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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35

333. 남매 Ep – 호적수

“그래서, 레리아나가 왕위를 차지하고파 한다는 거야? 그리고 그걸 나더러 막으라고?”

모나크 남작령. 레브가 끼어들었다.

이 친구 혓바닥이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벌써 날이 저물었고, 양초를 켜자 불그스름한 빛이 레아의 방을 메웠다.

금발의, 잘생긴 왕자님은 나지막이 수긍했다.

“…그래.”

“왜? 그냥 왕이 되게 내버려 두면 되잖아.”

레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스타로트 때문에 그래. 동생이 일을 키우다가 녀석을 만나게 되면 끝장이야. 게다가,”

“게다가?”

머뭇거림. 이내 레안이 말을 이었다.

“…난 레리아나가 엔딩 이후로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해. 동생은 제힘으로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니, 그건 그거대로 하게 해주되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이대로는 내 처지가 곤란하기도 하고.”

“뭐가 곤란해?”

“레브, 이 바보야. 베르크 추기경이 지금 정권을 장악했잖아.”

“그게 뭐 어쨌… 아.”

레아가 끼어들었다. 레브는 그제야 ‘레안 페테르’의 처지를 인식했다.

12번째 엔딩에서도 그랬다.

오리아스를 물리치고 정권을 틀어쥔 베르크 추기경은 콘라드 왕국을 ‘그라니아 신성 왕국’으로 재명명하고, 개혁 작업에 착수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동일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악신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눈에 띄는) 역할을 한 추기경이었기에 귀족들은 그를 따랐으며, 에릭 드 예리엘을 몰아내는 데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않은 레안은 인제 와서 돌아와 제 권리를 주장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공산이 컸다.

물론 레안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 논외지만, 문제는 레리아나였다.

레리아나가 왕위를 목표로 하면서 그녀는 베르크 추기경과 부닥칠 수밖에 없게 됐는데, 추기경은 크세니아의 친할아버지다. 레안은 동생과 처조부(妻祖父)1)가 대립하기를 원치 않았다.

‘아하… 그래서 왕위에 관심이 없던 거구나. 나한테 일을 맡길 때부터. 본인은 크세니아랑 결혼할 건데, 레안 없이 오리아스가 잡히면 베르크 추기경이 권력을 잡게 되니까.’

레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레안은 콘라드 왕국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려 했던 거다. 돌아올 생각도 없었는데, 동생의 바람에 떠밀려왔을 뿐.

레안이 말했다.

“그래서 레리아나랑 타협을 봤어. 예리엘이란 성은 포기하기로. 대신 모나크 남작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알아서 해보라 했지.”

“…”

레브는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이젠 그만하고 싶다. 오리아스를 잡은 것도 개고생이었고, 이제는 그만 레아랑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고픈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별도리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의 일인데. 레브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베르크 추기경한테 말해둘게. 너한테 여기랑 인접한 영지 하나를 하사해 달라고. 그럼 동생은 정치질을 하든 군을 일으키든, 너를 거쳐야만 할 거야. 나는 저기 위, 페테르 백작령에 있을 거고.”

“…이 모나크 남작가를 너랑 내가 위아래로 둘러싸자는 거구만. 레리아나가 여기서 꼼짝도 못 하게.”

“그렇지. 너는 내 동생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훼방을 놔 주면 돼. 네가 레리아나의… 적이 되는 거야.”

이것이 레안의 부탁이었다.

엔딩 이후로도 오래오래 살아갈 동생을 위해 레브가 그녀의 호적수(好敵手)가 되어주기를. 레리아나의 삶이 급물살을 타지 않게 적으로서 지탱해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브는

“날 죽일 셈이야?”

퉁명스럽게 답했다.

“내가 무슨 수로 네 동생을 막아. 당장 무력에서는 내가 앞서겠지만, 네 동생이 정치질을 하기 시작하면 나로서는 역부족이야. 내가 아니라 레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겠지.”

“영지전을 벌여서 내가 레리아나를 생포하더라도 결국 놓아줘야 할 테고… 네 동생을 영원히 막을 순 없어. 난 언젠가는 지고 말 거야. 그 전에 암살당할 수도 있고. 너, 이건 좀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내 삶이 있어.”

“미안해. 하지만…”

레안이 슬쩍 레아를 곁눈질했다.

