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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28

326. 소꿉 ep – 희생

“개… 개회(開會)하겠습니다. 모두 정숙해주시길 바랍니다.”

의회장인 재커리 남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5번째 비상대책 정무회의(政務回議)의 시작을 고했다.

이번에도 성실하게 참석한 레아는 참 개판이라고 생각했다.

사건이 터지고 5일째, 귀족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왕은 없고, 그들의 중심축이 되어 주었어야 할 라퍼트 테르탄 공작은 2번째 정무회의에서 피의자의 신분으로 단상에 올랐다.

뭇 사람들의 만류에도 단상에 선 공작은 고백했다.

이 모든 사태는 약 십오 년 전에 그의 딸인 ‘네도스티아 예리엘’이 사라진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에릭 드 예리엘 왕이 그녀를 제물로 바쳐 악신을 일깨웠으며, 본인은… 이를 알면서도 막지 못했노라고.

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떤 처벌이건 달게 받겠다는 공작이 자리를 비우고서야 조심조심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 대책이란 게 죄다 저희 밥그릇을 챙기고, 책임을 모면하려는 것들이어서 귀족에 대한 동경심이 있던 레아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우선 그들은 공작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그 어떤 처벌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 못 박았다.

공작에게 책임이 쏠리면 13년 전, 공작과 함께 레안 왕자를 쫓아냈던 저들도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혼란에 빠진 민심을 안정시키는 게 아니었다. 에릭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며 함께하길 거부했다가 지방으로 밀려난 귀족들이 복권(復權, 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하는 걸 막아내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레안 드 예리엘 왕자까지 데려와 권력을 잡으면 자칫 피의 숙청이 이뤄질 수도 있으리라.

해서 지방 귀족들이 소식을 듣고 몰려오기 전에 공작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모든 책임을 에릭에게 덮어씌우고, 폐위(廢位)했다.

에릭 예리엘.

왕위 계승권마저 박탈당한 그에게 남겨진 이름이었으며, 이 짓거리를 하느라 사흘을 소비했다.

재커리 남작이 말했다.

“오, 오늘은… 차기 왕을 누구로,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논의하고자 모였습니다. 조, 조용! 조용히 해주세요. 먼저 왕위 계승권을 지니신 분을 확정 짓겠습니다. 그…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과 레리아나 드 예리엘 공주님의 순위가 빠르긴 하지만… 부재하신 관계로, 크흠, 일단 다른 왕족분들을 살펴보겠습니…”

“헛소리 집어치워! 정통 후계자인 레안 왕자님이 엄연히 계시거늘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저, 정숙하세요! 투, 투표로 공정하게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릭 예리엘 폐왕자가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과 레리아나 드 예리엘 공주님을 암살하고자 기사들을 보낸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이 비상시국에 그분들의 생사를 확인하여 모셔오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며칠 전 정무회의에서 통과된 사항입니다.”

“이건 불법이다! 의회랍시고 저들끼리만 모여 앉아서… 두고 보자 이 개새끼들아! 재커리 남작! 당신도!”

그나마 수도 근방에서 지내던 한 귀족이 분노를 터뜨리며 나가버렸다. 의회장인 재커리 남작은 땀을 뻘뻘 흘리며 뻣뻣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여타 귀족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 의회라는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유명무실한 기관이었다.

수도의 귀족들끼리 의회장 역할만 관례적으로 돌아가며 맡고 있었는데, 왕권이 부재한 상황에 저들끼리 일을 수습하고자 급하게 재출범시킨 것이었다. 재커리 남작은 의회장에게 지급되는 나랏돈 몇 푼 공짜로 얻어먹다가 봉변을 당했고.

이러다간 내전이 터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베르크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왕위는 아무래도 연륜이 있는 분이 맡는 게 좋겠지요. 실례지만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퇴장하겠습니다.”

왕위 계승권자를 지목하곤 은발 머리를 날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레아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신정(神政).

신권정치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루티나의 시민들은 물론 귀족들까지 혼란에 빠진 가운데, 베르크 추기경은 콘라드 왕국의 모든 신도를 포용하는 대주교이자 십자교회의 최고 권력자로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테르탄 공작이 몰락하고,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 중앙 귀족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는 혼란한 민심을 잠재우기에도 힘을 쏟았다.

