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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69

366. 레나 Ep – 나쁜 놈들

“시, 싫어! 난 못 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다른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꼭 해야 해?”

레브가 내게 얼토당토않은 짓을 요구했다. 난 완강히 거부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되려 내 어깨를 잡으며 눈을 마주쳐 와서, 나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해야 돼.”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난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마음을 다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브가 날 꼭 끌어안고는 등을 두드려 줬다. 그것이 약간의 위로가 돼서, 고개를 들었다.

“도, 도와줄 거지?”

“그럼. 물론이지.” ─ 레브는 흔쾌히 말했다. 나는 옷을 갈아입으러 도로 마차에 올랐다.

…의식의 날에 입었던 사제복을 여기에 넣어 놨던가.

사제복에도 종류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수브타나(subtana)’라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단추의 유무와 개수가 다르고 어떤 건 자수가 새겨지기도 했다.

여성 사제는 아랫단이 치마로 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사제복의 종류가 다양한 까닭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절(제사 시기)에 따른 의미를 담기 위함이었다.

이를테면 봄.

봄은 고결한 희생의 여신, 보아르 님의 계절이다.

그분이 머리에 얹고 계시는 가시 면류관을 상징하도록 봄에 입는 사제복 허리에는 테두리가 그려졌다.

때로는 면류관을 그려 넣기도 하지만, 보통은 포근한 봄에 어울리는 꽃무늬를 자수로 새겨넣었다.

다음은 여름.

여름은 인내와 헌신의 신인 나메르 님의 계절이다.

남쪽에 거하신다고 알려진 그분의 계절은 역시 덥다. 바람이 바다에서 대륙으로 몰려 들어오는 들넋바람의 시기이기도 해서 높은 기온과 습도를 견딜 수 있도록 이때는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었다.

소매가 넓고 허리띠가 따로 주어지는 옷이다. 단, 색은 흰색이나 회색 같은 무채색이어야 하며 장식을 추가해선 안 됐다.

그리고 가을.

가을은 악행을 계도하는 신인 비나르 님의 계절이다.

과실이 무르익어 풍요로운 이때엔 부정한 것을 몰아내고 복을 불러와야 하므로 가을 사제복은 특히 화려하게 만들어졌다.

이때는 색깔에 제약이 없다.

제사를 올리는 지역 풍습에 맞춰 가장 복스러운 색상을 고를 수 있었고, 단추가 주렁주렁 요란스럽게 달렸다. 이 단추들은 장식을 부착하는 데에 요긴하게 쓰였다.

“여기 있네.”

의식의 날에 입었던 사제복을 의류 케이스에서 찾아 꺼냈다.

의식의 날은 가을에 열리는 데다가 성직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때 배급된 사제복은 그 어떤 사제복보다도 예뻤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는 어깨에는 (보온과 장식을 위한) 숏 케이프1)를, 소매에는 ‘소매 토시’를 부착했다. 치마는 더 손댈 곳 없이 화려하다.

사실 지금은 겨울이라 라차르 님을 기리기 위한 사제복을 입는 게 맞지만… 어쩔 수 없지.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서는 옷차림이라도 화려한 게 좋을 터였다.

더욱이 상대는 토착민이라니까.

나는 방금까지 입고 있던 동절기 사제복을 의류 케이스에 고이 접어 넣었다.

옷이 너무 두꺼워서 케이스가 안 닫히길래 위에 걸터앉고는 발꿈치로 밀었다. 제발 좀 들어가라. 쫌!

마차 안, 좁은 공간에서 한참을 발버둥 친 끝에 케이스를 의자 아래에 도로 넣는 데 성공했다.

휴. 이게 뭔 개고생이람.

나는 신발도 의례용 신으로 갈아신고, (화장이 지워지지 않았는지도 확인하고) 지팡이는 물론 황동 술잔까지 챙겨 들었다.

손이 가득 차서 문은 팔꿈치로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레브가 달려와선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레아, 얼른. 이러다 지나가겠…”

“아 쫌!”

