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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3 치킨게임

아침 일곱 시, 주번이라는 이유로 일찍 등교한 성현은 교무실에 들러 반 열쇠를 찾았다. 2학년 7반, 7반… 7반 열쇠만 제자리에 걸려있지 않았다. 누가 나보다 먼저 도착했나?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교무실을 빠져나와 제 교실로 걸어 올라갔다.

“경수?”

반장이거나 운동부 학생일 거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불이 켜져 있는 반에 힘없이 널브러져 있던 것은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 김경수였다.

“너 경수 맞아?”

“…….”

“김경수! 네가 웬일임?”

성현은 칠판의 ‘지각한 사람’ 아래 적힌 경수의 이름을 손바닥으로 문대 지웠다. 경수의 이름은 칠판에서 지울 일이 거의 없어, 청소를 하면서도 지우지 않았다. 성현은 경수가 지각을 하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일곱 시도 안 돼서 등교했다는 사실이 놀라워 내내 종알거렸다.

“닥쳐….”

“왜 지랄이야?”

“시끄럽다고.”

경수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성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수에게 말을 붙였다. 책상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묻고 있던 경수는 끈질긴 성현 탓에 고개를 홱 쳐들었다.

“씨발, 잠 좀 자자!”

“너 눈이 왜 그래?”

“…몰라.”

경수의 눈 밑이 퀭했다. 눈도 조금 풀려 있었고, 어딜 봐도 어젯밤에 잠을 푹 잔 애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 자라, 자!”

성현은 경수의 머리를 잡아 다시 책상에 엎어 놓았다. 경수는 화를 낼 기운도 없는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금세 단잠에 빠져들었다.

*

아직도 꿈만 같았다.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면 다시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

그럴 리가 없다. 헛된 희망을 품어봤자 어젯밤에 벌어진 일은 모두 현실이었고, 피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니까, 얼떨결에 천노을의….

“…고추잡채.”

“씨발!”

내내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욕을 하는 경수를 바라보며 태열이 얼굴을 찌푸렸다.

“씨발? …갑자기 왜 그래? 돌았냐?”

“방금 뭐라고 했어?”

“뭐, 고추잡채? 오늘 급식 메뉴인데.”

“…아, 미안.”

고추잡채…. 고추가 아니었다고…? 경수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렸다. 특정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가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되니 죽고 싶었다. 아직도 손에서 펄떡거리던 그게 생각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먹을 거 하나도 없어. 우리가 염소도 아니고 어떻게 풀만 먹고 살아? 교장 횡령하는 거 아냐?”

“몰라…….”

경수는 오늘 하루 종일 넋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국어 시간에 시를 읽어보라는 말에는 엉뚱한 영어 교과서를 펼쳤고, 창밖을 바라보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기도 했다. 음악 시간의 리코더 수행평가에서는 대충 하는 듯하면서도 구슬픈 멜로디를 잘 살려 A를 받았다. 오늘 하루, 경수는 시험을 보거나 선생님들이 부러 깨우지 않으면 종일 엎드려 잠을 잤다.

그런 경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도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실연이라도 당했어?”

“실연….”

실연? 실연이 뭐더라…. 혼잣말처럼 멍청하게 중얼거리던 경수는 실연의 뜻이 떠오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영을 바라봤다. 그 반응에 도영은 제 말이 맞다고 해석한 듯했다. 경수야…. 그는 짠하게 중얼거리며 애처로운 눈으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경수의 어깨를, 태열이 툭툭 두드렸다.

“위로하지 마!”

경수가 어깨를 홱 털어냈다.

“위로? 그게 아니라. 너 문자 온 것 같아서.”

“…….”

“진동 소리 났거든.”

경수는 휴대폰이 들어있어 불룩한 제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캐삭빵을 뜨고 난 뒤니 커뮤니티 반응도 봐야 하고,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도 정말 궁금한데….

“안 봐?”

“기다려 봐.”

경수는 입을 다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갑고 딱딱한 휴대폰이 손에 잡혔다. 당장 꺼내 들고 내용을 확인하면 된다.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천노을의 연락이 와 있을까 봐. 그게 두려웠다.

「어젯밤 기억나?」

“…….”

툭.

내용을 채 다 읽기도 전에 휴대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너무 놀라 손의 힘이 다 풀린 탓이었다. 경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오빠 우리 뜨♨거웠잖아♨ 놀러 와용^^♡ ㄱr입 즉ㅅi 포인트 1o만,원 지급★ ☞ www.****.**」

“…….”

야, 이 할 짓도 없는 개새끼야 이런 좆같은 문자 또 보내면……. 경수는 세상의 모든 욕을 긁어모아 답을 보내고 난 뒤 낯선 번호를 스팸 차단했다. 밀린 메시지들은 모두 쓸데없는 내용뿐이었다. 길드 톡방에서는 말도 없이 잠수를 타는 실패망에 대한 질책이 쏟아졌고, 자유게시판의 링크 몇 개를 보내어왔다. 하지만 노을에게 온 문자는 단 한 통도 없었다. 부재중 전화도 단 한 통 오지 않았다.

“…….”

설마 나만 신경 쓰는 건가? 경수는 눈을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새벽에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노을은 미소를 머금고 잠이 들었다. 조명에 비친 그 후련한 얼굴은 한 달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와는 다르게 경수는 단 1초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 다섯 시,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시곗바늘이 1분에 한 칸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를 한 시간 정도 더 듣고 있던 경수는, 여섯 시가 되자마자 살금살금 일어나 겨우 마른 교복을 주워 입었다. 숨죽여 가방을 메었을 때 노을이 일어나려는 듯 방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경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경수야 너 진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냐고?”

있기야 했지. 경수는 시선을 피하며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진짜 차인 거야?”

“그건 아냐.”

경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 대한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을 아끼는 경수를 추궁하듯 질문을 쏟아부었다.

‘내가 무려 어제 한 살 어린 남자애랑….’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강제로 말을 아꼈다. ‘어제 일을 떠올리면 기분이 어떠냐’는 말에, 경수는 가만히 서서 생각해보았다.

“좆같아….”

그 말 말고는 이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다.

「ㅊㄴㅇ: 형, 끝나고 봐요.」

그때 화면이 밝아지며 메시지 미리 보기 창이 떴다. 이번에는 스팸 문자도, 다른 사람도 아니라 천노을에게서 온 게 맞았다. …그런데 나를 봐서 뭐 하려고? 어제 일에 대한 해명이라도 하려는 건가? 생각이 많아질수록 머리는 더 아팠다. 고민이 있으니 밥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경수는 단단히 체해 보건실에서 약을 받아먹어야 했다.

*

노을은 학교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헛수고일 것 같다는 예감에 경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수가 똥 씹은 표정으로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노을이 환히 웃었다.

“가요.”

“……?”

가자니, 어디를? 노을은 경수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걸으면서도 경수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디 카페라도 들어가서 얘기하려는 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굳이 장소까지 옮긴다는 거야? 오만 생각을 하던 경수는 뒤늦게 이 길이 노을의 집에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천노을, 잠깐만. 어디 가는 거야?”

“저희 집이요.”

“……?”

아, 집에 가서 얘기하려는 건가? 하긴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길거리에서 ‘어젯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다. 노을의 집에 도착한 경수는 어제와 같이 컴퓨터를 켜고 그 앞에 앉았다. 게임에 접속하면서도 경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체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기다리며 말이다. 하지만 노을은 어젯밤의 ‘이응’자도 언급하지 않고 오늘 조금 춥지 않냐는 말을 하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네?”

“야, 빨리 말해.”

“무슨 말이요?”

“……?”

역으로 들어온 질문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일단 얼굴을 보게 되면 천노을이 먼저 어제의 일을 꺼낼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그 상황에 대해서만 걱정했을 뿐이라, 노을이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과를 하든가.”

“네, 죄송해요! …그런데 왜요?”

“왜인지 모르는데 왜 사과를 해?”

경수는 미치겠다는 듯 이마를 잡았다. 노을은 경수의 속이 타든 말든 눈을 멀뚱거리다 ‘아!’하는 탄성을 내뱉으며 배시시 웃었다.

“형 설마 어제 일 신경 쓰시는 거예요?”

머리가 굳었다.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해서 경수는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뭐? 내가?”

“그럴 수도 있죠.”

“……?”

“저는 괜찮아요.”

경수는 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그게 저 새끼 입에서 나올 말인가?

“야, 천노을.”

“좀 당황하긴 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하지만 잠결에 그러신 거니까 저도 별말 안 할게요.”

노을은 선심 쓰는 듯 눈을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주도권을 빼앗기는 느낌에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내가 어제 사과했잖아.”

“어? 그랬나?”

“그랬어! 잠깐만,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네, 그랬다고 쳐요. 전 괜찮아요….”

“아니! 내가 안 괜찮아!”

괜찮고 말고를 결정짓는 건 제 일이었다. 경수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경수를 바라보는 노을의 시선에 감격이 담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경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본론을 꺼냈다.

“이거, 꼭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해. 찝찝해서 하루 종일 신경 쓰였다고.”

“하루 종일… 제 생각을요…?”

경수는 무의식중에 노을의 아랫도리를 슬쩍 내려다보다, 그런 자신을 자각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어제 일 때문에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그는 손을 들어 뒷목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야, 보통 …만진다고 서지는 않잖아? 그것도 잠결인데.”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만지면 당연히….”

“알았어!”

경수는 노을이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중간에 말을 끊어버렸다.

“그래도 그걸 내가 대신… 그, 럴 필요가 있었냐는 거야.”

생각만 해도 꺼림칙하다는 듯 경수가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형이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너 나 좋, …좋아한다며?”

“네, 아마도요?”

“미안, 근데 나는 너 안 좋아해. 전혀.”

단호한 말에, 노을은 경수를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유순한 얼굴에 그림자가 지자 경수는 제가 대역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저 희망을 주지 않기 위해 초장에 딱 잘라 거절한 것뿐인데 말이다.

경수의 머릿속에 문득 전설 펫 분양권 생각이 스쳤다. 이 새끼 삐져서 나한테 그거 안 넘기면 어떡하지? 시무룩해진 천노을을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수가 입을 떼기도 전에 노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아니? 나는 사람이 싫어.”

“없다는 거네요.”

“…그렇지, 아직은.”

따지자면 그렇다. 경수는 말을 아꼈다. 여자친구가 없다고 해서 자신이 초라하고 비참해지는 것은 아닌 데다, 아예 사귀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노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수의 눈을 묵묵히 바라보다 입매를 비틀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맹수의 눈빛이 저런 걸까. 순간 팔에 돋는 소름에 경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전 이대로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이대로가 뭔데?”

“말 그대로예요. 지금 관계로도 괜찮았다고요.”

“지금 관계가 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뭔가 묘하게 기분 나쁘네요. …진짜 짜증 나.”

노을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 라면서 중얼거렸다. 꼭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수는 입을 다문 채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결론을 내린 노을은 명쾌하게 말했다.

“형도 절 좋아하시면 되겠네요.”

“콜록!”

청천벽력 같은 말에 숨이 목구멍에 걸렸다. 경수는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해댔다.

“난 여자만 사귄다고!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이렇게 개방적인 나라가 된 거냐? 난 남자는 별로야!”

“네? 전 사귀어달란 말 한 적 없어요.”

“뭔 소리야. 너 나 좋아한다며.”

“네. 그러니까 이제 형도 절 좋아하시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뭐?”

“어차피 지금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면서요. 네?”

“미친, 소름 돋아. 싫어.”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노을은 경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손을 뿌리친 경수는 현관문으로 도망치려다 노을에게 가로막혔다.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같은 속도로 천천히 다가오는 노을에 경수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그는 뒤돌아 노을의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나와요.”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경수는 공포영화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재빨리 최근 통화목록에서 아무 이름이나 골라 전화를 걸었다. 동시에 창문을 옆으로 확 열어젖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경수는 미약한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아니, 고소공포증은 없더라도 여기서 대뜸 뛰어내릴 미친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보세요?

“도영아, 여기가 지금… 10층인데.”

-…갑자기? 어디 10층?

2층 정도면 뛰어내려 볼 만할 텐데 10층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경수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까?”

-……뭐?!

아무리 봐도 어디 하나만 다치는 정도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망치려면 창문밖에 없는데…. 영화에서처럼 벽을 잡고 내려가는 것도 제게는 어려웠다. 문은 계속 덜컹거리다 말고 천노을이 열쇠를 찾는지 문 너머로 바쁜 발소리가 들렸다.

-김경수, 미친 새끼야! 거기서 왜 뛰어내려, 뛰어내리긴! 10층이면 당연히 죽지, 그걸 말이라고 해?

“미친 건 내가 아니야.”

“형, 문 열어요.”

열쇠 꾸러미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건 저 새끼지! 경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수화기 너머에서 도영이 황급하게 제 이름을 부르짖었다.

-경수야, 안 돼. 아까 말하던 그 일이야? 심각한 거였어? 일단 극단적인 생각하지 말고 네 부모님을 생각해봐!

“했어….”

-그럼 이제 뛰어내리고 싶지는 않아졌어?

“아니, 이 길밖에 없어. 살려줘.”

-아! 씨발, 너 어디야! 빨리 말해!

“10층….”

망연하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문에 열쇠가 하나씩 들어가 헛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일 분도 안 돼서 잡히겠지. 얼떨결에 도망친 건데 방에서 나가기가 도통 쉽지 않았다. 경수는 시한부 인생이 이런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야! 전화 끊지 마, 뛰어내리지도 마! 경수야, 죽으면 안 돼! 네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뭐라는 거야? 나 안 죽어.”

-……안 죽어?

“뭔 소리야? 내가 왜 죽어? 너 뭐 잘못 먹었냐?”

-…….

딸깍, 열쇠가 맞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뒤를 돌자 노을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경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미쳤냐, 뒤지고 싶냐, 내일 마우스피스라도 차고 와라, 그리고 기타 쌍욕들….

“아, 알았어. 미안해. ……응, 놀라게 해서 미안. 아니… 그냥 최근 목록에 있어서. ……응, 미안.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노을은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는 경수 옆에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소란 끝에 전화가 끊어지고 나니 이 일의 원흉인 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도망을 쳐요, 겁쟁이처럼.”

“겁쟁이라니? 누구든 이 상황이었으면….”

“전 안 그래요.”

“그래, 너 잘났다.”

경수는 진심으로 비아냥거렸다. 하필 도망을 치려 해도 천노을의 집 안이라, 어차피 처음부터 경수는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긴장이 풀리니 머릿속이 텅 비었다. 경수가 한숨을 폭 내쉬자 노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형,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꺼져. 죽어도 안 해.”

“질까 봐 그러는 거죠.”

“…….”

이 새끼가.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것 같은 어조에 경수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형, 질까 봐 겁나요?”

분명했다. 이건 도발하는 것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난 안 한다고 했다.”

“들어라도 보세요. 진짜 별것도 아니니까. 뭔지도 모르면서 피하기부터 하면 이도 저도 안 돼요.”

“…….”

분명 이상한 내기일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경수는 어디 한 번 얘기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노을의 입이 열리는 순간부터 말이 끝날 때까지, 대수롭지 않게 듣고 거절하려던 경수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이게 무슨 또라이 같은 소리야…? 이러면 너만 좋은 거잖아.”

노을이 제시한 내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정 기한 내로 경수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겠다는 것. 경수는 당연히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학을 뗐다.

“알아요. 당연히 제가 이기겠죠?”

“그럴 리가 있겠냐?”

“자신 없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노을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놀리는 것 같은 태도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자신 없기는 무슨! 당장 천노을이랑 무슨 게임을 해도 경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경수는 그만큼 게임이나 내기 따위에 강했고, 승부욕도 있었다.

“해! 언제까지?”

“음, 일 년이요.”

“아, 싫어. …그럼 안 할래.”

“일 년 정도면 제가 좋아질 것 같아서 그런 거죠?”

“아니? 내가 널 일 년이나 만날 용기가 안 나서 그런 거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부터 형은 이미 진 거예요.”

“너랑 말하다 보면 내 정신까지 다 이상해지는 것 같아. 너 진짜 이상해. 알아?”

“전 모르죠. 그건 그렇고 저한테 그런 말 하는 건 형이 처음이에요.”

