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과 드래곤 (1) >
소담스럽게 가꿔진 정갈한 정원.
그 한 편의 작은 정자에 다과상을 가운데에 둔 두 여성이 마주 앉아 있었다.
“···적룡, 너야?”
그중 한 명, 긴 푸른 머리를 가지런히 틀어 올린 한 여인이 손에 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지?”
“시치미 떼지 마. 하필 지금 도올이 저기 가 있는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글쎄,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가 어찌 알까?”
“적룡.”
그 차분한 추궁에 그녀와 마주 앉아 있던 붉은 단발머리의 여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사실상 수긍이나 다름없는 반응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이가 다시 깊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 그런 거야? 알고 있잖아? 이번 일은 단순히 우리 금오도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위한 거란 걸. 그는 그걸 위한 중요한 열쇠가 될 거야.”
“그래서다. 그런 중요한 일을 증명도 되지 않은 이만 믿고 진행할 순 없지. 이건 그걸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검증이다.”
“검증이라니···. 이건 용신께서 직접 내리신 뜻이야. 너도 알고 있잖···.”
콰앙!
차분하게 이어지던 그녀의 말이 다과상이 박살 나는 소리에 끊어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
적룡은 널브러진 상의 잔해를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밀어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용신··· 그래, 용신이란 말이지.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무너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동족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도 관심 한 번 주지 않다가, 이제 와서 적선하듯 몇 마디 던져준 그 용신.”
“···그것만은 아니잖아? 용신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용의 아이’들을···.”
“하! 용의 아이라. 웃기는 표현이군. 아이가 아니라 제물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용신께선 제 아이를 잡아먹는 취미라도 있으신가? 그것참 대단하신 분이야.”
“사린!”
“그만.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난 이제 적룡이야. 넌 청룡이고.”
그 단호한 말에 푸른 머리칼의 여인, 청룡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각 일족을 대변하는 이름.
그건 오직 그 일족의 대표자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그들의 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죽어버린 지금은 그들이 물려받게 된 이름이기도 했고.
“···그래, 적룡. 어쨌든 그와 분쟁이 더 커지는 걸 좌시할 순 없어. 이미 싸움을 말릴 이들을 보냈으니까 그런 줄 알아.”
“상관없다. 괜히 소란이 길어져 봤자 좋을 건 없겠지. 뭐, 그래도 도올이라면 제법 쓸 만한 놈이니까, 녀석을 상대로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태연하게 말을 잇던 적룡의 말이 도중에 멈췄다.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감았던 눈을 뜬 청룡이 그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적룡?”
“······.”
그녀의 물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에는 왠지 모를 당황이 어려 있었다.
그에 그녀가 어딜 보고 있는지 눈치챈 청룡도 곧바로 의식을 움직여 시야를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지금쯤 한창 소란이 벌어지고 있을 섬의 초입.
그녀의 초대를 받은 방문객과 환계의 골칫거리인 도올이 있는 곳으로.
‘···뭐지?’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빼곡한 근육으로 뒤덮인 듬직한 등판이었다.
그에 순간적으로 ‘시선’의 확대 설정이 잘못되었다 판단한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조절하다가···.
문득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중에 보인 주변 풍경들은 딱 그녀가 처음 생각했던 크기 그대로였으니까.
단 한 사람.
처음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던 거대한 등판의 주인공만 제외하면.
“뭐야, 저게···.”
그때 그녀의 귓가로 적룡의 허탈한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잊은 그녀는 그 말에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그 한 사람만 커다란 건 아니었다.
그와 마주한 존재, 청룡에게도 익숙한 외형을 한 도올 또한 큼직한 체구를 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다만 그 구도는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콰아앙—!
그곳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덩치의 성인 남성이 자신의 명치께밖에 오지 않는 복슬복슬한 인영을 거침없이 쥐어패고 있는 장면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렇게 일방적인 건 아니긴 한데.’
하지만 체급 차이가 워낙 현격했던지라 그에 맞서는 도올의 저항은 그저 애처로운 몸짓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야말로 시각을 휘어잡고 압도하는 폭력 그 자체!
멍하니 그걸 바라보던 청룡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걸 말리려면 아이들을 더 보내야겠는데.”
“으음···.”
당연하지만, 이견은 없었다.