순간 혈압이 올라서 나메르 님의 가르침을 잊어먹었다. 깜짝 놀란 레브를 뒤로하고 씩씩,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목표에 다가설수록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어… 어어. 진짜 해? 지금?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인적 드문 곳에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 젠장…… 눈 마주쳤어.

이젠 틀렸다. 하는 수밖에.

나는 우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성녀님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러고는 활짝 팔을 벌리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용사님! 전 당신이 오시기만을 기다렸답니다!”

정적이 흘렀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지려 할 때 목표는 뒤를 돌아보곤 자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요? 저한테 한 말이에요?”

“네 용사님! 저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당신을 도와 악을 물리치라는 계시를요!”

어렵게 끌어 올린 입가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레라 아이나르.

이 사람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레이라는 놈이 그녀의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나, 나쁜 사람!

속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뱉으며 표정을 관리했다. 이제는 날 완전히 사기꾼 바라보듯 하는 레라 씨에게 서둘러 말을 붙였다.

“요, 용사님을 도와줄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랍니다! 소개해드릴게요. 먼저 여기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역시 일행을 소개하는 게 가장 좋겠지.

레브! 빨리 나 좀 도와ㅈ…

레브를 소개하기 위해 돌아섰을 때였다. 나는 보고 말았다. 그의 입가도 움찔움찔 떨리고 있는 것을.

‘…개새끼들.’ ─ 행인이 우글거리는 오르빌 북문 앞 호숫가에서 나는 생각했다.

전부 다 나쁜 새끼들이라고.

* * *

“말 걸지 마.”

“미안해. 그래도 잘 됐잖아.”

“말 걸지 말라고 했어.”

우리의 용사님께서는 약혼한 분과 함께 방에 올라가셨다. 긴 대화로 인해 한껏 어질러진 식탁 앞에서,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그리고 너무 화가 난다.

나는 얼굴을 감싼 채로 물었다.

“…안 이래도 됐던 거잖아…”

“응? 레아야 미안. 못 들었어.”

“안 이래도 되는 거였잖아!!”

– 쾅!

식탁이 덜컹 흔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식탁을 쳐버린 걸 후회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다들 자러 올라갔는지 식당에는 투숙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너 알고 있었지?”

“…뭘?”

“레라 님이 널 알아볼 거란 거. 아… 생각해보니깐 당연한 거였네.”

우리의 용사님, 아니, 레라 아이나르 님은 내가 레브를 소개한 순간 소리쳤다.

“어?! 넌 그때 그놈이잖아! 우승자!” ─ 라고. 삿대질하며.

그러니까 이 새ㄲ… 아니, 레브한테는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그녀를 꼬드길 방안이 있었던 거다. 레브는 넉살 좋게 말했다.

“이게 가장 스무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잘하던데? 연기 실력이 크세니아도 울고 갈 만큼 훌륭했…”

“입 다물라고 했다.”

“합.”

레브는 제 입술을 얄밉게 오므려 닫았다. 입술만 쏙 들어간 저 입을 때려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앞에 놓인 음식을 깨작거리다가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계획이 뭐야.”

“잠깐만. 레이가 곧 레라 재워놓고 내려올 테니까 그때 얘기하자.”

“레라?”

“…말이 헛나왔네. 레라 씨 재워놓고 내려올 거야.”

“조심해.”

“미안.”

그제야 레브도 희희낙락하던 걸 멈추고 조용해졌다. 나는 그가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내버려 두었다.

침묵. 이윽고 레이 씨가 내려왔다.

“…”

“…”

“…”

그는 분위기를 잘 파악하는 편인지 와서는 조용히 앉았다.

나와 레브를 번갈아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했다.

레브한테야 평생의 동료일지 몰라도 내겐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쯤에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레라 님은 주무시나요?”

“네.”

“엄청 빨리 잠드시네요. 우리 용사님은.”

“하하. 그런 편이죠. 그건 그렇고…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레이 님도 웃음 참느라 고생하셨어요.”

