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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22

EP.421 16. 기사 이반 (29)

선수대기실에 들어선 이반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곳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만 명의 검투사가 지나갔던 길이었다. 청소를 매일 한다지만 곳곳에 밴 그들의 피와 땀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나 싫어하던 냄새였는데, 오랜만에 맡아보니 왠지 반가웠다. 그는 10대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다. 이곳은 그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장소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반은 상실감에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참기 위해 이를 꽉 악물어야 했다. 이네스. 그녀를 떠올리자 그는 한순간에 차가운 돌바닥에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귀족이었던 자신과 달리 부모의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 온 처지였다. 그녀의 무참한 죽음에 항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소유주도 다 큰 계집이 남자들 구역에 자주 들락거리다가 언젠가 큰코다칠 줄 알았다며 그녀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베르카의 소유주가 제시한 배상금에 만족하고 돌아섰다.

그녀의 장례식은 투기장 외곽의 공터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그녀와 친했던 몇몇 투기장 식구들이 참가했다.

그도 그곳에 있었다. 조문객들은 그를 강제로 끌고 나와 그녀의 무덤을 덮는 첫 흙을 푸게 했다. 그때 그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그녀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잘 돌봐주던 착한 누나가 죽어서 슬프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는 속에서 베르카에 대한 분노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를 죽였다.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는 그녀를 붙잡고 얼굴 뼈가 함몰될 때까지 주먹으로 때렸다. 그다음 칼로 그녀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르카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큰 분노를 느꼈다. 그건 그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자신은 그녀가 그에게 맞는 것을 벌벌 떨며 지켜보기만 했다. 심지어 그가 그녀를 죽였을 때는 살려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밖에서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것이 들려왔다. 이제 곧 그의 시합이었다.

그가 눈을 뜸과 동시에 오늘 그의 시합을 보조해줄 세컨드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괴물서커스단의 세 노인 단원이었다.

집사 바텔은 그에게 시합 중 기술적, 정신적 조언을, 안마사 칼슨은 그의 육체 상태 관리를, 정원사 가스통은 그의 장비 점검을 담당했다. 세 사람 다 각자 분야에서 전문가들이었기에 무리 없이 세컨드 일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나갈 시간이네.”

“잘 부탁합니다.”

이반은 세 노인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그들의 실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칼슨은 마사지로 그의 근육과 관절 곳곳을 유연하게 풀어 줬고, 바텔은 적절한 조언과 훈계로 그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잡아줬으며, 가스통은 각반의 손질, 혁대의 조임, 갑옷 안쪽에 덧대어 입을 내갑의(內甲衣)에 기름먹임 등을 그의 몸에 딱 맞게 조정해주었다. 어제 밤새 원더스타인과 대련한 그가 최상의 상태로 경기장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이반이 경기장에 오르기 위해 대기실을 나서는 순간, 맞은편 선수대기실은 이제 막 경기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챔피언은 도전자보다 몇 분 늦게 나가는 데다가, 오늘은 프로그램상 경기전 이반의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카의 세컨드도 이반처럼 셋이었다. 늙은 전직 검투사인 게나프와 콤프라치코스의 간부인 마샤, 그리고 그녀의 호위 역으로 따라다니는 찰리였다.

투기장 직원 대부분이 자신보다 이반을 지지하는 것을 베르카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게나프 외에 다른 투기장 사람은 부르지 않았다. 대신 비약의 효능을 관찰하기 위해 마샤가 육체 관리 담당으로 들어갔고, 찰리가 장비 손질을 맡았다.

“솜씨가 제법이군.”

“이 정도는 기본이지. 닌닌!”

베르카는 찰리가 마련한 장비의 상태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어딘가 행동거지가 이상한 놈이라 믿음이 안 갔는데, 실력 하나는 괜찮은 것 같았다. 장비를 모두 갖춰 입은 그는 경기장으로 향하는 통로로 나섰다.

입구에 선 그는 벽 한구석에 튀어나온 벽돌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에 손을 대고는 마샤가 가르쳐준 주문을 속으로 외며 손에 의지를 불어넣는 이미지를 그렸다.

그의 손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마치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약 2배 정도 크기로 부푼 손은 벽돌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화강암으로 만든 벽돌이 과자처럼 부스러진 것이다.

“대단하군.”

그녀가 제공한 도핑 약물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바라는 대로 몸을 바꿔준다는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이제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아.”

마샤는 그가 다시 손을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것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데볼루트를 다루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가 몇 시간 뒤에 있을 시합에 약을 쓰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마샤는 그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비약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최면 요법을 더한다고 해도 최소 며칠은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몸속의 데볼루트를 통제하는 일에 성공했다. 아마 본인의 자질에 더해서 일생의 숙적과의 목숨이 걸린 대결이라는 이벤트를 앞두고 집중력을 극한으로 발휘한 덕분인 것 같았다.

베르카가 있다면 그들의 연구를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진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도핑에 대한 그의 태도로 보아 그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하면 그가 계속 자신들의 실험에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마샤가 고민하고 있을 때, 찰리는 부엉이가 가져온 쪽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것은 페렌츠가 보내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마샤의 질문에 찰리는 고개를 저었다.

