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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62

손을 잡고 (5)

좌탈입망은 무슨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앉아서 입적에 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사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으며, 자유자재로 유체 이탈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의 단어를 의미했다.

어전 일 보의 ‘일격’은 그 자체로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었기에, 그것을 유체 이탈이라고 본다면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에 질문하였다.

“어째서 이름을 지어 놓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나 혼자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면 무엇하겠느냐. 벗을 베어 내며 도달한 경지다. 뜻은 통할지언정 단순히 편히 앉아서 입적에 들었다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지.”

“그렇습니까….”

여전히 청문령에 대한 죄책감에, 경지명을 붙여 놓고도 제대로 부르지 않는 것인 듯했다.

“뭐 어쨌든, 그 외에 본 것은 없느냐?”

“…봤습니다.”

김영훈이 춤의 형태로 보여 준 것.

그것은 다음 경지에 대한 단서였다.

그리고 나도 둔재일지언정, 지금까지 검을 쥐고 있던 시간을 단순히 헛으로 먹은 건 아니었기에 그 단서 역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좌탈입망의 그 너머.

어전 이 보라고도 부르는 곳에 다다르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능성을 끌어내야 한다.

김영훈이 자신의 마검과 요도들에 혈관을 깔아서 잠재력을 격발시켰듯이.

태열전이 자신의 심상 깊은 곳에서 힘을 끌어왔듯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끌어내는 것이 다음 경지에 대한 단초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필멸자의 몸으로 다른 가능성을 끌어내는가.

좌탈입망은, 어전 일 보를 부르는 김영훈의 별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경지의 수련 방법이기도 했다.

입망(立亡)인 동시에 입망(入亡)이다.

잊어야 한다.

다른 말로는 끊어 내야 한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모든 집착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그 모든 것을 끊어 내고 잊어내서, ‘지금 이 순간’만 남긴 채 진정한 공(空)에 도달해야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좌탈입망의 그 너머다.

나는 어째서 김영훈이 자신은 다음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하였는지를 이해했다.

“…못 끊어 내시는군요.”

“….”

그랬다.

모든 것을 끊고 잊어야 도달하는 것이 이 너머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리움이라는 감정 때문.

그런데 모든 것을 잊으란 말은, 김영훈에게 있어 자신의 정체성을 내던져 버리라는 말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김영훈은 힘없는 눈초리로 자신의 도를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모든 연을 끊을 수 있단 말이냐.”

“….”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김영훈의 말대로, 모든 것을 끊어 내는 것이 다음 경지로의 실마리라면….

‘나 역시, 다음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어.’

어떻게 사람이 자신의 모든 인연을 망설임 없이 끊어 낸다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말을 듣자 나는 한없이 음울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경지로 가는 방법은 알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빌어먹을.”

김영훈은 허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도를 휘둘렀다.

그가 서 있는 차원 표면이 도의 궤적에 따라 일렁였다.

“그래서 오현석한테 수련시켜 달라고 한 거다. 아무리 수련해도… 어쩌면 정말로 다음 경지에 이르는 건 불가능할 수 있으니까.”

“….”

그는 입맛이 쓰다는 듯 도를 잡은 채 가만히 있다, 심해의 표면을 밟고 저 멀리 가는 광음역으로 향했다.

“그 얘기를 하려고 한판 해 보자 한 거였다. 내가 깨달은 깨달음이, 정말로 맞는 깨달음인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저는 영훈 형님께 다음 경지에 대한 단초를 처음 듣는데, 왜 저와 부딪치며 깨닫는단 겁니까?”

“그야… 너는 이미 다음 경지에 대한 깨달음을 체화하고 있지 않느냐?”

“예…?”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고, 김영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인지도 못하는 것 같다만, 너는 이미 나와 동격의 깨달음을 가지고 아예 몸에 체화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너와 겨루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겠지.”

“그런….”

“너한텐 굳이 자세히 설명해 줄 필요조차 없지. 계기만 있으면 알아서 깨달을 테고, 스스로 깨닫는 게 제일 좋으니까. 어쨌든, 깨달음은 이미 확인했다. 나는… 오현석에게 가서 그 연체술이라는 것이나 조금 더 수련받아 보련다.”

말을 마친 김영훈은 그대로 다시 광음역으로 돌아갔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전히 주변은 무수한 환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김영훈이 환영 중 하나를 베어 버린 것인지 이해했다.

