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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66

363. 레나 Ep – 다른 레나

패배는 쓰다.

과정이 어쨌건, 상대가 누구였건 간에 입맛이 달아날 정도로 쓰디쓴 것이어서 패자는 동굴로 몸을 숨기고, 추스르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내가 그랬다. 나는 누가 우승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엘슨 아저씨네 저택에 숨어 있었다.

결국 그 레브라는 녀석이 우승을 거머쥐었다는데, ‘승자의 그림자는 패자의 안온한 도피처’라는 격언대로, 이런 생각이 들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냥 그 새끼가 존나 잘난 새끼였던 거다.

내가 못난 게 아니라.

물론 나는 그 녀석한테 진 게 아니라 아르펜이라는 사람한테 졌고, 아르펜은 그놈한테 져 버려서…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승패는 병가지상… 뭐시기라고.

이기고 지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 승패에 개의치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명언이 있다.

그래.

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거다.

레이랑 나란히 기사가 되는 것도, 올해 결혼하는 것도 모두 물 건너간 것 같지만, 마무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패자부활전에 나간다.

패자부활전에 나가겠다는 말을 했더니 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본선 결승전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패자부활전 결승에서는 꼭 만나자고. 나는 씩 웃으며 대꾸해주었다.

“어딜 16강에서 광탈한 녀석이 8강 진출자님한테 도전장을 내밀어? 흐흐. 레이, 나 절대 안 봐줄 거야.”

진짜로 안 봐줄 생각이다.

패자부활전은 본선과 달리 우승한 사람에게만 기사단에 입단할 기회 또는 상금을 줬다.

그러니까 나랑 레이, 우리 둘이 결승전에 올라도 한 명만 기사가 될 수 있는 건데,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우승해서 상금을 골라버릴 거다. 레이와 나란히 기사가 될 언젠가를 위해서.

나는 이 참으로 옹졸한 소망을 원동력으로 삼아 다음날, 패자부활전을 치러 나갔다.

원래 이랬어야 했던 것처럼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결승에 올랐고, 레이와 마주하였다. 그리고 레이는… 강했다. 예상했듯이.

관객석의 소음이 적막하게 멀어져 간다. 내 눈에는 오직 레이만이 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내게 빙그레 미소 짓는 레이가.

“헉. 헉. 후우…”

막간을 이용해 숨을 고르고, 자세를 재정비했다. ‘이렇게 평범하게 싸워서는 못 이긴다.’ ─ 생각하며 눈가를 닦아냈다.

미간에 흐르는 땀방울을 치우곤 레이를 다시 바라보니 그는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태양을 등진 그가 역광에 가려졌다.

시커멓고 거대한 실루엣. 레이란 걸 알지만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부디 이것이 통하기를.

– 와아–!!

검을 들어 올리자 관객석에서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함성이 아까보다 훨씬 시끄럽다.

그렇겠지. 세상 누가 검을 이딴 식으로 잡겠어.

나는 마치 창을 잡듯이 왼손으론 검의 중간을, 오른손으론 손잡이를 잡아 검을 들었다.

왼손으로 검 끝을 조정해 레이를 겨눈 것인데, 레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역광 때문에.

하지만 검을 조심스럽게 뻗어오는 것으로 보건대, 나를 경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살짝 인정받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며 게걸음을 쳤다. 거리를 좁히곤 레이의 검에 내 검을 갖다 붙였다. 그러자

– 챙…

느낌이 왔다. 이건 쓸만하다고.

“합!!”

레이의 검을 힘을 주어 눌렀다.

그랬더니 눌린다. 당연한 결과인 게, 검 중간을 쥐고 있는 내가 검을 훨씬 짧게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레이의 검을 옆으로 치워버리곤 ‘다음은 어떻게 하지?’ 물밀 듯이 쏟아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검을 달리 잡으니 검술이란 것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기상천외한 동작들이 마구 떠올라 선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일단은 무난하게 왼발을 들어 높이차기를 날렸다. 레이는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하는 것으로 역시 무난한 선택을 했다.

‘그럴 줄 알았지!’

나와 레이는 약혼한 관계이지만 동시에 같은 스승을 둔 사형제지간이기도 하다.

노엘 아저씨의 틈 없이 단단한 검술이 레이의 근간이니 이렇게 하면 물러서리란 걸 예상했다.

나는 날아가는 왼발을 동력 삼아 재빨리 다음 동작을 만들어냈다.

디디고 선 오른발을 축으로, 발차기와 함께 이뤄지는 대회전.

몸은 왼발의 반대 방향으로 크게 젖혀졌다. 머리카락이 경기장 돌바닥을 사악- 쓸고 가는 게 느껴진다.

그 사이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를 바꿨다. 오른손이 검신(劍身)을 잡도록.

그러자 우상단 찌르기 자세가 완성됐고, 나는 왼발이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찔렀다. 허리가 쭉 펴지며 원심력이 더해진 공격이 들어갔다.

그러자,

– 와아!!

수천 관객들의 함성이 한 사람이 외친 것처럼 들렸다. 그만큼 찰나의 순간이었고, 회심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레이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윽! 내가 나뒹굴었다.

오른쪽 갈비뼈가 깨질 듯이 아프다. 아니, 깨졌나?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한 손으론 얻어맞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론 내 오지게 무거운 검을 끌면서 안전한 위치까지 멀어졌을 때에서야 뭐에 맞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레이의 검 손잡이, 뭉툭한 끝으로 얻어맞았다.

그는 내가 밀어버린 제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되려 내가 대회전을 감행한 순간 걸음을 내디뎌서 내 찌르기 반경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손잡이로 아주 짧은 찌르기를 감행한 것이었다.

와.

얜 진짜 괴물이구나.

