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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49

347. 소꿉 Ep – 데파레

“저희 아이셀 왕국이 좀 그렇지요. 그밖에 또 신기한 건 없으셨나요?”

엘리카 공주가 호호 웃으며 긍정했다. 만나자마자 결혼을 앞두게 된 남녀는 왕을 알현한 뒤 자리를 옮겨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라도 알아가기 위함이었다.

괜찮은 남자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이 과연 나와 내 동생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엘리카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은 가슴에 묻고, 가식적인 미소로 왕자를 대했다. 그 사이 에릭은 “음~” 정중하게 말했다.

“실례되는 말이 아닐까 싶어서 좀 조심스럽습니다만, 한 왕궁에 여러 개의 가문이 들어서 있는 게 제겐 생소하고, 재밌게 느껴지네요.”

“…생소하신 건 알겠는데, 재밌는 건 어째서죠?”

“만자문 황실의 계보를 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현실적으로는 이사도라 왕가와 키르기스 공작가만이 번갈아 가며 왕위를 차지하고 있지만요.”

흠. ‘누구나’라.

일단은 야망이 있어 보이긴 한데… 능력은 될랑가 모르겠네.

엘리카는 에릭 왕자의 말에 담긴 악센트를 짚어내었다. 순간 조금은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왕족의 결혼이란 게 본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원하는 걸 서로가 먹고 먹히는, 그런 관계.

사랑?

그딴 건 기대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엘리카는 일견 멍청해 보이는 미소를 돌려주었다.

“맞아요. 오신지 얼마 안 됐는데, 저희 왕국에 대해 많이 알아내셨네요. 정말 현명하세요.”

그러면서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구슬려서 이용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왕자의 표정이 묘했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실망한 것 같기도 한 게 어쩐지…

‘뻔한 아부는 싫어하나 보네.’

고상한 척하길 좋아하는 모양이다. 뭐, 맞춰 줘야지. 엘리카는 서둘러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그러면 왕자님께서는…”

“엘리카 공주.”

에릭이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우리는 결혼에 앞서 진솔하게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합니다.”

“…어떤 이야기요?”

“남 앞에서는 하지 못할 이야기요. 레브 경. 미안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키게. 공주님도 기사를 물리시죠.”

더벅머리를 한, 아까부터 멍한 표정의 기사는 두말없이 밖을 향했다.

엘리카는 제 호위기사를 거리낌 없이 물린 왕자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의 눈동자는 서슴없이 맞부딪쳐 오고 있었다.

“어서요.”

마치 진심이라도 담긴 것처럼.

* * *

어지럽다.

밖으로 나온 레브는 휘몰아치는 정보를 잠재우며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와 길버트 포르테, 엘리카와 에릭 드 예리엘.

여기서 내가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뭘 하라는 걸까? 골똘히 생각하던 레브는 후! 고개를 흔들었다.

비비안 왕자를 따라 출정하기까진 앞으로 일주일가량이 남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잘 생각해 보자.

여차하면 레안한테 통신을 걸어서 물어봐도 되고. 에릭한테서 교회의 통신 권한을 빌려야 하겠지만.

정신없이 생각하던 레브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색 목재가 가득하고, 타오르는 화염 문양이 곳곳에 새겨진 여기는…

어디지?

알현을 마치고 에릭 왕자를 따라 마차를 탄 것까진 기억이 났다.

궁전 아래의 랑하랑 가도를 따라 한참 달렸던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던 레브는 가까스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차렸다.

여기는 오프론티스 왕궁의 남동쪽으로, 키르기스 공작가가 차지한 구획이었다.

왕궁(王宮)은 물론 왕이 거처하는 궁전이란 뜻이다. 그러나 자칭 황족이 즐비한 이 아이셀 왕국에서는 왕궁을 오롯이 왕 혼자 차지할 수가 없었다.