오리아스와 눈이 마주친 시민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하필 시민들이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시간이었어서 이마에 오리아스의 발자국이 찍힌 사람이 수만 명에 달했다. 사태가 진정된 이후, 그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베르크 추기경은 루티나 교회의 사제를 풀어 시민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었다.

낙인이 찍혀 왕궁으로 돌격해왔던 그들은 (추기경의 위용을 본지라) 더욱 감격하며 베르크 추기경님이 아니었으면 정말이지 모두 죽었을 거라며 칭송하기 바빴다. 루티나의 바람은 베르크에게 순풍이었다.

전부(fore), 후부(mizen), 그리고 메인마스트(main mast)까지1) 활짝 펼쳐진 베르크 추기경. 순풍을 탄 그는 저의 숙원을 항로에 올렸다.

꼭두각시 왕을 내세운 ‘그라니아 신성 왕국’의 등장이… 머지않았다.

레아는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추기경이 원하는 대로 되리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귀족들이 넋이 나간 엘리카 드 이사도라 공주의 처후를 결정하는 것까지 지켜본 뒤, 그 탐욕 어린 시장통을 떠났다.

“레브, 나 다녀왔어. 어? 바르트 아저씨랑 다른 아저씨들은?”

한편 레브는 루티나 교회에 머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정무회의에 딱 한 번 출두해서 진술했을 뿐, 그 이후 모든 권한을 추기경에게 위임해버렸다.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빈둥거리는 걸 보면. 물론, 워낙 성실한 레브인지라 훈련도 하고, 산책도 하는 둥 나름 바쁘게 돌아다녔다.

“떠났어.”

“어디로?”

레브는 윗몸 일으키기를 하며 짤막하게 답했다. 레아가 곁에 와서 대답을 재촉하자 흥건히 젖은 땀을 닦으며 다시 말했다.

“바르트는 가족들한테 갔고, 나머지는 나도 몰라. 알아서 하겠지.”

“그래? 근데 너는 왜 바르트 아저씨만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다른 아저씨들한테는 경칭을 붙이더만.”

“…거기 오늘은 별일 없었어?”

레브는 답하고 싶지 않은지 읏차, 자리에서 일어나며 딴소리했다. 레아는 그러려니 주제를 돌렸다.

“…별건 안 했어. 아! 맞다! 혹시 너 에릭 왕이 왕자님한테 기사들을 보낸 거 알아?”

“에릭이 레안한테? 응. 알지.”

“어?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들어보니까 하젠 경인가… 하는 기사단장님한테 기사님들을 딸려서 보냈다더라구. 뭐… 진심은 아닌 것 같았지만 다들 왕자님을 걱정하는 분위기였어. 정황상 그 사람은 에릭 왕을 따르는 사람이었다나 뭐라나.”

“하하! 재미있네.”

레브는 또 혼자 웃고선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과묵해졌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었다는 회차의 영향이 있는가 보다. 레아는 참을성 있게 물었다.

“뭐가 재미있어? 나도 알려줘.”

“응? 아~ 그게…”

하젠 경이라는 제2 기사단장이 좀 입이 무겁고 철저한 편이라 오해가 생긴 것이란다.

그는 기사들이 다들 에릭 왕자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궁시렁거리는 동안에도 자신의 정치적인 의사 표명을 일절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과거 레안이 하젠 경을 회유하려 했을 때 많이들 우려했었다.

에릭 왕자의 심복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에릭이… 언제냐, 그, 나랑 레안이 오른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지원군으로 하젠 경을 보냈었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에릭은 다른 기사들이 영 못 미더웠겠지.”

“아하! 그럼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응. 지금 레안이랑 레리아나 둘 다 멀쩡히 살아 있어. 하젠 경도… 방향이 같은 거로 봐선 같이 있는 듯하네.”

“그렇구만.”

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레브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 의회에 댕기느라 여기는 하나도 구경 못 했지? 가자, 안내해줄게. 여기도 멋있는 거 많더라.”

“좋긴 한데… 너 너무 한가한 거 아니야?”

“왜?”

두 사람은 콘라드 왕국에서는 특히 귀한 대리석 교회를 거닐며 이야기했다.

