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476

EP.475 18. 만우절 (17)

군청색 물감에 조금씩 물을 타는 것처럼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침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하늘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들여다봐야 간신히 여명의 티끌을 몇 점 발견할 수 있었다.

가로등의 소등을 알리는 종소리가 골목마다 울려 퍼졌다. 당직을 맡은 공무원들이 가스등 밸브를 잠그기 위해 몸을 일으키고 있을 때, 괴물서커스단의 숙소 뒷마당에는 누군가가 땀을 흩뿌리며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반. 원더스타인의 제자를 자처하는 남자였다.

“후, 오늘 아침은 여기까지 할까? 낮에는 어제처럼 계속 도시를 돌아다녀야 할 테니…….”

이반이 마당에 나와 검을 휘두른 지 30분 정도 지났다. 투기장에 있을 때 그는 보통 아침 수련에 2시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검만 파고 있기 힘들었다. 서커스단의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챙겨온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사실 서커스단 활동이 검술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방해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자로서 스승이 일하는 데 가만히 보기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앞으로 1년 반은 스승의 밑에 있기로 한 이상 그는 느긋하게 몸과 정신을 만들어서 나갈 생각이었다. 검술에 대해서도 초조해할 이유가 없었다. 원더스타인은 그에게 그가 10년에 걸쳐서 도달했을 경지의 검술을 전수해주었다.

휴식을 마친 이반은 이만 씻으러 들어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순간, 건너편 마당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누구지?’

서커스단 안에 자신 말고도 검사가 있었던가? 알렌과 조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검을 놓은 자들이었다. 두 사람이 새벽부터 검술을 수련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는 서커스단에 들어온 지 2주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 단원들이 어떤 재주를 익히고 어떤 특기를 가졌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가 들어오고 나서 서커스단은 바쁘게 일정에 쫓긴 터라 그에 대해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다.

목검이 휘둘러지는 소리만 들어봐도 상대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반은 기대감에 부풀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이반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있었다.

클라라. 스승님의 비서. 그녀가 마당 중앙에 서서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연습하고 있는 건 단순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무였다. 곡예사들이 날붙이를 이용해 보이는 일종의 춤 말이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 적을 말살하겠다는 의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것은 사람을 해하기 위한 검술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반은 그녀의 검이 그리는 궤적을 넋 놓고 바라봤다. 사람과 검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유려한 동작으로 움직였다.

검이라는 물건이 피를 뿌리지 않고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니. 10년 동안 투기장 생활을 해온 그의 삭막한 정서에 싱그러운 싹이 돋는 기분이었다.

클라라는 이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검 휘두르는 데만 집중했다.

이윽고 그녀가 거친 호흡을 내쉬며 검무를 마쳤을 때, 이반은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원더스타인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봤다.

“이반 씨?”

“훌륭하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검무는 처음 봤습니다.”

그의 말에 원더스타인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하시는 말이죠? 투기장의 스타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네요.”

“전혀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아, 물론 몇 가지 자세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뭔가요? 설명해주시겠어요?”

원더스타인은 그에게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갔다. 그녀는 현재 위에는 탱크톱을, 밑에는 돌핀 팬츠를 걸치고 있었다.

가슴골과 다리가 훤하게 드러난 것이 사실상 속옷만 입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반은 그 사실에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여체에 무심한 편이었다. 그가 여자의 몸을 주의 깊게 살핀다면 그것은 근육의 조형과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관찰하기 위함이지 성욕과는 관계가 없었다.

원더스타인은 그런 이반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원작에서 도적과 마법사가 노골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 몸을 직접 붙잡고 도와주시겠어요?”

“네! 물론입니다!”

이반은 신난 표정으로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그녀의 동작을 수정해주었다. 사실 그가 던져주는 조언들은 원더스타인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왜냐면 그녀가 방금 춘 검무는 원작에서 이반이 실제로 췄던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 표현에 ‘춤’을 입력하면 그는 들고 있는 무기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의 검무를 췄다. 설정상 그가 서커스 그랑프리의 경비를 맡게 되면서 곡예사들의 동작을 보고 개발한 것이라고 했다.

원더스타인은 그를 유혹하는 데는 검술만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수련 시간에 맞춰서 보란 듯이 검무를 연습한 것이다. 스킬북의 힘 덕분에 그것에 조금씩 실수를 섞어가며 펼치는 것은 그녀에게 쉬운 일이었다.

“우움, 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원더스타인은 목검을 쥐는 자세를 바꾸며 슬쩍 이반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했다. 방금까지 그녀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미끄러지며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물론 이반은 그런 것에 혹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그것을 유혹이라고 느끼지도 못했다.