***
“크아아—! 죽여 버리겠다!”
“그만! 거기까지 하시오!”
“어어, 물러서세요! 잡아!”
“방진을 펼쳐라!”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이들로 인해 싸움은 더 격화되기 전에 진화되었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도올이 강제로 진정되는 그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할리는 순순히 뒤로 물러나며 서서히 체구를 원래대로 줄여 나갔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제야 온 게 이상할 정도지.’
이곳은 그들의 본거지고 할리는 초대받아 온 손님이다.
정상적이라면 애초에 싸움이란 게 있어선 안 될 터.
‘정말 도올의 돌발행동으로 인한 사고라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들의 상부가 암묵적으로 유도하고 용인했거나.
하지만 그 의도가 무엇이건 사실 그는 큰 불만이 없었다.
이렇게 상대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준 덕분에—.
우물우물— 꿀꺽!
할리 또한 만족스러운 ‘한 입’을 할 수 있었으니까.
‘역시 사이즈를 키우길 잘했어.’
어느새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그는 허기가 가신 배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올이 아직까지 저렇게 발광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 사이즈 차이가 워낙 컸던지라, 어깨 부분을 딱 한 입 했을 뿐인데 놈의 두꺼운 팔이 거의 뜯겨나갈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육체파 요괴다운 뛰어난 재생력 덕분에 머지않아 수복되긴 했으나, 할리의 「폭식」은 그 안에 깃든 신비마저 먹어 치우는 이능.
아마 그 회복 과정에서 적잖은 힘의 소모가 있었을 터였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거 요괴끼리 한 판 하다 보면 서로 물어뜯고 할 수도 있지. 암!’
사실 이 정도로 끝난 것만 해도 어딘가?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요괴들의 마정석이나 다름없는 내단(內丹)을 취하는 것이겠지만, 당장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이상 지금은 새로운 유전자를 수집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드린 그가 오랜만에 반응하기 시작한 「궁극의 진화 생명체」를 차분하게 관조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군. 확실히 강환계의 요괴는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타입이야. 이종족과 유사하면서 몬스터인 것 같기도 하고. 정령체 느낌도 살짝 나는 것 같은데···.’
생체력이라는 에너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말단의 세포까지 발달한 몬스터와는 달리, 중앙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 순환 통로가 두드러진 것도 눈여겨볼 만한 차이점이었다.
아마 이것이 인간의 혈도를 대신한 요괴들만의 무공 체계의 근간이겠지.
‘이거 광제심결을 더 빨리 완성할 수 있겠는데.’
그는 자신의 체내 세포가 에너지 순환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는 것을 느끼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역시 다양한 문명과 생태의 교류야말로 진화의 지름길 아니겠는가!
그렇게 만족스럽게 미소 지은 그가 주먹을 쥐락펴락하고 있을 때.
“저, 광마님? 어디 다치신 덴 없으십니까?”
한창 싸움이 일어나는 중엔 멀찍이 피해 있던 청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물론! 오히려 가볍게 땀을 뺐더니 아주 개운하고 기분이 좋군! 으하하핫!”
“후우, 그거 다행이군요.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는 할리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더 이상 저 사내와 함께 있다간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던 것이다.
“괜찮으시다면 지금 바로 청룡님께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분께서 이번 일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런 그에게 마침 상부로부터 전달된 전언은 아주 좋은 핑곗거리였다.
얼른 맡은 일을 끝내고 저 폭풍의 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는 대륙과는 동떨어진 위상에 위치한 환계.
그곳에 자리한 금오도는 다양한 요괴들이 뭉친 집단이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요괴라는 건 인간 이외의 종족을 전부 싸잡아 부르는 것에 가깝지.’
거기엔 구미호나 도깨비 등은 물론 기린이나 해태 등의 영수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요괴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용(龍)이었다.
“···꺼림칙하군.”
지금 할리의 앞에서 찡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붉은 단발머리의 여성도 그중 하나였다.
청관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장소에서 청룡에게 소란에 대한 사과를 들은 직후, 그 옆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적룡이 붉은 파충류의 눈을 빛내며 할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내면을 모두 꿰뚫어 보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너, 용살자구나.”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 서서히 선명한 적대감이 깃들었다.
거기다 왠지 모를 실망감까지.