경수의 머릿속에서 흔한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 대사가 스쳐 지나갔다. ‘큭큭, 내게 이런 말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 그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제비 같은 남자 주인공에게 발이 묶여 끔찍한 연애 결말을 맞았다.

“…내가 이기면, 네가 깔끔하게 나를 피해 다닌다고 약속한다면.”

나는 괜찮겠지. 내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이기면 저 귀찮은 놈을 게임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보지 않을 수 있어. 경수는 안일하게 생각하며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발걸음을 들였다.

“약속할게요.”

“우연이라도 마주쳐서는 안 돼. 절대.”

“좋아요, 형이 이기면요. 대신 내기 기간 도중에 절 피하면 기한을 늘일 거예요.”

“…….”

그건 좀 싫은데. 경수는 떨떠름하게 시선을 내렸다.

“만약 내가 싫다고 하면?”

“이미 하시는 쪽으로 마음 기우셨으면서.”

“…….”

“약속?”

노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거기에 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다. 그날 밤 경수는 목에 목줄이 채워지는 꿈을 꿨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끈을 쥐고 있던 건 천노을이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뒤를 돌아보면, 아까와 같은 거리에서 노을이 환히 미소 지었다. 일어나보니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소름 끼치는 꿈이었다.

*

밀린 글 중에서 댓글이 그나마 달린 것들을 싹 읽어 내렸다. 결국 패왕1은 캐릭터 삭제는커녕 뻔뻔하게 길드원 모집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제목: ★주목★ 패망 또 길모 한댄다 뉴비들아 거기 들면 길 가다 통수 맞음

작성자: 전사한전사/전사

내용: ㅈㄱㄴ 최고 노간지 길드임ㅋㅋㅋㅋ 이유는 검색하면 27288191개 나와ㄱㄱ 추천 좀 메인에 띄워서 다들 보게 해줘

아 자매품으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있음ㅋㅋ 둘 다 길드존에서 이유 없이 칼빵 존나 맞으니 뉴비들은 주의할 것

(4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병신아 뉴비가 여길 왜 와

└맞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 수도 있지 나도 뉴비야

└라고 고이다 못해 썩은 물이 말했다

뭔가 이럴 것 같기는 했는데…. 패망이 또 언제 쿨타임이 차서 다시 시비를 걸어올까 궁금해졌다. 한 달도 안 돼서 다른 사람을 하나 붙잡아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다. ‘꾸준한 행보 상’이 있다면 대상부터 장려상까지 모두 패망이 휩쓸어갈 게 뻔했다.

제목: 오늘자_캐삭빵_PVP_실황_.avi

작성자: ㅈi9별/나이트 스피어

내용: (동영상)

ㅅㄱㅅㄱ

(189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1빠

-고마워ㅎㅎ

-??단체프븝을 개인전처럼 해도 이기는구나….

└22222

└작년 공성전 누구였지? 어떤 길드랑 좀 비슷함 중구난방인 거ㅋㅋㅋㅋ

└힐러 개쩐다 저걸 번번이 살리네

-킹세이버 왜 키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 발리는 데용?

└킹세이버 문제가 아냐 상대를 잘못 만난 거임

└킹세이버 개 당황한 거 보이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이게 왜 뚫리지…? 하는 움직임ㅋㅋㅋㅋㅋㅋㅋㅋ

-나이트 스피어 원래 저렇게 몸이 가벼워? 왜케 금방금방 움직이지?

└내방 모기 같다 이틀째 못 잡고 있음ㅅㅂ

└원랜 저렇게 안 빨라

└지구별? 쟤 이속에 목숨 건 애임

-패망 좀 불쌍하다 어쩌다 저런 애들만 골라서 시비를….

└아니 그냥 네 명 다 무빙 잘침ㅋㅋㅋㅋ

-발키리 키워보실 분…? 저 끌어오는 거ㅋㅋㅋㅋ 저거만 있으면 사냥터 독점도 문제없다 아님?ㅅㅅ 신성수 솔플도 가능할 것 같음

└솔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발키리가?ㅋㅋㅋㅋㅋㅋ

└일주일 뒤 이 새끼 글 예상: 왜 나 안 말렷냐

└해봐 한 번ㅋㅋㅋㅋ 키워본 사람 피셜로 조언하나 해주자면 장점: 그거 냥 어쩌고 말고 쓸 줄 아는 놈 없어서 하향 안 됨ㅋㅋ 단점: 존나 어려워서 니가 못 씀. (백퍼) 밸런스 엉망임. 회피력 씹ㅎㅌㅊ. 직업 스킬 쓸 때마다 피 절반 깎임. (필살기 x) 그래서 연속기 쓰기 어려움. A급 이상 펫 필수. (피 통이 한 방울임) 냥 말고 쓸 줄 아는 놈 없어서 상향도 안 됨. 지엠이 버린 직업이라는 타이틀 있음ㅇㅇ 화이팅!

└그래도 장점이 있네ㅋㅋ

└ㅋㅋ해보고 후기

└미친ㅋㅋㅋㅋ 안 해 안 햌 ㅋㅋㅋㅋㅋ 단점 백만 개 나열해 놓고 뭘 해보고 뭔 후기를 달래ㅋㅋㅋㅋ 말려줘서 ㄱㅅ

-????? 잠만 저거 장벽이 뚫린 거임?

└왘ㅋㅋㅋㅋ 나 방금 친구랑 해봤는데 뒤로 가면 장벽 안 먹힌다!!

└대박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무빙 치는 거 얏군… 저걸 어떻게 찾았대 실험해 봤나바?

└백퍼 다음 주에 패치될 듯ㅋㅋㅋㅋ 솔직히 개사기 스킬은 맞음… 이제 하향될 때 됐지ㅋㅋㅋㅋ 지엠아 내 댓이 보인다면 빛의 장벽 후면 방어 보완하고 파괴 수치 좀 낮춰라 존나 안 깨지니깤ㅋㅋㅋㅋㅋ

└왜 몰랐지 아무도…??

└누가 단체 프븝에서 그것도 킹세이버 있는데 뒤로 가서 칠 생각을 하겟냐….

-ㅁㅊ 나 킹세이번데 하향 각이라 개빡친다 ㅅㅂ 자게에 장벽 하향얘기 밖에 안 나옴ㅗ

-왜 천노을 얘기는 안 나와…? 그러니까 내가 먼저 하겠음… 일단 저거 천노을 아닌 것 같지 않아? 내가 아는 천노을: 공격은 약 공격으로만(천노을 피셜 공격이 빨라서ㅋㅋㅋㅋ) 피할 때는 수직점프(그래야 몹이 몰려서 냥이ㅋㅋㅋ 좋아한다고)….

그런데 지금 저 가짜 천노을은 무빙부터가 다르잖아 방해만 안되는 게 아니라 닿는 족족 목 따버리는데? 녹아여 녹아 사람이 녹아요

└먼솔 저기 천노을이 ㅇ어…? 헐 블레이즈 천노을이었네 엥….

└??????????

└??????????????

-대리다

└222

└대리 맞네… 고양이가 대신해 준 듯

└고양이면 용서해주자 귀여우니까

-얘들아 맨 앞으로 가서 채팅창만 보면서 재탕 돌려 봨ㅋㅋㅋㅋㅋㅋ 잘하다가 왜 후반부에 히어로 죽은 데서 앉아있나 했는뎈ㅋㅋㅋㅋㅋ 참사랑 납셨음… “전 히어로만 조질게요^^” 하고 진짜 다른 애들 달려들어도 가만히 그 옆에 앉아 잇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히어로가 냥 잡아먹어서 저런 거임?

└ㅇㅇ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히어로 부활하고 나서 바로 킬 따는 것도 신기하다 피 통 개 큰데

└만약 저거 대리면 채팅칠 땐 천노을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친 건가?

└몰라 내가 천노을도 아닌데 왜 쳐 물음ㅗ

└ㅊㄴㅇㄲ

└ㅊㄴㅇㄲㅋㅋㅋㅋㅋㅋ

└ㅊㄴㅇㄲ이 뭐임? 검색해도 안 나옴;

└천노을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포세이돈 애들이 입에 달고 사는 건데 암암리에 다 씀

-꺼억 잘묵읏다

└너 이제ㅜ 천노을한테 뒤졋다

-tmi 저거 끝나고 천노을이 냥한테 반지줌

└엥 그래서?

└왜 묻냐 거절이지 당연ㅠ

└ㅊㄴㅇㄲ…ㅠㅠ

└ㅠㅠㅠ….

└ㅠㅠㅠㅠㅠㅠㅠㅠㅌㄷㅌㄷ

-캐삭 이제 관심 없음ㅋㅋㅋㅋㅋㅋ 지금 제일 궁금한 거 1. 천노을 고양이 키우는지 2. 고양이가 영리한 편인지 3.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4. 고양이님 이름이 뭔지 5. 고양이 사진=‘ㅈ’=

└그냥 니가 고양이 보고 싶은 거잖아

└야옹♥

제목: 아테네서버_내_유명인_정리.txt

작성자: 빅데이터/나이트 스피어

내용: ㅎㅇ 할 짓 없는 자게 놈들아^^ 요즘 종종 ㅁㅁ가 누구야 소리 들려서 예전에 쓴 글 긁어서 다시 가져옴. 유명인 기준은 자게에 언급되는 거 열 번 이상 본 거 ㅇㅇ 예전 거는 여깄음 www.illusions2.net/board/71082839

아래는 업데이트된 내용이나 변경사항만ㅇㅇ

1) 모츠에나(업데이트)

이 새끼한테 “님 여자죠” 소리 안 들어봤으면 아직 뉴비임ㅇㅇ 랜선 연애질하고 싶어서 안달인 놈인데 최근에 성전환해서 여자인 척 접근하니까 성별 가리지 말고 조심 하셈ㅋㅋ

2) 썬셋(업데이트)

길드존 무분별 PK하던 앤데 뉴비들이나 접었다 돌아온 애들이면 모르는 사람 많을 거임… 반 년 전에 정지 먹어서ㅋㅋㅋㅋㅋㅋ 근데 풀릴 날 얼마 안 남아서 끌올함…ㅠ 기억해두면 도망치기 편할 것^^… ㅅㅂ 썬셋은 제발 겜 접었으면 좋겠다… 한순간에 길마 잃은 선율 길포 모은다고 저녁마다 눈물의 똥꼬쇼 중

예전에 정지 먹은 이유는 여기서 봐: www.illusions2.net/board/01819338

3) 천노을

얜 다들 알 거임 개발컨ㅋㅋㅌㅋ 검색해보면 영상도 있고 목격담도 많음ㅇㅇ 보고 각자 판단합시다. 냥이냥나냥(뉴비 돕는 발키리, 예전 글에 써놈) 따라다니는 중인데 최근에 포세이돈까지 뚫고 들어감. 냥이냥나냥을 찾아라! 라고 상시 이벤트 있었는데 종료됨…ㅠㅠ 쏠쏠했는데 아쉽다… 의문의 부자라 비위 맞춰주거나 지 기분 좋으면 돈 뿌림. 최근 PVP 영상을 보니 쓸만한 대리를 구한듯합니다… 노력했으니 봐주자 저런 대리 구하는 것도 힘들어^^….

4) 렉슈

마을 한가운데 몹이 하나 서 있으면 얘임ㅋㅋㅋㅋ 거인족 특성 누가 쓰나 했는데 얘가 써서 안 없애나 봐. 아무튼 놀라서 달려가서 때리지 맙시다. “몹인 줄….”하면 울더랔ㅋㅋㅋㅋㅋㅋㅋㅋ 취향이니 존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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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정리 ㄱㅅㄱㅅ

-이거 딴 데 퍼가도 되냐

└ㅇㅇ

└감사

-(사진) 천노을 돈 나오는 구석 알아냈음 새벽마다 선율 부길마랑 다님ㅋㅋ

└알바 쓰는 거래

└뭔 소리야 선율이 알바하는 거 본 적 있는 사람?ㅋㅋㅋ 백퍼 지인임

└지인이 한둘이냐

└지랄ㅋㅋㅋㅋ 그럼 저 새끼가 선율 삥 뜯는 거라고?ㅋㅋ

└이 새끼들은 캡처를 해와도 안 믿내ㄷㄷ

-썬셋 돌아와? 그럼 난 접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놈아 어디 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렉슈 사진까지 첨부해줘야 믿지 이게 몹이 아니면 뭐임;

└아 맞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인 아냐? 아쿠아리움에서 본 듯

└왜 하필 피부도 초록색이야?ㅋㅋㅋㅋㅋㅋ

└어쩐지 때렸는데 안 죽더라 버그 제보했는데…ㄷㄷ

└때리지마ㅠㅠ 애는 되게 착함… 그리고 나름 귀여워

└아니 유저 이름 머리 위에 있자나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요즘 경수의 일상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자고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노을의 집에 가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게임을 한다. 얼토당토않은 내기를 한 후였지만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이사항이라면 게임을 마치고 집에 가던 중, 천노을이 갤럭시 소드를 하나 더 획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날 밤 경수는 속이 쓰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희소식을 접했다.

「ㅈi9별: ??천노을 길드 나감」

「할로윈가지: 저한테 말하고 나감ㅇㅇ 길드 게시판에 글도 쓰고 나갔음요」

「ㅈi9별: 아 그걸 못 봤네」

아침부터 길드 톡방이 아주 시끄러웠다. 경수는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내용을 읽자마자 가슴이 떨려 채팅창에 손을 올렸다.

「나: ㅎㄹ헐 신난다;」

천노을이 옆에서 미친 짓을 하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나무 숲이 다시 돌아왔다.

「neutaaaa: ㅊㄴㅇㄲ님 생각이 바로 튀어나왔는데요?」

「나: 만세!」

「박휘벌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쾌한 주말 아침을 맞은 경수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본체의 전원을 눌렀다. 모니터가 밝아지는 것을 기분 좋게 구경하던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얼굴로 확 쏟아지는 햇빛이 기분 좋았….

“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

쾅! 그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천노을이 왜 여기에 있지? 뒤돌아 생각하는 와중에도 바깥에서는 노을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경수는 절망했다.

‘나 내일은 집에서 안 나가.’

‘왜요?’

‘주말이잖아.’

‘그럼 제가 갈게요.’

그 말에 주소를 툭 던져줬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왜 이렇게 빨리… 아.”

시계가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

경수는 경악하며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까 있던 자리에 천노을이 없었다. 설마 집에 간 건가? 창문을 다시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경수는 헐레벌떡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에 달린 작은 렌즈로 밖을 내다보니 그놈이 맞았다. 경수는 숨을 죽여 뒤로 물러났다.

딩동, 딩동, 딩딩딩딩동. 딩딩딩딩딩딩동.

“…….”

문을 열어주지 않자 노을이 초인종을 연달아 눌러대기 시작했다. 경수는 어쩔 수 없이 도어록 잠금 해제 버튼을 눌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처음 보는 사복 차림의 천노을이 눈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형, 안녕하세요!”

“어, 응.”

배색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딱히 차려입은 것 같지도 않은데 저 녀석이 입어서 그런지, 옷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갑자기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았다. 중학교 때의 체육복을 입고 있던 경수는 슬그머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매일 교복 차림만 보다가 제대로 옷을 챙겨 입은 노을을 보니 제 차림새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너 길드 나갔다며?”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집에 가시고 나서 재접속 안 하셨잖아요.”

노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수는 왼손에 들린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길드 톡방. 그렇게 말하자 노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하, 다들 뭐래요?”

“뭐라고 안 해.”

“다행이다.”

길드원들이 누가 탈퇴한 것 가지고 뒷말을 할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계속 울리는 길드 톡방을 내려다본 경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ㅈi9별: (사진)」

「neutaaa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l0h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구별이 보내온 것은 길드 게시판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길드원들이 출석체크 하듯 한 마디씩 남길 수 있는 게시판에, 천노을의 이름과 그가 쓴 말이 박혀있었다.

‘천노을: 전 원래 자리(냥깔)로 돌아가려고 탈퇴합니다~ 즐거웠어요^^’

「할로윈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시 봐도 개 웃기다」

「완두완댜: 마지막까지 컨셉 완벽했다ㅋㅋㅋㅋㅋ 컨셉질은 천노을처럼!」

경수는 사진을 노을의 코앞에 갖다 대고 소리쳤다.

“이거 뭐야!”

