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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02

EP.401 16. 기사 이반 (9)

제국의 노예 제도는 신분을 의미한다기보다 계약 관계에 가까웠다. 농노들의 경우는 대대로 ‘경작권’을 대물림했기에 그것이 사실상 신분처럼 고착화하긴 했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과 납세의 의무 외에는 딱히 부과되는 제약이 없었다. 거기다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기에 완전히 영주에게 종속된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느슨하고 유동적인 피라미드 형태의 노예 제도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단단한 다이아몬드 형태로 바뀌어 갔다. 토지 자본이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농노들 상당수가 경작권을 뺏기고 강제로 자유민이 되어 도시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는 무너져 내렸고, 경작권은 이제 더는 보장받지 못했다. 소수의 영주와 부농들이 노예들을 부려 대농장을 일구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정말로 주인을 위해 평생 일하다 죽어야 했다.

산업 시대 전까지만 해도 지역의 농민들은 영주들에게 나름대로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수틀리면 옆 동네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겠다는 식으로 드러눕거나, 우리가 아니면 이 땅을 누가 경작해주냐고 따지거나, 극단적으로는 수확 직전의 논밭에 불을 지르겠다고 덤비기도 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식량 과잉, 인구 폭발, 이촌향도 등이 일어나면서 농민 집단은 예전만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나마 얌전히 경작권을 뺏기고 도시로 쫓겨나면 양반이었다. 영주들은 각종 개발을 빌미로 세금 폭탄을 부과해 농촌에 남은 농민들을 철저하게 노예로 예속화하곤 했다.

번슈타인이 클라라 앞에 내민 서류도 그러한 영주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거액의 빚을 졌는데 갚지 않았기에 노예가 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대놓고 노예라는 단어가 적혀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시대에도 노예 증서는 표면상으로 여전히 ‘계약’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법률 용어가 가득했지만, 클라라는 그 내용의 핵심을 쉽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맨 앞 장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는 ‘1년 복무’라는 글자에 속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동 의무 연장과 해약 조건이었다. 그것을 읽어 본 그녀는 조소했다.

해약하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관공서를 찾아가야 했고, 일을 처리하기 위한 비용을 모두 노예 본인이 내야 했다. 거기다 해약 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시간을 냄으로써 주인의 본업에 지장이 생겼을 때는 그 손해배상금도 지급해야 했다.

다 내지 못했을 경우 자동으로 그만큼 빚을 떠안고 또 계약 연장이었다. 이자율이 법정 한도까지 책정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신의 노동력으로는 평생 가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전형적인 노예 계약서였다.

-뭐 하는 거냐. 정말 이대로 팔려갈 셈이냐?

마신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몇 번이나 그녀에게 배신을 종용했다. 그녀에게는 원더스타인을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약점이 몇 개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가 모르는 주술들도 익히고 있었다. 거기다 그 몰래 데볼루트를 상당량 포집해 두기도 했다. 도망치자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번슈타인에게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배신당한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에 심리적으로 탈진해버린 것이다. 이는 마신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클라라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계속 그를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너무 쓰라렸다. 그녀는 그가 내미는 노예 계약서에 서명했다. 여전히 바보 같은 웃음을 띠면서.

“이러면 됐나요, 단장님?”

“그럼. 됐고말고.”

그녀가 작성한 서류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법원의 증명을 받았다. 제국의 공무원들은 뇌물만 찔러주면 정해진 법적 절차까지 건너뛰면서 일을 빠르게 처리해주었다. 서류에 찍힌 날인이 마르기도 전에 번슈타인은 그녀를 노예 상인에게 데리고 갔다.

노예 상점에도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주로 젊은 여자들을 거래하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문신을 한 뚱뚱한 할망구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곧 지폐 몇 묶음을 챙기고는 노예 증서를 넘겼다.

“자, 클라라, 너는 방금 이 사람에게 노예로 팔렸단다. 놀라지 않는 거냐?”