레아는 그와 다시 눈이 마주치자 이불을 잡아당겨 모른 체했다.

“너한텐 레아가 있잖아. 너희 좋은 걸 얻었던데? 어떻게 얻은 건지는 몰라도.”

“뭘?”

“귀속 아이템인가 뭔가 하는 거. 레아한테 붙었더라고.”

[ 축하합니다. ‘레아’에게 아이템이 귀속되었습니다. ]

[ 퀘스트 : 수호자(守護者), 3/4 – Barbatos MalHas Oriax ]

크세니아와 결혼하는 날이었다.

날씨도 좋은 길일이었는데, 메시지가 다소간의 간격을 두고 연달아 떠올랐다.

레안은 그때 알아차렸다.

레브가 잘 해주었다는 것과, 레브와 레아에게 일을 맡긴 것이 결국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레라 아이나르에 이어 레아까지 귀속 아이템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귀속 아이템? 역시! 이거지?”

레아가 어디서 주워온 나무 지팡이였다. 이 떡갈나무 지팡이는 색이 고색창연한 게,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맞는 것 같은데? 어떻게 구한 거야?”

레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몰라. 레아는 이걸 어디서 그냥 주웠다대. 그치?”

“어, 응.”

“레아가 이걸로 굉장한 힘을 부렸어. 사제도 됐고. 이게 아니었으면 오리아스를 놓쳤을지도 몰… 이런.”

“그래. 그걸 가진 레아랑 너, 둘이면 내 동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도 그렇지만, 베르크 추기경도 뒤에서 은근히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

“너랑 레아는 늘 가난하게 살았지. 귀족은커녕 호의호식해본 적도 없이 끽해야 고향 마을 단칸집에서.”

“…”

“이번엔 귀족으로 살아볼 수 있어. 오리아스를 잡은 1등 공신으로서 떵떵거리며. 레브 비자인 자작과 레아 자작 부인. 어때?”

예법을 섞어 레안이 레아에게 과장되게 인사하고, 레브는 생각했다.

알고 있었지만, 이 친구는 정말 말을 잘한다고. 왕자가 일개 평민인 레아를 영애로 떠받들어주는 게 썩 싫지만은 않았다.

저게 레안의 달콤한 언변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족. 그리고 호의호식이라…’

레브가 팔짱을 끼며 상상했다.

본인이 귀족이 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고되게 일해온 레아에게 비단옷을 입히니 상상만으로도 참 보기 좋았다.

산열매를 따느라 상처투성이인 손에 고운 장갑을 끼우고, 붉은색 긴 리본으로 그녀가 꽉꽉 졸라매기만 하는 머릿결을 풀어 장식했다.

예쁘다.

그리고 레아의 안락한 삶이 레브를 충동질했다.

“…고민 좀 해볼게.”

“좋아. 결정되면 알려줘.”

레안은 레브의 어깨를 두드려주곤 방을 나섰다. 레브를 설득하는 건 됐고, 동생을 찾아갔다.

“공주님, 레안 님께서 오셨습니다.”

방에 들어서려 하자 하젠 경이 보고했다. 그는 더 이상 레안을 왕자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왕위를 포기한 그에게 단단히 실망한 것이다.

하젠 경은 레리아나의 오른팔이 되어 붙어있었고, 집무실로 개조한 침실 바닥에는 커다란 카펫이 체스판처럼 깔려 있었다.

콘라드 왕국이 그려진 카펫이다.

레리아나는 그 체스판의 최북단, 모나크 남작령을 밟고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를 향해 활짝, 반기는 모습이 해맑다.

“뭐 하다 이제 왔어?”

그러나 번쩍이는 눈동자.

이제는 숙녀 태가 나며, 붉은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는 정복을 갖춰 입은 동생에게선 서늘한 위엄이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레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실은 여왕(Queen)을 상대할 체스 말을 마련하러 다녀왔단다.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가 너를 막아설 거야.

레리아나는 흐음~ 눈을 가늘게 모았다. 그녀는 사실 오빠가 어딜 다녀왔는지 알고 있었다.

“웬 손님이 우리보다 먼저 와있었다던데? 아는 사람이야?”

“아니. 누군지 궁금해서 말이나 좀 붙여봤지. 베르크 추기경을 도와서 에릭 형님을 몰아낸 사람들이더라.”