노을은 어리둥절하게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사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제 유언이요.”

“진짜 유언으로 만들어주기 전에 지워.”

“아하하, 탈퇴해버려서요.”

“내가 재가입 시켜줄게!”

“한 번 탈퇴하면 일주일 동안 길드 재가입 금지예요.”

노을이 명쾌하게 말했다. 그는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는 경수의 머리카락을 은근슬쩍 매만졌다.

“머리 눌렸는데, 지금까지 잔 거예요?”

이건 십 년 치 놀림거리였다. 지구별도 사진만 보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글을 쓰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배꼽시계는 눈치도 없는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울려댔다.

“그럴 줄 알고 저도 점심 안 먹었어요.”

“…….”

“그래서 도시락 사 왔는데, 초밥 좋아해요?”

초밥! 그 말에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경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노을은 부스럭거리는 비닐봉투 안에서 초밥 두 팩을 빼서 내밀었다. 제 돈 주고 사 먹기에 아까운 초밥을 세 팩이나 사 오다니. 경수의 안에서 노을에 대한 평가가 조금 올라갔다. 노을은 경수의 뒤를 따라 탁자 앞에 앉았다. 경수는 냉장고에서 포도 주스와 컵 두 개를 꺼내어 놓고 초밥을 포장한 팩의 뚜껑을 뜯었다.

“길드 왜 나갔냐고 안 물어봐요?”

“…냥깔로 돌아가겠다며.”

“우와, 그걸 믿네.”

노을은 다소 놀라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경수는 표정을 굳히며 굳이 고개를 저었다.

“안 믿어. 네가 쓴 대로 말한 거야. 그래서 왜 나갔는데?”

놈의 소원대로 나간 이유를 물었는데, 노을은 곧바로 대답하기는커녕 피식 웃으며 아직은 비밀이라고 지껄였다.

“그럼 왜 물어봤어?”

“형이 저에 대해서 뭐든 궁금해해줬으면 좋겠으니까요.”

“…….”

어차피 천노을의 행동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몇 달 전 갑자기 자신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도, 제게 현상금을 걸던 것도,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게 된 이유조차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서 갑자기 게임을 잘하게 된 건지도, 아니면 원래부터 센스가 좋았던 건지조차 녀석은 제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녀석이다. 하지만 그런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만큼 정신이 나가야 가능할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한 지 오래였다.

“형.”

“왜?”

“사람이든 동물이든 호감 얻는 데에는 음식만 한 게 없다는 거 알아요?”

경수는 노을이 하려는 말을 곧바로 알아챘다. 생색내려는 거다. 그의 행동이 진심으로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미안한데 호감도로 따지자면 넌 아직도 마이너스야. 평생 마이너스야.”

“아, 해요.”

“아?”

되물으려던 건데 입안에 초밥 한 조각이 불쑥 들어왔다. 얼떨결에 입을 다문 경수가 초밥을 오물거리자 노을이 정말 기쁜 듯이 웃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놈이다. 생각의 차원이 다른 데로 가 있는 건가? 멀쩡히 두 손 다 달리고 똑같이 고추까지 달린 놈한테, 왜 나서서 밥을 먹여주고. 또 왜 저렇게 좋아하지?

“넌 내가 왜 좋냐?”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노을이 제대로 답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놈은 매번 무언가를 물으면 슬쩍 돌려 말하고는 다른 화제로 빠지기 일쑤였으니까.

“얼굴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도리어 당황한 것은 경수였다.

“……?”

“형 얼굴이 좋아요.”

노을은 단호했다.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경수는 멍한 눈을 깜빡였다. 내 얼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천노을은 잘생긴 편도 아니고 확실히 잘생겼다. 노을이 학교 앞으로 찾아올 때면 여자나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노을을 힐끔거렸다. 그런 그가 자신을 얼굴 때문에 좋아한다는 말을 하니, 놀림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다.

그래? 내 얼굴의 어디가 좋아? 라고 묻는 건 어쩐지 낯간지럽고,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것 같아 묻고 싶지도 않았다. 천노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데도 부담스럽지 않은 건, 놈의 마음이 그리 깊은 것 같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장난 같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날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경수는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밥을 꼭꼭 씹어 먹었다. 노을의 시선이 옆에서 내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

갤럭시 소드를 얻는 것은 이제 포기했다. 옆에 있는 천노을이 미친 운빨로 그 귀한 아이템 두 개를 획득했기 때문이었고, 거기서 나오는 아이템 중 가장 좋은 것인 ‘전설 펫 분양권’을 놈에게서 양도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보호 해제까지 7일)(SSS/★전설★)전설 펫 확정 분양권

-은하수에서 태어난 소환수를 분양 받을 수 있다.

천노을의 아이템 창에 자리 잡은 무지갯빛 분양권을 보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경수는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리기 위해 입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거 끝나고 용암 온천 갈까요?”

“레전드 퀘?”

레전드 퀘스트는 몇 달 전 패치 되어 새로 생긴 퀘스트이다. 기존에 있는 스킬을 성장시켜 위력을 더 높이기 위한 것이다. 만렙 유저들에게 주어지는 퀘스트인 데도 불구하고, 아직 경수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형도 아직 안 했던데요?”

“아, 하려다가 갑자기 갤소 이벤트가 떠서….”

아이템을 빼앗긴 과거가 떠오르자 배가 당겼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포세이돈대장 님께서 게임에 접속하셨습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ㅎㅇ

[길드] 냥이냥나냥: 헐

[길드] ㅈi9별: ???? 오신다고 말 안 했잖아여

[길드] 냥이냥나냥: 누구세요;;

[길드] neutaaaa: ㅋㅋㅋㅋ누구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할로윈가지: 누구세요ㅋㅋㅋㅋㅋㅋ

[길드] 포세이돈대장: 여기 짱이 누구예요ㅋ

[길드] 할로윈가지: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ㅈi9별: ? 님이요;;;;;

[길드] 포세이돈대장: 그.래. 반기지는 못할망정; 다 길드룸에서 머리 박으세요.^^

[길드] al0ha: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

길드 마스터는 게임에 들어오자마자 길드 스킬을 변경하고 그동안 모은 길드 포인트로 엠블럼을 변경했다. ‘냥이냥나냥’ 위에 떠 있는 ‘포세이돈’ 글자에 반짝이 효과가 붙었다. 한 달 만에 돌아온 그는 길드 채팅창의 말을 적당히 받아 치며 설정을 이리저리 바꾸는 듯했다.

일루전은 길드 시스템이 꽤 잘 되어있는 게임이다. ‘길드존’에서는 PVP 신청 없이 유저들끼리 스킬을 시험해보고 다른 유저를 죽일 수 있다. 길드가 없는 사람도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길드존에는 들어올 수 있으나, 다른 유저를 죽여서 길드 포인트를 얻지는 못한다.

‘길드룸에 스타트리 묘목을 심었습니다. 48시간 뒤 벌목이 가능합니다.’

[길드] ㅈi9별: 와 오랜만이닼ㅋㅋㅋㅋㅋㅋㅋ

‘최고급 성장제를 사용했습니다.’

‘스타트리가 완전히 성장했습니다!’

‘5분 뒤, 길드룸에서 스타트리 벌목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길드] 냥이냥나냥: ???

소속 길드원들끼리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길드룸’이라고 하는데, 거기서는 길드 마스터가 스킬을 바꿀 수 있으며, 스타트리를 심을 수도 있었다. 스타트리를 한 번 벌목하면 웬만한 물약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버프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벌목에서 나오는 아이템을 조합하면 ‘반짝이는’ 효과가 붙는 액세서리를 만들 수 있다.

일부러 스타트리 벌목을 위한 길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조합해서 팔지 않고 재료만 팔아도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 보통 한 번 벌목을 할 때는 벌목비를 가지고 와야 참여가 가능하다. 한 번 나무를 키워내는 데에 대략 8억 벨 정도가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5분 뒤에 무료 벌목 시작하니까 버프 얻어 가세요

하지만 오랜만에 복귀한 길드 마스터가 선물처럼 무료 벌목을 준비했다. 이를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길드] ㅈi9별: ㅋㅋㅋㅋㅋㅋㅋ헐^^7

[길드] al0ha: 충성충성! ^^777777777

[길드] neutaaaa: ^^7777

[길드] 냥이냥나냥: ^^777777

[길드] 완두완댜: 캬 부길마랑은 확실히 다르네요^^777

[길드] ㅈi9별: 맞아 맞아^^77

[길드] 할로윈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7

[길드] 완두완댜: 부길마 님이 귓말로 닥치래요ㅋㅋㅋㅋㅋㅋ

[길드] ㅈi9별: 저한테도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완두완댜: 인성부터 비교된다^^!

[길드] 할로윈가지: ㅗ

한참 거대 버섯 위를 뛰어다니던 경수가 가만히 채팅에 몰두하자, 노을이 옆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이따 제가 전원 집결 사용할게요

[길드] ㅈi9별: ^^77777

“길마예요? 그동안 안 보이던데.”

“아, 해외여행 때문에…. 오늘 왔나 봐.”

스타트리 묘목은 길드 마스터만 심을 수 있기 때문에 벌목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벌목 레이드에서 MVP를 차지하면 ‘나무의 정수’를 얻을 수 있다. 그걸로 무기를 새로 강화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벌목하는 거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그러든가.”

선심 쓰듯 한 말에 노을이 소리 없이 웃었다.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이미 의자까지 옮겨온 후였다.

‘포세이돈대장 님께서 전원 집결을 사용하셨습니다. 수락하시면 길드룸으로 이동됩니다.’

길드 마스터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바로 길드룸으로 이동되었다. 접속해 있던 길드원들이 모두 한데 모여 바글바글했다.

[길드] ㅈi9별: 냥깔이 안 보이니 어색하내요ㅇㅅㅇ

[길드] 냥이냥나냥: ㄷㅊ

[길드] neutaaaa: 안타깝게 되었읍니다ㅡㅡ

노을은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하필이면 어제 길드를 나가는 바람에 무료 수확에도 참여하지 못하다니. 조금 안쓰럽고 또 통쾌하기도 했다.

‘스타트리 벌목이 시작됩니다.’

‘주의! 트리 수호자들이 소환됩니다.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시스템 문구가 나오기 무섭게 길드원들이 나무 주위로 소환된 수호자 몬스터들을 잡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터질 때마다 뾰로롱거리는 효과음이 울렸다. 경수의 주위로 끌려온 몬스터들이 한 번에 터지자 1차 수호자들이 모두 소멸되었다.

‘수호자들의 영혼에 스타트리가 슬퍼합니다.’

나무의 눈물과도 같은 비가 내리며 ‘스타트리의 눈물’ 버프가 생겨났다.

‘스타트리가 분노합니다. 1분 뒤 2차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스타트리 주변을 빙빙 맴돌던 수호자들의 영혼이 허공으로 흩어져 소멸되었다. 나무의 눈이 빨간색으로 번쩍 빛났다.

[길드] 할로윈가지: 인간적으로 발키리는 한 손 조작만 하자 개사기야;;

[길드] 냥이냥나냥: ? ㅇㅋ 투표 받아요

[길드] ㅈi9별: 전 찬성이여

[길드] al0ha: 동의합니다

[길드] neutaaaa: 찬성 저희 엄마 아빠 강아지 옆집 부부도 다 찬성했어요

[길드] 박휘벌래: ㅊㅅㅊㅅ

[길드] 할로윈가지: 찬성

‘2차 레이드가 시작됩니다. 발아래를 조심하세요!’

[길드] 냥이냥나냥: 안타깝게도 만장일치로 기각입니다

[길드] 할로윈가지: 내 이럴 줄 알았지ㅡㅡ

[길드] ㅈi9별: ㅡㅡ투표는 왜 했죠?

[길드] 냥이냥나냥: 예의상 한 번 해봤어요ㅋㅋ

[길드] neutaaaa: 예의 좋아하시네;

2차 레이드는 분노한 스타트리의 뿌리가 땅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힐러와 마법사 계열 직업들이 나무뿌리에 ‘결박’주문을 걸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고정시킨다. 그 틈을 타, 딜러들이 뿌리의 HP를 완전히 깎는 것이 관건이다. 뿌리의 공격에 한 번 얻어맞으면 20초 동안 마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다.

[길드] neutaaaa: ㅎㅎㅎ자기야>_<

[길드] 할로윈가지: 아 커플 버프 부럽다;

다만, 스타트리는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에 커플은 공격하지 않는다. 함께 자주 던전을 다니는 탓에 비즈니스 커플이 된 지구별과 neutaaaa는, 여유로운 태도로 결박된 뿌리를 때렸다.

[길드] ㅈi9별: 자갸 끝나고 나 속도작 돌아죠ㅠㅅㅠ

[길드] neutaaaa: 머? 나야 이속이야;

[길드] ㅈi9별: 이. 동. 속. 도

[길드] neutaaaa: 우리 헤어져;

결국 두 명을 제외하고 모든 길드원이 일시적 마비 상태에 걸렸다. 뿌리의 HP가 절반이 깎여, 땅에서 튀어나오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냥님 부캐로 오시지….

[길드] ㅈi9별: 아 맞다 원조 냥깔이 길마 님이었지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포세이돈대장: 기간으로 치면 지구별 님네보다 더 오래됐어요ㅋㅋ

경수는 예전에 키우던 부캐릭터로, 길마와 커플을 맺은 적이 있었다. 커플을 맺고 100일이 지나면 탈 것 아이템을 주던 이벤트 때문이었다. 다만 그 캐릭터로는 잘 접속하지 않아 아직 커플을 깨지 않았다는 걸 떠올려냈다.

“형.”

귓가에 들리는 저음에 경수는 진심으로 화들짝 놀라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노을이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저 말고도 상대가 많았나 봐요?”

“…….”

나, 이거 알아.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패턴이다. 미디어의 유해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요즘 애들은 이게 문제다. TV에서 이딴 걸 로맨스라고 포장해 내보내니까 정말 그런 줄 알잖아. 경수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따지자면 너도 내 상대는 아닌데.”

노을이 미간을 찌푸렸다. 노을은 그대로 의자를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겼다.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새삼스럽게 삐졌을까?’

노을의 옆모습을 힐긋거리던 그때 3차 보스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경수는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박았다.

‘스타트리가 출현했습니다.’

분노한 스타트리가 뿌리를 들고 일어섰다. 나무가 뿌리를 들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길드룸이 흔들거렸고, 경고음이 웅웅 울렸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냥님

[길드] 냥이냥나냥: ??

[길드] 포세이돈대장: 다음 벌목도 주말에 할까요?

2차 때의 마비 스킬이 없으니 한층 더 순조로웠다. 스타트리 바로 아래까지 다가간 경수는 나무에 저주의 포를 쏘아 올린 뒤 대답했다.

[길드] 냥이냥나냥: 넴ㅇㅇ 주말이 사람 제일 많으니까여

[길드] ㅈi9별: ㅡㅡ길마님 왜 저희 의견은 안 묻죠?

[길드] 포세이돈대장: 님들은 맨날 들어와 있잖아요

[길드] 박휘벌래: 수상한대?ㅡㅡ

[길드] neutaaaa: 빼박이네;;ㅡㅡ

[길드] 냥이냥나냥: 타겟 바꾸셨는지…?

천노을에서 상대가 길마로 넘어갔다. 놀릴 상대가 하나도 없으면 당장 만들어내는 게 이들의 방식이었다. 반응하면 반응한 대로 즐거워했고, 반응하지 않으면 찔려한다고 깔깔거렸다. 경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서버] ㅈi9별: 천노을깔 바람핌~~ 길마 님이랑요~~~~~!~!~~!~!!

서버 마이크를 사용해 헛소리가 온 서버에 울려 퍼졌다. 귓속말로 그러면 안 된다느니, 정조를 지키라는 말 몇 개가 전달되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ㅗ’라는 답을 보냈다.

[길드] 냥이냥나냥: 돌았나

[길드] ㅈi9별: 아뇨><

[길드] 포세이돈대장: 아니ㅋㅋㅋㅋ 냥님이 부캐 데려오셔야 제가 안 맞으니까요

[길드] 박휘벌래: 핑계 쩐다;;

[길드] neutaaaa: 핑계 쩐다;;

[길드] 냥이냥나냥: 어휴….