“탈주한 아이들을 또 발견했다는 것 같습니다. 잡아서 열차로 이송시켜 두라고 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몇 시간 뒤에 출발할 거예요.”

그녀는 며칠 뒤에 있을 인간 박람회를 생각했다. 그것은 콤프라치코스에서 준비한 일종의 상품 설명회였다. 그녀의 상사인 록센은 그날 국내외의 검은손들을 초대해 자신들의 연구 성과와 목표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이번에 탈주한 실험체들도 몇 명 세울 예정이었다.

까마귀 마녀가 그것을 안다면 분노하겠지만, 록센은 이미 그녀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었다. 그가 찰리를 보필하는 척 그를 조종해 세계 방방곡곡을 들쑤시고 다니게 한 것은 단순히 조직의 잡일을 시키기 위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들이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이반은 무대 위에 올랐고, 잠시 후, 관악기들의 우렁찬 합주와 함께 반대편 통로의 문이 열렸다.

“우리는 어제까지만 해도 ‘페트로프 13호’가 재활에 성공해 복귀한 줄로만 알았었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기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속인 그 악당을 불러들이겠습니다! 현 챔피언! 가짜 페트로프 13호! 베르카!”

“가짜는 꺼져라!”

“링네임 도둑!”

“그냥 기권해라! 넌 어차피 실력으로 안 되잖아!”

관객 대부분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나 베르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갔다. 이런 야유 따위 비겁한 짓을 자주 일삼는 그에게 익숙할뿐더러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눈앞의 상대뿐이었다.

“베르카.”

“페트로프 형님.”

둘은 경기장 중앙에 서서 서로를 노려봤다. 검을 뽑으면 서로의 목을 날릴 수 있는 위치였다.

“건강해져서 다행이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은 이해해주면 좋겠소. 평생 바보천치의 기저귀나 갈아주면서 살아야 할 줄 알았거든.”

“6개월 전, 네가 내 음식에 약을 탔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말에 베르카는 잠시 움찔했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확실히 돌아온 모양이군. 이네스 누님이 알려준 모양이지? 그러면 이네스 누님이 죽은 것도 기억나나? 형님이 목 잘린 누님 앞에서 나한테 살려 달라고 벌벌 떨던 것도?”

베르카는 이반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도발이었다. 승부에서 확실하게 이기기 위해 그는 여느 때처럼 트래시 토크로 상대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려 들었다.

이반의 손이 꿈틀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놈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찬 검집으로 향하는 그때, 무대 밖에서 바텔이 소리쳤다.

“이반 님, 당신은 지금 페트로프의 검으로서 그곳에 선 것이오!”

검을 잡으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페트로프의 검. 그것은 노예 신분이었던 그를 지탱해주던 그만의 단어였다.

환경은 사람을 쉽게 뒤틀어 버렸다. 투기장에 서는 전사들 역시 그랬다.

처음에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살인에 대한 비난 대신 환호를 받았다. 심지어 그렇게 사람들의 호응이 좋을수록 투기장으로부터 받는 대접까지 좋아졌다. 그런 것을 경험하다 보면, 그들의 도덕관은 당연히 투기장에 맞게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다.

투기장에 들어와 몇 번의 살인을 하고 그것을 느낀 이반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 하나의 자기암시를 걸었다. 투기장은 생존의 장도, 자기 과시의 장도, 출세의 장도 아닌, 페트로프의 검으로서 무를 시험하는 자리라고 말이다.

그것은 그가 10년 동안 검사로서 추구하던 길이었다. 은원도, 갈채도, 흥행도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검을 위해 시합에 나섰다.

그것을 관철하는 것이 페트로프의 검으로서 그의 의무였다. 떨리던 손이 가라앉았다. 그는 냉정함을 회복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코너로 돌아온 이반은 바텔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객석 쪽을 가리켰다.

“감사 인사는 단장님께 하시오. 방금 그 말을 시킨 것은 단장님이니까.”

이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서커스단 단원들이 서로 원격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순간 ‘페트로프의 검’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정신 차리게 한다는 발상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읽었던 그만이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까지 잘난 척은.”

베르카는 차분한 태도로 시합의 시작을 기다리는 이반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노려봤다. 놈은 언제나 저랬다. 투기장에 서는 검투사들은 모두 당장 눈앞에 있는 뭔가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기 마련인데, 저놈만은 언제나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좇아 홀로 움직였다.

이네스의 이름을 들먹인 것은 승률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감정에 휩쓸려 날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그들처럼 되지 않았다. 짐승이 되는 길을 거부했다.

“그래. 그렇게 고고하게 굴어라. 결국 오늘 너는 죽을 테니까 말이야.”

베르카는 심판이 깃발을 치켜드는 것을 보고 마샤가 가르쳐준 주문을 외었다.

“ᚲᛁᚱᚲᚢᛊ ᛞᛟᚱᛗᛁᛖᚾᛊ ᛈᚨᛏᛖᚱ.”

그는 엄지발가락, 발목, 허벅지의 근육을 강화했다. 그는 이반이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 단숨에 결판을 낼 생각이었다.

심판이 깃발을 내려치면서 시합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술과 패턴을 잘 알고 있었다. 탐색전 따위 필요 없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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