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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68

365. 레나 Ep – 오필리아

황동으로 만들어진 술잔이다. 나는 마차의 삐꺽거림을 느끼며 술잔을 돌려보았다.

‘중요한 물건인 건 분명한데…’

이걸 얻기 위해 내가 수도교회에 왔었던 거다. 레브는 이걸 챙겨야 한다 말했고, 성녀님은 신력을 내려준다는 핑계로 날 불러서는 이것을 건네주셨다.

다만 문제는…

‘이거 기능이 뭐지?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아무리 돌려봐도, 신력을 불어넣어 봐도 사용법을 알 수 없었다. 황동 술잔은 신력만 잡아먹곤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지팡이와는 사뭇 다르게.

…별도리가 있나.

나는 술잔을 관찰하기를 포기했다. 품에 넣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아주 급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풍경이 아쉽다. 천천히 가면 좋으련만…

“이럇!”

레브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부석에 앉은 그는 말을 채찍질하기 바빴다. 나는 그런 레브가 못내 안타까워서 혀를 차고 말았다.

올해 세상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을 뽑는다면 레브가 다섯 손가락에 꼽힐 터였다. 십중팔구 1등이다.

작년 여름에 우리 마을에서 출발했을 때부터, 그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아이셀 왕국과 벨리타 왕국 간의 전쟁에 개입하러 달려갔었고, 다음엔 레라라는 사람을 탈락시키러 북쪽으로 달렸다. 그 일을 마치자마자 나를 데리러 왔다.

대륙을 거진 한 바퀴 쌩으로 돈 것인데, 이제는 오르빌에 가야 한단다. 그것도 한 달 내로.

약혼했다는 그 전사 커플과 비슷하게 도착하려면 그래야 한다는데, 그러려면 마차를 말 혼자 달리는 수준으로 몰아야 했다. “이럇이럇! 이럇!” 레브의 구슬땀 어린 외침이 계속되었다.

레브는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마차에 편히 앉아 하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술잔을 사용하는 법이라도 알아놔야 할 텐데.

“이렇게 서두르는 여행은 처음이네요. 성전사를 대동하지 않고 나와보기도 처음이고요.”

그때, 앞에 앉아계시던 오필리아 사제님이 입을 열었다. 주무시는 걸 내가 깨웠나 보다.

“그러게요. 물론 제 여행 경험은 전에 사제님이랑 같이 한 것밖에 없지만요.”

“호호. 그게 벌써 일 년이나 된 일이네요. 아니지. 일 년밖에 안 된 일이라고 해야겠어요. 레아 님께서 이렇게 빨리 졸업하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커닝을 했기 때문이다.

꿈속의 내가 쓴 논문을 되짚어 발표한 덕분이었다. 중간중간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베로니안 님께 질문하면서 맞춰나갔다.

그게 자극이 되었는지 베로니안 님도 자기 논문을 훨씬 빠르게 완성했다. 다만, 그는 사제가 되지 못했다. 그는 수도사가 됐다.

의식의 결과가 좋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는 내가 건네는 축하 말에 위로가 섞였음을 눈치채곤 이렇게 돌려주었다.

– “저는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제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신력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기억에도 수도사 출신 최초로 추기경에 올라선 베로니안의 모습이 있다.

나는 그가 잘 해낼 거라 믿으며 회상을 마쳤다. 덜컹거리는 마차로 돌아와 오필리아 사제님의 말을 받았다.

“과찬이세요.”

“과찬은요. 레아 님이 아무리 신탁을 받은 분이라 한들 남들처럼 졸업하기가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죠. 이걸로 신력 문제는 해결이네요. 논문은 흥미롭게 읽었어요.”

오필리아 사제님이 윙크했다.

이분은 나에 관한 이런저런 비밀을 많이 알고 계셨다. 그것 때문에 성녀님이 이분을 데려가라 하신 듯하다. 내가 정상적인 수습생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물심양면 도와준 분이기도 하고, 꿈속에서도 접점이 많았던지라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는 잠시 내 논문 이야기를 나눴다. 논문 주제가 사제의 자주성과 관련된 것이라 논박의 여지가 많았고, 오필리아 사제님과 나는 흔치 않은 ‘여성 사제’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더 깊이 나누어볼 부제(副題)가 있었다.

바로 출산에 관한 문제였다.