다들 3차 전직은 기본으로 찍은 유저들이라 보스 레이드는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었다. 다들 쉬엄쉬엄 채팅을 쳐가며 스타트리를 때렸다. 경수는 이들이 하는 헛소리를 무시하며 착실하게 데미지를 쌓아갔다.

“너 뭐해?”

“…….”

“씹냐?”

“집중 중이니까 말 걸지 마세요.”

노을은 노트북 모니터를 경수에게 보이지 않도록 몸을 최대한 틀어 대기하고 있었다. 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집중하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다가가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스타트리가 파괴되었습니다.’

‘스타트리의 영혼이 출현합니다!’

스타트리가 터지며 나온 아이템은 펫이 자동으로 습득해준다. 스타트리의 영혼은 투명해졌다 다시 선명해지기를 반복한다. 나무가 선명해졌을 때를 노려 다 같이 필살기를 쓰면 벌목은 끝이 난다. 15분에 걸친 벌목이 끝나자, 인벤토리에는 관련 조합 재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반지 강화할 건데 성수 사려면 제네스한테 가면 됐었나요?

[길드] 할로윈가지: 반지? 수상해….

[길드] 포세이돈대장: 뭐가 수상해 이 대머리야

[길드] 할로윈가지: ㅠㅠ….

[길드] 박휘벌래: 뼈도 못 추렸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냥이냥나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ㅈi9별: 어? 냥님은 이제 길마 님이 무슨 말을 해도 웃긴 건가? 참사랑…?

[길드] 박휘벌래: 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길마는 아직 제 머리를 되찾지 못했다. 그가 메이크업 숍 가까이에 접근하게 되면 귓속말로 누군가 반드시 알려왔기 때문이다. 부길마에게 현상금을 건 것은 박휘벌래로, 천노을의 이전 상시 이벤트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고 한다.

[길드] al0ha: ㅇㅇ제네스 맞아요 걔 길드존 우체통 앞에 있음

[길드] 포세이돈대장: ㄱㅅ

경수도 무기를 강화할 겸 길드룸에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옆에서 노을이 갑자기 키보드를 연타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로딩 창이 끝나고 길드존 포탈 앞에 도착했을 때, 경수는 근래 들어 가장 황당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

[길드] 냥이냥나냥: ……?

[길드] ㅈi9별: 왜요???

나오자마자 길드 마스터가 포탈 앞에서 눈이 엑스 자로 변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두 개의 검을 들고 멋진 대기 모션을 선보이는 천노을이었다. 포세이돈대장은 이게 뭔지 알 수가 없어 계속 물음표만을 띄워댔다. 그에 둘을 따라 길드룸 밖으로 나온 길드원들이 세 사람을 둘러싸고 ‘ㅋㅋㅋㅋ’을 연달아 머리 위로 띄우며 마구 웃었다.

[전체] 포세이돈대장: ……???

[전체] 천노을: ㅇㅅㅇ….

[전체] ㅈi9별: ㅅㅂㅋㅋㅋㅋ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너무 좋아ㅋㅋㅋㅋㅋㅋㅋㅋ

“…….”

[서버] Anchor: 3채널 길드존에서 사랑과 전쟁 시작됨 Feat. ㅊㄴㅇㄲ

구경꾼이 늘어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둘 사이에 낀 당사자인 경수도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중한다더니, 이렇게 기습하려고 말도 걸지 말라고 한 거야?

“형, 뒤로 물러나 봐요.”

“……뭐?”

경수는 의아해하면서도 노을의 말을 따랐다. 부활의 징표를 먹은 포세이돈대장이 일어나자마자, 천노을은 바닥이 움푹 파이도록 일격을 꽂아 넣는 스킬을 사용했다. 포세이돈대장도 이번에는 그저 당하고 있지만은 않고 대응을 해보려고 했으나, 그는 블레이즈와 직업 상성이 좋지 않았다.

[전체] 포세이돈대장: 왜 이러세요

경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말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당황스러워하는 포세이돈대장을 바라보며 구경꾼들은 그저 즐거워했다.

[전체] 천노을: ㅎㅎ안녕하세요

“이 미친놈이.”

[전체] 포세이돈대장: ? 안녕하세요;

[전체] 천노을: 처음 뵙겠습니다^^

[전체] 포세이돈대장: 아 네….

[전체] 박휘벌래: 뭐 하세요 둘이? 소개팅하심?

노을은 아직 쓰러진 채로 일어나지도 못한 포세이돈대장 옆으로 계속 스킬을 쏟아부었다. 때문에 부활도 하지 못하고 그는 계속 쓰러져있어야만 했다.

[전체] 포세이돈대장: ????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전체] 박휘벌래: ㅊㄴㅇㄲ이요ㅋㅋㅋㅋㅋㅋㅋ

[전체] 포세이돈대장: 아….

‘후킹 스타!’

경수는 광역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유저에 대한 공격이 인정되는 길드존인 덕분에, 구경꾼 일부가 죽고 천노을의 HP가 후드득 깎였다. 경수는 노을의 위로 뛰어올라 그의 머리통 위로 별이 튀는 바주카포를 연달아 쐈다. 천노을은 반격하지 않고 공격을 고스란히 다 맞아주었다. 결국 그도 포세이돈대장 옆에 눕혀졌다.

[전체] 포세이돈대장: 뭔 상황임 이게….

[전체] 천노을: ㅋㅋㅋㅋㅋ

경수는 이들을 피해 길드존 시계탑 위로 뛰어올라갔다. 이 이상한 상황을 만든 당사자가 바로 옆에 앉아있다. 경수는 질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이러려고 기다린 거지?”

“그럼요.”

반격도 하지 않고 맞아서 쓰러진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천노을이 씩 웃었다.

“…이번엔 안 따라와? 벌목 다 끝났는데?”

“기다려보세요. 이 사람 로그아웃 할 때까지 옆에 붙어있을 거니까.”

얘는 한다면 하는 놈이다. 그동안 제게 현상금을 걸고 집요하게 따라다닌 것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 경수는 경악하며 고개를 저었다.

“길마님 복귀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어! 하지 마!”

“형이 뭔데요. 제 상대도 안 해주시면서…. 저 사람이랑은 커플도 맺고. 그런데 내 반지는 아홉 번이나 거절했잖아요.”

노을은 그렇게 말하며 키보드를 성의 없이 꾹꾹 눌렀다. 그에 죄 없는 구경꾼들이 휘말려 죽어버렸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이게 뭐야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neutaaaa: 상대 잘못 고르신 거예요…ㅎ

“…….”

사람들은 썬셋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즐기며 웃는 놈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체 채팅이 천노을의 욕과 웃는 소리로 가득 차며 빠르게 올라갔다.

“너랑도 커플 하면 될 거 아니야. 이제… 그만해.”

“…진짜죠?”

“그래. 난 이게 본캐니까 네가 더 좋은 거야.”

경수는 성의 없이 중얼거리며 용암 온천으로 워프했다. 이게 더 좋은 거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은 노을의 표정이 풀렸다. 경수를 따라 장소를 벗어난 노을 덕에 길드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

「포세이돈대장: 완두님 냥님 이따 들어오시나요?」

「완두완댜: 박 부장ㅠㅠ」

「포세이돈대장: ㅇㅋ야근? 냥님은요? ㅋㅋ」

작년에 보니까 열 시까지 찬조 공연하던데. 경수는 몇 시쯤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 저 친구 학교 축제 와서여… 잘 모르겠어요ㅠ」

「나: 오늘 뭐 있어요??」

「포세이돈대장: 아까 오전에 가을 대규모 업뎃 있었잖아요」

「완두완댜: 안 그래도 저 지금 공지 보고 있는 뎈ㅋㅋㅋㅋㅋ 송편 모으기 또 있음ㅠ 지긋지긋해….」

「박휘벌래: 님은 일하러 가세요ㅡㅡ!」

「완두완댜: 박 부장도 안 하는데 내가 왜 해요;」

「포세이돈대장: 송편 말고 새로 정보 뜬 것도 있잖아요」

새 이벤트! 경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 화장실로 겨우 대피해왔다. 지난주 사전 안내 페이지가 새로 개설돼, 추석 관련 이벤트와 새 맵이 뜰 것은 알고 있었다.

「할로윈가지: 아오 여기서 선수 치넼ㅋㅋㅋㅋ 냥님 저랑 같이해요ㅎ」

「나: ?」

「포세이돈대장: 기각 내가 먼저 말했음」

「박휘벌래: ㅊㄴㅇㄲ님 귀여운 힐러도 껴주세요><」

「포세이돈대장: 박휘님 아깐 안 한다면서요?」

「박휘벌래: 길마 님이랑은 안 한다고요」

「박휘벌래: 오래 쉬더니 감 다 떨어졌음ㅋㅋㅅㄱ」

「포세이돈대장: ^^」

「포세이돈대장: 생각해보니까 타임 어택인데… 힐러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박휘벌래: 아녀아녀 버프 생각해보면 저 필요 할 걸ㄹ요ㅠㅠ」

「포세이돈대장: 글쎄요.」

「나: 잠만 저 ㅓㄴ화와서요」

「나: 전화」

도대체 무슨 이벤트가 새로 업데이트되었길래 같이하자는 말이 나올까. 경수는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경수 너 어디야? 왔어?

“2층 화장실 안인데?”

-뭐래, 방송실 1층이거든? 빨리 내려와.

알겠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경수는 순발력을 발휘해 칸막이 안쪽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 채 입을 틀어막았다.

“…형 또 통화 중이네.”

저 목소리는 천노을이 확실했다.

“누구길래? 여자?”

“형인데 여자겠냐….”

“뭐야, 그럼 관심 없어.”

“관심 가져달라 한 적 없어. 누군지 알아서 네가 뭐 하게?”

“씨발, 아까부터 계속 폰만 보니까 궁금할 수도 있지!”

“뭐지? 기껏 도와주는데 말이 많네…. 나 관둬도 돼?”

“미안해, 받을 때까지 걸어.”

여긴 천노을네 학교였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잘만 피해 다니면 마주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들어오기가 무섭게 저 목소리를 들을 줄이야.

-여보세요? 야, 나 끊어야 해.

“…….”

-왜 말이 없어? 끊는다? 방송실 입구에서 나 찾으면 있을 거야.

공연까지 다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전에 천노을과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수는 변기 뚜껑 위로 올라가 발뒤꿈치를 들어 소리가 들린 세면대 쪽을 바라보았다. 유독 밝은 머리칼을 가진 노을이 손을 옷에다 닦으며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코스튬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걸 보니, 준비 위원으로 참여한 모양이었다.

“세상 존나 좁네.”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노을의 이름이 액정에 떠올랐다. 경수는 통화를 애써 무시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중앙복도를 기준으로 바로 오른쪽. 팻말을 보니 방송실이 맞았다. 문 앞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며 인원을 조정하던 세원이 경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와 함께 안내를 맡았던 남학생이 경수와 세원을 번갈아 보며 과장스럽게 입가를 가렸다.

“뭐야? 선배 남자친구예요?”

“…….”

“…….”

그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짓궂은 질문을 던진 남학생은 세원의 주먹에 옆구리를 맞고 시무룩해졌다.

“야, 너 전화 와.”

무음 모드로 돌려놨는데도 화면 위에 떠 오른 ‘ㅊㄴㅇ’이라는 글자를 본 세원이 휴대폰을 가리켰다.

“안 받아?”

“스팸이야.”

“그럼 차단해.”

애초에 절대 안 온다고 말했는데도 귀찮게 구는 건 저놈이다. 오랜만에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러 온 거지, 오늘까지 천노을의 손에 붙잡혀 끌려 다닐 생각은 없었다.

세원은 남학생만 문 앞에 세워 두고 경수를 방송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였다. 중학교 때 세원과 같이 다니던 무리가 모두 방송실에 앉아있었다. 방송부는 보드게임과 통 아저씨 게임을 두고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김경수 운빨 여전하네.”

다섯 판을 연달아 이긴 경수는 1등 상품으로 받은 문화상품권을 팔랑거리며 씩 웃었다.

“원래 얘 돈 안 걸린 건 잘하잖아. 중요한 내기이거나 돈만 걸리면 다 발리고.”

“뭔 소리야! 몇 번 진 거 가지고! 웬만해선 다 잘하거든?”

경수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친구의 의견에 반박하며 천 원을 내걸고 다시 한번 통 아저씨의 몸통에 칼을 꽂아 넣었다. 한 번 만에 통 아저씨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1학년들과 교대한 친구들이 경수를 이끌고 동아리 부스 곳곳을 돌았다. 경수는 손쉽게 다른 동아리의 우승 상품을 휩쓸어 방송부의 품에 안겨주었다. 신문부에서는 사람 몸통만 한 잉어 사탕을 탔다. 다른 상품은 모두 빼앗아가던 친구들이 선심 쓰듯 ‘이건 김경수 주자.’라며 경수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아, 싫어! 다른 사람 줘, 저 필요 없어요.”

“1등 축하드립니다!”

신문부 애들이 박수를 짝짝 치는 동안 부장이 직접 나서서 등에다 잉어 사탕을 묶어주었다. 하필 들고 가기도 힘들게! 부실을 나오자 등에 달린 잉어를 힐긋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 탓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포세이돈대장: 냥님….」

「포세이돈대장: 내가 누구 때문에 천노을한테 시달리는데ㅠㅠ」

톡방에서는 아직도 신 이벤트 때문에 같이 팀을 맺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팀을 짜서 하던 이벤트는 ‘VS 길드 공성전’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천노을은 포세이돈대장의 복귀한 이후부터 경수가 한눈파는 사이를 틈타 길드존으로 이동해 포세이돈대장을 칼로 쑤셨다.

「할로윈가지: 아ㅋㅋㅋㅋ 걔 요즘 하는 짓 진짜 썬셋 전성기 때 같음ㅋㅋㅋ 무근본킬ㅋㅋㅋㅋ」

「할로윈가지: 이럴 줄 알았으면 길드 나간다 할 때 뜯어 말릴걸ㅋㅋㅋㅋ 그럼 더 재밌었을 텐데….」

「ㅈi9별: 근데 좀 달라여ㅋㅋ 천노을은 표적만 집요하게 따라 다니잖아욬ㅋㅋㅋ 어떻게 보면 그게 썬셋보다 더함… 도망쳐도 따라오니까;」

「포세이돈대장: 아오 진짜ㅡㅡ」

썬셋에 대해서는 경수도 들은 바가 많았다. 그가 정지당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길드 안에서도 썬셋에게 피해를 입은 유저가 여럿 있었다.

“스카우트 연합 동아리에서 귀신의 집 한다고 꼭 가보래.”

세원이 친구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안 가면 후회한다며 느낌표 열 개까지 붙어있었다. 친구들은 그 말에 거기만 들렀다 공연을 보러 가자며 발걸음을 옮겼다.

허접할 줄 알았던 귀신의 집은 꽤 잘 꾸며져 있었다.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다 가려져 있고,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서부터 한쪽 눈에 피 칠갑을 한 유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로가 좁아서 2인 1조로 가셔야 해요.”

그 말에 네 쌍의 눈이 경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내가 혼자 갈게.”

“그럴 줄 알았어, 먼저 가! 파이팅!”

어차피 다 사람인 걸 알기에 무섭지도 않다. 경수는 앞사람들이 출구로 튀어나오자마자 잉어 사탕을 고쳐 맨 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으스스하게 꾸민 내부를 돌아가다 보니, 아이들이 밑에 숨어있다가 발목을 잡기도 하고 벽장에서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저기요, 나가는 길 어디예요?”

“으어….”

“왼쪽?”

“오으오….”

“오른쪽이요?”

“아.”

“감사합니다.”

오히려 크게 놀라지 않는 경수를 보며 귀신이 실망했다.

“뭐야, 막다른 길도 있어?”

오른쪽으로 가라며! 미로처럼 곳곳에 놓인 칸막이 탓에 나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경수는 뒤를 돌았다. 그때, 뒤에서 쾅 소리가 났다.

“형?”

“으, 으아악!”

소품인 줄 알았던 관이 열리며 귀신보다 무서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을은 자신을 보자마자 화색을 하며 꼭 껴안았다. 일부러 놀라게 하려고 만들어둔 장치에는 전혀 놀라지 않았던 경수가 소리를 빽 지르자, 지나쳐온 길의 귀신들이 고개를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 찾으러 왔어요?”

