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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3

43화 여왕과 기사들

숨을 멎게 하는 용모였다.

몸에 걸친 검은 옷, 단아한 표정과 드레스조차 그 ‘색(色)’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안녕하세요, 기사님. 사자심왕 폐하라고 불러 드릴까요?”

위험한 여인이다. 눈웃음과 함께 입을 가리는 미려한 손가락에조차 정취가 물씬 풍긴다.

타고난 교태, 존재만으로 색을 풍기는 분쟁의 원인. 타락의 전조가 되는 경국지색.

‘아름답군.’

일견 달빛에 반사되는 자색 눈동자에는 빛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끝없는 어둠이 깔려 있다.

평범한 남자라면 그 심연의 깊숙한 구덩이에 잠기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익사했을 것이다.

“베아트리체 알리기에리 스페로. 이 작은 왕국의 여왕 되는 몸이랍니다.”

“라이온하트 왕국의 사자심왕되는 레온 드라고니아 라이온하트요.”

레온은 정중하게 여인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경계한다.

‘이 내가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레온은 스스로 자만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아무리 전성기에 비해 약해졌다고 해도 숱한 암살자와 악마들의 침입을 차단한 제 기감을 속이다니?

“후후, 너무 경계하지 마시어요. 저는 그저, 왕국의 은인께 인사드리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정숙한 레이디께서 방문하시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군.”

달빛은 아직 여명을 지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단련을 하는 건 기사의 미덕이지만, 왕족의 미덕은 아닐뿐더러 레이디의 미덕은 더더욱 아니다.

“감시당하고 있는 몸인지라.”

“감시?”

레온은 베아트리체 여왕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왕을 감시한단 말인가? 대체 누가?”

여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감금하고 있는 세력을 말했다.

“대장군과 그 기사들이 저를 감시하고 감금하고 있답니다.”

“대장군이?”

레온은 여왕에게 충심을 표한 대장군을 기억했다. 그런 불충을 저지를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속내란 모르는 법이다. 충성스러운 기사가 왕의 아내를 탐하는 일도 있고, 청빈한 사제가 재산을 축재하는 일도 있다.

“라이온하트 폐하. 폐하께 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여왕의 손길이 레온의 손을 붙잡았다. 단순히 손을 잡았을 뿐인데도,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교태가 느껴진다.

“듣고 판단하겠네.”

“대장군을, 그리고 기사들을 죽여주세요. 그리해주신다면 왕국의 모든 것을 드리지요.”

“…….”

레온은 섣불리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나 수상했던 탓이다.

여왕도 이를 모르진 않았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여왔다.

“왕성의 지하를 조사해보세요. 그곳에 대장군이 숨기고 있는 게 있답니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성내가 소란스럽다. 무장한 갑옷과 군화가 내는 소리였다.

“라이온하트 폐하! 밤중에 죄송합니다만, 문을 열겠습니다!”

기다리는 시간도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는 대장군과 그 휘하 기사들이다.

“왕족의 침실에 군홧발로 침입하다니 이 무슨 무례냐!”

“……무례임을 알고 있으나 사태가 시급하여 어쩔 수 없었소.”

대장군은 목례로 사과하고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온 앞에 있던 베아트리체 여왕은 없다.

“흠…….”

대장군은 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감지하고 이곳에 여왕이 있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레온에게 그녀를 만났느냐고 묻지 않았다.

“여왕전하를 만났노라.”

하여 레온은 정면으로 치고 들어왔다.

“그렇습니까.”

“자국의 여왕이 밤 산책을 나왔는데, 묻질 않는구나.”

“……본디 그런 분이시기에.”

“하…!”

왕족이 밤산책을 나오는 걸 어찌 기사들이 내버려둔단 말인가. 레온조차도 어디에 가든 호위기사들과 근왕병들을 달고 다니건만.

“악마들이 설치고 다니는 이 시국에 왕족을 홀로 두었다?”

“……악마들은 밤에는 침공하지 않소.”

“헛소리.”

악마들이 언제부터 밤낮을 가렸단 말인가. 당장 성 안에 사람으로 위장해 숨어있던 것들이 수백 마리거늘.

그걸 모를 멍청이 아니다. 그런 얼간이가 대장군이 됐을 리 없다.

“마치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

대장군은 대답없이 돌아서려 했다. 그런 그를 멈춰 세우는 레온의 한 마디.

“여왕은 네 녀석들이 자신을 감금하고 있다더구나.”

그 말에 대장군과 기사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외지인에게 말할 사안이 아니오.”

“번즈 경이라고 했나. 무엇을 숨기고 있던 솔직하게 밝히는 게 좋을 것이야.”

리카르도 번즈. 스페로 왕국의 대장군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레온은 턱을 쓰다듬으며 의문을 입에 담는다.

“수상하군, 수상해.”

여왕과 대장군 모두.

이들의 행동은 단순히 악마들의 군세를 막아서는 디펜스 퀘스트라곤 볼 수 없는 속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어찌 됐건 진상을 파악하려면 지하를 조사해봐야 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준비가 덜 됐다. 레온은 여명이 밝아오며 움직이기 시작한 악마의 군대를 맞이해야 했다.

