”

실패했구나.

레브가 손을 놓자 투구를 쓴 그 근위기사는 검과 목걸이를 가지고 되돌아갔다. 그에게 오거튼 백작이 손짓했다.

“왕께 가져다드려라. 적습을 막아냈노라 보고드리고.”

끄덕.

정문이 열렸다. 역시나, 안에선 큰 연회가 한창이었다. 홀을 가로질러 저 멀리 단상에 에릭 드 예리엘이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불유쾌한 장면이 보이자 에릭은 말없이 엘리카 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문은 금방 닫혔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오.”

“그런 것 치곤 왠지 기뻐 보이는걸요?”

엘리카가 눈썰미 좋게 물었다.

에릭은 빙그레한 웃음으로 기존의 웃음을 덮어씌웠다.

기쁘지 않을 리 있느냐. 오리아스 님께서 경고한 소드마스터를 처치했는데. 그분께선 모르는 게 없으셨다.

‘내가 왕위에 오르면 소드마스터가 등장할 거라 하셨지. 더러운 주신의 오랜 수법이라고.’

오리아스 님의 경고는 맞아떨어졌다. 명줄 질긴 동생 놈 때문에 빨리 왕위에 올라야겠다 마음먹고 공작을 시켜 왕을 살해했을 즈음이었다.

로페로 백작이 테르탄 공작에게 거품을 물고 찾아와 따졌다.

타디안 로페로라는, 저희 가문의 기사가 댁의 손자를 호위하던 중에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에릭에게 사로잡혀 시야마저 공유된 공작이 침묵하자 로페로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 “공작님! 전 타디안이 임무 중에 사망한 걸 따지는 게 아닙니다. 분명 명예롭게 죽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공자님의 태도입니다. 팔라스 테르탄 공자님께선 어찌 저를 위해 목숨 바친 기사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지는 못할망정 병사들을 시켜 운구해가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상대가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요! 병사들 말로는 고작 일곱 명이었다는데… 이러쿵저러쿵.”

그때 알았다.

드디어 소드마스터가 등장했음을.

놈은 오리아스 님이 오른 왕국으로 세를 뻗치려는 걸 막는 동시에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또, 본인이 더러운 주신의 안배임을 증명하듯이 그라니아 보육원으로 숨어 버렸다. 북쪽으로 달려갔다는 세 명은 아마 추기경을 불러오기 위함이겠지.

하핫!

그러나 추기경이 돌아왔을 때쯤엔 늦을 것이다. 나는 왕위에 오르고 엘리카와 결혼해 흔들림 없는 정통성으로 그들을 맞이할 테니까.

녀석들을 죽여버리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굳이?

소드마스터는 내 정체를 알지 못해서 벨리타 왕국의 헤르만 포르테 백작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밖에 하지 못한다는데, 굳이 건드려서 내 정체를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녀라는, 무서운 적수와 맞붙게 되는 것도 곤란한 일이고…

그래서 마법사를 시켜 감시하라 했다. 녀석이 선공을 치거든 그걸 반란으로 규정해 처리하려고.

오리아스 님께서는 십수 년, 혹은 수십 년에 걸쳐 눈치싸움을 해야 할 것이라 하셨다. 그랬는데… 하하하!

저 멍청한 소드마스터는 어떠한 정치적 움직임도 없이 필부(匹夫)의 만용을 부려 주었다. 소드마스터로서 이름값을 떨치며 옥죄어왔으면 곤란했을 것을.

‘주신의 안배란 것도 별것이 아니로구나.’

흥미가 떨어진 왕은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내게 남은 위험은 레안과 레리아나… 동생놈들 정도인 듯했다.

물론 이것도 이미 처리한 문제였다. 엘리카 드 이사도라와 결혼하는 것 외의 방법으로.

내가 녀석들이 칼을 겨누기까지 기다려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잘라낼 수 있는 떡잎은 미연에 잘라내야지.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보험은 들어 놨고… 에릭이 엘리카의 손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이 경사에 추기경을 부르지 못해 미안하오. 하필 그가 순례를 나갔을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괜찮아요. 전 당신이 보기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어서 안심했는걸요. 성급한 질문이지만… 왕께서는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시겠지요? 비록 저를 맞이한 까닭이 혈통 때문이었다 할지라도요.”

“…질문이 짓궂군요. 그리하겠소.”

엘리카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제가 욕심을 부려봐도 될까요? 왕께서 제게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무엇이오?”

“그 목걸이를 제게 주세요. 당신 어머니의 목걸이를요. 제가 콘라드… 아니, 우리 왕국에 대해 그동안 많이 공부했답니다.”