번슈타인은 철창 안에 갇힌 그녀에게서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자 조금 당황해하며 질문했다. 그녀는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알고 있었어요. 사실 기차 타고 오는 도중에 눈치챘어요.”

“호오, 그러면 왜 달아나지 않았지?”

“그랬다면 그냥 보내주셨을 건가요?”

“아, 그래. 당연히 아니지.”

그녀가 달아나려고 했다면 그는 그녀 배에 칼을 들이밀고서라도 제지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탄 차량에는 그들밖에 없었기에 다른 사람 눈에 띌 염려도 없었다.

“그럼 잘 가라.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다.”

“네.”

클라라는 그가 상점을 나갈 때까지 꼿꼿이 허리를 펴고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이내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철창 바깥에 있던 상인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미소를 교환했다. 늘 보던 패턴 중 하나였다. 애써 강한 척하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는 이전의 다른 노예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전신에 식은땀을 흘려댔으며 셔츠의 등 부분에는 붉은 핏자국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달려왔다.

“이게 뭐야!”

“꺄악!”

상점 직원들은 그녀의 셔츠를 벗겨보았다가 그만 놀라자빠지고 말았다. 노예상 일을 하면서 온갖 잔인한 꼴을 많이 본 그들이 보기에도 이런 건 처음이었다.

옷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반신은 마치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회색 피부 곳곳은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붉은색 피를 벌컥벌컥 내뱉고 있었다.

“이런 하자품을 팔다니!”

상점의 주인인 뚱뚱한 할망구가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오랜 노예상 경험 덕분에 클라라가 실혼증(失魂症)에 걸린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몸에서 혼이 빠져나가 텅 비어버리는 현상 말이다. 피부가 회색으로 변하는 것은 실혼증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였다.

“쯧쯧, 독한 계집이로군. 이렇게 될 때까지 버텨?”

실혼인은 시체처럼 가만히 앉아 눈을 뜨고 사람으로서는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였다. 혼이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보통 몸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반점이 생기는 시점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혼이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회색빛 피부는 전체 피부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녀가 주술을 이용해 억지로 다른 사람 몸에서 혼을 뽑아내 자신의 혼을 쑤셔 넣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가게 주인으로서 클라라를 대단한 독종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쯧, 옷을 벗기고 똑바로 검사만 했어도 알았을 것을…….”

“아니,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애가 이런 꼴일 줄 누군들 알았어요?”

“이거 어떻게 하죠? 어떤 가게도 사주지 않을 텐데요.”

직원들의 수선에 골치 아픈 듯 머리를 긁적이든 가게 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많이 물러졌군. 몇 번 거래한 사이라고 방심하다니. 다음번에 오면 두고 봐라. 아주 트집에 트집을 다 잡아줄 테다, 원더스타인 놈! 어쩔 수 없지. 싼값에 투기장에 넘겨야겠군.”

“거기 검투 노예들도 이런 전염병에 걸린 꼴을 한 여자는 안지 않을 텐데요.”

직원의 말에 그녀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듣기로 그중 한 놈은 여자면 다 좋다고 달려든다고 해. 멀쩡한 여자를 워낙 많이 망가뜨려서 노예 주인이 싸구려 하자품들 위주로 찾던데. 얘가 딱 적절하지 않겠어?”

늙은 여인은 지팡이로 클라라의 허리를 딱 하고 후려쳤다. 그녀는 윽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니카와 도스빌 남작에게서 클라라가 노예 상점에 팔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원더스타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1시간 반 뒤처지고 있을 뿐인데 일이 거기까지 진행되다니. 클라라가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것을 보면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알겠습니다. 니카 양과 도스빌 씨는 그 이상 접근하지 마세요. 노예시장은 용병들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갈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채널을 닫자마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엘라가 그를 쳐다봤다. 원더스타인은 그녀가 대화를 훔쳐 들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단장 대리’ 능력을 얻은 뒤로 음향실을 통해 자주 그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

“가서 어떻게 할 셈이야? 설마 직접 때려 부술 건 아니겠지? 정체를 숨기기 힘들 거야. 클라라 선배가 노예로 팔렸다는 증거가 있을 테니까. 바로 우리가 의심받을걸?”