“···적룡.”
“안다, 청룡. 그러나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나?”
“하지만 그는···.”
“그래, 무력은 인정한다만 거기까지다. 차라리 평범한 인간인 게 낫지, 애초에 용신전에 들어갈 수도 없는 존재인데 뭘 어쩌라는 거지? 이건 그냥 처음부터 불가능한 조건이지 않은가?”
“하아—.”
“어이가 없군. 혹시나 했다. 그래도 용신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구나 싶었단 말이다! 그런데 열쇠라는 자가 용을 잡아먹고 그 껍데기를 취한 괴물이라니? 설마 우릴 놀리는 건가?”
푸른 머리의 여성, 청룡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지그시 눈을 감았고 적룡은 연신 거센 분노를 토해냈다.
뭔가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 감정에 따라 주변의 기가 꿈틀거리며 불편한 공기가 장내를 휘감았다.
‘뭐야? 왜들 저래.’
물론 할리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이긴 했으나, 안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판국에 남의 사정이 어떻든 알 게 뭐란 말인가?
“킁!”
콧바람과 함께 팔짱을 낀 그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불량스럽게 목을 꺾었다.
“거참, 댁들끼리 떠드는 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하라고. 바쁜 손님 불러놓고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뭣···?”
그에 한창 분노를 토하던 적룡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봤지만, 할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내가 괜히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러니 후딱후딱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허!”
그 당당한 요구에 적룡은 물론 청룡까지 황당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대체 뭘 믿고 저리 나오나 싶어서.
그러나 싸움은 언제나 환영인 할리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그들과 시선을 마주할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이쪽이 먼저 부른 건 사실이니 며칠 정도는 체류를 허락하지. 적당히 관광이나 하다가 떠나라. 그때 선물도 챙겨주도록 하마.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런 할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적룡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엔 옆에서 낙심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린 청룡도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막상 그를 직접 마주하니 그녀도 의견이 적룡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쓰읍.”
그런 그녀들의 미묘한 반응에 인상을 찌푸린 할리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대충 들어보니 내가 드래곤을 잡아먹고 그 업(業)을 강제로 취한 게 문제가 되나 본데?’
하긴 아우테리카에서도 대주술사가 그걸 한눈에 알아봤었지.
그래도 그간은 대충 용인인 척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뭔가가 다른 듯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우테리카에선 진짜 드래곤과 마주한 적이 없었구나.’
그가 아는 유일한 드래곤인 슈리하트겐도 레어에 틀어박힌 채 마법으로만 바깥을 관측했을 뿐이었다.
아마 지금 남아있을 다른 드래곤들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터.
그보다 서로 다른 차원인데도 그런 업이 적용된다는 게 더 놀라웠다.
애초에 드래곤과 용은 서로 다른 종족이 아니었던가?
‘아니지. 인간도 그렇고 서로 유사한 종족들이 차원마다 얼마나 많은데.’
이놈의 신들이 피조물을 만들 때 서로 소스라도 공유하는지, 종종 몰개성한 요소가 튀어나오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드래곤과 용 사이에 뭔가 연관성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다 엎어버릴까?’
이쯤 되니 슬슬 모든 게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뭘 바라는지는 몰라도 이쪽은 그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을 뿐이지 않던가?
저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위해 지금까지 순순히 요청에 따르고 있을 뿐이지, 무력 진압을 강행한다면 이쪽이 원하는 걸 얻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래. 강환계 수복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눈치만 봐야 해? 일단 저지른 뒤에···.’
그렇게 사고가 극단적으로 흐르며 머리 한 편이 스멀스멀 폭력에 물들어 갈 무렵.
문득.
다른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결국 할리가 용을 잡아먹은 게 문제라는 거지?’
저들은 이쪽에 뭔가 바라는 게 있다.
그런데 할리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럼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아니, 그걸 넘어 저들의 취향에 더없이 부합하는 인재가 대신 나서 준다면?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허?”
적룡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넋이 나간 건 청룡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
팔짱을 낀 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할리의 앞에서.
“에헤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쑥스러운 듯 몸을 비튼 금발 꼬맹이가 조막만 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무해한 웃음을 흘렸다.
““···황룡?””
아우테리카의 어린 골드 드래곤 호루스가 강환계에 조기 유학을 온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