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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4

34화 떠나는 자들 (2)

34화 떠나는 자들 (2)

“데미안.”

세실이 나를 불렀다. 우리는 뒤뜰에서의 이야기를 마친 뒤 2층에 올라와 있었다.

쿠는 할 일이 있다며 돌아갔다.

“정말. 가?”

어쩌다 보니 황소머리 여관에서처럼 나는 세실과 작은 방을 쓰고, 테오 일행은 조금 더 큰 방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금은 다섯 명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있었다. 영지전에 참여하겠다는 나의 발언 때문이었다.

“응. 갈 거야.”

“어째서?”

세실은 표정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테오, 족제비, 덩치도 비슷한 감정을 담은 얼굴로 나를 봤다.

하긴, 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석 광산에서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노동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광산을 탈출했고, 그 과정에서 숱한 위험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이제야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은 것이다.

‘벨레트 단장이 너를 아주 좋게 본 것 같더구나. 그래서 네 친구들도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게다가 쿠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원한다면 학교를 다니거나 여러 기술을 배울 수도 있을 거라고 한다.

나는 그것이 의아했다.

물론 벨레트는 페르디나에서 대단한 권력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꺼리는 인물로 알고 있다. 그런 그가 도박장에서 잠깐 스쳐 간 것에 불과한 내게 이런 도움을 준다고?

그것만이 아니다. 벨레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세르지오와 관련된 일을 처리해 줬다. 덕분에 우리는 상당량의 자본금을 손에 쥔 채, 당장 내일부터 랑베르 잡화점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데미안. 우리와 함께 있자. 용병이 되는 것은 조금 더 몸이 커진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테오의 말에 족제비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는 아까부터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강해져야 해.”

내 말에 세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미래에 닥칠 카인의 패악질을 막아야 하니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소중한. 것?”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은 있기 마련이잖아.”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되는 대로 떠들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너희들이 가장 소중해. 어렵게 손에 넣은 우리의 보금자리도. 그러나 오를리안 왕국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어. 자치국처럼 운영되는 페르디나라고 해서 전쟁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어찌 됐든 페르디나는 오를리안의 영토에 속해 있으니까. 만약 브리앙스 백작군이 영지전에서 패배한다면, 대대적으로 브리앙스의 손을 들어준 페르디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로슈포르 후작은 오래전부터 브리앙스 백작령을 눈독 들였고, 또 그의 욕심은 상당하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나는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싸울 거야. 내게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나는 세실, 테오, 족제비, 덩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영지전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보다 장기적인 목적을 위해서지만.

“크흑······!”

나의 ‘되는 대로 연설’에 테오가 울컥한 모양이다.

안구가 붉어진 테오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데미안. 함께 가자.”

“테, 테오! 데미안을 못 가게 해야지 같이 가면 어쩌자는 거야!”

화들짝 놀란 족제비가 테오를 말렸지만 테오는 요지부동이었다.

“우리 모두는 데미안에게 목숨을 빚졌어. 다들 잊은 거야? 숲에서 봤던 그 시커먼 괴물들을.”

봤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테오가 차원의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긴, 1회차의 테오는 차원의 그림자에게 찢겨 죽기도 했었다.

“그때 데미안이 나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거야.”

테오의 말에 덩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족제비가 테오와 덩치를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다, 다들 왜 이러는데······! 전쟁에 나가면 우리는 죽을 거야······! 이번에는 진짜 죽을 거라고! 나, 나는 싫어. 절대로 전쟁터 같은 데는 안 갈 거야!”

“조. 너는 여기 남아. 누군가는 랑베르 잡화점을 지켜야 하니까.”

“테오······!”

울보 족제비야. 내가 도와주마.

“테오. 너희는 참전해서는 안 돼.”

“뭐라고?”

테오는 조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계획을 조금만 공개하기로 했다.

“나는 세력을 만들 거야. 훗날 어떻게 변모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우리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세력을.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해. 하나는 ‘무력’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이야.”

그 말대로, 나는 테오 일행을 단순히 전쟁이라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참전을 막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필요하다.

소설 초반의 카인도 용병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었다.

“테오, 너도 방금 말했잖아. 누군가는 랑베르 잡화점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그저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돼. 전쟁이 벌어지면 많은 돈과 물자가 움직일 거야. 우리는 이번 영지전을 기회 삼아 사업을 키워야 해. 다행히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자본금이 있어. 그래. 우리들만의 거대한 상단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자. 성공한다면 우리는 ‘자본’이라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고, 그 힘으로 ‘무력’도 키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커진 무력은 또 다른 자본을 불러올 테고, 결국 우리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거야. 그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미래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거야.”

테오 일행이 쩌억 입을 벌리며 나를 봤다.

나도 모르게 다소 격정적으로 ‘되는 대로 연설’을 한 모양이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세실이었다.

“나. 참전.”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세실이 영지전에 참여하면 카인에게 뺏길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커진다.

조금 전 쿠에게 몰래 확인한 바로, 검은 갈기 용병단과 쿠는 벨레트가 지휘하는 ‘황금의 검 용병단’에 소속되어 움직인다고 한다. 즉, 나와 카인은 같은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어떤 전쟁이든 대개 살수들이 움직인다. 만약 암영이 이번 영지전에서 암약한다면 세실이 발각될 소지가 있다.

“나. 데미안. 지켜.”

어떻게 해야 할까.

세실은 고집이 센 편이다.

“세실. 너에게 딱 맞는 임무가 있어.”

“임무?”

나는 호다닥 1층으로 내려가 무언가를 찾아낸 뒤 2층으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세실의 몸에 둘렀다.

종업원의 앞치마였다.