고력계의 밤바다는 대상의 과거를 대강 비춰 주고, 김영훈은 자신의 과거를 베려 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서 다시 가 버린 것이었겠지만.

“….”

나는 가만히 밤바다에 남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상인연도.”

츠츠츠츳!

무색유리검이 윙윙 울며, 주변으로 희뿌연 안개를 내뿜었다.

고력계의 바다 위로, 뿌연 물안개가 나타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무수한 그리운 인연들이 나타났다.

우우웅―

고력계의 성질과 뭔가 공명하는 건지, 만상인연도 전체가 심해와 함께 명동하고 있었다.

물론 뭔가 숨겨진 힘이나 잠재력 같은 걸 각성하는 건 아니었고, 그냥 평범하게 같이 울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얼마간 밤바다 위쪽에 떠 있던 나는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스르륵―

내 손이 그들의 환영을 관통했다.

잡히지 않는다.

분명 내가 이전에 이뤘던 인연들이었지만, 지금은 잡히지 않는 허상이나 마찬가지였다.

허공에 멍청하게 손을 뻗으며 옛 추억을 회상하는 건 이미 내 버릇이나 마찬가지였다.

일견 멍청해 보이는 행위였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계속 손을 뻗다 보면, 언젠간 잡힐 것 같았으니까.

내가 힘들 때 ‘문명 사회의 지구인’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의미 없더라도 계속 반복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의미 없더라도 계속 손짓하면, 다시 그들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다음 경지에 도달하려면 이걸 끊어 버려야 한다고…?

“…불가능한 일이지.”

파사삭―

내가 손을 뻗자, 희뿌연 안개가 흩어졌다.

주변은 결국 다시 밤바다일 뿐이었다.

나는 김영훈이 사로잡힌 모순을 알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려면, 무공이든 수행이든 갈고닦아 더욱더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초기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으면 다음 경지엔 도달할 수 없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합체기까지는, 그래도 어찌할 만하건만.”

합체기는 이대로 어찌어찌 오복축을 쌓고, 육극에 대한 걸 깨달아 가 지축기를 완성한 후 도달하면 어찌어찌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쇄성기.

그리고 좌탈입망 너머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과연, 도달할 수 있을까?

당장 쇄성기와 그 이하에 대해서만도 정신 나간 차이가 존재한다.

보통 삼태극을 극한으로 올리면 두 경지 위의 존재와도 좋은 승부를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나였지만, 삼태극으로 합체기 대원만에 도달해도, 미쳐 버린 강민희의 일 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왜 이러고 있지.”

나는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밤에 홀로 나와 이러고 있기 때문일까.

괜스레 잡념이 들고, 급기야 심마(心魔)가 내 정신을 갉아먹으려 한다.

―넌 왜 살지?

눈앞에 또 다른 나의 환영이 떠올랐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인생. 오로지 회귀를 끊는 것 외에 아무 관심도 없잖나. 평생을 강해지기 위해 쏟아붓고, 노력해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강민희니 김연이니 뭐니 하는 놈들 구하기 위해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고… 옆에서 볼 때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멍청해 보이는 거, 알고 있나?

“….”

―그렇게 해서, 네가 그들을 구해 주면 뭐, 달라질 거 같냐? 어차피 운명은 고정되어 있단 걸 너도 알잖냐. 네가 구해 봤자 다시 불행해져. 차라리 그딴 연놈들 전부 버려 버리고, 어디 외딴곳에 틀어박혀 천년만년 수련해서 진선이 된 후에 다시 회귀해서 전부 구하면 되잖냐. 응?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인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안 그래?

“….”

‘나’의 환영은 검은 옷을 입고, 19개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놈이 내게 속삭였다.

―그러니 지금 당장 자살해서 조금 더 최적화된 방법으로….

“그래서?”

그러나 나는 눈앞의 심마를 텅 빈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남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류의 심마는 꽤 빈번히 내 정신을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어떤 심마에게도 잡아먹힌 적 없다.

“그래서, 죽으면? 어쩌라는 거냐?”

나는 퀭하니 빈 눈으로 심마를 내려다 보았다.

놈은 점차 몸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평안히 웃으며 죽는 서립을 보며, 얼마나 미친 듯이 질투가 나고 울분에 찼는지 모른다.