* * * *

악마의 군대가 진군한다.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타락시키고 쾌락으로 점철시키는 추악한 색욕의 군단이 전진한다.

-놈들을 범해라. 머리를 자르고 제 육신이 농락당하는 꼴을 보게 해!

-타락시켜! 제 딸을 범하게 해! 광장에서 난교파티를 열자!

-자식을 잘라 부모에게 먹여! 보기 좋을 것이야!

족히 수천. 아니, 만을 넘는 악의 군대. 원색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있는 것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악성의 진군 앞에 공기가 바뀐다.

야릇한 간질거림과 질척거리는 피부.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넘나들어 살아있는 것들을 유혹한다.

“안드로진 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벽을 가장 먼저 넘는 자, 노예 백 명을 하사하시겠다고!”

고통조차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나체병사가 채찍을 휘두르며 외쳤다. 진군하라.

“키히힛! 인간 놈들을 타락시키자.”

“쾌락으로 절여서 생각도 못 하게 하자!”

“타락시켜! 타락시켜! 쾌락으로──”

그 순간, 가장 선두에 있던 악마가 멈춘다. 당장이라도 인간들을 밧줄로 묶고 싶어 안달이 난 그것이 무언가를 목격하고 파르르 떨었다.

“뭐야? 빨리 안 가?”

“얼간이 색갸! 뒤에 막힌 거 안──”

1열이 멈춘다. 따라서 2열이 멈춘다.

3열, 4열…… 성벽이 시야에 들어온 모든 악마들이 충격에 멈춰 선다.

-끼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옷──!!

비명이었다.

아니, 비명 자체는 악마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문제는 그 비명의 주체다.

-사려져, 사려져어어……

-쥬코시치아나… 쥬코싯지아나…….

비명이다.

고통에 찬 절규다.

죽음을 앞둔 절망이다.

인간에게서는 들리지 않는, 괴이하고 소름 끼치는 비명. 하지만 그 절규만큼은 인간만큼 생생하다.

전장이 얼어붙었다.

누구보다도 비명에 익숙하며 비명을 자아내는 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동포들을 향했다.

그 시선이 향한 끝에.

불 붙은 목재를 지피는 헌터들이 있다. 그들이 목재로 악마들을 지지고 있었다.

“”?????””

그게 어쨌다는 건가.

하, 악마 상대로 고문이라도 하는 건가?

어차피 악마는 정신체다. 이계의 육신 따위 그릇에 불과해. 죽으면 다시 악성의 정원으로 돌아갈 뿐이──

“죽음을 모르는 거짓된 생명들이여.”

성벽 위, 여명을 등에 업고 찬란한 광채를 빛내는 기병이 있다. 새벽빛을 흡수한 듯 광채를 뽐내는 황금의 검을 뽐낸다.

“너희는 모르겠지. 벌레처럼 원초적 욕구만을 추구하는 짐승들이 어찌 알겠느냐.”

황금의 검이 매달려 있던 악마를 절단한다. 잘려나간 머리통을 기사가 쥔다. 그리고 던졌다.

-데구르르르

어찌나 투구력이 좋은지 2km를 넘어 굴러 온 머리는 악마들의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목 잘린 악마에게서 검은 혼이 새어나온다. 그릇을 잃었으니 본체로 돌아가야할 혼이── 성벽의 기수에게로 빨려 들어간다.

그 의미를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불멸을 사는 악마들이 죽음을 목도하고.

있을 수 없는 기적을 행한 악마 도살자를 쳐다본다.

“들어라, 더러운 벌레들아. 이 사자심왕이! 만신전을 대리하는 나 라이온하트가! 너희 악종들에게 한 번뿐인 삶의 소중함을 가르치겠노라!”

와라, 천한 것들아.

너희들의 공포가 여기 있다.

혼란, 공포, 절망.

악종의 공포 그 자체인 사자심왕이 가르친 삶의 소중함 앞에 물질세계를 제 놀이터로 여기던 악마들이 절규한다.

하급 악마들은 물론이고 중급 악마들마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의 공포가 번져나간다.

누구보다도 파괴와 살육, 공포에 익숙할 그들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행하는 자’로서의 입장일 때다.

어차피 죽어도 정신체로서 귀환하는 게 당연했기에 악마들은 오히려 공포에 익숙하지 않다.

자신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에 죽음을 목도하자 스스로 자멸하기 시작한다.

군단이 와해된다.

죽음을 모르는 불멸의 군세가, 있을 리 없는 죽음을 발견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 이 멍청한 놈들! 어딜 도망치는 거냐!”

“멈춰라! 도망치지 말란 말이다!”

상급 악마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부하들을 보며 이를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들을 멈춰 세우기에는 중심이 될 중위 악마들이 너무나 적다.

“제, 제기랄…! 시체 수확자들! 그놈들만 있었어도!”

“타락수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밤중에 레온과 야피가 철저하게 사냥한 중위 악마들. 소리소문 없이 죽어나간 그들은 군세의 중간 지휘자다.