너도나도 권리를 주장하는 통에 왕궁은 끝없이 증축되었고, 코르니우스의 황금 문서로 그 정통성이 보장된 백여 개의 황가(皇家)가 하나의 왕궁에 난립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공중 왕성 오프론티스다. 왕궁에 짓눌린 도시 전체가 평민이 거주하는 ‘낭하랑’이 되고, 황족의 탈을 쓴 귀족들은 그 위에 군림하였다. 레브는 어딜 가나 있는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물끄럼.

난간 아래로 궁핍한 아이들이 보였다. 붉은 자수목(刺繡木) 난간이 부끄러울 지경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아래위의 신분, 경제적 격차는 엄청났다.

아이들은 저들이 결코 오를 수 없는 이곳을 선망이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척 보기에도 평민 같아 보이는 레브가 위에 있는 게 신기한지 눈길이 떠나질 않는다.

“…안녕.”

가만히 있기도 뭐했던 레브는 소심하게 손바닥을 펼쳐 흔들었다.

꺄! 아이들이 웃었다.

“이름이 뭐야?”

“저는 코니구요 얘는-”

“저는 데리예요! 아저씨! 아저씨는 거기 있어도 괜찮아요?”

“어허. 아저씨라니. 장가도 안 간 총각한테. 나이도 별 차이 안…”

“꺄악! 총각이래.”

구르는 낙엽에도 웃을 나이라 빵 터진 아이들은 저들끼리 키득거렸다. 아저씨 아조씨 놀림받았지만, 순진한 동심이 밉지가 않다. 레브는 제 동심은 언제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먹을 거라도 좀 가져다줄까…

레브가 시녀를 불러 간식거리를 얻어내려 할 때였다.

“앗!”

“코니! 얘들아! 들어와!”

회색 구름이 번졌다. 아이들이 레브와 잡담하는 걸 지켜보던 부모의 부름이 다급해지고, 마법사가 보란 듯이 등장했다.

또각또각.

복도를 걸어오는 실루엣이 길다. 이윽고 레브는 엄청난 장신의 여성 마법사를 마주하였다.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 경. 오셨소이까.”

경?

레브와 함께 밖에 나와 있던 공주의 호위기사가 마법사를 반겼다. 레브는 순간 마법사와 어울리지 않는 칭호에 놀랐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경(卿)이란 보통은 기사에게만 붙는 칭호다. 왕족 또는 귀족 가문을 수호하는 이를 존중해 높여 부르는 것인데, 아이셀 왕국에서는 마법사가 특정 가문에 ‘입양’돼서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 경.

그러니까 이 여자는 키르기스 공작가에 (아마도) 입양된 마법사이자 공작가를 수호하는 자이며, 코르넬 마탑의 ‘리디아’ 파벌 출신인 거다.

공작가 출신의 귀족이 우연히 마법사로 태어나서 키르기스라는 성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법사가 워낙 희귀한지라 그런 경우는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오른 왕국의 소아렐 데메트리 오거튼 백작과 아이셀 왕국의 오스카 드 이사도라 왕자가 마법사인 것이 천운의 확률을 뚫은 유일한 사례다.

한데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레브는 앞에 선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키가 엄청나게 크고(그래도 레이만큼은 못 된다), 레이스가 요란한 옷을 입었으며,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해서 푸르스름한 혈관이 도드라졌다. 회색. 그래, 회색이다.

부채를 든 그녀는 레브 쪽으론 곁눈질도 안 하며 말했다.

“공주님을 뵈러 왔네. 왕자님도.”

“음… 지금은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군요. 공주님께서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셔서.”

“난 바쁘네. 들어가겠네.”

“?”

레브의 표정이 벙쪘다.

누구 맘대로? 방금 호위기사가 한 말을 못 들었나?

공주가 기사더러 나가 있으라고 했다. 안에는 에릭 드 예리엘, 콘라드 왕국의 왕자도 있다. 어찌 감히 마법사 따위가. 하지만 레브는 곧이어 더 놀라고 말았다.