“아니?”

“전화도 안 받으시더니, 이렇게 절 놀라게 해주시려고.”

노을은 경수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기괴한 분장을 했던 다른 귀신들과는 다르게, 노을은 흡혈귀 망토만 두르고 머리만 넘긴 모습이었다.

“야, 나 이제 그만한다!”

“왜!”

노을이 소리치자 귀신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왜긴? 아는 형 올 때까지만 돕는다고 했잖아.”

“뭔 소리야? 아는 형이 나야?”

경수가 노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노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망토를 벗어다 프랑켄슈타인의 팔 위에다 걸쳐놓았다.

“안 돼, 너 가면 아무도 안 온다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어차피 분장도 안 했잖아? 다른 놈 잡아다가 옷만 입히면 되겠네.”

“그게 아니라….”

노을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 그는 경수의 등허리를 잡아 길을 이리저리 빠져나왔다.

“긴장 풀어요, 형. 허리가 딱딱해.”

노을이 웃음기를 담아 은밀하게 속닥거렸다. 경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거 내 허리 아닌데?”

긴장도 한 적 없고. 노을은 믿지 않고 계속 귓가에 긴장을 풀라는 말을 쏟아부었다. 결국 입구에 다다르고 나서야 제가 만지작거리던 것이 경수의 허리가 아니라 등에 멘 잉어 사탕임을 깨달은 노을이 허탈한 듯 웃었다. 친구들은 출구로 빠져나온 경수를 보자마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안에 무서워? 소리 왜 질렀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러자 친구들이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명이 들어가자마자 남은 둘이 경수와 노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 친구예요?”

“중학교 때 친구들.”

“안녕하세요, 저 형 좀 데려갈게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어조에 경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넌 다시 들어가. 괜찮아. 나, 안 가!”

“네? 저 형이랑 놀려고 나온 건데.”

“난 다 갔다 왔어.”

“저랑 또 가면 되잖아요.”

둘의 대화가 이어지자 친구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을 포착한 노을은 신나서 경수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계단으로 달려 내려갔다. 목줄이 잡힌 채 정신없이 노을을 따라 내려가던 경수는 그의 팔뚝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나 쟤네랑 공연 보러 가야 해.”

“이미 연예인들은 다 왔다 갔어요.”

계단을 내려오자 바로 오른쪽에 방송실이 눈에 들어왔다. 경수가 순간 눈을 빛냈다. 그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 노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앗, 여기서 이러시면….”

“저거 한 판 해서 내가 이기면 놔줘.”

경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들여다본 노을이 눈을 찌푸렸다.

“좋아요. 제가 이기면 포기하고 오늘 제가 원하는 거 다 해주세요.”

어차피 통 아저씨 게임은 운이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다시 부실을 찾아온 경수가 이번에는 노을을 데리고 오자 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에는 노을의 친구들도 있는 모양인지, ‘저 형 한 판 빼고 다 이겼었어.’라고 속삭이는 게 경수에게까지 들렸다.

둘은 플라스틱 칼을 구멍에 번갈아 끼워 넣었다. 탁, 소리가 나며 칼이 들어갈 때마다 경수는 숨을 졸였다. 구멍 세 개를 남겨뒀을 때 조심스레 칼을 찔러 넣자, 통 아저씨가 로켓처럼 위로 튀어 올라 비장한 표정을 짓던 경수의 이마를 때렸다. 지켜보던 부원 중 누군가가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폰 떨어졌어요.”

경수가 이마를 붙잡은 채 분한 듯 눈썹을 씰룩거리자, 노을이 옆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주었다. 화면이 밝아지며 길드 톡방의 메시지가 미리 보기 창으로 떴다.

「할로윈가지: 근데 썬셋 이번 달에 정지 풀린대요」

“썬셋?”

화면을 들여다본 노을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경수는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며 되물었다.

“너 걔 몰라?”

노을은 아무 말 없이 경수를 응시하기만 했다. 종종 자유게시판에서 글에 댓글을 달고 다니던 걸 보면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진짜 몰라? 네가 날 스토킹하기 시작했을 때가 언제부터지?”

스토킹이라는 말에 게임 진행을 돕던 학생이 흠칫 놀라며 경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싶었을 때쯤 노을이 둘의 시선 사이를 가로막았다. 노을은 볼을 긁적이다 대답했다.

“음… 몇 달 전이요. 여름방학 시작할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전에 정지당했거든.”

천노을이 게임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썬셋이 없었을 무렵이다. 그러니 모를 수도 있었다. 아마 천노을이 조금 더 게임을 빨리 시작했더라면 썬셋과 만났을지도 모를 텐데. 돈은 많아서 계속 부활하는 천노을과 그 꼴을 두고 못 보는 썬셋. 경수는 둘이 만나는 생각만 해도 우습다는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 사람이 어땠는데요? 형이랑 알던 사이예요?”

“알던 사이는 아냐.”

길드도 다르고 딱히 거래해본 적도 없으니 접점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노을이 실제로 ‘썬셋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경수는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들은 바는 많았다.

“그런데 모르는 게 나아. 그 새끼 인간쓰레기든.”

“……왜요?”

“말하자면 긴데….”

썬셋의 악행은 책 한 권으로 엮을 수도 있을 만큼 수없이 많았다. 곧 돌아오게 되면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경수는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방송실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우글거리는 복도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노을이 어깨를 잡고 길을 뚫어주니 한결 나았다.

“고마워. 잠시만?”

경수는 일루전 홈페이지 검색창에 ‘썬셋’이라고 치고 엔터키를 눌렀다.

‘썬발놈 착장.’

사진이 첨부된 글을 클릭하니 익숙한 캐릭터가 액정 위에 떠올랐다. 하는 짓 답지 않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놈이었다. 구름처럼 몽글몽글한 하얀 헤어와 은빛의 처진 눈, 그리고 썬셋의 특징이라 불리는 대천사 날개까지.

썬셋은 ‘문페어리’였다. 문페어리는 마법사 계열 직업으로, 하프를 연주해 적을 죽이거나 버프를 주는 직업이다. 대기 모션은 달 조각으로 만든 하프 위에 기댄 채 공중을 둥둥 떠다니고는 한다. 그 하프마저 ‘반짝이는’ 아이템 효과가 붙어 빛나게 리폼해 뒀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면 천사가 따로 없었다. 경수는 노을에게 썬셋의 외양을 보여주며 말했다.

“얘가 썬발놈. 얜 평소에는 길드존에만 있으니까 이렇게 생긴 놈 보이면 튀어. 문페어리라서 공중에 떠다니니까 미니맵에 보일 거야. 이 새끼는 복귀한다고 마음 고쳐먹을 것 같지는 않거든.”

“……썬발놈?”

“아, 썬셋 씨발놈을 줄인 말이야. 썬발 새끼라고도 불려.”

“…….”

스크롤을 내리던 중, 이틀 전에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경수는 제목을 보기가 무섭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이거 봐.”

“…….”

제목: 야 내가 대박인 거 하나 찾아냈는데 천노을이 썬셋인것 같음;;;

작성자: 사루/암흑기사

내용: 개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제발 한 번만 봐줘ㅠ 길드원들 아무도 안 믿어서 자게로 옴… 일단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친구랑 썬발 새끼 까다가 ‘썬셋이 그대로 게임을 접었을 것 같냐 분명 다른 계정 파서 게임 하고 있다.’까지 나왔거든? 근데 저번에 자게에 포세이돈이 올린 동영상 있잖아. 그걸 내가 우연히 봤어….

(동영상)

이거랑 비교해보셈ㅇㅇ 예전에 썬셋 플레이 영상 퍼온 건데 움직임이 비슷하지 아늠?? 좌우 점프+마비 먹이고 백덤블링으로 뒤로 넘어가서 쑤시는 거….

내내 발컨이던 애가 갑자기 왜 잘해졌지…? 했는데 생각해보면 예전까지 천노을이 스킬 쓰거나 피하는 걸 본 적이 없잖아. 피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것 같았는데 이제 와보니까 왜 그랬는지 대충 알 것 같음. 어차피 썬셋으로 복귀하면 되는데 굳이 새 캐를 왜 키우겠음 ㅇㅈ?

시기상으로도 생각해봐 썬셋으로 정지 먹고 바로 천노을 계정 생성됐잖아;;; 퍼즐이 딱딱 맞춰지니까 소름 돋아서 어제 잠도 못 잠

아무튼 이건 내 예상인 거고, 그냥 천노을이 갑자기 잘하네? 아 그래 썬셋 영상 보고 배웠구나… 싶어서 걍 넘길 수도 있었음. 근데 이거 봐봐

(사진)

(사진)

ㅋㅋㅋㅋ빼박이지???;;;

(14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 뭐가 빼박임?

└죽이고 나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거;;; 소름;;

└머라는 거여 안녕하세요 하면 다 썬발놈임? 왜 혼자 소름 돋아 해; 그게 더 소름ㅠㅠ

-안녕하세요~ㅋㅋㅋㅋㅋㅋㅋ 이제 나도 썬셋임?ㅋㅋㅋㅋ

└썬셋 하이

└하이도 썬셋으로 쳐줌?ㅋ

└쳐준답니다 썬셋 정모 열리나요ㅋㅋㅋㅋ

-잠도 잘 잤으면서 또 또 거짓말한다~!

└거짓말 아니라고ㅠㅠ!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 내 위에 선율 부길마 등판함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나라도 웃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ㅋㅋㅋ 망상증^^ PVP는 빼박 대리라고 이미 못 박은 건데 님 업데이트 좀 하고 사세요~

└그럼 포세이돈 길마 썰어버린 건? 그때도 대리라고?ㅋㅋ

└ㅇㅇ

└말이 안 대자나; 아 답답해

“얘가 너보고 썬셋이래.”

“하하…. 아하하, 무슨 개소리예요?”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잘 안다. 말 그대로 개소리지. 노을의 예전 실력을 생각해보면 더 그랬다. 경수는 뒤를 돌아보며 해맑게 말했다.

“하긴, 못하는 척을 했다고 하기엔 너무 감쪽같은 발컨이었지. 그래서 그냥 난 너 벼락 맞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이해가 안 돼서!”

“…아, 네.”

“문페어리 특성상 원래는 버프 주는 직업인데, 썬셋은 공격형 문페어리였어.”

“그래요? 대기 모션 예쁘던데.”

“쓰레기 직업이니까 따라 할 생각하지 마. 웬만해선 못 다뤄.”

마법사 계열은 버프 트리와 공격 트리로 나뉜다. 버프 트리를 타면 마지막 3차 전직에서 힐러와 문페어리로 갈리게 된다. 보통은 힐러를 선택한다. 힐러는 치유와 버프를 주는 직업이고, 문페어리는 자가 치유만 가능하고 버프 쪽으로 특화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두 직업 모두 공격 스킬이 있기는 하지만 굳이 공격 스킬을 찍는 사람은 없었다.

“근데 형, 썬셋…에 대해서 되게 자세히 아시네요.”

“내가 자세히 아는데 너는 왜 웃어?”

“기분 좋아서요.”

천노을이 귓가에서 소리 내어 웃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경수는 눈을 또륵 굴리다 이벤트 소식을 떠올려냈다.

“참, 오늘 이벤트 새로 떴다는데….”

그 말에 노을이 아는 척을 하며 대답했다.

“추석 송편 이벤트는 작년이랑 똑같고, 5인 팀 결성해서 타임 어택 하는 이벤트 새로 생겼어요. 순위제래요.”

“그래? 그런데 네가 작년이랑 똑같은 건 어떻게 알아?”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똑같다고….”

“송편 노잼인데 몬스터 새로 뽑기 귀찮다고 재탕하네. 좆망겜 일 안 하나.”

“형, 팀 아직 안 짜셨죠? 저랑 같이해요.”

5인 팀에 타임 어택이라면, 무조건 빨리 깨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다들 나랑 팀을 하려고 안달이었구나. 쿨타임이 조금 길지만 발키리가 끌어온 몬스터를 때려잡는 게 시간 단축에 있어 효과적이니 말이다. 버프를 줄 힐러 한 명에, 나머지는 딜이 잘 나오는 딜러로 구성하면 될 것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이야?”

“송편은 내일 정오부터고, 단풍 타임 어택은 다음 주말부터예요.”

“멀었네. 팀은 천천히 짜도 되겠다. 내 전설 펫은 언제 풀려?”

“내일요. 끝나고 저희 집으로 오세요. …다음은 여기 갈래요?”

노을은 오른쪽 교실을 가리켰다. 내일 당장 손아귀에 들어올 전설 펫 확정 분양권을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너그러워졌다. 경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너 가고 싶으면 가든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룰렛에 끝이 빨판으로 된 다트를 던져 받고 싶은 상품을 타가는 곳이었다. 다트는 딱 하나. 그러니 기회도 딱 한 번이었다.

“천노을 웬일이냐, 집에 간다더니?”

전에 노을과 함께 있던 친구였다. 친구는 노을을 보며 눈가를 씰룩대더니 그의 손에 다트 하나를 쥐여주었다. 경수는 이미 아까 한 번 던져 친구에게 상품을 안겨줬기에 양심상 다트를 받지 않았다.

“형이랑 있을 때 학교에서 아는 척하지 마.”

노을의 단호한 말에 친구의 표정이 황당한 듯 일그러졌다.

“미친놈이… 어젠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며. 아, 형 안녕하세요. 저 노을이 친구예요.”

노을의 친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경수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노을은 어딘가 거슬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경수 형이 왜 너네 형이야?”

“야라고 부를 순 없잖아. 그쵸, 형? 따지자면 천노을 네 형도 아니잖아.”

“형이면 큰일 나지.”

경수는 노을의 손등을 꼬집었다. 아무리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도 학교에서 티를 내면 어떻게 하냐. 죽을래? 경수의 차가운 시선에 노을은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경수는 단호하게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 천노을. 난 네 친구도 뭐도 아니고 그냥 어울려주는 거니까. 학교에서 날 좋아한다고 티 내봤자 손해 보는 건 너야.”

“…형이 룰렛 돌려주세요.”

그 말에 경수는 노을의 친구와 함께 룰렛 옆에 섰다. 1등 문화상품권, 2등 매점 이용권, 그 외에는 잡다한 간식이었다. 경수는 룰렛 위를 잡고 힘차게 돌렸다.

딱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룰렛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노을은 자세를 고쳐 잡고 비장하게 경수를 노려보았다. 룰렛을 보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노을에 경수는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노을이 팔을 휘둘러 다트를 던졌다. 룰렛을 향해 날아가…지 않고 제게 힘차게 다가오는 다트에 경수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

다른 부원들은 생경한 일을 본다는 듯 웅성거렸고, 노을의 친구는 바닥에 쓰러져 배를 잡고 웃었다. 경수는 오늘따라 갖은 고난을 겪는 제 이마를 만지며 치를 떨었다.

“어? 왜 안 붙지? 손에는 붙던데?”

“사람한테 붙을 리가 있냐?”

경수는 이마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 다트를 주워 다 노을의 이마에 꽂았다.

“…어? 붙네?”

경수는 이마에 딱 달라붙은 다트를 손가락으로 몇 번 튕겨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트를 뽑아내자 ‘뽁’소리와 함께 노을의 이마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 친구가 배를 잡고 노을을 손가락질하며 낄낄 웃었다. 노을의 얼굴이 굳어지자 그것도 곧 관뒀지만. 노을은 경수에게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하자고 꼬셨다. 찬조 공연을 보러 왔던 터라 망설이던 와중, 친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갈래!”

“네가 왜 가?”

그의 친구는 노을을 공략하는 것보다 경수를 설득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경수에게 말을 걸었다.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형, 저도 같이 가도 되죠? 일루전 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알았어?”

“그거 저도 하니까요! 노을이한테 얘기 …존나 많이 들었어요. 저 게임에서 쓰는 닉은 ‘스페이드퀸’인데 아세요?”

“아, 노을이 퀴즈 친구?”

맞지? 경수가 노을을 돌아보자 노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에 친구 놈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이더니 입가를 가린 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큭, 퀴즈친구….”