나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수도자들이 수행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장생불사, 무한한 힘, 방대한 지식, 새로운 진실.

세계에 대한 탐구, 혹은 복잡한 은원.

남에게 휘둘리기 싫어서, 혹은 그냥 하다 보니까 적성도 맞는 것 같고 쭉쭉 진도가 나가니까.

하지만 나는 감히 자부한다.

내가, 삼천세계 그 어떤 수도자들과도 다르고 이질적인 이유로 수행을 하고 있다고.

“나도 죽고 싶다…!”

콰득!

나는 눈앞의 심마를 잡아, 입을 벌렸다.

와득, 와드득, 와득!

19개의 머리를 가진 심마는 내 손에 잡혀서 내 입 안에서 뜯겨 나갔다.

놈이 발버둥 쳤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여태껏 수많은 심마를 만났지만, 그동안 크게 미친 적은 없던 이유.

그것은, 나 자체가 나의 가장 큰 심마였기 때문이었다.

미쳐도 소용없다.

초회차 때 문명 사회의 지구인을 부르짖으며 미쳤다.

소용없었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나름 일에 미쳐 지내며 조금 불만족스러울지언정 거의 이뤘다.

소용없었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강해지고, 세계의 비밀을 알고, 내 위치를 인정받고, 소중한 사람을 잃고, 소중한 사람을 얻었다가 다시 잃고, 귀중한 경험을 얻고, 소중한 친구를 사귀고, 많은 진실과 힘을 손에 넣고, 또다시 내 위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전부 소용없었다.

전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나마 몇 번 정도 회차가 고정되며, 몇 가지 인연은 손에 쥐는 데에 성공은 했다.

하지만!

“아직도! 남아 있다고!”

회귀는!

사라지지 않았다!

끝끝내, 양수진의 경고 때문에 회귀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촤아아아아!

나는 주먹을 힘껏 내리쳤다.

여기까지 도달하며 쌓은 힘이 인척력을 불러일으키며, 심해가 그대로 출렁거렸다.

나는 심마를 뜯어먹어 버린 후, 우울한 표정으로 내게 갑자기 심마가 찾아온 이유를 알아챘다.

‘…끊어 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군.’

끊을 수 없다.

이미 모든 것을, 몇 번이나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다.

회귀라는 저주로 인해 몇 번이나!

나는 김영훈이 다음 경지에 대해서는 거짓말하지 않는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다음 경지에 대해 단서를 내놓으면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끊어 내야 다음 경지에 갈 수 있단 그의 말도 맞는 말이리라.

그리고, 나는 어느새 내 등 뒤로 떠오른 삼태극을 느꼈다.

최근 들어 알 것만 같았다.

‘천지족의 수행법은, 점차 비슷해지고 있다.’

천인기까지는 그래도 천지족 간의 수행법이 갈렸다면, 사축기부터는 천지쌍수라 해도 힘의 경로와 힘의 표출법.

그리고 체내에 담을 수 있는 법력의 양이 달라질 뿐, 크게 수행 방식이 갈리지 않았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쇄성기에 이르러서는 천지족 간의 수행법에 차이가 거의 없다시피 변한다 하였다.

또한 나는 쇄성기 승급 의식도 잘 알고 있었다.

태수회에서, 혹시라도 태수를 벗어나 존자가 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전부 공개해 두었으니까.

그러나 합체기 대원만 준제나, 후기인 골맥.

그리고 한때 후기였던 헌원 역시도 합체기 후기 이상에 머물렀을 뿐 존자가 되려고 시도하진 않았다.

‘쇄성기 승급 의식도, 김영훈이 말한 방법과 비슷하다.’

재밌게도 기, 혼, 명의 계위가 실상은 하나이듯 천지심 역시 후반으로 갈수록 수행 방식이 비슷해지는 모양이었다.

만류귀종인지 뭔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 다음 경지로 가려면 방법은 하나였다.

버리는 것!

내가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을, 가차 없이 버려 버려야 하는 것!

그것이, 더욱더 높아지기 위한 방법이었다.

“어떻게… 버리란 거야….”

심마란 놈이 찾아와 헛소리를 주절대다 내게 뜯어먹힌 이유는 하나였다.

답이 없으니까.

