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40

40화 발현 (2)

40화 발현 (2)

나는 사내에게 검을 겨눴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검 끝이 떨렸다. 그 정도로 사내의 위압감은 대단했다.

나를 보며 사내가 말했다.

“하지 마라. 죽는다.”

나는 미니맵을 확인했다. 사내는 우호적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대적 대상도 아니다.

스윽.

마치 그림자처럼 내게 다가온 사내가 입꼬리만을 움직여 웃었다. 오직 입술 말고는, 얼굴을 움직이는 모든 근육이 마비된 사람 같았다.

“친구들을 깨워라.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새 사내의 손에는 내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다루듯 휘휘 검을 돌려 보더니, 다시 내 손에 쥐여줬다.

“······당신은 누구지?”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다. 나는 그저 단장의 명령에 따를 뿐이니까.”

“단장?”

“네가 ‘쿠’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내 말이다.”

내 눈에 힘이 들어갔다.

“쿠가 살아있는 거야?”

그 순간 카앙! 사내의 옆에서 불꽃이 튀었다. 세실이 사내에게 뛰어들며 단검을 뻗었고,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막았다. 나는 그 광경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쿠를 처음 만났던 날, 쿠는 저 사내와 같은 동작으로 세실의 단검을 막았었다.

세실도 그것을 느낀 듯했다. 재빠르게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세실이 나와 사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족제비를 깨워. 세실.”

이런 상황에서 쿨쿨 잘도 자고 있던 족제비는 사내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뒤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십여 초 만에 우리는 여관방을 벗어나 말 등에 올라탔다. 사내가 족제비를 옆구리에 낀 채 움직였기 때문이다.

비가 내렸다.

“입어라.”

사내는 자신이 입은 것과 비슷한 검은 로브를 우리에게 건넸다. 우리는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채, 사내를 따라 말을 달렸다.

“쿠. 어디.”

“단장은 살아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세실의 물음에 답한 사내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초에 그가 죽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벌판. 달빛마저 어둠에 삼켜진 지면 위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느꼈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잠시나마 마음속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듯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사나우면서도, 불규칙한.

“벌써 알아챈 건가.”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먼지가 몸을 떨었다.

“계속 달려라. 곧 다른 단원을 만날 거다.”

사내가 뒤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말을 달려오는 모습을.

“데미안······!”

“가자, 세실!”

우리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빗속을 달렸다. 세실의 어깨가 움츠러든 것이 보였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거기에 더해 세실은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우는 것일까. 아니면 화가 난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나는 세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암영이 나타났으니까.

나는 말고삐를 질끈 움켜쥐었다. 암영. 이 세계에서 가장 맞닥뜨리기 싫은 상대가 나타났다. 그들의 목적은 뻔했다. 세실이다.

“데미안. 달아나.”

돌연 세실이 우측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나는 직감했다. 세실은 우리와 헤어지려 하고 있다.

“세실!”

세실의 뒤를 쫓았다. 본능적인 결정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세실과 헤어지는 것이 맞는지 모른다. 여기서 갈라지면 나와 족제비는 안전해질 수도 있다. 혼자가 된 세실 또한 조금은 달아나기 수월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세실과 함께하는 것을 택했다. 세실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여기서 세실과 헤어지게 된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세실을 중심으로 세계가 공전했다. 회전하는 지면이 끝없이 펼쳐진 벽이 되고, 하늘이 됐다. 변화하는 세계를 짓밟으며 나는 말을 달렸다.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고 자세를 낮췄다.

“오지 마! 데미안!”

세실은 계속 내게서 달아나려 했다. 세실의 승마술은 나보다 뛰어나다. 그럼에도 나는 악착같이 세실을 쫓았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어, 너와 함께 이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다.

[승마술(Lv.2)이 3레벨로 진화합니다.]

내 의지가 시스템에 전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승마술 레벨이 올랐다. 3레벨의 승마술이 더해진 회색마의 주력은 대단했다. 긴 갈기를 불꽃처럼 휘날리며 세실을 따라잡았다.

“데미안! 왜!”

“널 두고 가지 않아! 전속력으로 달려! 세실!”

***

세실은 암영의 추격을 확인하자마자 데미안에게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자신이 데미안보다 승마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이대로 자신은 데미안과 멀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암영의 추격자들은 나에게로 몰려들 테니까.

“세실!”

뒤를 돌아본 세실의 눈이 커졌다. 데미안이 무서운 속도로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왜 따라오는 거야 데미안. 너도 알잖아. 암영의 타깃은 나 하나뿐이라는 걸.

그러나 이내 세실은 깨닫는다. 자신의 혀는 그 많은 생각을 한꺼번에 토해낼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세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고작 이것뿐이었다.

“데미안! 왜!”

“널 두고 가지 않아!”

세실의 눈동자가 파문처럼 흔들렸다.

“전속력으로 달려! 세실!”

소리치는 데미안에게서 세실은 생기(生氣)를 봤다. 거짓과 허상으로 점철된 이 잔혹한 세계에서 오직 데미안만이 살아 숨 쉬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눈이 부시다. 세실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광산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암영의 추격을 조우한 이 순간까지, 데미안은 단 한 번도 예측대로 행동한 적이 없다.

세실은 밤눈을 밝혀 등 뒤를 돌아봤다. 흑발의 사내가 암영과 얽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살수들이 경로를 우회해 자신을 추격하고 있다.

세실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데미안을 지킬 것이다.

설령 이곳에서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시이잇.

그림자 결속을 발현한 세실의 몸이 어둠으로 덮였다. 양손에 단검을 쥐며 세실은 말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 순간 세계가 멈췄다.

***

나는 허공에서 벌어진 기현상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내리던 비가 멈췄다.

아니, 얼어붙었다.

쩌저저적······!