“걱정하지 마시죠. 정정당당하게 되찾아올 생각이니까요.”

“어떻게?”

“클라라 양을 살 겁니다.”

“우리에게 그 정도 돈은 없을 텐데?”

엘라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아나이스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생활비도 빠듯하죠. 하지만 단장님에게 생각이 있으신 듯하네요. 애초에 벨리키 볼라크로 방향을 잡으신 것도 그때문 아니었나요?”

“……알고 계셨습니까?”

그가 멋쩍은 미소를 짓자 아나이스는 픽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 정도 되는 상인이 지난 며칠간 했던 질문들의 의미도 모를까 봐요? 그 도시에 제국의 유력자가 숨겨둔 비자금이 있으니 슬쩍하자는 얘기였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온천에서 황태자 앞에서 말씀하셨던 내용과 결합하면 어떤 근사한 결론이 나오죠.”

“아.”

원더스타인은 탄식을 내뱉었다. 황태자에게 했던 3가지 제의를 아나이스와 니카 두 사람이 옆에서 다 들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간과한 것이다.

“다 꿰뚫어 보고 계셨군요. 이거 부끄러운데요.”

“훗,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아봤자죠.”

엘라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곧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 나올 구석이 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클라라 양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았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건너갔다. 아나이스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래서 얼마 정도 있는 거예요. 그곳에?”

아나이스는 당연하지만 모든 황실 비자금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원더스타인이 알고 있는 것은 그중 아주 일부일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는 집사 바텔의 20년 치 연봉 정도를 불러 보았다.

원더스타인은 대답하기 전에 다시 상태창을 살폈다. 과연 엘라의 귀에 들리는 자신과 아나이스의 목소리가 어느새 다시 증폭되어 있었다. 그는 멀리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엘라를 슬쩍 바라봤다가 아나이스의 질문에 답했다. 그는 그녀가 부른 값의 절반 정도를 말하면서 손으로는 그 반대를 표시했다.

아나이스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50…… 말한 것과…… 반대로? 50%의 반대니까…… 그러니까…… 2배라는 소리? 집사의 40년 치 연봉?’

아나이스가 수화로 되물었고 원더스타인은 자신이 오해의 여지를 주었음을 깨닫고 손과 입술을 이용해 제대로 정정해주었다. 그것을 본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꽉 틀어막아야 했다.

50배. 바텔 1000명을 1년 동안 고용할 수 있는 돈이었다. 이는 베르그송 상회의 한 달 매출에 버금가는 돈이기도 했다.

원더스타인은 아나이스가 경악하는 것을 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대상회의 회장인 그녀가 보기에도 많은 돈인 모양이었다. 이것은 황실 비자금 전체에서 1할도 되지 않았지만, 서커스단을 운영하는 데는 충분한 돈이었다.

예전에는 이것에 손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후원자의 지원이 빵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두교 측에 굽실거리며 돈을 타내야 하는 지금, 그 돈이 있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 아나이스의 복권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이 돈에 손을 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차량 끝에서 설리반으로부터 예절 교육을 받는 시그마를 바라봤다.

그녀는 원더스타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사납게 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설리반에게는 꼼짝 못 했다. 그가 입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녀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맹수를 겁내는 개의 본능 같았다.

원더스타인은 그녀를 길게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걸린 최면은 그렇게 깊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으면 풀릴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녀를 얌전히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미래의 이야기에 깊게 개입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부두교와 맞부딪치고 마왕도 쓰러트려 보니 겁날 게 없었다. 설사 미래가 바뀐다고 해도 그에게는 어떻게든 대처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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