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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9

39화 발현 (1)

39화 발현 (1)

족제비다.

빌어먹을 족제비의 목소리다.

시이잇!

작고 어두운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날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것을 봤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 왔어.”

세실이 나를 보며 미소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세실의 몸이 어둠으로 덮였다. 블레오파드의 블러디드, ‘그림자 결속’이다.

힘을 드러낸 세실이 적진을 종횡무진했다. 신기한 점은 단검이 아닌, 검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디에선가 족제비도 계속 화살을 쏴댔다. 나는 조금 감탄했다. 세실도 세실이지만, 족제비의 활 솜씨가 정말 놀라웠다.

“데미안!”

나는 히죽 웃으며 족제비에게 마주 외쳤다.

“닥쳐! 족제비!”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

.

.

“너는······ 누구냐······.”

지면에 드러누운 레오네가 세실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과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렀다.

주위에는 붉은 폭풍 용병들이 고통에 신음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족제비가 오들오들 몸을 떨며 그들을 경계했다.

나는 레오네의 목에 칼날을 밀어 넣었다.

“크륵······! 큭······!”

발작하듯 몸을 떨던 레오네는 곧 숨이 끊어졌다.

“마무리는 내가 할게. 세실.”

지친 몸을 이끌며, 나는 아직 살아있는 적의 숨통을 차례로 끊었다. 죽음을 향한 단말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는 상처 입고 쓰러져 더는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 명 한 명, 그들의 몸에 검을 꽂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래야 레벨업을 위한 경험치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세실이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봤다. 족제비는 자리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저런 겁쟁이 주제에 잘도 화살을 쏴댔구나, 족제비야.

마무리를 지은 나는 내 회색마를 찾아 끌고 동료들에게 갔다. 발 빠른 적색마로 갈아탈까 잠시 생각했지만 눈에 띌 것 같아 그만두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도미닉을 포함한 검은 갈기 동료들의 시체를 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돌연 세실이 말했다.

“거짓말쟁이.”

***

세실은 데미안이 적장의 목에 검을 꽂는 것을 봤다. 이어 데미안은 전장을 돌아다니며 아직 살아있는 자들의 숨통을 차례로 끊었다.

그냥 두었어도 어차피 죽을 이들이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 있으면 집요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사뭇 광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잠시 후,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데미안이 회색마를 끌고 다가와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세실은 알아챘다.

데미안은 거짓말쟁이다.

‘사람 죽이는 거, 나는 별 감정 없어.’

‘아무렇지. 않아?’

‘응. 아무렇지 않아.’

역시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데미안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적들을 죽인 후 저런 안타까운 한숨을 뱉는 거겠지.

그렇다면 왜 데미안은 굳이 제 손으로 그들을 죽인 걸까. 내버려 두면 어차피 과다출혈로 죽을 자들이었는데.

‘······!’

세실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데미안이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며 적의 숨통을 끊은 이유.

‘나 때문이야.’

적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건 세실이다. 세실은 그들을 공격하며, 이전에 죽였던 두 기사의 얼굴이 떠올라 차마 숨통을 끊지 못했다. 그래서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만 상처입혔다.

얄팍한 조처였다. 눈앞에서 적의 죽음을 마주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피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세실, 자신이 그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이 손을 썼다.

‘데미안은 나를 배려해 준 거야.’

살생을 주저하는 세실을 위해 데미안은 제 손에 피를 묻혔다. 그 행동의 결과로, 그는 괴로워하고 있다.

모든 상황을 깨달은 세실은 물끄러미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떠올렸다. 이전에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이가 있었다.

‘레이븐.’

세실은 데미안에게서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투정 부리듯 말했다.

“거짓말쟁이.”

***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지쳐서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나는 세실과 족제비에게 적당한 말을 골라오라고 했다. 눈치 없이 족제비가 적색마를 끌고 오길래 한 소리 하려 했더니, 세실이 먼저 나서 족제비의 이마를 손날로 때렸다.

족제비가 이마를 매만지며 달아났다.

세실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데미안.”

“응?”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하지만.”

세실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아도. 돼.”

뭐를.

“레이븐.”

“레이븐?”

“그때. 일로. 충분해.”

그때 일?

“나. 달라질.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러니까. 데미안.”

세실이 훌쩍 말 위에 올라탔다.

“고맙지만. 괜찮아.”

나를 보며 세실이 웃었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눈부시게 환한 미소였다.

잠시 후 족제비가 다른 말을 골라왔다.

“근데 데미안. 쿠는?”

“며칠 전 소드마스터를 막으러 중부 전선으로 떠났어.”

“소, 소드마스터?”

“다행히 소드마스터는 물러난 모양이야. 그런데 이후 쿠의 소식을 듣지 못했어.”

족제비가 울상이 됐다.

“서, 설마 죽은 거야? 쿠가?”

하지만 세실이 손날을 세워 들자마자 제 입과 이마를 가리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나도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 왜 여기 있는 거야?”

