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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62

361화.

한국대에는 재벌가 자제들이 꽤 많이 다닌다. 때문에 같은 과 선후배 중에 재벌가 사람이 있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내가 1학년이었을 때 고준형은 휴학 중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아마 학교축제 때였을 것이다. 그때 선아와 함께 인사를 했었다.

GH그룹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고 신기하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난 맞은편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가 GH건설 사장의 아들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쪽이겠지.

어이없어 하는 나와는 달리 고준형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택규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것 같은 표정이다.

“…….”

이 자식은 대체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난 차분하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선아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그래도 한때 친했던 사이인 만큼 오히려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 그럼 어째서……?”

“도와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가 무슨 자선사업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서성, 은성, GM, 포드, CL, SSK 등과 손을 잡은 것은 그게 우리한테 이익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GH그룹은 도와줘봐야 별 이득이 없다.

고준형은 여전히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그를 납득시켜주기 위해 말했다.

“잘 생각해보세요. 만약 저에게 사적인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까지 GH그룹이 멀쩡했을까요?”

내 말에 고준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난 그 표정을 보며 계속 말했다.

“서성그룹이라면 모를까 GH그룹 정도 사이즈라면 간단하죠. 지주회사인 GH홀딩스 주식 공개매수하고 우호지분을 확보한 다음 주총에서 회장이고 사장이고 다 내쫓으면 되니까요. 제가 GH그룹 먹겠다고 나서면, 막을 수 있겠어요?”

놀란 고준형은 소리치듯 말했다.

“GH그룹은 저희 집안이 평생을 바쳐서 키워온 기업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택규도 한마디 했다.

“자자손손 세습할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이 합심해서 도와드려야 하나요?”

한국은 유독 총수일가와 기업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식을 가진 주주들이다.

경영자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걸 제대로 못하면 물러나야 하는 거고. 실제로 외국에서는 창업자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10퍼센트도 안 되는 지분을 가진 총수일가는 마치 자신이 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리고 언론은 그것을 견제하기는커녕 마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한다. 총수가 횡령이나 배임으로 구속되기라도 하면 글로벌 경영전략에 차질이 생겼네, 국가경제가 망하네 열심히 떠들어대며 국민들의 공포를 자극한다.

한국에서 그동안 재벌체제가 유지되어온 것은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재벌 1세는 창업가였다. 지금의 스타트업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불모지에서 기업을 일궈냈다.

재벌 2세들은 창업자인 재벌 1세를 도와 같이 기업을 키워나갔다. 오일쇼크와 외환위기 등이 한국을 덮치며 많은 그룹들이 몰락했지만, 살아남은 기업들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다.

만약 임일권이 서성그룹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서성전자를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었을까? 한민구가 은성차를 맡지 않았다면, 한국이 지금처럼 자동차강국이 될 수 있었을까?

문제는 3세와 4세들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라왔고, 경영능력도 전혀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연하다는 듯 기업을 물려받았다.

외국기업이라고 가족끼리 경영권 승계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능력도 검증 안 된 후계자에게 온갖 편법을 써서 승계시키지는 않는다.

재벌의 승계문제를 지적하는 이런 농담이 있다.

임일권의 아들이 임진용이다. 그럼 빌 게이츠 아들 이름은 뭘까?

빌 게이츠는 모두가 알다시피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자이자 CEO. 한때는 세계최고의 부자였고, 지금도 활발하게 자선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빌 게이츠 아들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임진용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서성그룹 회장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반면, 빌 게이츠는 적절한 시점에 은퇴해 CEO자리를 스티브 발머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사실 승계를 받았든 합리적 절차에 따라 전문경영인을 뽑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본의 초거대 전자기업이었던 소니는 전문경영인이 다 말아먹었다.

승계를 받은 후계자가 기업을 몰락시킨 사례만큼이나 전문경영인이 몰락시킨 사례도 셀 수도 없이 많다.

검은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말처럼 누가 어떻게 경영을 맡았든 잘하면 살아남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되는 거다.

고준형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듯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진후 대표님. 이번에 도와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아주 오래전,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통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별 감흥도 없다.

그리고 이번에 도와준다고 과연 문제가 잘 해결될까?

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부실 외에 해외 사업장에 3억 달러 규모의 추가부실이 있다던대요.”

“그, 그 무슨 말씀입니까?”

표정을 보니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업의 재무제표란 일일이 까서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사업장이 해외에 있는 경우에는 현황파악이 더 힘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장부에는 100억의 자산으로 잡혀있는 부동산이 실제 매각가는 30억밖에 안 될 수도 있다.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결손처리 하지 않았던 어음이나 채권이 알고 보니 부도가 났거나 정크본드일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정보가 가장 빠른 것은 금융권. 골든게이트를 비롯한 외국계 IB들은 진작GH건설의 재무상황을 파악하고 관계 정리에 나섰다.

끌어안고 있을 때야 숨길 수 있겠지만, 매각하겠다고 시장에 내놓으면 각종 실사를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숨겨왔던 부실이 한번에 드러나게 된다.

