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36

36화 전쟁 속의 전쟁 (2)

36화 전쟁 속의 전쟁 (2)

발아래로는 모래와 흙, 그리고 피가 섞인 땅이 뻗어 있었다.

멍한 정신 속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를 가르는 검의 울림.

갑옷이 부딪히며 내는 금속성 소음.

인간의 비명과 절규.

“피해!”

누군가가 내 머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밀쳤다.

그 위로 군마를 탄 적병의 검이 지나갔다.

“일어나 금발! 움직여!”

내리치는 햇빛은 기사들의 갑옷과 무기를 번쩍거리게 했다. 그러나 그 빛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는 더욱 어둡고 참담했다.

용병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판단해 움직였다. 기사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그림자를 그렸고, 그 그림자는 연이어 또 다른 죽음을 불러왔다.

“비, 빌어먹을 기사 새끼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의 모두 붉은색이었다. 붉은 피, 붉은 불길, 붉은 갑옷과 무기. 그 붉은색이 내 눈을 찌르며 파고들었다. 전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그 붉은색과 합쳐져 나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렇게 멍하니 서 있던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기병대의 창에 타격당했다. 검으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달리는 군마의 힘이 더해진 공격은 나를 뒤로 날아가게 했고, 바위에 머리가 부딪친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후우우······.”

전장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 속에는 죽음의 냄새와 악의,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이 후각을 통해 내 머리를 깨웠다.

“으아아아! 염병할 놈들! 덤벼!”

저만치에서 악에 받쳐 검을 휘두르는 자는 며칠 전 나와 검을 맞댔던 도미닉이었다. 나는 도미닉이 방금 적의 칼날로부터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전쟁을 하러 가는 거다. 오늘 죽이니 마니 하는 사이가 내일은 서로의 목숨을 구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나는 도미닉의 등 뒤를 기습하는 적병을 막아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페르디나를 떠나고 며칠이 지났더라.

내 검이 적의 얼굴을 베었다. 그의 뺨에서 피가 솟구쳤고,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 결과로 상대는 옆구리에서 내장을 쏟으며 쓰러졌다.

“자, 잘했다! 금발!”

도미닉이 히죽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주 웃었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쿠의 말은 사실이었다.

.

.

.

“크하하! 이 금발 꼬맹이가 나를 구해주더라니까? 요 녀석이 아니었으면 오늘 아주 그냥 황천길 갔을 거라고! 크하하하하!”

달이 밝은 밤, 천막 앞에서 도미닉이 내 목에 팔을 두르며 외쳤다. 나는 질겅질겅 육포를 씹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경험한 전쟁은 생각보다 더욱 참혹했다. 나는 지난 며칠간 수많은 생명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그라드는 것을 봤다. 그중 하나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살아남았군. 데미안.”

카인이 내 옆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이 녀석이 자꾸 나를 따라다닌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무섭단 말이다.

“그건 그렇고, 네가 만났다던 그 용병은 가르침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군.”

비검(Lv.1) 스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설에서 카인은 15세 때 비검의 오의를 깨닫는다. 물론 지금은 이미 터득한 상태지만.

“오. 카인! 하하하하!”

도미닉이 카인을 알은체하며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새끼니 뭐니 하며 카인을 무시하던 그였지만, 전장에서 싸우는 카인을 보고서는 태세를 전환했다.

강철손 모건이 저만치에서 불만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봤다. 내 생각에 도미닉이 내게 시비를 걸었던 이유는 모건의 압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랬던 도미닉이 우리와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으니, 모건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법도 하겠지.

도미닉이 마음을 바꾼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카인 때문이다. 평소 모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용병들은 서서히 카인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하하하! 카인 요 녀석! 오스카 단장이 아주 칭찬이 자자하더군!”

도미닉의 말에 몇몇 용병이 맞장구를 쳤다. 카인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수통을 들어 올렸고, 다른 용병들도 수통을 올리며 건배를 외쳤다.

***

밤공기가 제법 차갑군.

지휘관의 막사에 들어선 쿠는 의자에 앉았다. 기둥 곳곳에는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거뭇한 연기를 피워올리며 흔들흔들 주위를 밝혔다.

