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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4

44화 흔적

44화 흔적

쿠가 루나의 아버지인 ‘쿠훌린 아르테미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마음 한구석에 얼룩처럼 남아있던 일말의 의심을 말끔히 지웠다.

아르테미스는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절대적인 선(善) 역할을 맡는 가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소설 속의 루나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 독자들로 하여금 선인지 악인지 헷갈리게 했던 카인과는 달리.

“이것 참. 타고 갈 말이 없잖아.”

쿠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말은 미스트가 죽였다.

카인과 마르셀이 타고 온 말이 있었지만 이 많은 사람이 타기는 무리였다. 부상자도 여럿 있었고.

그런데 쿠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허공을 향해 외쳤다.

“스트라이더!”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스트라이더가 달려왔다.

쿠가 녀석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무어라 속삭이자, 스트라이더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얼마 후, 말 몇 마리를 대동한 채 돌아왔다.

“하하하! 역시 영특한 녀석이구나! 스트라이더!”

껄껄껄 웃은 쿠가 잠든 엘리샤의 어깨를 툭툭 발로 찼다.

조금 전까지 각혈하던 환자에게 저래도 되나 싶었지만, 엘리샤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주섬주섬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으와아아웅······! 다 끝난 거예요? 단장.”

쿠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샤는 으웨엑! 한 차례 더 피를 토한 뒤 소매로 쓱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는 쿠를 향해 빽! 소리쳤다.

“아니 단장! 그 금패는 내가 빌려달라고 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저 족제비 같은 녀석한테 준 거예요?”

“잠시 빌려준 거다.”

“와. 너무해! 치사해!”

엘리샤는 화풀이하듯 족제비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그에 헛숨을 들이켜며 깨어난 족제비는 무사한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쿠를 발견하자마자 으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걱정했어요 쿠······!”

우리는 말 위에 올랐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던 나는 엘리샤와 함께, 의식을 잃은 세실은 쿠와 함께 말을 탔다.

용케 몸을 일으킨 카인이 기절한 마르셀을 말에 태운 채 다가왔다. 녀석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말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다 죽어가는 주제에 안 그런 척하는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오스카와 함께 있던 아이들이구나. 너희 단장은 어떻게 됐지?”

“오스카 단장은 죽었습니다.”

카인이 부연 설명했다.

부단장 모건과 그의 측근 몇이 함정을 파, 반기를 들었다고. 그리고 평소 모건의 행실을 눈여겨보던 자신이 오스카 단장을 도와 싸웠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죽고 말았다고.

쿠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렇군. 좋은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비는 그쳤다.

네 마리 말이 달빛 아래를 걸었다. 환자가 많았기에 빠르게 달릴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홀로 말을 모는 족제비만이 깐죽거리며 뛰어다녔다.

“어이. 금발.”

엘리샤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어?”

그녀의 눈은 미심으로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혼돈’을 발현했다. 나도 많이 놀랐지만 엘리샤에게는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었겠지.

“제대로 마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있니?”

예상치 못한 엘리샤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쿠가 버럭 소리쳤다.

“엘리샤! 금발 꼬마는 내 제자니까 눈독 들이지 마!”

엘리샤가 움찔 어깨를 떨더니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그녀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렀고, 엘리샤는 투덜투덜 욕설을 뱉으며 소매로 피를 닦았다.

‘쿠훌린의 제자라.’

쿠훌린 아르테미스와의 만남은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이래 가장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존재지만, 쿠훌린은 대륙의 여러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다. 게다가 은월검은 암흑 속성의 상대에게 강력한 카운터가 된다.

‘은월검을 배울 수 있을까? 아니, 무리겠지.’

은월의 마력은 아르테미스의 블러디드다. 말 그대로 ‘아르테미스의 핏줄’만이 발현할 수 있는 능력.

그러고 보니 신기했다. 나는 아르테미스도, 블레오파드도 아닌데 동기화 스킬을 통해 그들의 블러디드를 발현했으니까.

“으아악! 너희가 머물렀던 마을이 저기였냐! 빌어먹을 돼지 오줌보 마을이잖아!”

꽥! 소리친 쿠가 나를 돌아보며 참혹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샤가 깔깔대며 웃었고, 족제비가 물었다.

“돼, 돼지 오줌보 마을이요? 그런 이름이 있어요?”