경지는 더 올려야 하지만, 앞길이 막막하니까.

아무리 시간을 들인다 한들!

과연 내가 어찌 그 방식을 쓸 수나 있단 말인가.

이전에는 아무리 막막한 경지라도 대충 시간을 때려 부으면 될 거란 기대감이 아주 은연중에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넣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심마가 아무것도 모르고 지껄인 헛소리처럼, 천년만년, 심지어 억년을 퍼부어도 그런 방법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나에겐!

몇 번이나 심마를 마주하고, 몇 번이나 이런 좌절을 한 나는 내 다음 행동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수련을 하며, 좌탈입망의 극한에 도전할 것이다.

그런 다음 수행 경지도 전부 합체기에 올려 놓을 것이다.

천지심을 합체기 대원만에 올리면 꽤 쓸 만해질 터였다.

어쩌면 쇄성기 앞에서도 도주는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결말을 알고 있었다.

또다시 벽에 막혀 천년만년, 백만 년이라도 울부짖으리라.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젠장할.”

나는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심해를 바라보며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밑에서 꾸불텅하는 것이 보였다.

심해 마물이 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촤아아아아!

허공 위로, 무수한 환영으로 뒤덮인 고래 같은 괴물이 내게 입을 벌리고 뛰어올랐다.

부웅!

사축기 대원만 수준의 마물이었지만, 나는 대충 갈라 버리고 안쪽에서 머리통만 한 고석을 꺼냈다.

심해 마물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 무수한 차원 속의 역사들이 뭉쳐 만들어진, 일종의 ‘기록’이 형상을 취한 것이라 했다.

때문에 놈은 몇 다경 정도 심해 위에 떠 있나 싶더니, 그대로 스르르 녹아 소멸되어 버렸다.

츠츠츠츳―

과거의 기록으로 이뤄진 심해 마물은, 그대로 허공으로 녹는 듯했고, 녀석의 사체는 녹아서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심해 마물의 안쪽에 있던 무수한 과거의 잔영들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문득, 과거의 잔영 중 은은한 녹빛을 흘리는 잔영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잔영 속에서, 나는 옆집 한 일가족이, 누군가와 함께 커다란 관짝을 이고 산으로 올라가는 풍경을 보았다.

일가족은 중년 부부였는데, 조그마한 여자아이와 함께 산을 오르는 중이었다.

여자아이는 옆집 주씨네 딸이었다.

“…잠깐.”

나는 그 잔영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 그 잔영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파츠츠츠!

심해 마물의 몸에서 나온 잔영은 허공에서 뭉치더니, 그대로 녹빛의 짐승이 되었다.

심해 마물의 몸에서 나온 정보체가 다시 뭉쳐 소형 심해 마물이 된 것이었다.

“자, 잠깐!”

나는 그 녹빛의 짐승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사슴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내가 달려들자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토옹― 토옹―

난 저 심해 마물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잠깐, 넌 뭐냐.”

나는 사슴을 쫓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고력계의 밤바다 위쪽.

그곳에서, 나와 녹색 사슴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사슴은 김영훈처럼 바다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나는 사슴의 뒤꽁무니를 계속 쫓아갔지만, 사슴은 이상하게도 가까워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거기 서…! 거기 서라!”

나는 눈이 벌게진 채로 갑자기 나타난 사슴을 쫓았다.

“거기 서!!! 거기 서라고!!! 당장 거기 서지 못하냔 말이다!!!”

촤아아아아!

나는 비둔술과 축지법, 활공술이나 어검 비행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슴을 쫓았다.

그러나 사슴은 절대로 나와 가까워지지 않았다.

난 이를 악물며 사슴을 향해 소리쳤다.

“도, 돌아와! 돌아와라!!!”

그러나 사슴은 나를 피해 저 멀리 도망쳐 버렸고, 나는 어두운 바다 위에 둥둥 떠서 사슴을 놓쳐 버릴 뿐이었다.

“…뭐냐, 저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내가 전력을 내서 한참을 달렸다.

이 위정해역을 몇 번이고 왕복할 속도로 한참을 날아갔는데, 잡히지 않은 건 둘째 치고 바다가 너무 끝이 없이 이어졌었다.

“뭘 봤던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아까 고래 형태의 심해 마물을 잡았던 곳에서 그리 멀리 빠져나오지 않았다.

