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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6

46화 거울 속의 호박

46화 거울 속의 호박

네몬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와인에 젖은 그의 입술이 나직이 혼잣말을 뱉었다. 데미안이라고 했던가.

첫 등장부터 놀라움을 안겨준 소년이었다. 비츠크 산맥의 마석 광산에서, 소년은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움츠러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네몬은 소년을 도왔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이후에도 소년은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그날 네몬은 세실의 ‘그림자 도약’을 처음 보았다. 블레오파드와 페이드린의 블러디드가 융합된 특별한 기술. 아직은 덜 다듬어졌지만, 그 기술이 완성되면 세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테지.

그런데 그 금발 소년이 세실과 동일한 기술을 발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꼬마는 블레오파드도, 페이드린도 아닌데.

“큭큭큭······.”

그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네몬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감을 느꼈다.

“블레오파드와 페이드린의 블러디드를 지닌 것을 넘어, 악마의 숨결까지 삼킨 소년이라.”

악마의 숨결을 삼킨 자.

다른 말로 ‘소서러(Sorcerer)’.

소서러는 마법사와 비슷하지만, 그 근본은 완전히 다른 자다.

그 소년처럼.

“재미있군.”

지금도 이 정도일 진대, 시간이 흐르면 얼마나 더 재미있는 모습으로 변모해 있을까.

그 기대감이 네몬을 흥분시켰다.

그때, 그의 뒤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일었다.

스겅.

네몬의 뒤를 노리며 다가오던 기사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블레이드에 맺힌 피를 털어낸 네몬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는 열 명이 넘는 기사의 목이 잘려 있었다.

“이것으로 랑케스터 가문은 멸망인가요?”

목이 잘린 소드마스터, 피에르 랑케스터의 머리를 들어 돌리며 물었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네몬의 붉은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이제 로슈포르 후작은 영지전을 끝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금발 소년은 은월의 도움을 받으며 가파르게 성장하겠지.

세실도.

그리고 하센베르크의 망자(亡者) 역시도.

“이 정도 선물이면,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겠죠?”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우리는 한동안 돼지 오줌보 마을에 머물렀다. ‘회복력’ 특성을 지닌 나와 카인과 달리 세실과 마르셀에게는 요양이 필요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는 엘리샤였다. 엘리샤는 걸핏하면 각혈하고, 쓰러지고, 각혈하고, 깔깔 웃었다.

쿠는 머리색을 감추려는 듯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다녔다. 그리고 매일 투덜거리며 돼지 오줌보 맥주를 마셨다.

“데미안. 혼돈?”

병상을 털고 일어선 세실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전의 이상한 반응은 역시 잠이 덜 깨서 그런 거였나 보다.

“이거. 혼돈?”

그렇게 물으며 세실은 나뭇가지로 바닥에 커다란 회오리 무늬를 그렸다. 미스트에게 공격받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줄 알았었는데, 어느 정도는 의식이 있었나 보다.

아이처럼 뛰어다니는 세실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운동장에 금을 긋고 하는 놀이가 떠올랐다. 아쉽게도 나는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눈을 빛내며 집중하던 세실이 카인을 보자마자 내 뒤에 숨었다.

“데미안.”

여기서도 카인은 나를 따라다녔다.

아니, 같은 여관에 머물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오스카 단장이 죽어서 아쉽게 생각하고 있나.”

“아쉬운 건 카인, 너 아니야? 네가 소속됐던 용병단이 사라진 거잖아.”

나는 일행에게 검은 갈기 용병단이 붉은 폭풍 용병단의 기습으로 전멸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 말을 들을 때의 카인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오스카의 죽음에 카인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용병단은 다시 만들면 된다.”

“그래. 잘 해봐.”

“지금도 나와 함께할 생각이 없나. 데미안.”

집요한 녀석.

나는 지난번과 같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내 길은 내가 선택할 거야.”

“세실이라고 했나?”

카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심 불안해졌다. 뭐야. 오지 마. 갑자기 왜 세실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내 옷을 꼭 쥐는 세실의 손이 느껴졌다.