“저 마을 여관에서 파는 맥주에서는 돼지 오줌 맛이 난다. 크으······,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저 돼지 오줌보 맥주야말로 이번 영지전의 가장 큰 난관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기력이 쇠한 와중에도 어이없다는 얼굴로 쿠를 봤다.

“그, 그럼 맥주를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조조 네 이노오옴! 기본이 안 된 소리를 하는구나! 여관에 들렀는데 맥주를 마시지 않는다니! 그건 죄악이다!”

“그, 그럼 조금만 마시면······!”

“끔찍한 소리를 하는구나! 지난번의 내가 그걸 마시고도 죽지 않은 건 천운이 따랐기 때문이야! 하늘이 내린 행운은 두 번 오지 않는다!”

***

돼지 오줌보 마을 여관의 1층 식당에서, 쿠훌린과 엘리샤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돼지 오줌보 맥주의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인지 두 사람 외에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쿠훌린은 이 역겨운 맛을 참을 수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벌컥벌컥 맥주를 마셨다. 엘리샤는 깔깔 웃다가, 각혈하다가, 다시 깔깔 웃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엘리샤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라이칸. 살아 있었어?”

자리에 앉은 라이칸이 엘리샤가 먹다 남긴 맥주를 들이켜자마자 푸우우! 공중에 뿜었다.

“······돼지 오줌보 맥주였나.”

엘리샤가 테이블을 탕탕 내리치며 웃었다. 라이칸은 물끄러미 엘리샤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맥주잔을 쥐었다.

잔 속의 술을 비운 라이칸이 쿠훌린에게 말했다.

“블러디드를 사용하신 겁니까.”

“쿼드 둘을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지.”

“위험한 아이들입니다.”

“알고 있다.”

“하나는 블레오파드입니다.”

쿠훌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 늪지의 모닥불 앞에서 세실을 처음 봤을 때부터, 쿠훌린은 세실이 블레오파드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고 갈 생각이십니까.”

“버려진 아이다.”

“알파의 핏줄입니다.”

쿠훌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라이칸의 말대로, 세실은 일루산의 아이다.

전투할 때 설핏 드러나는 살기 어린 표정이 제 아비와 똑 닮았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 일은 함구하도록.”

“금발 쪽은 어쩔 생각이에요?”

엘리샤의 물음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예요. 그 아이가 발현한 마법 보셨어요?”

“봤지.”

“소서러예요.”

맥주를 마시던 쿠훌린의 어깨가 멈칫했다.

“저는 그 아이가 마법을 발현하는 모습을 두 번이나 봤어요. 영창이나 술식 실행의 과정 따위는 개나 줘버린 모습이었죠. 그런데도 엄청난 마법이 발현됐어요. 감마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쿠훌린도 보아서 알고 있다. 데미안은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선보였다. 미스트가 그림자 안개를 발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데미안은 미스트 주변의 빗물을 휘발시켰다.

의문점은 또 있다. 데미안은 어떻게 알았던 것일까. 미스트가 그 기술을 발현하려면 공기 중의 수분을 필요로 한다는걸.

“자고 있었던 줄 알았는데. 엘리샤.”

“참 나. 그 상황에 어떻게 잠을 자요! 실눈 뜨고 다 보고 있었죠! 아, 물론 시그마가 나타났을 땐 죽은척하고 있었지만요.”

그 말대로, 엘리샤는 데미안의 모든 행동을 관찰했다. 불필요한 경계를 지우기 위해 자는 체를 하며.

그렇게 데미안을 관찰하며 엘리샤가 느낀 감정은 아주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경악.

“그것만이 아니에요. 금발은 시그마를 알고 있었어요. 그것도 한눈에 알아보더라니까요?”

“······뭐라고?”

“진짜예요 단장. 제가 분명히 들었어요.”

엘리샤는 금발 소년과 시그마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누가 이길 거로 생각하죠?’

‘네몬······ 블레오파드.’

‘호오. 나를 알고 있나요?’

그 뒤, 시그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엘리샤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말하자 테이블 위로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저기, 그때 금발 안 도와줬다고 혼내려는 거 아니죠? 단장도 아시잖아요. 저 마법 못 쓰면 보통 사람만도 못하다는 거.”