“내게도 알려 주게.”

“됐습니다. 심해 마물이 환각을 보여 줬나 보군요.”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었다.

‘내가 미치기라도 했던 건가.’

아무래도 김영훈이 근처에 있었다면 내가 환상에 빠지더라도 그는 대비를 했겠지만, 그가 돌아가고 고력계 밤바다에 혼자 남았다 보니 잠시 환각에 빠졌던 것이리라.

“…큰일 날 뻔했군.”

난 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김영훈이 고력계의 밤바다를 계속 쳐다보면 위험하다 했던 건 아닌 듯했다.

난 뒤를 돌아보아, 고래 마물을 잡았던 곳을 돌아보았다.

환영은 전부 흩어지고 없어졌고, 차원의 바다만이 일렁일 뿐이었다.

“…돌아가야겠어.”

심해 마물 하나는 별로 위험하진 않다 생각했지만, 방금 전의 그 기오막측한 환영을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그대로 축지법을 써서 저 멀리 날아가는 광음역으로 돌아갔다.

쿠구구구!

광음역은 어느새 공기 방울의 끄트머리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코앞에 궁창의 벽이 보였다.

촤아아아아!

내가 성란도에서 봤던 새파란 ‘수평선’의 끝이 눈앞이었다.

‘꼭 수계에서의 풍경 같군.’

수계와 같이, 이곳도 세계의 끝처럼 수평선의 끝자락이 끊겨 있었다.

다만, 수계에서는 세계순력 같은 게 세계의 끝을 막고 있었다면, 이 해역은 ‘바닷물’이 수직으로 올라서서 ‘심해’로 이뤄진 벽을 만든 채 하늘로 끝없이 이어져 궁창을 이루고 있었다.

타 해역으로 넘어가려면 이 벽을 넘어서야 했다.

‘어디 보자…. 벽을 넘을 때쯤이 되면 연위나 서란, 시호, 북향화 둘 중에 한 사람이 불러 달라고 했었는데….’

서란과 시호는 굉장히 바빠 보였고, 북향화는 술에 절은 채 잉잉거리며 똑같이 취한 김연에게 머리카락을 빨아 먹히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연위 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연위는 조금 치료가 된 육요와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연위에게 부탁해야겠군.”

나는 연위에게 전음을 보냈고, 분혼 상태로 나와 있던 그녀는 육요에게 지고 있던 판을 그대로 엎어 버린 후 그대로 판돈을 가지고 전명훈과 연진이 수련 중인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잠시 안쪽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연진의 몸을 차지한 연위가 내게 날아왔다.

“아, 벌써 해역 끝에 도착했느냐?”

“예, 몸에 땀 좀 식히시지요.”

“됐다. 내 몸도 아닌데 뭘. 후후, 그나저나 정복왕 꼬맹이가 이전과 똑같다 했으니 내 도움만 있으면 충분히 건널 수 있을 거다.”

연위는 땀을 훔치며 눈앞의 거대한 궁창의 벽을 바라보았다.

“일단, 고석 같은 거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나는 방금 잡은 고래 마물의 고석을 잘게 부숴서 그녀에게 건넸다.

연위는 고석 한 줌을 쥐더니 수결을 맺었다.

파아아앗!

고석은 허공에서 빛을 뿜더니, 나침반 같은 모형으로 변했다.

나침반 같은 모형은 허공에서 끼릭거리더니, 궁창의 벽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광음역을 저 앞으로 이동시켜라.”

“예.”

쿠구구구!

얼마 후 광음역이 그곳으로 이동하자 연위는 고개를 까딱였다.

“고력반의 술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올곧게 인력을 뻗어라.”

우우우웅!

내가 그녀의 말대로 인력을 뿜었을 때였다.

“음?”

나는 문득, 내가 뻗은 인력과 의식이 그대로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인력과 의식은 궁창의 벽 저 너머에 있는 어딘가와 연결되었다.

“연결되었냐?”

“예. 그렇습니다만….”

“수결을 가르쳐 주마. 이 수결대로 주언을 외며 잡아당겨라!”

우우웅!

나는 그녀의 뜻대로 수결을 외며, 인력으로 광음역과 해당 장소를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광음역은 그대로 궁창의 벽에 틀어박혔다.

쿠구구구구!