“그래? 나도 만나봐야겠네. 그보다 오빠, 여기 좀 봐봐. 아르네 후작이 나를 도와줄 것 같아?”

“글쎄? 에릭 형님과 반목할 때라면 분명히 도와줬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는걸.”

“그치? 그럼… 일단 편지나 한 통 보내놔야겠다. 고래잡이가 한창이겠네. 서두는 그렇게 쓰고~ 보니까 테르탄 공작가가 불만이 많겠더라구. 그쪽도 알아봐야겠어.”

레리아나가 쓱싹쓱싹 메모했다. 레안은 그런 동생을 만류하였다.

“너무 일러. 아직 모나크 남작령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네가 바라던 대로 한 바퀴 둘러봤으니까 돌아가자. 지금쯤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이 백작령에 도착해 있을 거야. 그리고, 너무 늦었어. 그만하고 자.”

“알았어. 하젠 경, 오늘도 수고했어요. 가는 길에 티안을 불러주시겠어요?”

“네. 좋은 밤 되십시오, 공주님.”

하젠 경이 물러가고, 이윽고 산티안이 시녀들을 데려왔다. 시종 역을 맡은 그는 시녀들을 시켜 동생의 옷을 갈아입히고, 레리아나에게 찡긋 윙크하며 사라졌다.

레안은 동생이 침대에 드러눕는 걸 확인하고, 곁에 앉아 잠시 그녀의 머리맡을 지켜주었다.

제 길을 걷겠노라 선언한 이후 하루가 다르게 독립된 성인이 되어가는 동생이었다. 레안은 내심 아쉽지만, 장차 펼쳐질 그녀의 삶을 축복하였다.

‘거지 남매’로서 마지막이 될 이번 생에서 부디 행복하기를.

그는 본인은 물론 레브와 레아를 갈아 넣어서라도 그리되도록 안배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좋은 꿈을 꾸려무나. 내 사랑하는 동생아.

레안은 레리아나의 동그란 이마를 쓸어주곤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달 뒤, 예상치 못한 엔딩을 맞았다.

[ 레나가 결혼했습니다! 축하합니다! ]

상대는 산티안 라우노였다.

급히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일이 둘 사이에 있었고, 레리아나는 한동안 일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크세니아 언니보다 먼저 아이를 가질 줄은 몰랐네.”

“…그러게.”

레리아나는 ‘바쁘지만 어쩔 수 없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결혼식은 페테르 백작령에서 성대하게 열렸고, 레안은 동생이 결혼하는 모습을 난생처음으로 지켜보았다.

“어머. 당신 의외네요.”

결혼식장.

곁에 앉은 크세니아가 말했다.

“전 당신이 시누이를 너무 아껴서 울어버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쩐지 기뻐 보이기도 하고… 무슨 표정인지 모르겠네요.”

레안은 고개를 끄덕하고 말았다.

레안이 크세니아의 손을 가만히 붙든 가운데 예식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레리아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신부가 되어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마냥 축하할 순 없는 결혼이었다. 신분을 지나치게 초월한 결혼이라, 비록 예리엘이라는 성을 버렸다 한들 조만간 남사스러운 소문이 횡횡할 터였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공주가 끝내 몰락하고 말았노라는.

그러나 레리아나는 개의치 않아 했고, 레안도 그까짓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예식이 막바지에 치달을수록 그는 무의식중에 발과 턱을 밀어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버티듯이.

“…한 부부의 탄생을 신께 고합니다.”

“여보?”

크세니아와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아하게 돌아보는 아내와 환하게 웃는 동생, 붉게 상기된 표정의 산티안 라우노, 주례를 보는 사제와 하객들이…

아! 삽시간에 멀어져 갔다.

[ 축하합니다! ]

[ 레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

익숙하지만 매번 힘겨운 마무리였다. 세상과 분리되듯 치솟는 시야와 아래에 남겨진 결혼식장, 사랑하는 아내와 동생, 사람들.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위를 올려다보는 나, 레안 페테르.

이제 저 녀석이 나를 대신해 살아갈 것이다. 민서의 정신과 함께 뜯어져 나온 나는 곧 사라질 테고.

레안의 상념과는 관계없이 엔딩 크레딧은 타닥타닥, 허공을 무심하게 채워나갔다.

1) 아내의 할아버지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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