콘라드 왕국에서는 목걸이를 누구에게 주는 것에 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약혼반지나 결혼반지처럼 십자교회의 주도로 만들어져 온 대륙이 따르는 풍습이 아닌 콘라드 왕국민들만의 의미부여인데, 목걸이를 주고받는 건 저들이 피로 묶인 ‘가족’임을 의미했다. 단순히 결혼해서 함께 사는 사이가 아니라.

해서 목걸이를 주고받았다는 건 앞으로 이혼하지도 헤어지지도 않을뿐더러, 가족이니까 그럴 수도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런 선언은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웠을 때 이뤄지곤 했다.

“아이까지 다 키웠는데, 인제 와서 우리가 뭐 헤어지겠냐.”라며 친척과 이웃들 앞에서 저들이 한 가족임을 맹세했다. 그때 아이들에게도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에릭은 그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제가 제물로 바쳐버린 어머니의 목걸이를 챙겨다 보관해온 정도인데…

엘리카의 당돌한 요구에 에릭 드 예리엘은 잠시 침묵했다. 우리 왕국의 문화를 좀 공부한 모양이지만, 아직 한참 부족한 듯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걸이를 남에게 주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새로 만들어준다면 모를까.

“미안하지만 어렵겠구려. 대신 다른 것을 드리지요. 섭섭해 마시오. 이것도 귀한 물건이니.”

마침 근위기사가 단상 아래에 도달해 있었다. 팔라스에게 들려 보냈던 오리아스 님의 파편을 가지고 있길래 별생각 없이 손을 까닥였다.

이제 우리는 오리아스 님의 은총 아래 영원히 행복하…

“음? 뭐냐?”

“…이제야 알겠어.”

투구를 쓴 근위기사가 중얼거렸다.

뭐 하는 짓이지? 에릭과 왕을 호위하는 근위기사들이 의아해하는 순간, 그가 투구를 벗어 던졌다.

텅! 감미로운 연주가 울려 퍼지던 홀에 쇳소리가 섞였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축복받은 결혼식장 한가운데에 선 그 기사는,

바르트 경이었다.

그는 레브에게서 뺏어온 검 대신 날이 성한 곳 없이 울퉁불퉁한 제 검을 빼 들었다. 먼저 떠난 동료들의 무기를 녹여 만든 그 검에서는 찬란한 광채가 하염없이 뿜어지고 있었다.

– 죽여라.

악을 벌하는 주신의 사도, 소드마스터의 등장이다. 에릭의 눈을 피해 스스로 제 소임을 찾아온 바르트가 분노에 찬 외침을 토했다.

“그자의 말이 맞았어. 테르탄 공작이 아니라… 네놈이 원흉이었구나, 에릭 드 예리엘!! 나는 네까짓 것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

바르트가 붉은 보석을 높이 던져 올렸다. 잘그락, 허공에 뜬 그것이 절정에 달하자 오러블레이드를 세게 내리그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부수지 못하고 끝내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던 보석은 새파랗게 타오르는 오러블레이드에 썽둥 잘려 나갔다.

에릭이 손을 뻗으며 “자, 잠깐!” 소리쳤으나 그것이 왕위에 오른 그가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텁텁한 소 울음소리가 그의 가슴을 때리며 튀어나왔다.

– Koj청한 ruam! Kuv twb mu을 잃었으kuv 네 몸으로 yog li kuv 대신하 hloov nrog!

“에릭? 왜 그… 꺄, 꺄아악!!”

“사, 살…!”

다급히 뒤돌아선 에릭의 피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마치 바위가 몸 안에서 자라는 것처럼 살이 팽팽히 당겨지더니 단 한 방울의 핏물조차 없이 찢어졌다.

덩그러니 남은 붉은색 바윗돌.

먼 옛날, 오리아스는 저를 섬기던 미노타우르스들을 죄다 잃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강림하였고, 아즈라 성인과 맞붙었음에도 또다시 살아남았다. 그는 저를 믿는 신도가 없으면 소멸해버리는 여타 아신들과 달랐다.

파편. 저의 일부를 물질로 만들어 생존하였고, 신과 피조물을 가르는 장막을 뚫으려 노력해왔다. 그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어 오리아스는 장막에 구멍을 뚫고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일단은 파편을 지키는 게 급하다. 그래. 저기 있군. 신력 효율은 그닥 좋아 보이지 않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마침 레브에게 다가가던 오거튼 백작이 “헉!” 고꾸라졌다. 부들부들, 머리를 자명종처럼 흔들며 무언가를 뿌리치려 발악했다.

“오, 오칸… 오칸타 티고페이악!! 포..프르논 브뮤엑제카디… 끄아악!”

고대의 주술사들이 쓰던 주문이다. 마법사는 본능적으로 이를 읊었으나 상대가 좋지 못했다.

이내 고통이 잦아든 백작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안구는 핏물로 가득 차 출렁거렸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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