쿠훌린의 눈치를 살피던 엘리샤는 검은 소용돌이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쿠훌린은 직감했다.

카론 늪지의 소용돌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카인이라는 아이 말인데요.”

카인.

데미안처럼 하센베르크의 검술을 쓰는 소년.

쿠훌린은 전장에서 카인의 전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에게 주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아이는 하센베르크 기사단의 검술을 뿌리부터 제대로 익히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름이 ‘카인’이라니.

“저는 금발이 발현한 검은 파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녀석은 그냥 쑥 들어가더라고요. 그러고는 감마한테 마구 검을 휘두르는데 와······,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그때 걔 표정을 단장도 봤어야 했는데. 무슨 짐승 새끼인 줄.”

엘리샤는 카인이 파장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아이의 몸에서, 금발이 발현한 것과 유사한 기운이 흘러나왔어요.”

그 말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엘리샤는 데미안이 소서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카인에게도 유사한 힘이 있다고?

“그 아이도 소서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엘리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단장. 금발의 검에 깃들었던 그거, 은월검 맞죠?”

“은월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 라이칸. 그 금발, 은월의 마력을 발현했다고.”

“잘못 봤겠지.”

해명을 요한다는 듯 라이칸이 쿠훌린을 돌아봤다.

쿠훌린이 말했다.

“라이칸.”

“네. 단장.”

“알아봐줘야 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라이칸이 고개를 숙였다.

그를 바라보는 쿠훌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센베르크의 흔적을 조사하도록. 무덤 속의 시체까지. 남김없이.”

***

세실은 꿈을 꿨다.

꿈속에서 세실은 족제비와 여행을 하고 있었다.

데미안을 도우러 가는 여행.

‘살려줘 세실!’

‘내, 내가 잘못했어!’

‘으아아앙······!’

족제비의 훈련은 험난했다.

곰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고.

도적과 싸웠다.

‘제, 제발 도와줘 세실!’

족제비에게는 벅찬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데미안을 도우려면 족제비는 강해져야 하니까.

아니, 사실은 그보다 큰 이유가 있었다.

족제비는 데미안을 ‘금발 약골’이라고 불렀다.

세실은 그것이 괘씸했다.

‘족제비. 약골.’

‘미, 미안해! 용서해 줘!’

‘활쏘기. 300번.’

‘모, 못해! 진짜 더 하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족제비. 실시.’

엉엉 울면서도 족제비는 시키는 것들을 잘 해냈다.

내심 세실도 놀랄 정도였다.

‘세실! 내 오줌발 좀 봐! 대단하지! 이렇게나 멀리 쏠 수 있다고! 나는 이것만큼은 테오에게도 진 적이 없어!’

족제비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세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든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세실! 너도 이리 와서 해봐!’

‘······.’

‘세실! 얼른!’

‘······난. 못 해.’

‘세, 세실도 못 하는 게 있어? 그럼 내가 세실보다 잘하는 게 있는 거야?’

세실은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못 하는 건 못 하는 거였다.

‘그, 그럼 내가 이긴 거다? 오줌 멀리 쏘기는 내가 너보다 잘하는 거다?’

‘······맘대로. 해.’

세실은 훈련 일정을 더욱 빡빡하게 조정하는 것으로 족제비에게 복수했다.

그래도 쉬이 화가 풀리지 않았다.

.

.

.

그래서 세실은.

“세실! 정신이 들어? 데, 데미안! 세실이 깨어났어!”

눈을 뜨자마자 얼굴을 들이미는 족제비의 이마를 손날로 때려 주었다.

족제비가 아악! 소리치며 뒤로 넘어갔고, 그 자리를 데미안의 얼굴이 채웠다.

“괜찮아? 세실.”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가슴의 통증이 상당했다.

“윽······.”

“누워 있어.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거야.”

“······여기. 어디?”

‘돼지 오줌보 마을이야!’ 라고 외치며 족제비가 방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이어 ‘쿠! 세실이 깨어났어요!’ 하며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은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움직여 상체를 일으켰다. 물론 데미안의 도움이 있었다. 자리에 오래 누워있었는지 허리와 등이 몹시 아팠다.

멍하니 제 몸을 확인하던 세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옷이 갈아입혀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살짝 벌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의 붕대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다.

세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데미안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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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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