그는 그대로 한참 히끅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천노을의 친구 이름은 정민재였다. 경수는 친구들에게 일이 생겨 공연은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전화를 한 뒤, 두 사람에 의해 PC방으로 끌려갔다. 노을은 경수를 제 옆에 앉히고 민재를 그의 뒷자리에 끌어다 놓았다. 집에 간다더니 왜 PC방에 왔느냐는 경수의 물음에, 노을 대신 민재가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하여간 저 새끼, 집에 누구 들이는 거 진짜 싫어한다니까….”

“누가? 천노을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의아한 눈을 들자 민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쟤네 집 비밀번호 진짜 자주 바꿔요!”

“형, 그건 쟤가 맨날 무단 침입해서 그런 거예요….”

경수가 알기로는 노을은 혼자 사는 만큼 외로움을 타는 편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스킨십도 좋아하며 불을 끈 채로는 잠도 못 잔다. 친구라면서 그것도 몰라? 이상하네…. 경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노을에게 물었다.

“집에 누구 오는 거 싫어해?”

“아니요! 형은 괜찮아요. 쟨 너무 더러워서….”

하긴, 남의 집을 제 방인 것처럼 더럽히는 애들이 간혹 있긴 하지. 그래놓고 치우지도 않잖아. 경수의 중얼거림에 민재가 억울한 눈으로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길드원들이 파티 초대를 보내어왔다. 경수는 그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길드] 포세이돈대장: 엥? 냥님 벌써 팀 짰어요?

[길드] 냥이냥나냥: 아직요

[길드] 냥이냥나냥: 친구랑 와서 팟초ㄴㄴ

[길드] 할로윈가지: ㅠ….

[길드] neutaaaa: ㅠㅠ….

‘천노을 님께서 파티에 초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파티원은 아직 노을과 자신밖에 없었다. 노을은 마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경수에게로 이동해와 정신 사납게 곁을 돌아다녔다.

‘스페이드퀸 님께서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파티] 스페이드퀸: ㅇㄷ?

[파티] 천노을: ㅇㅅㅅ

[파티] 스페이드퀸: ㅇㅇ

어디? 이시스. 이응.

둘은 자음만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대화였다. 스페이드퀸이 이시스 마을로 워프해 노을을 찾았을 때, 경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선율?”

음표가 길드 이름 옆에서 반짝거렸다. 선율은 한때 1위 자리를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는 길드였다. 지금은 길드 마스터가 없어지는 바람에 순위가 조금 내려왔지만, 게임 안에서는 포세이돈만큼이나 알아주는 길드이다. 현재 신규 회원을 받지 않고 있어 더더욱 그러했다.

암흑기사인 스페이드퀸의 발아래로 까만 블랙홀이 넘실거렸다. 선율의 스페이드퀸. 암흑기사….

“뭐야? 얘 선율 부길마 아냐?”

경수는 당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노을이 감정 없는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러고 보니 가끔 자유게시판에 ‘천노을 새벽마다 선율 애들이랑 다니던데 그거 뭐냐?’는 말이 올라오고는 했다. 친구가 같은 게임을 하는 데다, 선율 부길마라니. 새벽에 경수가 잠을 자기 위해 접속을 종료하고 나서도 노을은 몇 시간 정도 더 게임에 남아 있다 잠을 청하고는 했다.

“그럼 천노을 사람 만들어둔 것도 민재 너겠네? 친구였구나.”

“……민재?”

“사람이요?”

노을이 눈살을 찌푸렸고, 민재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얘가 새벽에 같이 다녔다는 것도 너지?”

“넹, 저 맞아요.”

“내가 옆에 붙어서 알려주는 것보다 그냥 친구가 알려주는 게 더 나았나 보네.”

갑자기 왜 실력이 일취월장했나 했다. 실제 친구이니 노을이 못하면 못한다고, 가감 없이 욕을 섞어가며 알려주니 더 효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노을은 민재의 캐릭터에 칼질을 하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형, 그건 오해예요.”

“무슨 오해야. 아무리 친구라도 고맙다는 말은 제대로 해야지. 쟤 아니었으면 네 실력 여기까지는 오지도 못했을 거야.”

“…….”

“고맙다고 해.”

[파티] 천노을: ㄱㅅ;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ㅇㅋㅇㅋ~

노을이 열심히 레벨업을 해둔 덕에 셋은 파티 던전에 입장할 수 있었다. 노을은 오늘따라 입을 다문 채 열심히 몬스터만 때려잡았다. 스페이드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선율’이라는 글자는 볼 때마다 새로웠다. 선율의 유명세에는 시초가 되었던 인물이 하나 있다.

[파티] 냥이냥나냥: 혹시 너 썬셋도 알아?

[파티] 천노을: ㅎ마ᅟᅥᆸㅈㅂㅅㅇㄹㅁㄴㅇ

[파티] 냥이냥나냥: ?

“아, 당연히 알죠.”

민재가 손을 놓고 의자를 돌려 대답했다. 그 탓에 스페이드퀸이 보스 몬스터의 일격에 맞아 저 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냥 채팅으로 쳐.”

민재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뒤돌아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노을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곧이어 민재가 소리 내어 웃었다.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스페이드퀸: 머가 궁금하신데영?

궁금한 거야 많았다. 썬셋이 누구인가. 정지당하고 지금은 뭘 하는가. 그리고….

[파티] 냥이냥나냥: 썬셋 진짜 싸패임?

[파티] 스페이드퀸: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싸패ㅋㅋㅋㅋㅋㅋ

[파티] 천노을: 싸패…?

[파티] 냥이냥나냥: 싸이1코패스ㅇㅇ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천노을: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냥이냥나냥: 머가 웃겨?

[파티] 천노을: 그러게요ㅇㅅㅇ?

[파티] 냥이냥나냥: 너도 웃었잖아

[파티] 천노을: ㅋㅋ….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

[파티] 냥이냥나냥: 웃지만 말고

얜 도대체 대답해줄 마음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자기네 길드 마스터라고 감싸고도는 것은 아니겠지?

[파티] 스페이드퀸: 싸패ㅋㅋㅋㅋㅋ맞음ㅠㅠ

[파티] 냥이냥나냥: 역시ㅎ

선율 부길마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았다.

[파티] 스페이드퀸: 형도 썬셋 알 줄 몰랐어요ㅋㅋㅋㅋㅋㅋ

[파티] 냥이냥나냥: 당연히 알지;; 소문이 자자하니까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그럼 형은 저희 길마님 어떻게 생각해여?

어떻게 생각하냐니. 별생각 없는데 그래도 선율 부길마 앞이니 예의를 차려 말해줘야 하나? 아니면 정말 솔직하게? 잠시 망설이던 경수는 후자를 택했다.

[파티] 냥이냥나냥: 난 별로….

[파티] 천노을: 왜요?

[파티] 냥이냥나냥: 썬신병자잖아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천노을: ㅋㅋ

[파티] 스페이드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스페이드퀸: 썬신병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천노을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밤이 늦어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노을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매일 옆에서 쉬지도 않고 종알거리던 애가 잠자코 있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아까 때린 이마가 많이 아팠나?

*

제목: ★경★ 썬셋 6개월 정지 ★축★ (정리글)

작성자: 징크스/힐러

내용: 보고 있니? 축하해 씨발 놈아♡!!!!!

하지만 일단 영정이 아닌데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6개월은 평화로울 테니 존나 다행임^^ 암튼 내가 이 사건 짧게 요약해줌

1. 이번 눈꽃 이벤트 맵이 격투장 맵을 변형한 거라 버프 데미지 버그가 있었음 (유저에 대한 공격은 안 먹히는데 버프만 먹히는 상황이었음)

2. 이벤트 시간에 몬스터 때려잡던 썬발놈이 이벤 재미없다고 맵 위로 올라감(문페어리라서 가능했어)

3. 그러면서 2분마다 내려오는 보급 상자에 버프 걸어둠. (당연히 아래서 열심히 이벤몹 잡던 애들은 몰랐음)

4. 10분 동안 보급 상자 때문에 이벤트 맵에 있던 애들 전부 시한폭탄 버프 걸린 상태

5. 터ㅋ뜨ㅋ림

6. 다 뒤짐… 다른 이벤트 채널 가서 위 짓 반복

10개 채널 다 조져지고 데스 페널티 먹어서 이벤트 템 전부 썬셋한테 빨려 들어가고 귀속템이나 펫 소실된 애들도 존많… 썬셋만 부자 됨

그리고 이벤트 맵에서 죽은 애들 부활이 안 됐엌ㅋㅋㅋㅋㅋㅋ 부활템 써도 안 되고 저장한 비석에서 살아나는 것도 X 로그아웃하고 다시 들어와도 안 됨ㅋㅋㅋㅋㅋ 맵 제대로 안 만들어 둔 영자 탓이지…;

죽은 애들 중에 서마있는 애들이 이벤트 맵에서 죽었다고 난리 쳐서 구경 온 애들 죽이고, 구경꾼들 뒤졌단 소문 듣고 또 구경 온 애들 죽이고ㅋㅋㅋㅋ GM 푸딩이 상황 파악 겸 경고하려고 들어왔는데 GM도 죽ㅋ여 버ㅋ림ㅋㅋㅋㅋㅋ

구경하러 간 사람들 때문에 이시스가 텅 비었다고 하면 믿겠음?ㅋㅋㅋㅋㅋㅋ 긴급공지 띄우는 반나절 동안 게임 암전 됨 다 이벤트 맵에 갇혀서요;

(318개의 댓글이 등록되었습니다.)

-엥… 아이템 복구도 안 해줌?

└ㅇㅇ… 아직 버그 수정 중

└솔직히 대처가 너무 늦어서 서버 롤백 하면 다른 불만 나올걸….

-맵 좆같이 만들어둔 GM은 둘째치고 누가 시발 이벤트 맵에서 뒤질 거라고 생각을 했겠음? 눈꽃만 떨군 애들은 다행인데 거기서 죽어가지고 데스 페널티로 아이템 썬셋한테 강탈당한 애들 백만 명임

└너구나

└ㅇㅇ나 펫 뜯김ㅋㅋ

└나 8강 무기 사라짐 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 행운옵 40퍼 붙어있던 건데

└ㄴ헐 그럼 전설템이자나

-개빡치는게 선율은 저 날 이벤트 맵 들어도 안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

└계획범죄네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마도 순삭 당했는데 길드 모집은 하려나

└하면 나 들어가서 폭파시킨다

└선율 보이면 아묻따 죽인다 시발 롬들

-근데 왜 그랬대?

└심심해서겠지 진짜 싸패 새끼 어휴

└정지당해서 물어볼 데도 없음

└맵 재탕했다고 그런 건가?

└누가 맵 재탕했다고 일반 유저들을 죽여요

└아냐 지엠도 죽였어~ㅋㅋㅋㅋㅋㅋ

-뒤에 구경 온 애들은 보급 상자 안 먹었는데 어떻게 죽어?

└포탈 앞에서 버프 주고 바로 터뜨림

└…? 사람을 터뜨림?

└ㅇㅇ타임밤… 문페어리 스킬… 개쓰레기 스킬인데 여기서 쓸 줄이야

└타임밤의 재발견

-저분 존나 인성 개쓰레기던데요ㅋㅋㅋㅋㅋㅋㅋ 지나가는 사람 심심하다고 생긴 거 좆같다고 시비 털고….

└ㅇㅇ 걔 파충류 싫어한다고 뱀족이면 아묻따 킬땀 뉴비도 안 가리고 죽임ㅋㅋㅋㅋ

└근데 나도 파충류 싫어서 뱀족 피함… 뱀족들아 미안… 근데 진짜 너무 징그러워…ㅠㅠ

└피하는 건 그럴 수 있음… 근데 썬셋처럼 징그럽다고 죽이지는 않잖아

-엥… 격투 맵 수정한 거라더니 프븦 포인트까지 반영되는 거였음?? 개인 PVP 신기록 세움ㅋㅋㅋㅋㅋㅋ 이거 섭종 할 때까지 아무도 못 깬다에 썬셋 모가지검

└근데 그 전 기록도 썬셋거야ㅋㅋㅋ

└당연하지 그렇게 아무나 킬따고 다니는대ㅋㅋㅋ

└내 라이벌은 나밖에 없다…. BY. 썬셋

-저 새끼 지엠 죽이고 한말이 더 어이없음 앗… 푸딩님 안녕하세요~^^래

└그 뒤에 펫 쓰다듬는 이모티콘 쓰러진 지엠한테 쓰면서 죽은 지엠 쓰다듬어줌; 쌉태연해서 존나 어이없어

└(사진)

└GM푸딩: ?? 이게 존나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쓰다듬는 거 개 또라이 새끼 아니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푸딩둥절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

└ㅅㅂㅋㅋㅋㅋㅋㅋㅋ이건 좀 웃기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시발ㅋㅋㅋㅋㅋㅋㅋㅋ이거 때매 정지 먹인 듯

제목: 이벤트 맵 정상화 및 긴급 패치 안내(수정)

작성자: GM딸기

내용: 안녕하세요, 일루전 플레이어 여러분. GM딸기입니다.

F 엔터테인먼트에서는 플레이어 여러분의 긍정적인 게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분들께서 남겨주시는 의견을 적극 검토하여 게임 내 처벌 시스템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타 플레이어들의 게임 환경을 저해하고 버그를 악용한 썬*(cjssuns*****) 플레이어는 운영정책에 위반된다고 판단되어 ‘계정 6개월 정지’를 실시했습니다. 해당 기간이 지나고 나면 계정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지만, 반복적으로 악의적인 의사가 보일 시 영구적으로 계정이 정지당할 수도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굿바이 윈터! 스노우 플레이크’ 이벤트 특별 맵에서 마법사 계열 직업의 버프가 적용되는 현상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이벤트 맵은 정기점검 이후 정상화되었으며, 오류가 있었던 유저분들에 대한 마을 귀환도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이벤트의 오류 현상으로 인해 모험가 님들의 게임 이용에 불편을 드리게 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금일 진행된 긴급 서버 점검이 완료되어 현재는 원활한 게임 접속이 가능합니다. 신비롭고 즐거운 일루전에서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모험가 여러분들의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이벤트]

* ‘굿바이 윈터! 스노우 플레이크’ 이벤트 특별 맵에서 마법사 계열 직업의 버프가 적용되는 버그가 수정되었습니다.

* 보급 상자에 버프가 적용되는 버그가 수정되었습니다.

* 게임 접속 후 1시간 동안 경험치 버닝 버프가 적용됩니다.

[오류 수정]

* 일부 PC 환경에서 정령이 소환될 시 버벅대는 현상이 수정되었습니다.

* 아쿠아리움의 픽셀 일부가 깨져 보이는 현상이 수정되었습니다.

(댓글을 달 수 없는 게시글입니다.)

*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좋았어!

경수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무지갯빛 테두리가 영롱했다. 당장 경매장에 올린다 해도 기본가 몇십억을 훌쩍 넘어갈 매물이다. 현금 거래로도 몇십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수에게 전설 펫 확정 분양권을 양도해준 뒤, 노을은 남은 한 개의 갤럭시 소드를 장비한 채 휙휙 휘둘렀다.

“뭐해요, 안 까요?”

“아깝게 왜 지금 까?”

분양권을 사용하면 4종의 전설 펫 중 하나를 골라서 분양 받을 수 있다. 당장 사용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물론 지금 까든 나중에 까든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지만, 무슨 이름을 지어줄지도 아직 생각해두지 않았으니까…. 한참 아이템 창을 정리하는 척하며 분양권을 황홀하게 쳐다보는 경수를 보고 노을이 한숨지었다.

“하루 종일 그러고 계시게요?”

“…아직 이름을 못 지었어.”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노을은 일단 4종의 전설 펫 중 하나를 고르는 게 먼저라며 경수를 보챘다. 그 보챔을 이기지 못한 경수는 얼떨결에 분양권을 더블 클릭했다.

“아… 넷 다 귀여워.”

“토끼해요, 토끼.”

“토끼? 그러지 뭐.”

찹쌀떡처럼 동그란 모양의 토끼를 클릭하자 이름을 짓는 창이 떠올랐다.

‘밀키웨이 토야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경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름을 짓는 센스가 없었다. 지금까지 인게임 닉네임을 짓는 데에도 최소 30분이 걸렸지만 결과는 형편없었다. 지금 쓰는 닉네임도 창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충동적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웬만해선 울음소리로 짓겠는데 토끼는 심지어 울음소리조차 없었다.