원더스타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신체적 접촉을 계속 시도했다. 그녀가 노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둘이서 뭘 하는 겁니까?”

과연 잠시 후 건물 안에서 클라라가 어딘가 굳은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두 사람이 연습하고 있던 장소는 그의 방이 있는 창문 바로 아래였다. 당연히 이렇게까지 소음을 내면 그도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원더스타인은 그가 경멸에 찬 시선으로 자신과 이반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레이나의 작전이 먹혀든 것 같았다.

***

레이나가 세운 작전의 요지는 클라라의 수치심을 자극하자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림자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엉뚱한 짓을 할 때마다 당장 그녀에게서 몸을 되찾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클라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리 원더스타인의 몸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그가 클라라로서 살아온 세월이 무려 19년이었다. 만약 원더스타인이 그녀의 몸으로 수치스러운 일을 한다면 몸을 되찾고 싶다는 마음이 들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런 일을 하라는 거냐?”

“설득은 무리인 것 같다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어요?”

레이나의 추궁에 원더스타인은 말없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확실히 지금은 그녀가 말한 방법을 따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하면 되는데?”

“우선 말이죠…….”

그렇게 레이나의 지시에 따라 다음날 새벽이 되자마자 시도한 것이 바로 이반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클라라는 여자였다. 자신의 몸뚱어리로 다른 남자와 부대끼는 모습을 보면 질색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작전은 성공적인 결과를 보였다.

“이반 씨, 분명 낮에 바쁠 거니까 충분히 쉬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클라라 양, 아직 4월입니다. 그런 차림새로 밖을 돌아다니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요.”

클라라는 제 딴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두 사람을 타일렀지만, 그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굴욕감과 분노가 어려 있었다. 원더스타인은 레이나의 예측이 적중한 것을 알아차렸다.

‘좋아. 수치스러워하는구나. 효과가 있어. 이걸로 가보자.’

그렇게 원더스타인은 그날 내내 계속 클라라 앞에서 도발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용 욕실의 이용 시간을 착각한 척 남자들이 모여 있는 탕에 알몸으로 들어가는 실수를 하거나, 속옷을 입는 것을 깜빡한 척 빼먹고는 노골적으로 몸에 붙는 옷을 입고 다니거나.

그리고 중간중간 기회가 있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표정으로 남자들에게 몸을 들이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마다 클라라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원더스타인은 그가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처음 봤다. 분명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조금만 더 자극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일 그녀를 도발하고 다녔는데도 퀘스트 창은 그대로였다. 이 몸으로 돌아오기가 그만큼 싫다는 것일까?

서커스단이 새로운 가면 하나를 더 찾아냈다는 사실도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3일째 밤이 됐을 때, 원더스타인은 이제 시간이 48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작전은 먹혀들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내일은 좀 더 강한 수로 나가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싼다든지.”

레이나의 제안에 원더스타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나보고 싸라는 소리냐?”

“제, 제 그림자가 저지른 일 중에…… 그, 그게 가장 부끄러우니까요!”

원더스타인은 그녀의 외침에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공공장소에서 잘도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 같았다.

“하지만 클라라의 이미지를 너무 망쳐 버리면 돌아오기 싫어하는 건 아닐까?”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일단 내일은 오늘 한 것보다 약간 더 수위를 올릴 수밖에. 정 안 되면 마지막 날에는…… 네가 말한 그런 방법까지 동원해봐야겠지만…….”

원더스타인과 레이나가 내일은 또 클라라에게 어떤 수치심을 줄지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클라라는 자신의 방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원더스타인이 벌였던 일들을 떠올리며 이를 꽉 악물었다.

현재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레이나와 원더스타인이 예측하던 것과 달랐다. 그는 수치심 따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클라라는 자신의 몸이 아니었으니까.

대신 그는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원더스타인을 향한 것이었다.

‘제가 오라버니를 너무 얕봤네요.’

지금 그의 마음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강한 질투심이었다. 다른 남자들에게 원더스타인이 몸을 비빌 때마다 그는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훗, 여자들을 다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자들 상대로 꼬리를 흔들어 보겠다, 이건가요?’

클라라의 눈동자가 정욕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못 참아.’

그는 까마귀 마녀가 원더스타인에게 작별의 키스를 날렸을 때, 들었던 반감의 정체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소유욕이었다. 오라버니는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줄 바에 차라리 내가 가져야지. 거부한다면 강제로라도……. 원래 내 몸이니까. 이건 나쁜 일이 아니야.’

클라라는 내일 어떤 식으로 원더스트인을 굴복시킬지 상상하며 웃음을 흘렸다.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