“세실. 너는 랑베르 잡화점의 얼굴이야.”

“잡화점. 얼굴······?”

“응. 네가 종업원으로 일하면 분명 엄청나게 손님이 몰릴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그러다 보면 우리는 금세 우리만의 상단을 만들 수 있을 거야.”

“······.”

나는 세실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하며, 테오에게 도와달라고 눈짓했다.

그러자 테오, 족제비, 덩치가 어색한 표정과 말투로 내 편을 들어줬고, 그날 세실은 잠이 들 때까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

이튿날부터 우리는 잡화점 일을 시작했다.

테오와 덩치를 설득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두 사람은 영지전에 참여하는 대신 랑베르 잡화점을 더욱 번성시키겠다는 희망찬 꿈을 품었다. 그 결정에 족제비가 환호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데, 데미안. 너도 그냥 우리와 함께 있으면 안 돼?”

족제비가 쭈뼛거리며 내게 물었다. 족제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닥쳐. 족제비.”

잡화점의 일에 대해서는 덩치가 잘 알고 있었다. 테오와 덩치는 주로 거래처 관리와 장부 정리 및 힘쓰는 일을 했고, 족제비는 청소와 요리를 비롯한 집안일을 도맡았다. 세실은 뚱한 얼굴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모두 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들이야. 배합식도 적어 놓았으니까, 조제해서 팔면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이 시점에는 없지만 향후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유명해질 약물 몇 개의 레시피를 동료들에게 알려줬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나를 봤다.

“돈 많이 벌어놔. 테오.”

“걱정 마라! 데미안!”

그런데 왠지 쿠가 나보다 약초학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전력질주(Lv.2)를 획득합니다.]

[고통 감내(Lv.2)를 획득합니다.]

달리기 훈련은 계속됐다. 요즘 여러 일로 바쁜 쿠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잡화점 문을 열기 전의 이른 새벽에 다 함께 들판을 달렸다. 종종 약초도 구할 수 있었기에 일석이조였다.

[검술(Lv.1)을 획득합니다.]

쿠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검술을 가르쳤다. 손님이 없을 때면 최소한의 인원(앞치마를 두른 세실)만 잡화점에 남기고 다 함께 뒤뜰에서 훈련했다.

하루는 족제비가 고블린의 활을 들고 나타났는데, 그것을 본 쿠가 무기점에서 괜찮은 활을 사다 줬다. 족제비는 으아앙! 울며 쿠를 껴안았고, 쿠는 껄껄 웃으며 족제비에게 궁술을 가르쳤다.

놀라운 점은 족제비에게 활쏘기 재능이 있었다는 거다.

◎ 특성: [의리], [충성심], [울보], [의외의 용기], [활의 재능]

쿠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족제비는 ‘활의 재능’ 특성을 개화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족제비는 화살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잎사귀 무늬를 그려 넣었다.

그때쯤 나는 진검을 손에 들었다. 무려 벨레트가 직접 잡화점을 찾아와 우리 모두에게 진검을 선물한 것이다.

[검술(Lv.2)을 획득합니다.]

그 덕분인지 나의 검술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물론 쿠에게는 여전히 서투르다며 혼이 나곤 했지만.

***

세실은 은근히 앞치마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데미안이 괘씸했기 때문이다.

쿠는 틈틈이 잡화점을 찾아와 동료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싫다는 손님을 억지로 끌고 오기도 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잡화점에 들어온 손님들은 세실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양손 가득 물건을 사가고는 했다.

그 무렵 세실에게는 비밀이 생겼다. 잡화점을 운영한 지 나흘째 되는 날, 한밤중에 쿠가 2층 창문을 열고 세실을 찾아온 것이다.

“가자. 예쁜 꼬마.”

잠든 데미안을 둔 채 세실은 쿠의 손에 이끌려 들판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쿠는 세실에게 검술을 가르쳤다. 그때 세실은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의 생각보다, 쿠는 훨씬 더 대단한 실력자였다.

세실은 왜 쿠가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실은 이 시간이 즐거웠다. 요즘 동료들 사이에서 조금은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쿠와 검을 부딪치다 보면 그런 생각은 금세 휘발되어 날아갔다.

다른 동료들을 가르칠 때와는 달리 쿠는 세실에게 실전적인 검술을 가르쳤다. 세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쿠는 내가 가진 실력을 정확하게 가늠하고 있어. 하지만 어떻게.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단검보다는 검을 쓰도록 해라. 불필요한 이목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세실은 조금 무서워졌다. 쿠는 마치 세실이 처한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럴 리 없어. 그저 우연일 테지.

“다녀올게.”

창백한 달이 떠오른 밤, 데미안은 랑베르 잡화점을 떠났다. 쿠와 함께였다. 테오와 덩치는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의외로 족제비는 울지 않았다.

테오 일행이 모두 잠들었을 무렵 세실은 짐을 꾸렸다. 처음부터 세실은 잡화점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데미안을 따라갈 것이다. 물론 앞치마를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침대 위에 간단한 메모를 남긴 세실의 귀에 인기척이 포착됐다. 세실은 조심스레 창을 열었다. 그리고 옆방의 창 아래에서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흑······! 흐흑······!”

등에 활과 화살통을 둘러멘 족제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밧줄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족제비는 소매로 눈물을 훔친 뒤 2층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세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세실은 창을 넘어 고양이처럼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이어 족제비에게 다가가 손날로 이마를 때렸다.

“바보. 족제비.”

족제비는 숨을 죽이며 울었다. 그러나 애써 양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퉁퉁 부은 눈으로 세실을 바라봤다.

“가자 세실. 데미안을 도우러.”

그날 세실은 처음으로 족제비가 멋진 녀석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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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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