나와 추격자들 사이의 빗줄기가 얼음으로 바뀌었다. 이어 첨예한 화살처럼 변해, 추격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채채채채챙!

“어이! 이쪽이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등 뒤에 족제비를 태운 채, 속삭이는 것처럼 주문을 읊었다. 그녀의 오른손에서 차가운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그 빛은 순식간에 긴 창으로 변했다.

파앙!

한순간에 날아든 빙결의 창이 추격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알았다. 그녀가 엄청난 실력의 마법사라는 것을.

“따라와! 여기로!”

우리는 여자 마법사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그녀에게 도달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놀라운 마법이 적의 추격을 차단했다.

“단장이 보내서 왔다.”

여자 마법사가 세실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냥 페르디나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왔을까?”

그녀가 긴 주문을 읊었다. 잠시 후 우리 뒤쪽의 지면 일부가 얼어붙었고, 말을 달려오던 추격자들이 차례로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광경을 보며 여자 마법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미니맵에 변화가 생겼다.

새롭게 등장한 적대적 표식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세실이 말했다.

“······유령. 표범.”

유령 표범은 암흑 속성의 정령이다.

그리고 그 사나운 정령을 탈것으로 운용하는 것은 암영 내에서도 아주 특별한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가능하다.

“······쿼드? 빌어먹을 라이칸! 그런 말은 없었잖아!”

마법사의 얼굴이 긴장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손에서 새로운 공격 마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유령 표범은 놀라운 몸놀림으로 회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정말로 너였구나? 세실.”

유령 표범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인영이 허공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상대의 정체를 깨달았다.

‘미스트!’

급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내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세실, 족제비, 그리고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원인은 분명했다. 미스트가 우리의 말을 습격했다.

세 마리 말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절단된 머리통과 앞다리가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았고, 나는 우리를 올려다보며 웃는 오렌지빛 눈동자의 여자를 봤다.

“미스트!”

세실의 외침과 동시에, 낯선 냉기가 내 몸을 감쌌다. 쌓인 눈처럼 부드러운 빙결의 마법. 그 차갑지만 푹신한 보호막이 낙하의 충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했다.

카아앙!

몸을 일으키자마자 나는 세실의 몸이 뒤로 날아가는 것을 봤다. 미스트가 세실을 공격했고, 마법사가 빙결의 장막으로 세실을 보호했다. 하지만 완벽하지 못했다.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 세실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이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세실!”

나는 세실에게 달려가서 상태를 살폈다. 죽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세실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너, 제법이네?”

미스트가 마법사를 보며 놀란 눈을 떴다.

마법사도 미스트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 미소 속에서 긴장감을 포착했다.

마법사는 살수와 상성이 좋지 않다.

게다가 지금처럼 공기 중에 수분이 가득한 날의 미스트는 평소보다 더욱 강해진다.

차앙!

미스트의 공격이 빙결의 장막에 막혔다. 미스트는 마법사를 무시한 채 세실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마법사가 집요하게 방해했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끼어들지 마! 방해다!”

마법사의 외침이 내 발길을 막았다. 저만치에서 활시위를 당기던 족제비도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법사의 경고는 옳았다. 나의 개입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스트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세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 정도의 강자다. 마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 마법사는 누구지?’

암영에는 ‘쿼드 블레이드(Quad-blade)’라 불리는 살수들이 있다.

기사로 치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비견되는 이 초절정 살수들은 각각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시그마라는 코드네임을 가지고 있다.

그중 ‘코드네임 감마(Gamma)’가 바로 미스트다.

‘그런 미스트를 상대로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그러나 이내 마법사는 한계를 드러냈다.

마법사의 입에서 피가 흩어졌고, 기회를 놓치지 않은 미스트가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가까스로 그것을 막은 마법사가 허공을 날아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아하하하!”

미스트가 내게 달려왔다.

그녀를 향해 검을 겨누며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RP는 여전히 21. 리메이크를 발현할 수 없는 수치다. 더욱이 상대는 소드마스터 급의 강자.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른다. 알 수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움켜쥐며 전진했다.

“데미안!”

족제비의 외침이 고요한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미스트의 손이 희미하게 번졌다.

[관찰력을 발현합니다.]

시간이 느려진 듯, 나는 미스트에게 날아오는 족제비의 화살을 봤다. 그 화살은 미스트가 투척한 단검에 길게 반으로 쪼개졌고, 이어 굴곡진 궤적으로 날아간 단검의 칼날이 족제비의 가슴에 박혔다.

족제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족제비!”

그렇게 외친 순간, 나의 검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그었다. 내 얼굴 위로 네 갈래의 블레이드가 드리워졌다. 죽는다. 의심할 것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다. 내가 죽으면 세실도 죽는다. 나는 살아야 한다. 반드시.

【■■ 속의 ■■가 리메이커를 응시합니다.】

내 심장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어딘가에서 나를 뒤흔드는 거대하고 불가해한 존재의 시선이 느껴졌다.

【포식한 ■■의 파편을 혼돈으로 변환합니다.】

심장의 고동이 귀를 메울 듯이 강렬해졌다. 눈앞의 세상이 푸른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두 눈이 새파란 예기를 발하며 빛났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봤다. 경악으로 가득한 미스트의 부릅뜬 눈동자 속에서.

“너······! 무슨······!”

나는 내 몸 안에서 터질 듯이 타오르는 힘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그 힘을 붙잡고, 응축했다. 그래. 마치 블랙홀처럼.

그그그그그그······!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응축된 힘이 강한 반발력을 드러냈다. 나는 힘을 억누르던 무형의 장막을 걷어냈다. 그러자 폭발했다.

【혼돈을 발현합니다.】

폭풍처럼 터져 나온 어둠의 파장이 미스트를 덮쳤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