그들이 밤중에 떼거지로 죽어나갔으니 하급 악마들을 채찍질할 중간 간부들이 부족할 수밖에.

“이 멍청한 것들아! 이리 돌아──”

-쾅!

무어라 외치려던 중급 악마가 어디선가 날아온 투창에 몸통이 관통됐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상하로 찢겨나가는 악마.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던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성검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한 명의 기수였다.

“라이온 하트에! 영광 있으라!!”

도주하는 악마들을 쫓아 일방적인 살육이 시작된다.

게이트 입장 사흘째.

하라는 디펜스는 안 하고 악마 도살자가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 * * *

족히 천 마리는 넘는 악마들을 도륙했다.

구대성과 김진수 과장 등 추격전에 나섰던 헌터들은 악마란 게 이리 쉽게 죽는 것이었나 하고 회의에 젖어들었다.

“마지막엔… 아예 자살하는 놈도 있었어.”

“우린 폐하처럼 성법 같은 거 못 쓰는데도 말이지…….”

악마들의 도주는 참 가관이었다.

도망친다는 행위 자체를 모르는 건지, 아비규환이 되어 서로를 짓밟으며 저 혼자 살겠다고 사방팔방으로 도망친다.

헌터들이 한 거라곤 자빠진 악마들을 하나둘 찍어 죽인 것뿐이다.

“이 새끼들… 폐하 처음 보나? 첫날에 조진 놈들은 뭘 한 거야?”

“뭐… 군대가 크니까 소문이 안 난 걸지도.”

그때, 레온이 헌터들의 등 뒤에서 말했다.

“그렇지도 않다.”

“폐, 폐하!”

오늘 아침, 악마들을 고문하는 모습을 훤히 보이도록 전시하라고 일렀던 잔혹한 사자심왕은 악마들의 추태를 피식 비웃으며 말했다.

“놈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뭉치질 않지. 단체를 위함이 아닌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는 놈들은 보고 따윈 하지 않는다. 저만 아는 것으로 어떤 이득을 취할지나 계산하지.”

“그, 그 정도입니까?”

“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첫날 짐이 죽인 악마가 트롤 한 마리뿐이었으니 전장의 혼란 속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구대성은 자신들 손에 죽지 않기 위해 자살까지 하던 악마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쉽게 집결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다.

“이것 때문에 악마들을 생포하신 거군요?”

“그렇다. 놈들은 누구보다도 잔악한 짓거리를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내성이 없지. 쓰레기 구더기들은 어딜 가도 쓰레기 구더기인 법이다.”

레온은 헌터들이 붙잡은 악마 한 마리를 발로 뻥 차면서 추가로 명령했다.

“잘 생포해서 끌고 와라. 놈들의 비명은 좋은 교향곡이 될 것이다.”

헌터들은 그냥 레온이 무지성 악마 혐오자라서 악마들이 최대한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 우리 사자심왕 폐하께서 다 깊은 뜻이 있으셨구나!

그냥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야피 경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전투 중에 안 보이시던데.”

“스피너 경은 짐이 명령한 것을 수행하고 있다.”

“???”

그것에 의문은 들었지만, 구태여 질문하지 않기로 한 헌터들이었다.

‘악마들을 고문하고 있으려나?’

‘물고문 살벌했지.’

‘비협조적이라는 말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니까.’

그때, 생포한 악마들이 파르르 떨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쇼, 나리!”

“응안돼. 돌아가.”

악마들은, 동정심이 생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쾌락의 악마라기에 살짝 기대했던 몇몇 헌터들은 악마의 뒤통수를 후리며 아쉬움을 풀었다.

* * * *

헌터들의 예상과는 달리 야피가 향한 곳은 감옥이 아니다.

야피는 전투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스페로 왕성의 지하 깊숙한 곳으로 잠입했다.

“응? 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나?”

“못 봤습니다?”

천장을 거꾸로 주파하며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를 내지 않는 야피는 병사들의 감시를 손쉽게 피해냈다.

간혹 날카로운 기감을 가진 기사가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야피의 위장색은 완벽하다. 야피는 기어코 지하의 심층부로 향했고, 그곳에서 한 무리를 발견했다.

“리카르도 장군님! 전투 지휘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리카르도 번즈.

왕국의 대장군인 그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었다.

“그것은 외부인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문제는 봉인이다. 봉인은 잘 작동하고 있겠지?”

봉인.

비슷한 용어를 야피는 천년의 세월 동안 들어왔다.

지혜의 보옥을 봉인하고 그것을 숨겨오며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켜왔던 것이 야크트 스피너였으니까.

“예, 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병사. 리카르도 대장군은 병사를 지나쳐 봉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 들었다.

“머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백년의 숙원이 완성될 것이다.”

천막을 거두고 봉인된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야피의 광각렌즈는 그것을 확실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끼룩?

그것은 강인공지능인 야크트 스피너에게도 의외였다.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The Knight King Who Returned with a God

singwahamkke dol-aon gisawangnim, The King of Knights Returns with the Gods, 신과함께 돌아온 기사왕님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returned to Earth as the invincible Knight King. But the Gods came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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