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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5

45화 저울추

45화 저울추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했느냐고? 무엇을?

“조금 더 누워있는 편이 좋겠어, 세실.”

잠이 덜 깨 헛말이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는 세실의 어깨를 살포시 쥐었다.

그러자 세실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내 팔을 꽉 끌어안았다. 얘 또 왜 이러냐.

“······데미안.”

“응.”

“······봤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세실은 내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귀가 새빨개진 것을 보니 열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자자, 얼른 눕자 세실.”

나는 세실을 눕혔다.

세실은 아주 살짝 저항했을 뿐,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자리에 누운 세실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더니 빼꼼 두 눈을 내밀어 나를 봤다. 저럴 때는 정말로 고양이 같다. 샴고양이.

“배고파? 먹을 것을 가져다줄까?”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그러나 나는 먹을 것을 가지러 갈 필요가 없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접시를 손에 든 쿠가 방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깨어났구나 예쁜 꼬마! 하하하하!”

***

쿠가 세실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기에 나는 방 밖으로 나왔다.

왠지 시선이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니, 이불 밖으로 빼꼼 얼굴을 내놓은 세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호다닥 이불을 덮어썼다.

‘······.’

여관 밖으로 나온 나는 적당한 잔디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족제비의 하소연을 들어주느라 혼자 있지 못했다.

‘역시 안 보이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혼돈을 발현했을 때의 메시지를 시스템 창에서 찾아봤으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머릿속에 각인된 활자는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 속의 ■■가 리메이커를 응시합니다.】

이 메시지가 발현되었을 때, 나는 정말로 어떤 존재의 시선을 느꼈었다.

그렇다면 저 검은 사각형으로 가려진 부분에는 무슨 단어가 숨어 있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포식한 ■■의 파편을 혼돈으로 변환합니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두 메시지에는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 속의 ■■’와, ‘포식한 ■■의 파편’에는 중복되는 단어가 숨어 있다든지.

‘이불 속의 세실이 리메이커를 응시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상상에 피식피식 웃던 나는 묘한 느낌에 옆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샤가 빤히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잠시 내게 시선을 고정하던 엘리샤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좋니?”

“······뭐가요?”

“세실 말이야. 깨어났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닌데요.”

“흐응,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세실 걔, 보기보다 대단하더라? 좋겠네 금발? 아하하하!”

엘리샤가 깔깔 웃으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왠지 당한 기분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후드득, 머리를 털어냈다.

‘이상한 여자.’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집중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27도 기울어 있습니다.】

앞의 두 메시지와 달리 이 문장은 직관적이다.

그동안의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는 너무 추상적이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기울어집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이래서는 어느 방향으로, 얼마큼 기울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아스트레아의 천칭’ 특성의 상세 설명을 열어봤다.

◎ 아스트레아의 천칭

[아스트레아 대륙의 정기(精氣)가 모여 태어난 환상의 저울대.

리메이커가 이 세계를 ‘픽션’으로 인지하는지, ‘현실’로 인지하는지 정교한 수치로 가늠할 수 있다.

리메이커의 심상에서 픽션의 무게추가 무거워지면 저울대가 ‘왼쪽’으로, 현실의 무게추가 무거워지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저울대의 방향과 기울기에 따라, 리메이커가 지닌 가장 특별한 스킬인 ‘리메이크’의 위력이 결정된다.]

픽션이 왼쪽, 현실은 오른쪽.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27도 기울어 있습니다.】

지금 천칭의 상태는 ‘현실’의 무게추가 27도만큼 내려와 있다.

즉, 내가 이 세계를 픽션보다는 현실에 가깝게 인지한다는 의미.

신기한 일이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의 나는 마주하는 모든 인물을 그저 ‘활자로 만들어진 가짜’라고만 여겼으니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기울어집니다.]

최초로 떠올랐던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는 C조의 숙소에서 카인을 만났을 때다.

이때, 천칭의 방향과 기울기는.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왼쪽으로 7도 기울어집니다.】

왼쪽, 즉 픽션의 무게추가 7도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후 세 번 연속 오른쪽으로 기울었어.’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10도 기울어집니다.】

광산의 숲에서 테오 일행이 기사에게 공격당했을 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13도 기울어집니다.】

균열의 팽창이 이 세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직감했을 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11도 기울어집니다.】

그리고 지난밤, 암영의 추격을 인지한 세실이 내게서 달아나려 했을 때.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게다가 이 세 번의 메시지는 모두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었다.

공통점은 천칭의 기울기가 10도 이상 변했다는 것.

‘10도가 기준이 되는 거야.’

향후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가 뜰 경우, 이전보다는 조금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하지만.

【리메이크의 위력이 27퍼센트 감소합니다.】

문제는 이거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오른쪽으로 27도 기울어 있습니다.】

두 메시지에서 27이라는 숫자가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테지.

‘아스트레아의 천칭에서 현실의 무게추가 무거워지면 리메이크의 위력이 감소한다.’

그리고 만약 현실의 무게추가 끝까지 기울어 90도에 이르게 된다면.

‘리메이크의 위력도 90퍼센트 감소한다.’

이것은 정말로 큰 문제다.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음에도, 리메이크는 내가 지닌 시스템의 힘 중에서 최고의 위력을 발현하는 스킬이다.

리메이크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 리메이크

[리메이커가 소설 속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간섭할 수 있다.

연관 특성 ‘아스트레아의 천칭’의 기울기에 영향을 받는다.

리메이커의 ‘플레이어 레벨’에 영향을 받는다.

발현되는 힘의 크기에 비례해 RP가 소모된다.