몇 달 사이 훌쩍 키가 커진 카인이 내 어깨 너머로 물끄러미 세실을 내려다보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카인이다.”

세실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잠시 후, 세실이 카인에게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세실.”

그 손을 마주 잡은 카인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반갑다. 세실.”

.

.

.

그날 밤 쿠가 우리를 한 방에 모았다.

“소드마스터 피에르가 살해된 채 발견됐다는구나.”

이어 쿠는 로슈포르 후작과 오비니 백작, 그리고 브리앙스 백작이 휴전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영지전이 끝났다.

“그, 그럼 우리 이제 페르디나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족제비의 물음에 쿠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색한 족제비가 나와 세실을 돌아보며 외쳤다.

“데, 데미안! 세실! 우리 이제 돌아갈 수 있대!”

그러나 나는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피에르 랑케스터의 죽음.

이는 소설에서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에티엔에 이어 피에르까지 죽다니.’

오를리안 왕국의 다섯 소드마스터 중에서 둘이 죽었다. 다시 말해 왕국의 군사력에 큰 손실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영지전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피에르는 전쟁터에서 죽은 게 아니야. 암살당했어.’

내가 떠올린 용의자는 역시 네몬이었다.

정황상, 이전에 쾨르다시에 가문을 멸망시킨 자도 네몬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랑케스터라니.’

나는 네몬이 피에르 랑케스터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그의 목적은 보다 빠르게 영지전을 끝내는 것이었을 테지. 하지만 굳이 왜. 어차피 피에르 랑케스터는 상처 입어 후퇴했고, 네몬은 ‘쿠훌린 아르테미스’라는 걸출한 소드마스터가 브리앙스 진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몬은 브리앙스가 로슈포르에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아. 그런데도 굳이 서둘러 전쟁을 종식시켰어.’

나는 소설을 통해 보고 느꼈던 네몬을 머리에 그렸다.

그러면서 떠올렸다.

‘내가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다는 거, 알고 있나요?’

그래.

답은 하나다.

내가 네몬의 흥미를 자극한 거다.

‘네몬은 무한회귀 세계관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

내가 알기로 네몬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소는 오직 하나, ‘흥미’다.

물론 네몬은 나뿐만이 아니라 세실과 카인에게도 짙은 흥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나의 존재가 그에게 예정되었던 것 이상의 흥미를 유발했고, 그래서 이런 돌발 행동을 벌인 거겠지.

즉, 네몬은 내가 성장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해라.”

그렇게 말한 쿠가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방을 나섰다.

***

이튿날,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쿠의 머리와 수염이 처음 봤을 때의 새치 가득한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염색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쿠는 불만이 많았다.

엘리샤의 마법 실력이 형편없어 자꾸 새치의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예요 단장! 아니거든요! 마법으로 염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필요 없으면 관둬요!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까!”

엘리샤가 발끈하며 달려들자 쿠가 손사래를 치며 피했다. 그러나 잠시 후, 엘리샤는 내게 귓속말로 ‘단장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새치를 넣은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밝혔다. 또, 저렇게 자연스럽게 새치를 넣으려면 상당한 수준의 마력 제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새치가 어지간히도 불만족스러웠던 것인지, 쿠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족제비가 자신의 금패를 망가뜨렸다며 뒤늦은 화를 냈다.

울상이 된 족제비를 구경하던 내가 물었다.

“그런데 쿠. 그 금패는 정체가 뭐예요?”

“아, 이거? 원래는 그냥 평범한 금패인데 특별한 힘을 조금 추가했다. 문제는 일회용이라서 한 번 힘이 발현되면 못 쓰게 된다는 거지.”

“그런데 그걸 왜 족제비한테 빌려줬어요?”

함께 영지전에 참여한 내게 빌려주지 않은 것에 대한 물음이었다.

서운했다기보다는, 실제로 쿠가 내 안위를 많이 염려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다.

쿠가 내게 말머리를 붙이며 속삭였다.