“…죄송합니다.”

“레이 님이 오시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레브, 말해 봐.”

“응…”

레브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려 하는데 숙소 주인장이 와서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물었다.

레이 님이 그에게 은화 한 줌을 쥐여주었고, 우리는 어느덧 빛을 잃어가는 랜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누가 들었으면 반역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오해할 내용이었다.

“레안이 판은 다 짜 놨어. 지금쯤 포르테 백작이 아이셀 왕국이랑 협정을 맺고 돌아오는 중일 거야.”

“패전이지?”

“아마도. 내가 떠난 사이에 전황을 뒤집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마법에 의한 병력 손실이 너무 커서 문책을 피하긴 힘들어.”

“그게 왜 중요한데?”

내가 물었다.

레브가 저 전쟁에 끼어들었던 까닭은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란 사람이 너무 일찍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들었다.

한데 지금 듣자 하니 다른 의도가 또 있었나 보다. 레브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악신을 잡으려면 사람이 많아야 하거든. 우리가 오리아스를 잡았던 거 기억나? 그때도 사람이 많을 때 쳐들어갔잖아.”

“아아. 꿈으로 살짝 봤어. 결혼식 날이었던가? 아무튼, 그래서?”

“응. 이번에도 왕궁에 사람이 많이 모이게 하고 싶었어. 아스타로트를 잡을 때 도움을 받으려고. 그런데 사람을 많이 모을 방법이 마땅치가 않더라구. 우리 셋 다 외국인이다 보니 더더욱.”

“우리 셋?”

“나랑 레이랑 레안. 여튼 그래서 레안이 꾀를 냈지.”

그 이웃 나라 왕자님 말인가.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떠올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꿈에서 본 아주아주아주아주 근사하게 생긴 청년을.

그는 확실히 머리가 좋아 보였다.

“바로 이 나라의 정계 상황을 이용하자는 거였어. 벨리타 왕국은 베나르 타티안 후작이 이끄는 왕당파랑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이끄는 소드마스터 파벌로 갈려 있어.”

“그래?”

“응. 개중에서 소드마스터 파벌이 정권을 쥔 상황이지. 그런데 만약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음… 아귀다툼이 일어나겠지.”

“그렇지. 왕당파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거야. 소드마스터 파벌의 귀족들은 포르테 백작을 두둔하려 들 거고. 아마 포르테 백작이 돌아오는 날 귀족들이 왕궁에 몰려들 건데, 레안은 그 아귀다툼을 부채질할 방법까지 마련해 놨어. 그게 바로…”

“바로?”

레브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레안 드 예리엘 왕자님이 여기 오르빌에 행차할 거야. 헤르만 포르테 백작이 패해서 돌아온 날, 클로에 공주를 만나러.”

“…아!”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놈들은…

“너무하네. 그러니까, 이번 전쟁이 그 공주님 때문에 벌어졌던 건데 또 다른 왕자가 그 공주를 만나러 오는 거잖아. 시민들은 자칫하면 또 전쟁이 터지겠다고 생각할 거 아냐.”

레브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기가 낸 계책은 아니지만,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렇지. 심지어 레안은 베나르 타티안 후작과 동행할 거야. 그러면 왕당파 귀족들은 당혹스럽겠지. 소드마스터 파벌이 이걸 어떻게 해석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레안이 입궐한 날,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이 궁으로 몰려들 거라는 건 장담할 수 있어.”

“그럼 우리는 아스타로트의 탈을 벗겨낼 준비가 된 거고요.”

“……”

나는 놀라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수천의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과 한 나라의 정파 싸움을 고작 저들의 계략이 설립할 환경으로 여기고, 높디높은 귀족 나리들을 일개 병졸로 다루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나는 이들이 얼마나 격한 아수라장을 겪어 왔는지

조금이나마 느끼고 말았다.

1) short cape: 망토의 일종. 어깨에서 가슴께까지를 덮는다. 이것보다 길면 롱 케이프로 분류된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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