[길드] 냥이냥나냥: 토끼는 어떻게 우나요

[길드] al0ha: 꾸애액?

[길드] 냥이냥나냥: 꾸애액 같은 소리 하네

[길드] al0ha: ㅠㅠ….

[길드] neutaaaa: 냥님 인성ㅠ 왜 알로하 님한테 뭐라 그래요!!!! ㅌㄷㅌㄷ…ㅠ

흰색이니까 화이트…? 토토? 끼끼? 그런데 너무 흔한 이름은 싫은데. 경수는 계속 ‘음….’거리기만 하며 키보드에서 손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잠깐만, 나 화장실 좀.”

결국 이름을 채 다 짓지도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노을은 화색을 하며 경수를 돌아보았다.

“형! 그럼 펫 이름 제가 지어도 돼요?”

“그러든가. 이상한 이름으로만 짓지 마.”

“걱정 마세요.”

누가 뭐로 짓든 끼끼 같은 것보다는 낫겠지. 경수는 그렇게 천노을의 무시무시함을 깜빡 잊은 채 방심하고 말았다. 화장실을 갔다 오니 조용하던 길드 채팅창에 채팅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언제 온 건지, 주위에 포세이돈 길드원들도 잔뜩 모여 있었다. 마을에서 스킬을 사용하며 화려한 효과를 흩날리는 탓에 펫 이름이 보이지가 않았다.

“얘네 뭐야? 네가 불렀어?”

“아뇨.”

노을은 그저 웃기만 했다. 경수는 채팅창을 위로 쭉 올려 자리를 비웠던 때부터의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길드] ㅈi9별: 와ㅅ1벌

[길드] ㅈi9별: [속보] ㅊㄴㅇ♥ㅊㄴㅇㄲ 공식으로 밝혀져!

[길드] 박휘벌래: 원래도 공식이었는데요ㅋㅅㅋ

[길드] ㅈi9별: 지금 둘이 같이 있음ㅋㅋㅋ

[길드] 할로윈가지: 같이 다닌 게 뭐 하루 이틀인가….

[길드] ㅈi9별: 그리고 ㅊㄴㅇㄲ 토야 생겼어요

[길드] 박휘벌래: ???

[길드] 할로윈가지: ?????

[길드] 포세이돈대장: 헐 전설 펫?

[길드] neutaaaa: 그거 매물 언제 나왔어요? 배 아파ㅠㅠ;

[길드] ㅈi9별: 이시스 경매장 앞ㄱㄱㄱ

[길드] ㅈi9별: 직접 와서 보세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구별이 지나가다가 노을과 경수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해 길드원들을 부른 모양이다.

[길드] neutaaaa: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박휘벌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지, 부러워서 저러나? 경수가 위로 뛰어오르자 흰토끼가 별 가루를 흩날리며 경수를 따라 위로 폴짝 뛰었다.

‘노을♡’

“…….”

펫 이름을 보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난 경수가 노을의 멱살을 잡기 위해 그에게 달려들었다.

“씨발, 천노을!”

노을은 웃음소리를 내며 그를 피하려 했지만 제게 몸을 부딪쳐오는 경수 탓에 어쩔 수 없이 멱살을 붙잡혔다. 그때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플라스틱 의자가 기우뚱 기울어졌다. 동시에 둘의 몸이 겹쳐지며 뒤로 넘어갔다.

쾅!

뼈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

“…….”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노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경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가까운데,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입술에 말랑한 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랑해? 뭐가 말랑하지?’

순식간에 자세가 뒤집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

경수는 순순히 입술을 떼고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점프 한 번 만에 다시 사라져 잠수를 탄 경수를 찾는지, 길드원들이 스킬을 사용하는 화려한 효과음이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어색해 죽을 것 같다. 누가 이럴 줄 알았겠느냐고. 둘 사이의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노을이었다.

“형, 그….”

“어? 왜?”

“좀 내려와 주시면….”

“……?”

“좋…겠는데요.”

엉거주춤하게 누워있던 노을이 곤란한 듯 웃었다. 경수는 아직도 노을의 멱살을 어설프게 쥔 채 그의 허리춤에 올라타 있었다. 그걸 깨닫기가 무섭게 경수는 재빨리 옆으로 구르듯 몸을 비켜주었다.

‘씨발, 설마!’

혹시나 해서 놈의 바지춤을 살펴보았는데 다행히 지난번과 같은 대형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또 억지를 부려 제 손을 그 위에 얹어둔다면 이번에야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경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노을은 바닥에 망연하게 앉아 자신의 뒤통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마을로 워프한 경수는 뒤통수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천노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경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그, 방금은 실수였어. …알지?”

“…….”

“솔직히 네가 잘못했잖아.”

“…제가 뭘요. 형이 저더러 이름 지어도 된다고 했으면서.”

“그건….”

그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펫 이름을 ‘노을♡’로 지어 놓는 미친놈은 처음 보았다. 경수는 할 말이 없어 말을 얼버무리다 이내 제가 잘못한 건 없다는 생각에 언성을 높였다.

“뭘 그렇게 봐!”

노을은 눈을 내리깔기는커녕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꾹 다물고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와서 앉아.”

경수는 제 실수를 묻어버리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노을은 그 탓에 더 불만을 품은 듯했다. 쓰러진 의자를 다시 세워 그 위에 걸터앉은 노을은 성의 없게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그게 신경이 쓰인 경수는 망설임 끝에 몸을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너도 처음은 아니었을 것 아니야.”

“…처음이었으면요?”

“웃기지 마. 그렇게 생겨놓고 뭐가 처음이야.”

경수는 냉소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내자식 얼굴에 별 감흥이 없는 경수마저도 가끔 감탄하게 되는 얼굴이다. 그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유난히 흰 피부와 옅은 머리카락 덕에 묘한 분위기가 돌기도 했다. 그러니 주변에서 천노을을 가만히 뒀을 리가 없다.

“저, 진짜 처음이었어요.”

“……진짜?”

“네. 그러니까 책임져 주세요.”

“응, 싫어.”

“책임져요, 책임져!”

“고집 피우지 마. 막말로 키스도 아닌데 뭘 책임져? 실수였던 거 너도 잘 알잖아.”

경수의 달변에 이번에야말로 할 말이 없었는지 노을이 입을 다물었다. 미안한 마음이 아예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책임져달란 놈에게 잘못 말려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서버] ㅈi9별: 냥이냥나냥<<<< 위치 제보 시 선착 한 분 2000드림ㅇㅅㅇ 잡아두면 오천!

[길드] 냥이냥나냥: ;;뭐 하세요?

[서버] ㅈi9별: ㅊㄴㅇ놀이요ㅎㅅㅎ

[서버] neutaaaa: 천노을 놀이ㅋㅋㅋㅋㅋ

경수는 천노을처럼 따라다니며 자신을 놀리는 길드원들을 피해, 던전에 들어와 몸을 피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노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뭔데?”

그는 처음 보는 듯한 냉랭한 얼굴로 일어나 경수에게 다가왔다. 경수는 바퀴 달린 의자를 조금씩 뒤로 굴리며 뒤로 물러났다. 결국 뒤에 벽이 닿아 도망칠 곳이 없어졌을 때 노을이 자세를 낮춰 속삭였다.

“키스도 아닌데 뭘 책임지냐면서요?”

“…….”

“그 말은 정말 키스하면 책임지는 거예요?”

노을은 말간 눈을 깜빡이며 폭탄 발언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처럼 갑작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깜짝 놀란 경수는 노을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말랑한 감촉이 느껴질 새도 없이 떨어진 노을에 경수는 입을 손바닥으로 덮으며 말했다.

“씹, 너 진짜 뒤질래?”

“먼저 피하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뭐?”

“그러니까 형이 졌어요.”

“…….”

졌다는 말에 경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는 세상에서 지는 것을 가장 끔찍해 하는 인종이었고 노을은 그런 경수의 승부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형이 졌다구요. 먼저 피해서.”

노을이 빙글 웃으며 못을 박듯 한 번 더 말하자, 경수는 노을의 멱살을 잡아챘다.

“…먼저 피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노을은 고개를 기울이며 슬쩍 웃었다.

“네.”

“…….”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이미 한 번 맞춘 입인데 뭘 더 못하겠느냐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 뽀뽀나 키스나.

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망설임 끝에 떨리는 입술을 노을에게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입술이 포개진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자, 노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형, 입 살짝만 벌려주면….”

“…….”

“안 돼요?”

…되겠어? 경수는 대답 대신 입술을 더 꾹 다물었다. 노을은 고개 각도를 틀어 혀를 내어 경수의 입술을 핥았다. 축축한 감촉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쉽게 입을 벌려주지 않는 경수를 보채듯 노을은 입술을 잘근거리고 민망한 소리가 나도록 빨기까지 하며 경수를 자극했다.

경수는 금방이라도 노을을 밀쳐낼 듯 손을 꿈틀거렸지만, 먼저 떨어지면 지는 거라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결국 간지러운 감촉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풀리자 뾰족하게 세운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좆됐다….’

이건 정말 키스였다. 누구나 다 하는 어린애 같은 뽀뽀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은 실수도 아니고 말이다. 경수의 머릿속에서 빨간 적색 등이 울렸다.

김경수, 이 미친 새끼야! 아래 덜렁덜렁한 자지 달린 놈이랑 뭐 하는 짓이야! 이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그마저도 무시해버릴 만큼 승부욕이 더 강했다.

‘…아, 씨발.’

축축한 혀가 제 혀에 얽혔을 때는 정말, 진짜로 망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천노을을 때려눕히고 이 집을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 생각을 한순간, 놈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가? 얼굴로 콧바람이 느껴지자마자 경수는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노을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여유로운 듯했던 노을은 제 작은 행동 하나에 어깨를 쥔 손을 움찔 떨었다.

“읏….”

긴장한 노을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경수는 별안간 또 자신에 대한 노을의 마음을 떠올리고 말았다.

‘너 진짜로 나 좋아하는구나.’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을은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새빨개진 채로 제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호기롭게 내기를 제안했던 것과는 달리 손부채 질로 열을 식혔다. 그 반응을 보니 처음이라는 말이 아주 조금, 조금 믿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새낀 날 왜 좋아하지? 미친 새낀가.’

이기기는 했는데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노을을 보면서도 경수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형… 나 더워요.”

“뭐. 물이라도 마셔.”

더욱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내년까지도 자신은 노을을 좋아하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

악몽을 꾸었다.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는 꿈이었다. 이성을 잃고 노을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그의 위로 쓰러지고, 실수로 입술이 맞닿은 뒤, 어쩌다 보니 놈의 도발에 넘어가 혀까지 섞고 마는 그런 꿈 말이다.

꿈에서 깨어난 뒤 경수는 머리를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천노을은 몰라도 경수는 이번이 첫 키스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키스를 했다고 해서 엄청나게 중대한 일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외국에서는 친구끼리도 종종 키스를 한다는데, 그것에 비하면 어제 일은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을과 한 번 더 입을 맞추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어제 일은 실수였어. 너도 나도 다 잊자. 그게 네게도, 그리고 내게도 이득이 되는 길이야.’

노을의 얼굴을 마주하면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 어제 형 꿈꿨어요!”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제 꿈을 꿨다고 말하는 놈에게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경수는 그냥 잊자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말을 한다고 해서 노을이 들어 처먹을 놈도 아닌 데다가, 정말 잊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슨 꿈?”

“그건 야한 꿈이라 못 말해요.”

“…….”

노을은 꼴에 얼굴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이 씨발 놈이 날 가지고 무슨 꿈을 꿨다고? 경수는 참다못해 노을의 볼을 아프게 꼬집어 잡아당겼다. 양 볼을 꼬집고 흔들자 노을의 한쪽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다시는 꿈꾸지 마.”

노을은 그 말에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지으며, 꼬집혀 빨개진 볼을 감싼 채 반항했다.

“하지만! 꿈을 제가 원한다고 해서 안 꿀 수….”

“꾸지 마.”

“……네….”

비로소 만족할 수 있었다. 노을은 시무룩해졌다가도 금세 활기를 회복하고는 했다. 핀잔을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옆에 다가와 살랑거리는 걸 보면 좀 우습기도 했다.

“어제 형이 이겼잖아요. 그러니 대가로, …절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저 얼굴은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그럼 의자에 앉아.”

“네.”

노을이 의자에 털썩 앉은 채 눈을 빛냈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가만히?”

“응, 열심히 해봐.”

“형….”

경수는 노을을 무시한 채, 제 할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계속 경수를 애타게 부르던 노을은 의자를 끌어 그에게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발로 슬쩍 밀어내도 다시 붙기 일쑤였다.

“얌전히 있으라니까, 내가 이겼잖아.”

“그거 기간 다 지났어요. 5분 전에.”

“기간 같은 소리 하네….”

“……그럼 얌전히 있으면 집 가기 전에 또 뽀뽀해줄 거예요?”

또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경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내가 미쳤냐?”

“어제는 됐는데 왜 오늘은 안 돼요?”

“원래 인생이란 게 그런 법이야. 네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 거야. 앞으로도.”

“형도 그리 오래 산 건 아니면서….”

불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무슨 말끝마다 첨언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집에 가려고 채비를 하던 중, 노을이 불쑥 앞으로 나타나 도둑 뽀뽀를 하고는 씩 웃었다.

“죽을래?”

놀란 채 잠깐 굳어 있던 경수는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살벌하게 협박했다.

“잘못했어요!”

“하루 종일 눈치 보더니, 이러려고 그랬냐?”

“형이 틈을 안 주는데 어떻게 해요. 앞으로도 빈틈 보일 때마다 뽀뽀할 거예요.”

“그럼 난 그때마다 때리면 되는 거야?”

경수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노을은 말간 눈을 깜빡이더니 경수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뭘 하려는 건가, 하고 잠시 내버려 두었더니, 손을 결박한 채 또 쪽쪽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정강이를 퍽 걷어차니 그런 짓을 관두었다.

“간다, 내려오지 마.”

“왜요? 오늘은 데려다줄래요.”

“…….”

밖에서도 이러면 어떻게 하지. 경수는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빈틈이 보인다고 입술을 가져다 대면 그거야말로 대참사였다.

“형이 이기면 안 내려갈게요.”

“이기면? …이, 씹!”

노을은 고개를 살짝 비틀어 키스를 청했다. 그를 밀어내려던 경수는, 엘리베이터나 바깥 어디에서든 노을이 돌발행동을 한다면 정말 큰일이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노을을 내버려 두었다. 결과는 같았다. 노을은 어제처럼 눈가를 파르르 떨며 먼저 나가떨어지고는 했다.

“…다 했냐?”

“……네.”

매번 호기롭게 달려드는 것치고는 정말 별거 없잖아.

“간다.”

또 아무것도 안 하고 이기고 말았다. 매번 질 거면서 왜 겁도 없이 덤벼드는지 경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범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왕왕거리는 하룻강아지 같아 우습기도 했다.

*

「ㅊㄴㅇ: 들으셨어요?」

「ㅊㄴㅇ: 어제 썬셋 돌아왔대요.」

그 뒤로 강아지가 놀라는 이모티콘 두 개.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썬셋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천노을은 ‘어떻게 그런 개새끼가 있지?’를 눈으로 표현하듯 동공이 마구 흔들리곤 했었다.

아침부터 길드톡에서도 썬셋 얘기가 한창이었다. 어제 썬셋이 나타나는 것을 직접 코앞에서 목격한 부길마가 지금도 한창 영웅담을 펼치고 있었다.

「할로윈가지: 거래 때문에 1채 가 있었는데」

「할로윈가지: 살면서 현실판 모세의 기적 일어나는 거 처음 봤잖아요ㄷㄷ」

날짜를 헤아리며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그가 이벤트 포탈이 있었던 이시스 마을의 한가운데에 나타나자마자 기적이 일어났다. 새벽에도 활발하게 수다를 떨며 놀던 놀캐 족들이 썬셋을 중심으로 좌우로 싹 갈라져 그를 피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서도 썬셋을 모세의 후손이라고 부르며 놀고 있었다.

「ㅈi9별: 알만하네여ㅇㅅㅇㅋㅋ」

「ㅈi9별: 그래서 부길마 님은요?」

「할로윈가지: 당연히」

「할로윈가지: 저도 피했죠ㅋㅋ」

「박휘벌래: 노간지….」

「ㅈi9별: 개노간지」

「할로윈가지: 님들이라면 안 그럴 수 있겠음?」

「할로윈가지: (사진)」

게임 화면을 찍은 스크린샷이 연달아 열 개나 보내져 왔다.