“아아, 조조 녀석이 어떻게든 우리를 따라올 것 같았거든. 그래서 빌려줬다. 원래는 네게 빌려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조조 녀석이 죽을 것 같아서 말이다. 뭐, 그때는 내가 중부 전선으로 차출될지 몰랐으니까.”

쿠가 무안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튼 금발 꼬마. 너에겐 미안하게 됐구나.”

나는 그저 씩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쿠는 무력만 강한 것이 아니라, 직감 또한 뛰어난 것 같다고.

‘그러고 보니 루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었지.’

예지(豫知)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루나는 다른 이들에 비해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좋았다.

나는 물끄러미 쿠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얼마 전, 쿠는 지금 하던 일을 마무리한 후 자신의 고향으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소설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알겠다고 했다.

이유?

그곳에 루나가 있을 테니까.

***

리즈 플랑빌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소녀 가장이었다.

리즈는 얼마 전 랑베르 잡화점으로 일터를 옮겼다. 리즈가 그곳에서 일을 하는 목적은 하나였다. 다른 곳보다 보수가 좋았기 때문에.

“어서 오세요. 호호호.”

리즈는 이전에 거쳐 간 여러 일터에서 늘 친절하고 싹싹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잡화점의 종업원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어라? 전에 일하던 종업원은······?”

“이보쇼 젊은 점주 양반! 이전의 종업원은 어디로 사라진 거요!”

“꺄악! 전의 그 인형처럼 예쁜 아이는 어디로 가고 저런 호박 같은 게!”

리즈는 어이가 없었다.

미녀라는 소리까지는 못 들어도,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런데 호박이라고?

“하하하! 그 종업원은 잠시 휴가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영지전도 끝났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이 잡화점에는 세 명의 점주가 있다.

그중 대표 격인 인물은 중요한 용무 때문에 한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들었고, 나머지 두 점주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그중 ‘테오’라는 이름의 저 점주는 솔직히 조금 많이 멋있었다. 이제 와 사실을 밝히자면, 리즈가 랑베르 잡화점에 취직한 이유에는 저 점주의 지분이 꽤나 들어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

적당한 근육질 몸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어투.

거기에 상냥함까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손님!”

친절하게 손님을 배웅한 테오 점주가 리즈를 격려했다. 잘하고 있다고. 이전 종업원 이야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신경 쓰였다. 도대체 어떤 아이였길래 오는 손님마다 빠짐없이 찾는 걸까. 거기다가 뭐, 인형처럼 예쁘다고? 흥. 웃기고 있네.

잠시 후 벌컥, 잡화점 문이 열리며 검은 후드를 눌러쓴 아이가 들어왔다.

리즈는 친절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후드를 쓴 아이는 아무런 말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돌연 리즈에게 달려와 앞치마를 벗기기 시작했다.

“꺄악! 왜 이러시는 거예요 손님! 저, 점주님! 여기 이상한 손님이 들어왔어요! 꺄아악!”

리즈는 저항했지만 이 왜소한 아이의 완력은 상당했다.

아이는 순식간에 앞치마를 빼앗은 뒤 자신의 몸에 둘렀다. 그때, 리즈는 후드에 가려졌던 아이의 입술이 싱긋 미소하는 것을 봤다.

리즈의 외침을 들은 테오 점주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고는 흠칫 놀라 외쳤다.

“세실! 세실이야?”

아이의 손이 천천히 후드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아이의 긴 흑갈색 머리칼에 닿으며 빛줄기처럼 번졌다.

동그랗게 커진 리즈의 눈이 아이의 얼굴에 집중됐다. 매끄러운 순백의 피부, 반짝이는 연녹색 눈동자, 완벽한 굴곡을 그리는 오뚝한 콧날, 석류알처럼 투명하고 도톰한 입술.

아이의 얼굴은 마치 이 시대 최고의 화가가 자신의 영혼을 담아 그려낸 걸작 같았다.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순수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

리즈의 마음속에서 강한 파동이 일었다. 두 눈으로 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발견한 듯, 그녀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우리. 왔어.”

아이가 테오를 보며 환히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리즈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리즈는 떨리는 고개를 움직여 전신거울을 돌아봤다. 웬 호박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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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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