“그럼 저쪽에도 물어보시죠.”

“???”

“네가 에릭 왕자의 호위기사인가? 나, 용무가 있어 들어가겠네.”

공주의 호위기사는 이미 허락한 모양이었다. 레브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서부터 뭐라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군. 순서를 지키쇼. 댁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왕자님께 허락을 구하는 게 먼저고, 허락을 못 받으면 못 들어가오.”

“…”

공주의 호위기사는 헉, 놀란 표정이고 마법사는 레브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픽 코웃음 치곤 고개를 장난스럽게 굽혔다.

“그럼 허락을 구해 주시죠, 기사 나리.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가 왕자님을 뵙고자 한다고요. 어차피 허락하시겠지만.”

“…기다리쇼.”

레브는 한 마디를 지지 않는 마법사를 못마땅하게 흘겨보곤 문을 두드려 양해를 구했다. 마법사는 앞에 세워 놓고 살짝 들어가 상황을 전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라는 마법사가 알현을 청했사온데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들어오라 하셔요. 왕자님, 허락해주세요.”

레브는 내심 에릭 왕자가 거절해주길 바랐다. 한데 공주가 눈가를 훔치며 끼어들었다.

뭐지? 에릭이 돌아보며 말했다.

“들라 하세요.”

“…마법삽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러면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아니요. 레브 경은 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주세요. 안젤리카 경과 담판을 지을 일이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레브는 문고리를 잡으며 뒤돌아섰다. 에릭이 공주에게 손수건을 꺼내주는 걸 눈여겨보며 문을 열었는데, 악! 깜짝이야.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가 문에 바짝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허락이 떨어진 걸 확신하는지 레브를 밀치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레브는 속으로 ‘씨발’ 욕지거리하며 투덜거렸다.

“저 사람은 뭔데 저렇게 건방집니까? 고작 마법사 따위가.”

“고작이라기엔 좀 대단하지. 당신은 타국인이라 모르겠지만, 저자는 우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요. 키르기스 공작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사람이기도 하고.”

“전권이요?”

“적어도 수도에서는.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 게, 안젤리카 경은 대륙 유일의 대마법사거든.”

……아!

그 순간 레브는 외마디 소리쳤다.

저 시건방진 마법사의 대단함을 알게 되어서는 아니고, 퍼뜩 기억난 게 있기 때문이었다.

안젤리카 리디아 키르기스. 대마법사.

내가 여기서 뭘 하고 떠나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원래는 레안이 와서 해야 했을 일이지만, 우리 사이에 뭘 새삼스럽게.

내가 하는 일이 곧 레안이 하는 일이고, 레안이 한 일이 곧 내가 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하하하하!

레브는 징그럽게 웃으며 업무를 마쳤다. 에릭 왕자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그를 호위하며 돌아왔는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레아가 호다닥 달려들었다.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레브! 내가 엄청난 걸 알아냈어! 귀 대봐.”

“아야! 뭐, 뭔데 이래?”

“그게… 코르니우스의 황금 문서에 주인이 있었어! 추기경한테 들은 거라 확실해. 이이나 이사도라 공주야. 그녀가 아카이아 제국 황실의 정통 계승권자야!”

“뭐? …역시! 그렇다면…”

빛바랜 낙엽 색을 띤 눈동자.

보기 드문 안경을 끼고도 시력이 지독하게 나쁜 그녀는 역시나 눈에 ‘데파레’를 넣은 것이었다.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를 지우기 위해서.

레브는 {뒷골목의 규칙} 정보와 제 눈에서 타오르듯 느껴지는 고통을 되새김질했다. 동생을 찾으려 더듬더듬, 온 대륙을 헤매던 레안의 세 번째 기억까지도.

역시 여기는 내가 아닌 거지 남매가 방문해야 했던 곳이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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