무수한 차원의 조각들이 깨진 유릿잔처럼 일렁인다.

‘이것이 멸망한 세계의 흔적….’

거리감각이 일렁이며 당장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와 연결된 뭔가가 나를 차근히 잡아당기며 우리가 갈 길을 알려 줬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광음역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번쩍!

쿠구구구구!

광음역은 그대로 어딘가에 진입했다.

“…여기가 다른 해역입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 굉장히 협소한 공간이었다.

인도양 크기인 광음역이 꽉 찰 정도의 공간이었다.

물론 그 정도도 작은 건 아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해역’에 비하면 굉장히 협소한 편이었다.

그러나 연위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중간지대다.”

“중간지대요?”

“그래. 해역과 해역 사이는 상당한 차원과 차원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긴 시간 동안 그 해역 사이를 헤엄치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지. 그래서 적당한 거리에 수많은 합체기 수사, 혹은 존자들이 ‘중간지대’를 만들었다. 일종의 해역 간 역참이지. 이 공간을 둘러싼 인력을 읽어 봐라. 이렇게 해석하면 된다. 자….”

나는 그녀가 알려 준 해석 방식대로 이 이공간을 둘러싼 인력의 흐름을 읽었다.

“인력의 흐름이 느껴지지? 그 인력의 흐름에 위정해역의 좌표와, 또 다른 해역의 좌표가 있는게 느껴질 거다. 우리가 가려는 반대편 해역의 좌표를 향해 방금 했던 것을 반복하면 된다.”

“….”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눈동자를 떨었다.

‘이 인력의 흐름… 이 이공간에 새겨진 술식….’

“이놈, 서은현! 사조가 말하면 들으란 말이다!”

‘이건….’

나는, 문득 한 부해계를 떠올렸다.

그 부해계에 있던, 계곡 밑에 있던 진법과 옥패.

‘함진이 있던 세계…!’

그 세계에 있는 진법을 발동시키면, 그 진법 일대는 공기 방울처럼 변해 부해계와 분리되고, 특이한 인력이 이계의 주변을 뒤덮었다.

예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오늘에서야 알 수 있었다.

‘함진의 세계에 있던 그것은, ‘중간지대’였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인력의 흐름에, 연위가 알려 준 인력 해석 방식을 도입해서 읽어 보았다.

“이 고얀 놈! 나 때였으면 선배에게 그런 태도를 취했다간 볼기짝을 맞았단 말이다!”

함진이 있던 세계의 중간지대.

그 중간지대에 새겨져 있던 좌표는 두 곳.

하나는 이곳 고력계.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좌표, 그 이름은 뇌성해(雷聖海)였다.

나는 내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연위를 떼어 놓으며, 눈을 빛냈다.

‘…그래, 생각해 보면 그가 있었군.’

그녀의 해석한 방식으로 뇌성해의 좌표를 얻었다.

그리고, 뇌성해는 서휼의 말에 의하면 존자들이 원정을 나간 머나먼 장소.

그중에는 장익이 있었다.

쿠구구구!

나는 광음역을 완전히 다른 해역으로 이동시키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정말로 김영훈의 말대로 모든 것을 끊어 버리는 게 이 너머로 가는 방법이라면, 장익은 어찌 한 거지?’

그가 모든 번뇌와 집착을 버리고 간 것 같은 느낌은 안 들었다.

뭔가 초탈한 느낌은 있었을지언정, 그는 여전히 심족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모든 것을 버린 존재가 어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김영훈의 방식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장익의 사례로 보았을 때.

‘분명히, 모든 걸 버리지 않아도 될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

나는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장익을, 만나러 가 보자.’

어쩌면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또 다른 길을 발견할 수도 있을 터였다.

어쩐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나는 그렇게 북향함대의 본 함대가 있는 흑색해역에서 장익을 만나자고 결심하였다.

회귀수선전(回歸修仙傳) 371화


           


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A Regressor’s Tale of Cultivation

回歸修仙傳, 회귀수선전
Score 9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On the way to a company workshop, we fell into a world of immortal cultivators while still in the car. Those with spiritual roots and unique abilities were all called to join cultivation sects, living prosperously. But I, having neither spiritual roots nor special abilities, lived as an ordinary mortal for 50 years, complying with fate until my death. That’s what I thought. Until I regre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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