[서버] 힙찔이: @@@@@1채널 썬발 새1기 등장 빨리 채널 옮기셈@@@@@@@@

[서버] 페일에일: 썬발놈 복귀함;;;;;; 길드존에 잇으면 당장 나오세요!!!!!!

[서버] 썬셋: 잉 서마로 치면 나한테도 다 보이는데ㅇㅅㅇ!!

[서버] 소라게: ㅆㅂ좃댓다ㅋㅋㅋ 님들 킬 각 섰음 빨리 대피햌ㅋㅋㅋㅋ

[서버] 힙찔이: ㅈㅅ저희집 고양이가 친 채팅입니다…;;;

‘1채널 이시스 주의보’와 ‘길드존에 있으면 시급히 대피하라’라는 경고문이 널리 퍼졌다.

「할로윈가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새벽에도 1채는 무조건 혼잡이잖아요?」

「al0ha: 혼잡 아니면 보통이죠」

「할로윈가지: 암튼 1채널 쾌적 뜨는 거 본 사람?」

그렇게 말하며 그가 보내온 사진에는 ‘1채널(쾌적)’이 당당하게 쓰여 있었다.

「포세이돈대장: ㅁㅊㅋㄱㅋㅋㅋㄲㄱㅋㄱㅋㄱㅋ」

「포세이돈대장: 근데 저 창을 봤다는 건ㅋㅋ 채널 옮겼어요?」

「할로윈가지: 아 옮겻어요ㅋ 거래 5채널에서 하기로 했음ㅋㅋㅋㅋㅋㅋㅋ」

「ㅈi9별: 무섭긴 했나 보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율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악하는 유저들 틈에서 그들만이 축제 분위기를 가졌다. 물론 유저들에게 욕을 퍼먹기는 했지만 썬셋이 없었던 동안 피해자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선율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특수문자를 섞은 ‘썬셋 복귀 축하’ 서마를 날렸다.

「neutaaaa: ㅅㅂ 생각하니까 추억돋넼ㅋㅋㅋ 나 그날 게임 접을 뻔했는데」

「나: 제 친구는 그날 접었어요….」

「완두완댜: 저도요ㅋ 저 부길마 님한테 못 해 먹겠어서 접는다고 귓말도 보냈어요ㅋㅋ」

「ㅈi9별: ㄷㄷ」

「박휘벌래: 대박 결단력 있어」

「할로윈가지: 결단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할로윈가지: 웃기고 있네ㅋㅋ 저 인간 긴급 점검하고 나서 1등으로 들어왔음. 제가 2등이었거든요」

「완두완댜: [귓속말]쉿 그건 비밀이라고 했잖아요」

「ㅈi9별: 1등;; 해명하세요」

「완두완댜: …….」

「완두완댜: 지갑으로 애지중지 키운 내 새끼 못 버려욧!!!」

곧바로 길드존에 가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유저들에게 풀 거라는 예상들과는 다르게, 썬셋은 얌전히 이시스 경매장 앞에 앉아 아이템을 정리했다고 한다.

‘파티 제목: [1ch] 별 조각 개당60 무한ㅍㅍㅍ’

‘파티장: 썬셋’

‘내용: 썸페허스키 6.0 풀옵오벨리스크 2.0 꽃 조각 개당 50 별 조각 개당 60 ㅍㅍㅍ 구입 문의는 팟참ㄱ’

썬셋 이름으로 만들어진 파티 매칭 채팅방 소식에 서버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거래를 핑계로 옆에 다가오면 목을 따 버릴 게 분명하다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정말 한 시간 내내 얌전히 아이템만 처분했다. 여름 한정 펫 분양권부터 시작해 SS 등급에 옵션이 네 개나 붙은 시즌 패션 템마저 깔끔하게 팔아넘기는 탓에 그가 게임을 접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경수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진짜 게임을 접을 거였으면 왜 정지가 풀리는 날에 맞춰 게임에 접속을 했으며, 길드 마스터 자리도 넘기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겠는가? 그냥 다시 유저 죽이기 놀이를 하기 위해 무기 옵션을 새로 맞출 속셈인 것 같았다. 만렙 유저의 무기를 맞추는 데에는 상당한 양의 돈과 운이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ㅊㄴㅇ: 어제 썬셋 돌아왔대요.」

경수는 다시 천노을과의 채팅방을 클릭해 입력창에 손을 얹었다.

「나: 망했넼ㅋㅋㅋ」

「ㅊㄴㅇ: ㅠㅠ」

노을의 메시지에 짧게 답변을 보낸 경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을 나섰다. 게임을 접었던 다른 반 친구에게 썬셋의 복귀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

편한 차림으로 앞에 앉은 노을은 묻지도 않은 학교생활을 온종일 종알거리고 있었다. 꼼짝없이 두 시간 동안 게임도 없이 놈을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어제 경매장에 싸게 올라온 걸 샀다며, 가만히 있어도 경험치를 주는 ‘눈토끼 온천 2시간 이용권’을 사용하고 경수에게도 선물했다. 효율이 높지 않아 예쁜 스크린샷을 남기겠다는 놀캐러들이 아니면 온천 이용권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필요 없다고 거절하기엔 제 생각도 해서 이용권을 두 개나 산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형? 제 말 듣고 있어요?”

“…….”

“형?”

경수는 눈을 멍하게 깜빡이며 뒤늦게 대답을 했다.

“응, 듣고 있어. 매점 아저씨 외제 차 뽑은 얘기하고 있잖아.”

“…그건 아까 전에 끝났는데요?”

“……아닌데?”

“맞아요. 지금 제 얘기 안 듣고 있잖아요.”

“…….”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노을의 입술이 댓 발 튀어나왔다. 그리고 시무룩하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모습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아예 처음부터 듣고 있지 않던 것이 아니고, 딴생각을 조금 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노을의 시선이 경수의 턱에 와닿았다. 분홍빛을 띠는 입술이 자그맣게 벌어졌다.

“형… 여기.”

“뭐, 또.”

“…….”

노을이 낮은 책상에 손을 짚고 살짝 일어나 손을 뻗어왔다. 덩달아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에 경수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어차피 오늘도 제가 이길 승부였다.

“…….”

눈을 질끈 감고 기다렸으나 어느새 익숙해진 말캉함은커녕 어떠한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슬그머니 눈을 뜨자, 노을이 코앞까지 손을 가져온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뭘 보고 이렇게 놀란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 같은 표정.

노을을 알게 된 날로부터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시원하기만 했던 날씨가 싸늘해지고 풍성하던 나뭇가지에서는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동안 노을은 수도 없이 경수에게 들들 볶이면서도 종일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얼마 전 멱살까지 잡히고, 매번 키스 내기에서 먼저 나가떨어질 때도 이런 표정은 지은 적이 없었다.

“왜, 뭐?”

“형 여기 속눈썹이 묻어서.”

“……?”

“그거 떼 주려고 그랬던 건데….”

멍하게 중얼거린 노을이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훑었다. 속눈썹?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사람 헷갈리게…. 경수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뺨을 쓸었던 손가락이 얼굴선을 타고 턱으로 내려왔다. 다른 손으로도 얼굴을 부여잡은 채 노을이 고개를 숙였다.

“읏.”

“…….”

이번에야말로 기다렸던 감촉이 와닿았다. 노을은 테이블을 옆으로 치운 채 경수의 뺨을 소중하게 감쌌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던 물컵이 옆으로 쓰러졌다. 노을은 경수가 컵으로 손을 뻗으려는 그 잠깐의 찰나마저 가로막았다. 무작정 들이밀어 오는 혀 탓에 당황했던 경수도 곧 얼떨떨하게 대응했다.

“…….”

또 가만히 있으면 이길 수 있었다. 여태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

이 새끼가…. 평소 같으면 곧바로 떨어졌을 놈이 오늘은 좀 버텼다.

“…….”

왜 이렇게 길어지지? …어?

“……으응.”

이게… 아닌데.

천노을은 연한 갈색의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깊게 입을 맞췄다. 숨결이 뜨거웠다. 맞닿았던 입술을 잠깐 떨어뜨리고 눈을 떴다. 아직 항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는 다시 입술을 맞댄다. 뭉클한 혀가 파고들어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이게 뭐야.’

경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했다. 이건 고작 키스다. 아무에게나 해도 상관없고 감정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한 그런. 그런데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뒤로 빼기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용납할 수 없는 승부사로서의 자존심이 버티고 있었다.

“으, 자, 잠….”

경수는 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입술만 간신히 뗀 채로 이마를 맞대고 노을이 낮게 속삭였다.

“잠깐 왜요?”

사납게 날이 선 눈이 낯설었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에 주눅이 들려다가도 오기로 입술을 질끈 물었다. 입맞춤은 재개되었다. 매번 필사적인 노을과 다르게 경수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평소보다도 길어지는 키스에 기분이 좀….

“내가 졌어!”

“읏, 네에?”

경수는 노을을 두 손으로 밀쳐내고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손을 얹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투덜거렸다.

“아 씨발, 숨 막혀서 더는 못 하겠네! 이번엔 천노을 네가 이겼어.”

평소답지 않게 삐질 거리는 경수를 유심히 살피던 노을이 의심의 눈초리로 경수를 흘겨보았다.

“형, 일어나 봐요.”

“…….”

좆됐다.

“이 자식이 어디서 명령 질이야?”

“으음, 일어나주세요.”

“…….”

“…제발?”

노을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경수는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제발’이란 말을 붙인다고 해서 전부 부탁이 되지 않는다고 핀잔을 줄 여유도 없었다. 하필이면 도망칠 수도 없게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곤란해. 들키면 진짜 곤란하다고…. 경수는 무릎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무표정을 유지했다.

노을의 손이 태연함을 가장한 경수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볼에 달라붙었던 머리카락을 떼어낸 그는 천천히 경수의 목덜미로 손가락을 옮겼다.

“알겠어요. 싫으면 일어나지 마요. 그 대신에….”

“…….”

“뽀뽀.”

애교 섞인 말투와 함께 섬세한 손가락이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당장 보여 달라며 달려들어 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던 경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단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

노을은 무작정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경수가 고개를 홱 돌려 피하자, 차선책으로 볼에 부드러운 입술을 가져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왜 자꾸 피해요? 처음인 것도 아니면서.”

“뭐.”

“수도 없이 했잖아요. 오늘은 형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

“맞, …아, 아니야. 뭔 개소리야.”

깃털 같은 목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혔다. 등줄기가 찌릿했다. 귀를 벅벅 긁어대고 싶을 정도로 소름 끼쳤다. 노을이 볼에 쪽쪽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꺼져, 쫌…!”

큰일 났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속으로 노래를 불러보았지만 효과는 전혀 없었다. 뒤통수를 받치고 있던 손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더니 그대로 두 뺨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집중할 수도 없었고. 막무가내로 디밀었던 입술 때문인지 입안이 찢어져 철냄새가 감돌았다. 입술이 벌어지기가 무섭게 말캉한 혀가 감겼다. 경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 좋아. 전혀 안 좋다. 안 좋다아아….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친 것과는 상반되게, 경수는 혀가 비벼질 때마다 허리를 들썩거렸다. 기분이 붕 뜨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둘은 입술이 얼얼할 때까지 입을 맞췄다. 묘한 쾌감에 시야가 일렁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뚝 떨어진다. 보통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희게 물들었던 시야가 제 색을 찾기가 무섭게 노을의 입술이 떨어졌다.

“…너 잠시 여기서 기다려.”

이 이상은 위험해서, 더는 안 돼. 경수는 노을을 내버려두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세수라도 해서 머리를 가라앉혀야 했다. 잠시 후, 문고리가 덜컹하고 움직였다.

문이 열렸다.

*

경수가 화장실에서 나와 다리를 덜덜 떨며 도무지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노을이 물었다.

“형, 제가 불편했어요?”

“왜 아는 척이야.”

꼭 내가 뭘 했는지 아는 것처럼 구네. 그럴 리가 없는데. 경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다음엔 연습해 와서 좀 더 잘할게요.”

“누구랑 연습해?! 너 나 말고 또 있어?”

“응? 아니, 저 혼자요….”

“아, 그래.”

이런 짓을 밥 먹듯이 하는 줄 알았다. 분명 내가 처음이라고 했는데…. 경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노을은 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번엔 뭐가 문제였냐고 되물었다.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 같은 질문으로 대꾸하니 이젠 아주 질릴 지경이었다.

“몰라. 한 번만 더 물으면 나 집에 갈 거야.”

“저는 좋았어요. 엄청….”

“…….”

“좋아해요, 형.”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히는 노을에 경수는 떨떠름하게 시선을 돌렸다.

“이거 원래 이렇게 좋은 거예요? 본판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본판은 무슨, 나도 안 해봐서 몰라.”

경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이걸 왜 노을과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잠깐 미쳤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 저랑 해볼래요?”

“……?”

말이 담고 있는 내용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담백하게 들렸다.

“뭐라고?”

내가 이해한 게 맞나? 경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노을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수를 위해 친절히 부가 설명까지 곁들여 말했다.

“저랑 해봐요. 섹스.”

“미쳤냐? 우린 아직 안 돼!”

“왜요? 한 번 해봐요. 그럼 알 수도 있잖아요.”

“싫어! …생각해보면 네가 상식적인 소릴 할 리가 없지. 몰라줘서 미안하다. 됐냐?”

“어차피 나중에 할 거 연습해보면 좋은데….”

“너 진짜 좆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누가 그걸 연습해?”

노을은 눈을 휘어 웃으며 친절하게 손짓으로 가르쳐주었다.

“형이랑 제가요.”

“야! 그게 아니라! ……남자끼리 그걸 어떻게 해, 멍청아.”

그 말에 노을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작게 벌렸다. 그것도 몰랐으면서 무작정하자고 한 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 안 되나?”

“안 되지, 이거 진짜 바보 아냐?”

애초에 들어가는 곳이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 경수는 킬킬 웃었다. 내내 밀리기만 하다가 드디어 이긴 것 같았다. 노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만약에 되면요?”

“안 돼. 방금 한 게 다야.”

“불가능이란 없댔어요. 방법은 만들면 되죠.”

“불가능이 있으니까 그 단어가 생긴 거야. 방법? 어떻게 만들게? 네가 여자로 환생이라도 해서 올 거야?”

“그건 너무… 늦구요, 제가 방법을 찾아오면? 그래서 공부해오면 어쩔 건데요?”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도 원래 있던 것을 찾아내기만 한 것이다.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또한 자연적으로 타고난 성별이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노을의 전적을 봐서는 이상한 방법을 가져와 우길 게 분명했지만, 넘어가지 않고 꼬투리 잡을 자신은 얼마든지 있었다. 경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미래의 자신이 듣는다면 반드시 살해를 결심할 말을 내뱉었다.

“하, 공부? 야 공부한다고 방법이 생기면 벌써 건물주 될 방법 연구해서 부자 됐지.”

“말 돌리지 마요.”

“그래, 한다!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노을은 철두철미해 근처에 잡히는 달력을 아무렇게나 찢어와 뒤쪽 하얀 면에 별 이상한 내용을 휘갈겨 적었다. ‘어길 시 일루전 캐삭하기.’ 경수는 그 아래 제 이름 세 글자를 적은 뒤 코웃음을 치며 노을에게 넘겼다. 그 종이는 노을의 방 어딘가에 숨겨졌다.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The Dark Mage’s Return to Enlistment

gwihwanhaessneunde ibdae jeonnal-ida I returned, but it was the day before enlistment. 귀환했는데 입대 전날이다
Score 3.3
Status: Ongoing Native Language: Korean

Kim Minjun, who was a normal high school senior in South Korea, was suddenly summoned to another world and became a dark magician.

Minjun, who persevered through all sorts of hardships with the single-minded goal of returning home, saved this other world with his dark magic.

Casting aside a life as a hero and guaranteed riches, he returned to Earth.

Just when he was about to fully enjoy his life, a problem arose. A dungeon break occurred, and monsters began pouring out. Not only did this threaten the peaceful Earth life that Minjun had just returned to… But on his very first day back, he was also ordered to enlist in the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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