산이 거의 없다시피 한 콘라드 왕국에는 석재가 극히 부족한 것이다. 해서 기왕 돌로 짓는 것, 교회에는 무수한 장인의 손길이 세밀하게 어려 있었다.

아쉽게도 데모스 마을 교회조차 돌로 지어진, 오른 왕국 출신인 레아와 레브는 그것들까지 눈여겨보진 못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잖아. 아스타로튼지 뭔지도 잡아야 한다면서.”

“아… 이번에 그것까지 잡을 생각은 없는 것 같던데?”

“왜?”

“나야 모르지.”

레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레아는 좀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네가 모르면 어떡해.”

“레안이랑 민서가 어련히 계획을 세워 놨겠지. 보통 그랬어. 걔네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기도 하고… 내가 할 일이 있으면 알려줄 거야.”

“…”

레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레브가 그 레오들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포지션인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바보네. 바보.

그냥 착한 바보.

레브는 레아가 속으로 제 흉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곤 해맑게 손가락질했다.

백색의 회랑, 거기엔…

“이것 봐. 멋있지? 7대 성인의 조각상이야.”

제1 성인인 아즈라 성인을 필두로 콘스티노 라오노, 라자르 라오노, 우데안, 티고로프, 윌라드 보프만과 제7 성인이자 유일하게 성전사 출신인 가이단의 조각상이 줄지어 있었다.

꿈이라고 모든 걸 보여주진 않아서, 레아는 “우와…!” 감탄했다.

“잘하면 너도 여기에 동상이 세워질 텐데… 레아, 내가 좀 고민해봤거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우와! 여기 봐봐. 아즈라 성인의 조각상에는 글귀도 적혀 있네. 그것도 심지어 금으로! 어디 보자…”

“레아! 나 할 말이 있다구.”

“뭔데?”

“우리가 어떻게 살면 좋을지 고민해봤어. 네가 수도교회에 가서 정식으로 사제가 되고, 성인으로 추대받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서…”

레브는 눈 딱 감고 말했다.

“나, 나랑 결혼해 살자.”

“그래.”

“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성인, 뭐…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마침 여기 적혀 있는걸. 마음 가는 대로 행하라고.”

“정말이지?”

“그래.”

“그, 그럼…”

“그건 안 돼.”

레아는 시무룩해진 레브의 뺨에 쪽, 뽀뽀해주었다.

나라고 싫을 턱이 있겠니.

단지 그게… 상상 이상으로 기분 좋더라고. 네가 잘하는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잠깐만.”

“왜?”

“…너희들 기억을 공유한다면서. 그, 그럼 혹시… ‘전부 다’ 기억하는 거야? 그 회차에서 겪은 일을?”

“음… 그렇지. 그런데 가끔 생각은 정리해주지 않으면 읽히지 않을 때가 있어.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더라구. 특히 레안은 생각이 휙휙 넘어가는 편이라 이해하기가 어려운 편… 어라? 왜 그래?”

“꺄악!!”

얼굴이 홍당무가 된 레아가 레브의 뺨을 철썩! 때려버렸다. 그러곤 후다닥 달아나는데, 레브는 황당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 * *

레안과 연락이 닿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을 마치고 오르빌로 돌아왔다는 레안은 전에 말했던 대로,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베르크 추기경은 만족했고, 레브가 물었다.

/ 그럼 이제 끝난 거야? 내가 더 할 일은 없지? 너 크세니아랑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었어. 너희 결혼하는 것까지만 보고, 나랑 레아는 고향으로 돌아갈까 해. /

이상하게 레아는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지만… 이윽고 답장이 돌아왔다.

/ 미안해. 부탁할 일이 있어. 가능하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

/ 뭔데? 간단하게라도 말해줘. 그래야 나도 준비를 해놓지. /

다음 답장이 오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안은 심히 머뭇거리는 문체로 레브에게

/ 우리 동생이 병정놀이를 하고 싶은가 봐. 네가… 그 상대가 되어 주었으면 해. /

희생을 요구하고 있었다.

1) 돛대. 중형급 이상의 범선은 여러 개의 마스트(mast)를 가지며, 마스트가 세 개일 경우 가운데 마스트가 메인마스트라 불린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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