테이블에는 지도가 올려져 있었다. 그 옆에 석상처럼 버티고 선 벨레트의 표정은 진지했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중부 전선에 피에르 랑케스터가 나타났네.”

천막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피에르 랑케스터.

일명 ‘붉은 장미의 피에르’.

로슈포르 후작령의 소드마스터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제 브리앙스 백작령에는 소드마스터가 없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벨레트.”

“중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네. 황금의 검 용병단을 보내달라는군. 지휘관을 포함해서.”

오스카가 끼어들었다.

“1번대 전원이 빠져나간다는 거요? 그러면 남부에 문제가 생길 텐데.”

“이쪽은 이미 승기가 기울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네. 뭐, 사실이기도 하지. 자네들의 활약 덕분에 적들은 물러나고 있으니까.

“섣부른 속단이오 벨레트 단장. 오비니 백작령에서 ‘붉은 폭풍 용병단’을 고용한 것을 잊었소? 그들이 로슈포르와 협력해 우리를 협공한다면 1번대 없이는 버틸 수 없을 거요.”

벨레트는 침음을 삼켰다. 오스카의 말은 조리에 맞았다. 그렇다고 중부 전선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다. 소드마스터의 존재는 이번 영지전의 승패를 좌우할 가장 큰 변수니까.

게다가 벨레트는 아직 해야 할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군. 벨레트.”

그런 벨레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쿠가 말했다.

벨레트의 눈이 쿠를 바라봤다.

“쿠. 자네도 함께 가주었으면 하네.”

그 말에 오스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쿠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급조한 팀이라도 나는 3번대장이네. 책임져야 하는 이들을 두고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소드마스터를 막지 못하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걸세. 아니, 브리앙스 백작군의 패배로 막을 내리겠지. 우리에게 소드 엑스퍼트가 한 명이라도 더 남아 있을 때 소드마스터를 협공해야 하네. 앙리 몽포르 경도 중부 전선으로 이동 중이라 하더군.”

쿠는 얼마 전 앙리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데미안 때문에 변태성욕자가 될 뻔했던 그날, 앙리는 이렇게 속삭였었다.

‘도움이 필요해질 것 같습니다.’

쿠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이전 같으면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쿠는 데미안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데려갈 수도 없다. 피에르 랑케스터가 있는 곳이 바로 로슈포르의 최정예 병력이 집결한 장소다. 데미안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부탁하네. 쿠.”

쿠는 무거운 마음으로 막사를 나왔다.

3번대는 오스카의 2번대에 흡수시키기로 했다.

오스카가 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금발 꼬맹이는 자신이 잘 챙길 테니, 염려 말라고.

***

1번대와 쿠가 중부 전선으로 떠나고 며칠이 흘렀다.

이제는 대(隊)의 구분 없이 ‘검은 갈기 용병단’으로 통합된 2번대와 3번대는 큰 어려움 없이 적군을 밀어붙였다.

사실 벨레트가 이끈 ‘황금의 검 용병단’이 거의 다 이겨놓은 판에, 우리는 숟가락만 얹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미니맵(Lv.4)이 5레벨로 진화합니다.]

미니맵이 5레벨로 업그레이드되며 상당히 좋아졌다. 이제는 우호적, 중립적, 적대적 대상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에 해당하는 모든 표식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뭐, 뭐야 금발! 저쪽에서 적이 오는 걸 어떻게 알았냐? 눈이 하늘 위에 달리기라도 한 거냐!”

“그 말이 딱이로군! 하늘에 눈이 달리지 않은 이상 저럴 수는 없지! 크하하하하!”

“하늘눈의 금발!”

덕분에 나는 적의 습격으로부터 몇 번인가 아군을 구했다. 자연스레 부대 내에서 나의 입지도 올라갔다.

[자연 감응(Lv.1)이 2레벨로 진화합니다.]

주로 숲에서 야영했기 때문일까, 자연 감응 적성도 업그레이드됐다. 숲의 어둠을 밝히는 능력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원하는 범위를 망원경처럼 당겨서 볼 수 있게 되었다.