웬만해서는 발차기에 눈이 가려져서 내가 회전을 하는지 어쩌는지도 알아채지 못할 텐데.

감탄을 뒤로하고, 나는 내가 더 싸울 수 있는지를 살폈다.

옆구리를 얻어맞아서 몸에 경직이 왔다. 앞으로 움직임이 좀 둔해지겠다. 체력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반면 레이, 저 괴물 같은 녀석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듯했다.

패색이 짙어졌음을 감지했는지 관객들의 함성에 레이의 이름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를 악물며 검을 세우자 레이가 말을 걸었다.

“레라, 네 희한한 검술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어.”

“…네가 보기엔 어때?”

한 걸음 다가오는 바람에 다시 역광. 하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아주 훌륭해.”

퍽-

레이를 향한 환호성과 희미해지는 시야를 마지막으로, 나의 첫 마우닌-레티이 대회가 막을 내렸다.

* * *

“아오… 머리야. 레이 이 개샊…”

눈을 뜨자마자 몰려오는 두통.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일으켰다?

바닥을 짚으니 폭신한 이불이 느껴졌고, 둘러보니 병동이었다. 경기를 치르며 낯을 익힌 전사 몇몇이 주변에 누워 있었다.

“일어났네.”

개중의 한 전사가 내게 다가왔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이 사람은 ‘칼리 톨루카’라고, 썩 붙임성이 좋은 전사였다.

나는 그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몇 마디의 잡담을 나눴다.

피차 아쉽게 됐다는 위로가 주된 내용이었다.

별로 길게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그를 돌려보냈다. 칼리 톨루카는 한번 생각해보라 말하곤 되돌아갔다.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졌구나.’

─ 라는 생각 말고는.

아직도 함성이 들려오는 거로 봐서는 그렇게 오래 기절해있지는 않았나 보다. 생각을 돌리려 했지만, 지금쯤이면 레이가 기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방금 그 함성이 입상자들의 기사 서임을 축하해주는 것일지도.

입맛이 쓰다. 내 꿈은 레이와 함께 기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기사 서임식과 결혼식을 같이 치러서 하늘하늘한 드레스 대신 단단한 갑옷을 입고 싶었다. 이쁘기만 한 신부가 아닌, 신랑과 대등한 부인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물 건너갔구나.

레이는 이번에도 나보다 한발 앞섰고, 나는 따라잡지 못했다.

대등은 개뿔. 나보다 한참 앞서서 기사가 된 레이는 수도의 화려함과 간드러진 목소리의 문명인 아가씨들에게 홀려서 나를 잊어버릴 거다. 나는 레이가 나랑 언제 결혼해주나 눈치를 살피며 집구석에서 초라하게 밥이나 짓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는 개뿔, 그럴 리는 없다.

‘에이. 잘하면 눈물이 맺힐 수도 있었는데.’

병동에 누워 비극의 여주인공 같은 느낌을 살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삶에 그렇게 눈물 콧물 뺄 일이 벌어질 턱이 없지 않으냐.

조금, 아니, 많이 아쉽긴 하지만 결혼식은 따로 해야겠다.

기사단 입단 시험이 언제 열리는지 알아봐야겠고… 그냥 이 정도의 문제다. 대회에서 떨어진 게.

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레이를 축하해주러 가야 하는데, 왠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야속한 새끼. 그리고 곧이어 그 야속한 놈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는 돌아누웠다. 레이가 옆에 다가와 앉은 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하며 협탁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았다.

“레라. 나 왔어.”

하지만 꽃병은 비어 있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한테 화가 나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씨! 이게 무슨 청승이야! 야, 레이! 축하해. 역시 네가 먼저 기사가 됐네. 소감 한 말씀 해주시고, 술이나 먹으러 가…”

…헐.

나는 돌아선 그대로 굳어버렸다. 파하하하하! 폭소하는 레이의 손에, 그의, 내 약혼자의 손에…

보기에도 묵직한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레이가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상금 받아 왔어. 왜? 내가 기사 서임을 받을 줄 알았어?”

“너는 기사가 되고 싶어 했잖아. 그, 그런데 왜…?”

“너랑 같이 되고 싶어서. 우리 결혼도… 글쎄, 조금 이른 얘기기도 하고, 네가 좋아할는지 모르겠지만 기사 서임식이랑 같이 하고 싶었어. 물론, 네가 좋다면 말이야.”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까 그렇게 애썼어도 단 한 방울이 나오지 않던 눈물이 지금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레이를 끌어안았다. 끌어안곤 펑펑 울어버렸다.

“그래, 이 바보야. 너무 이른 얘기잖아. 결혼은. 킁. 사, 상금은 또 뭐하러 타 왔어. 쓸데없이.”

레이는 내 등을 찬찬히 쓸어주었다. 그러면서 작게 속삭였다.

“아니 뭐… 우리 이대로 돌아가긴 뭐하잖아. 그래서 말인데, 이 돈으로 여행이나 다녀오자. 오르빌. 벨리타 왕국의 오르빌 어때? 거기 기사단이 대단하다더라. 대회는 내년에 다시 와서 치르고.”

“…좋을 대로 해. 난… 상관없어.”

끄히히힉, 히히히.

너무 좋아서 몸이 배배 꼬였지만 그렇지 않은 척했다.

내 사랑하는 남자, 레이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목에 두른 팔로 얼굴을 가리곤 웃었다. 울었다. 웃었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온 대륙을 뒤져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때 대륙의 서쪽 편, 한 거대한 교회에서는 ‘다른 레나’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경건한 종소리.

화음이 섞인 기도 소리.

북부의 흙투성이 경기장과는 사뭇 다른 이곳은 제롬 신성 왕국, 수도 루테티아 뒤편의 수도교회였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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