현 플레이어 레벨(Lv.32)에서 스킬 발동을 위해서는 최소 30의 RP가 필요하다.]

아무리 내가 플레이어 레벨을 올려도.

RP를 모아도.

‘아스트레아의 천칭’의 기울기 때문에 90퍼센트의 위력이 감소한다면, 리메이크는 이전만큼 강력한 스킬이 될 수 없다.

그 생각을 하자 불현듯 떠올랐다.

【잊지 마 김우진.】

나를 이 세계에 던져놓으며 가이아 작가가 했던 말.

【지금부터 네가 경험할 모든 것은 그저, 활자일 뿐이란 걸.】

그랬던 건가.

그 말속에 숨은 뜻은 즉.

이 세계를 활자(픽션)로 인지해, 리메이크 스킬의 약화 가능성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나.

‘게다가 나는 30레벨 대에 들어섰어.’

지금부터는 레벨을 올리는 일이 쉽지 않을 거다.

점점 더 어려워지겠지.

[리메이크 시전이 취소됩니다.]

[발현 범위가 시전자의 능력을 초월했습니다.]

광산 탈출에 성공한 후 리메이크를 발현하려 했을 때 떠올랐던 메시지.

그때의 나는 무의식적으로 리메이크의 힘이 약해진 것 같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아스트레아의 천칭에 주목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어.’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천칭의 현재 기울기와 상관없이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가 발동할 때면, 리메이크를 포함한 나의 전반적인 능력이 향상되는 것 같다는 점.

‘예를 들어 통찰을 습득하거나, 승마술과 동기화를 레벨업하거나.’

어쩌면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어느 방향이든 ‘기울어지는 것 자체’로, 나는 어떤 일시적인 에너지를 얻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추론이겠지.’

아무튼, 이 세계를 현실로 인식하는 것에는 경계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혼돈을 발현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겠지.

현재로서는 ‘혼돈’이야말로, 점점 약화될지 모를 리메이크를 대신할 유일한 방책이니까.

***

세실은 쿠가 가져온 수프에 만족했다. 맛있다. 이것도 쿠가 만든 걸까?

수프를 먹으며, 세실은 쿠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흘끗흘끗 쳐다봤다.

그러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쿠. 머리.”

“아, 이거? 사실은 이게 내 원래 머리색이다. 하하하.”

세실은 동글게 눈을 떴다.

쿠의 은빛 머리카락과 수염에서는 위엄이 풍겼다. 새치 가득한 검은색일 때는 지저분해 보였는데, 지금의 쿠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족 같았다.

“그런데. 왜.”

“보면 알겠지만 내가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여자들이 가만두지를 않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염색했던 거다! 으하하하!”

“염색?”

“그래. 엘리샤가 마법으로 해줬던 건데, 내가 어떤 힘을 발현하면 그만 염색이 날아가 버리거든. 그래서 다시 검게 물들여야 하는데 엘리샤가 아직 마력 회복을 못 해서 말이다. 엘리샤 기억하지? 그 입 걸걸한 여자 마법사 말이야.”

아. 우리를 구해줬던.

고개를 끄덕인 세실이 쿠의 머리를 향해 슬쩍 손을 뻗었다.

“만져보고 싶은 거냐?”

쿠가 세실에게 머리를 가져갔다.

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세실은 부드럽게 미소했다.

“지금. 좋아요.”

“나도 알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머리색은 너무 눈에 띄거든. 아, 그리고 예쁜 꼬마.”

쿠가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상처를 돌본 것은 엘리샤였으니 염려 말거라.”

세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흉터는 생기지 않을 거라고 하더구나.”

“······.”

정적을 깨뜨리듯 쿠가 짝! 손뼉을 쳤다.

“예쁜 꼬마. 내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세실은 물끄러미 쿠를 바라봤다.

쿠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함께? 어디?”

“내 고향.”

“쿠. 고향?”

“엄밀히 말하면 고향은 아니고, 그래. 별장 같은 곳이지.”

“쿠. 별장?”

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왜?”

“그곳에는 너를 추격하는 자들이 올 수 없거든.”

세실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역시 쿠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암영의 습격이 있었던 마당에 모를 리 없겠지.

세실은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스트에게 당해 쓰러진 후, 세실의 의식은 깨어났다가 잠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래서 기억이 툭 툭, 끊겨 있었고, 불완전했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것처럼.

그러고 보니 설핏 네몬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설마. 아니겠지.

“그곳에 가면 네 또래의 친구들도 있다.”

세실은 쿠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데미안은?

세실은 데미안과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쿠를 따라간다면 암영은 더는 데미안을 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데미안을 위해서라도 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게 옳은 길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이는 모두 죽고 마니까.

세실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면서 상기했다.

자신이 고려해야 할 대상은 데미안만이 아니다.

‘카인.’

다시금 죄책감이 차올랐다.

데미안과 함께하며 얼마간 카인을 잊었었다. 하지만 막상 카인의 얼굴을 마주하면 마음이 아프고, 몸이 떨리고, 초조해졌다.

카인에게는 평생을 바쳐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그의 가문을 멸망에 이르게 한 자는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니까.

그런데도 나는.

비겁하게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어.

“쿠. 나는······.”

세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쪽으로 저울대를 기울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미 무게추는 내려갔다. 입 밖으로 꺼내기가 두려울 뿐.

그래.

이것이 옳은 선택이야.

나는 카인에게서 달아나지 않아.

그런데.

“데미안도 함께 가기로 했다.”

그 말이 세실을 다시 혼란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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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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