[Lv.29]

레벨은 두 단계가 뛰어 29가 됐다. 하지만 이후로 많은 적을 베었음에도 레벨은 더 이상 상승하지 않았다.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는 있다. 30레벨부터는 ‘중급 소드유저’. 병사로 치면 산전수전 다 겪은 상급 병사에 해당하고, 용병으로 보자면 소규모 용병단을 이끌 수 있는 레벨이니까.

‘그런데 카인은 뭐냐고.’

카인은 진즉 29레벨의 벽을 깨고 32레벨에 도달했다.

나와의 격차는 3레벨로 좁혀졌지만, 실질적인 실력 차는 더 벌어졌을 거다. 빌어먹을 재능 넘치는 주인공 같으니.

“단장! 카인 녀석이 설치는 꼴을 언제까지 두고 볼 거요!”

그래서인지 모건은 틈만 나면 오스카와 다퉜다.

오스카는 그런 모건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천막 앞에 앉아 술을 들이켜며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또 뭐가 문제인데.”

“보고도 모르겠소? 저 어린놈이 우리 용병단을 분열시키고 있지 않소!”

모건의 목소리가 커지자 오스카가 부하들에게 휘휘 손을 저었다. 오스카의 뜻을 알아들은 용병들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자리를 떠날 듯 뒤로 빠지다가 바위 뒤에 숨었다. 쿠가 없는 이상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부대의 속사정쯤은 알아두는 편이 좋겠지.

“자, 말해 봐. 모건.”

“오스카. 검은 갈기 용병단의 부단장이 누구지?”

“어디서 똥물이라도 처먹었냐? 모건, 네놈이잖아.”

부하들이 사라지자 둘의 말투가 변했다. 아무래도 저들은 단순한 단장과 부단장 사이가 아닌 듯하다.

모건이 울화가 치민다는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들겼다.

“다른 놈들이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니까? 입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새끼를 나보다 더 따르고 있다고!”

“그 애새끼는 카인을 말하는 거고?”

“알면서 뭘 묻는데!”

오스카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모건. 정말 모르겠냐.”

“뭘!”

“카인은 늑대 새끼다. 태생이 포식자인 놈이라고. 나는 한눈에 그걸 알아봤는데,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냐.”

“······!”

“사실 나도 고민했었다. 녀석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잘 키우면 훌륭한 사냥개로 자라겠지만, 잘못되면 우리 모두를 물어뜯는 미친개로 돌변할 것 같았거든.”

의외로 오스카는 카인을 아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단에 받아들인 거지?

“그런데 왜!”

“우리와 같았으니까.”

오스카가 모건을 바라봤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카인을 처음 봤을 때, 녀석은 그날의 우리처럼 악에 받친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벌컥벌컥 술을 들이켠 오스카가 턱 아래로 흐르는 액체를 닦았다.

“우리는 그날 그렇게 구원받았었지. 나는 그때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카인이었던 거고.”

“······.”

“누가 뭐래도 검은 갈기의 부단장은 모건, 너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그 빌어먹을 마을에서 도망쳐 함께 일궈낸 ‘우리의 단’이잖아.”

오스카가 모건의 등을 두드렸다.

“카인에게는 내가 한마디 해 두지. 그러니까 너도 부하들에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주먹을 부르르 움켜쥔 모건이 말없이 돌아갔다.

홀로 술을 들이켜며 밤하늘을 바라보던 오스카가 돌연 말했다.

“거기 금발.”

······눈치채고 있었나.

나는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스카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표정을 연기하며 오스카에게 다가갔다.

“쿠가 너를 많이 아끼더군.”

“······.”

“그래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다. 다음은 없어.”

“네. 단장.”

오스카가 피식 웃었다.

“카인과는 제법 친분이 있다지?”

“뭐, 조금은요.”

“카인이 네게 관심이 많아 보이더군.”

끔찍한 소리하지 마라.

“검은 갈기에 들어올 생각 있나?”

“이미 함께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 정식으로 말이다.”

“이유가 뭐죠?”

“왠지 너라면 카인이 미친개로 돌변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있겠냐.

“카인이 유독 너를 볼 때만은 그 나이에 맞는 얼굴을 하더군.”

그거 다 연기다.

“검은 쿠에게 배웠나?”

“네.”

오스카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너는 ‘쿠’라는 사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