과연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사람이 무능한 건 죄가 아니에요. 하지만 무능한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죄죠.”

무능한 CEO는 직원들과 주주들은 물론이고, 국가경제에도 피해를 끼치게 된다.

택규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내가 죄 짓지 않으려고 CEO 안 하는 거지.”

고진광 사장이 물러나면, 고준형 역시 자리를 보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자존심 숙이고 나를 찾아와 고개를 숙인 것은 회사를 살리기 위함일까,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함일까?

경영권을 잃은 재벌은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다.

재취업 걱정은 할 필요 없겠지만, 다시는 그룹 내에서 요직을 맡기는 힘들 것이다. 다른 계열사를 차지하고 있는 고진광 사장의 형제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저, 저는…….”

“한마디만 더 할게요.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저한테 사적인 감정 운운하는 것부터가 대단히 실례라는 건 알고 있죠?”

뭔가 말을 하려던 고준형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실언이 많았습니다. 부디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잘 해결되길 바랄게요.”

잘 해결 안 될 게 뻔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사람은 보는 위치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처음 학교에서 만났을 때는 커보였던 사람이 지금은 왠지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가 나가고 나자 택규가 물었다.

“정말로 안 도와줄 거야?”

“말했잖아. 사적인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고.”

“그냥 해본 말인 줄 알았지.”

“…….”

대체 내 말을 뭐로 들은 거냐?

아직 선아를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면 GH건설을 도와줬을 것이다. 반대로 원망하는 감정이 있다면 진작 손을 썼을 테고.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다.

“아까 말한 대로 GH그룹을 먹는 건 어때? 니가 경영권 빼앗겠다고 하면, 주주들이 두 팔 벌려 환영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겠지.”

이는 내가 총수일가보다 정의롭거나 인격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게 주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돈에는 선도 악도 없으니.

난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먹어봐야 어따 써?”

먹어봐야 별 실익이 없다. 괜히 돈만 쓰고 끝날 가능성이 높다.

건설을 매각하면 그룹전체의 재무구조는 개선되겠지만, 기우는 사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GH그룹의 두 축은 정유와 건설.

GH오일이 남아있긴 하지만, 경기둔화와 전기차 보급증가 등으로 인해 매출하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시장 자체가 축소되는 것도 문제지만, SSK이노베이션과 A-oil의 공세에 밀려 국내 점유율마저 하락 중이다.

만약 아무 변화도 없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하던 일만 계속했을 테고 지금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겠지.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경영자들은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상황은 여기까지 몰렸다.

업황이 좋지 않아도 찾아보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대체 경영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으면 멀쩡하던 기업이 자본잠식 상태까지 빠졌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재벌이기 때문이다.

전문경영인이었다면 진작 잘리고도 남았다.

카로스가 만든 자율주행전기차는 이미 세상을 바꿔놓고 있다. 페이스잇이 만든 VR섹스기기는 성인산업을 넘어 연애와 결혼시장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VRMMORPG는 게임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테고, 진행파원자로는 에너지산업의 흐름을 바꿔놓게 될 것이다.

난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영원히 살 수는 없어. 변화를 읽고 적응하면 살아남는 거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게 자연의 이치지.”

* * *

시장은 이제 GH건설 매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고진광 사장은 필리핀으로 날아가 협상을 벌였으나, 현지 SPC가 파산한 이상 대금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상항이 이렇게 꼬인 건 애초에 계약을 잘못했기 때문.

자본잠식 우려가 커지며 주가는 하한가로 치달았다. 관심이 있는 기업들은 인수를 저울질했다.

난 점심시간에 엘리를 만났다.

“대마불사라는데, 저렇게 큰 기업도 넘어가네요. 이런 걸 보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적자생존이죠.”

“진화론 설명할 때 흔히 쓰는데, 정작 찰스 다윈은 그 말 한 적이 없는 거 알아요?”

“그래요?”

이게 다윈이 한 말 아니었어?

얘기를 하는 도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난 직감적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받을지 말지 고민하자, 엘리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받아 봐요.”

“알았어요.”

난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잠시 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나야.]

예상했던 대로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사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시간 괜찮으면, 만날 수 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그녀가 결혼하기 전이다. 내 첫사랑은 이제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애 엄마가 됐다.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일이다.

난 그녀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연락한 건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난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요즘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대답은 한참 후에 들려왔다.

[……알았어.]

난 진심으로 말했다.

“잘 지내.”

[너도.]

내가 전화를 끊자 엘리가 물었다.

“정말 안 만나도 괜찮아요?”

“그러는 편이 선아에게 좋을 테니까요.”

엘리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거 알아요?”

“뭘요?”

“진후는 참 다정하고, 제가 그 점을 좋아한다는 걸요.”

“아, 고마워요.”

난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괜히 볼을 긁적거렸다.

엘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점심은 뭘 먹으러 갈까요?”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re may be great entrepreneurs, but there are no great investors. That’s the reality of this country.”

One day, something started to appear before my eyes.
What could I possibly do with this ability?

From now on, I will reshape the global financial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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