“대략 제국력 3900년경의 기록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를 출산한 사제가 직위를 박탈당한 최초의 징계 기록이죠.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사제의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아! 그거 저도 봤어요. (꿈에서 봤던 건가?) 사제의 혼인 및 성관계 여부가 징계 대상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사건이었던 거로 기억해요. 좀 불합리한 면이 있었죠.”

“맞아요. 아무리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한들 징계 대상으로 정해지지 않은 일을 징계 처리했으니까요. 내용이 내용인지라 어디서 말은 못 하지만, 저는 그 사건이 사제의 자주성을 가장 크게 훼손한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성관계라던가 그런 거… 상관없잖아요?”

오필리아 사제님은 마지막에 다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관계는 남자든 여자든 사제에게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필리아 사제님의 마음을 헤아려 얼른 긍정했다.

“그렇죠. 신을 모심에 있어서 그런 게 왜 문제겠어요. 오히려 고대의 사제들은 결혼하는 게 당연했던 것 같은데… 이걸 추론할 수 있는 글귀가 성녀실록에 있어요. 당대의 사제들은 성녀가 결혼하지 않는 걸 되려 기이하게 여겼다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성녀님의 마음이야 제가 알 도리가 없지만, 신께서 우리 몸에 달아주신 걸 죄악시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출산의 경우는 더 이상한 것이, 아이가 태어나는 건 분명 경사이고 산모에게 축복을 내리는데, 어째서 사제가 아이를 낳으면 불경하다 하는지 모르겠어요. 술이 좀 땡기네요.”

“푸핫!”

오필리아 사제님이 찬장을 뒤적여 의례용 술을 꺼냈다. 나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으나 사제님은 이미 술을 따르고 있었다.

역시 경험 많은 선배님…! 아니, 사제님이 질문하셨다.

“레아 님도 한잔하시겠어요?”

“음… 딱 한 잔만요.”

아직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지만, 난 술이 약하니까. 절반만 받아서 건배했다.

레브 미안. 근데 맛있네.

무수한 꿈의 기억으로 나는 나의 주량을 잘 알았으므로 술을 가능한 한 아껴 마셨다.

홀짝홀짝 음미하며 잡담을 이어가는데, 중간에 사제님이 말했다. 얼굴이 붉어지신 게 취기가 오르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어요. 제 고향에 한 번 들러도 괜찮을까요? 오르빌로 가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긴 할 건데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아요.”

“어라? 오필리아 사제님 벨리타 왕국 출신이셨어요?”

“네.”

“우와! 전혀 몰랐어요. 전 당연히 저희 왕국 사람이신 줄 알았네요. 말투며, 행동거지며…”

“제가 오른 왕국에 파견돼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까요. 껌벅 속으셨죠?”

“완전히요. 그러면 고향에 가본 지 정말 오래되셨겠네요. 레브한테 말해볼게요. 그런데… 시간이 될는지 모르겠어요.”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괜찮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막 봐야 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어서요.”

오필리아 사제님은 내 부담을 덜어 주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평소였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부탁을 취기를 빌어 꺼내신 듯해 못내 안쓰러웠다. 레브한테 잘 말해봐야겠다.

그 이후의 일이지만, 레브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하다가 벨리타 왕국으로 넘어갈 즈음에 말을 바꿨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르빌로 이동 중인 그 약혼한 커플이 중간에 멈춰 섰다고. 그 덕분에 시간을 조금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오필리아 사제님은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누군가를 만날 걸 기대하는 듯 머리를 빗질하셨고, 종이에 간혹 무언가를 끄적이셨다. 입을 오물거리시는 걸 나는 봤다.

누구일까? 오필리아 사제님이 이토록 재회를 기대하는 사람이.

레브는 부지런히 말을 몰았고, 이윽고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생전 처음 와보는 벨리타 왕국,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다는 서부 평원이 펼쳐졌다.

서부의 지배자로 불리는 베나르 타티안 후작의 영토였다.

* * *

베나르 타티안 후작의 영지는 상상을 초월하게 넓었다. 다섯 개의 도시와 수십 개의 중소도시들. 이만하면 영지가 아니라 왕국이라 할 만하다.

(레브의 말에 따르면) 타티안 후작가가 이토록 넓은 영토를 소유할 수 있는 까닭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아카이아 제국이 분열하던 시기에 타티안 후작가도 아스란 왕국이나 제롬 신성 왕국, 아이셀 왕국처럼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하고 왕국에 잔류한 게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벨리타 왕국은 그 충절1)을 높이 사 타티안 후작가의 (아카이아 제국 시절에나 가능한) 그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영지로 인정해줬다.