세실이 설명을 시작했지만, 곧 족제비에게 차례가 넘어갔다. 족제비는 세실의 눈치를 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는 족제비가 스스로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족제비는 ‘의리’와 ‘의외의 용기’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그래서 세실이 나를 업고 성벽을 넘은 다음에······.”

족제비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특히 족제비는 여기까지 걸어 오느라 죽을 고생을 했으며, 세실이 자신을 아주 많이 힘들게 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물론 그때마다 세실에게 손날로 얻어맞긴 했지만.

나는 족제비와 세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이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테니까. 세실은 미소 지었고, 족제비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로. 가.”

“쿠를 찾아야지. 하지만 그전에 조금 쉬어야겠어.”

오랜 전쟁과 직전의 소란으로 나는 많이 지쳤다. 세실과 족제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마침 족제비가 말을 타고 수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마을이 있다고 했다.

세실도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말을 달렸다.

***

눈을 뜨자 창밖에는 달이 떠 있었다.

이른 아침에 마을 여관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침대에 뒤얽혀 쓰러졌다. 이후 죽은 듯이 잠들었던 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회복력’ 특성 덕분인지 몸 상태는 제법 호전됐다.

세실은 내 팔을 두 손으로 꼬옥 붙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족제비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언제 침대에서 떨어졌는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

조심조심 세실의 팔을 떼어낸 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지난밤의 일이 꿈결처럼 멀게 느껴졌다. 며칠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다.

시스템 창을 열어봤다.

그제야 나는 지난밤에 리메이크 스킬이 발현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현 플레이어 레벨(Lv.30)에서 스킬 발동을 위해서는 최소 30의 RP가 필요하다.]

붉은 폭풍 용병단과 싸우며 나는 레벨업했다. 줄곧 29레벨의 벽을 넘지 못하다가 기적적으로 30레벨이 된 것이다. 하지만 30레벨이 되며 리메이크 스킬을 발현하기 위한 최소 RP 보유량이 20에서 30으로 늘었다.

◎ RP: 21

그래서 21의 RP로는 리메이크를 발현할 수 없었다.

‘그랬던 거군.’

앞으로는 이 부분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 사실 예측 못 할 부분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이 모자랐을 뿐.

나는 세실과 족제비에게 통찰을 시전해 봤다. 세실은 딱히 달라진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블레이드도 여전히 봉인된 채였고.

그런데 족제비는 달랐다.

————————

◎ 조아킴 데샹 [13세], [Lv.24]

◎ 속성: 없음

◎ 특성: [의리], [충성심], [울보], [의외의 용기], [활의 재능]

◎ 적성: [창술 Lv.1], [도끼술 Lv.1], [투척술 Lv.2], [검술 Lv.1], [궁술 Lv.2]

◎ 일반 스킬: [빠른 사격 Lv.1]

◎ 전용 스킬: [정밀 사격 Lv.1]

————————

이것이 정녕 내가 알던 족제비라는 말인가.

일단 레벨이 24다.

내 기억에 마지막으로 봤던 덩치의 레벨이 22였던 것 같은데, 족제비는 그때의 덩치를 뛰어넘었다.

‘궁술 적성도 2레벨이고.’

그것만이 아니다.

빠른 사격(Lv.1)과 정밀 사격(Lv.1) 스킬이 생겼다.

어쩐지 붉은 폭풍 용병단을 잘도 쓰러뜨린다 했더니, 못 본 사이에 족제비는 이렇게나 큰 성장을 이룬 것이다.

‘세실이 정말 많이 괴롭힌 모양이네.’

족제비의 하소연을 통해 유추했었다. 세실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녀석에게 강제로 훈련을 시켰을 거다. 사냥도 족제비가 도맡았을 테고, 간혹 도적이라도 만나면 죽기 직전까지 시험당했겠지.

족제비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하자,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잠든 녀석의 뒷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일으켜서 침대에 뉘어줄지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왠지 녀석을 세실의 옆에 눕히기 싫었다.

‘그건 그렇고, 잘도 자네.’

나는 세실과 족제비를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불과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광산에 있었다. 왼쪽 가슴에 번호를 달고, 이른 아침부터 갱도의 탁한 공기를 마시며 노동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 이전의 족제비는 툭하면 밥을 굶어야 했겠지. 이 몸의 원주인인 데미안 때문에. 그래서 나를 금발 약골이라 부르며 비난했었고.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겁이 나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도 나를 돕겠다고 달려왔다. 나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러고 보니 족제비와 테오는 언제부터 광산에 있었을까.

“어이. 금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숨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나를 덮치는 듯한 한기. 나는 천천히 눈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봤다.

낡은 창틀 아래, 달빛마저 잠식해 버릴 듯한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긴 흑발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같았고, 차가웠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체도 그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일까. 세실도, 심지어 먼지마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쉿.”

사내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가며 살짝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의 미소를 흉내 내는 다른 ‘무언가’ 같았다. 나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통찰을 쓰는 것도 위험하게 여겨졌다.

사내는 잠든 세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어 족제비의 뒤통수를 보고, 다시 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 마라.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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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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