둘째는 변경백령이다.

어느 가문이든 한 가문은 하나의 영지만 소유할 수 있다. 다만 변경백이라는 직책을 맡으면 예외적으로 국경 부근에 하나의 영지가 추가로 주어지는데, 타티안 가문은 그 변경백령을 서쪽에 있는 것으로 받아냈다. 그게 타티안 후작 가문의 원래 영지와 맞닿아 있어서 영토가 더욱 불어난 것이다.

제롬 신성 왕국이 십자교회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시피 한 국가라는 걸 고려하면 타티안 후작가는 변경백령을 거의 공짜로 받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속령(屬領)이라는 것으로 인한 착각이었다.

타티안 후작가가 워낙 커서 그렇지, 일반적인 영지는 중간 규모 도시나 마을이면 평범한 축에 속했다.

그런데 그렇게 자잘자잘한 영지가 타티안 후작가의 거대한 영지와 맡닿고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절로 복속되는 과정을 거쳤다. 경제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해서 후작가의 영토 안에는 (비공식적으로) ‘속령’으로 통하는 영지가 많았다. 대부분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남작 가문들이다.

오필리아 사제님의 고향이 개중 하나였다. 우리는 완전히 탈진해버린 말들을 달래며 도시에 입성했다. 성문에는 ‘올덴부르크’라고 적혀 있었다.

인구가 삼천 명쯤 되어 보이는, 제법 큰 도시다. 난 신기한 생각이 들어 말했다.

“오필리아 사제님은 도시에서 자라셨군요! 궁금해요. 도시에서 생활한다는 게 어떤 건지.”

“그렇게 다를 것도 없어요. 더군다나 전 꽤 어렸을 때 교회에 가서… 와! 이게 아직도 있네요.”

레브는 마차 때문에 숙소를 구하러 갔고, 오필리아 사제님과 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루테티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아 사제님은 간판이나 가게처럼 눈에 띄는 것이 아닌, 굉장히 자잘자잘한 흔적들에 눈길을 주며 반가워했다.

대부분 어린애들이 놀러 다닐 법한 골목길이나 공터 따위였다.

‘…나랑은 다른 길을 걷고 계신 것 같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현대의 올덴부르크 거리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주 흔해 빠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필리아 사제님은 지금 과거의 길거리를 걷고 있는 중임이 틀림없었다.

수십 년도 더 된, 일부 벽과 건물이 없었을 과거의 거리를. 어쩌면 친했던 또래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심심하지만, 사제님이 추억을 충분히 되새길 수 있게 간간이 맞장구쳐드리며 뒤따라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제님의 걸음이 멈췄다. 아연한 표정으로 어느 담장을 두 번 세 번 둘러보셨다.

“왜 그러세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여기가 왜…?”

오필리아 사제님은 근처에 있던 가게로 가 주인장을 불러세웠다. 한참 살펴보던 담장을 손가락질하며 질문한다.

“저기가 왜 영주님 댁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는 거죠? 그… 옛날에는 창고가 있지 않았나요?”

“아~ 저기요? 저렇게 된 지 꽤 됐어요. 창고로 내놔봤자 사람들이 잘 사용하질 않으니까 영주님이 거둬간 거예요.”

“…거둬갔다고요?”

“네, 사제님.”

오필리아 사제님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날엔 없었다는 그 담장 주변을 배회하였고, 이내 걸음을 돌렸다. 다른 쪽 시가지로 가서 몇몇 지인들을 만났고,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았다.

한데 섣불리 추측하건대, 개중에는 머리를 빗고 만나야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정성껏 준비한 편지를 건네줄 사람도 없었고, 만날 때를 고대하며 대사를 준비하기엔 너무나도 평범한 인연들이었다.

다음 날 우리는 올덴부르크를 떠났다.

오필리아 사제님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뒤를 자주 돌아보셨다.

1) 타티안 후작가가 독립하지 않은 게 타탈리아 왕가를 향한 충성의 발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수의 학자들은 타티안 후작가가 황실을 대리해 휘두르던 권리, ‘화폐주조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결정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제국이 분열한 이후 타티안 후작가의 재산이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배로 불어났다는 추정이 이 의문을 뒷받침하며, 당시 타티안 후작가와 채무 관계에 놓이지 않은 가문이(여섯 왕가를 포함해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타티안 후작가로 전(全)대륙의 재화가 일시적으로 쏠렸음을 뜻한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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