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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9

49화 새로운 여정 (3)

49화 새로운 여정 (3)

특별한 경험.

세실은 그 말이 별달리 와닿지 않았다. 머릿속이 몽롱하고 기운이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 몸이 경직됐다.

‘······!’

세실은 자신이 왜 혼절했었는지 기억해 냈다. 그제야 들렸다. 쿠와 데미안의 발소리에 섞인, 카인의 발소리.

바들바들 몸이 떨렸다. 세실은 카인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지난밤에 봤던 그의 일그러진 얼굴. 세실은 쿠의 망토를 꼬옥 움켜쥐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세실.”

세실은 목소리를 향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인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세실.”

카인의 눈동자에는 염려의 빛이 담겨 있었다.

지난밤의 일은 모두 잊어버린 사람처럼.

아니, 애초부터 그런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괜. 찮아.”

그러자 카인이 싱긋 웃었다.

바르르 아랫입술을 떨던 세실은 쿠의 등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쿠는 분명 알아채겠지. 하지만 모르는 척해줄 거야.

“예쁜 꼬마. 왜 걸어가고 있냐고 묻지 않는 거냐?”

쿠가 너스레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물어도 안 가르쳐줄 거다. 아직 저 녀석들에게도 말해주지 않았거든. 으하하하!”

***

쿠의 말대로, 나는 왜 쿠가 말들을 먼저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오늘 오전, 오를리안 왕국의 국경을 넘은 우리는 너른 초원지대에 진입했다. 머리색을 감추고 싶은지 쿠는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바람노래 초원이다! 하하하하!”

나는 이 ‘바람노래 초원’이라는 곳을 알지 못했다. 소설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새삼 나는 아스트레아 대륙이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소설에 등장한 지역이 얼마나 한정적이었는지 실감했다.

바람노래 초원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는 우리를 말에서 내리게 했다. 쿠의 속삭임에 푸르릉! 투레질한 스트라이더가 다른 말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오. 슬슬 마을이 보이는군.”

다소 원시적인 곳이었다.

대충 나무를 세워 만든 조악한 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으니까. 조금만 센 바람이 불어도 다 날아갈 것 같은데.

울타리를 지난 쿠가 어느 집의 현관을 두들겼다.

“주인장! 손님 왔소!”

한 여자가 환하게 미소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녀의 외모에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머리 위로 뾰족 솟은 두 귀.

그랬다. 여자는 아스트레아 대륙의 여러 수인족 중 하나인 ‘카타이나(Cataina)’족이었다.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기에 존재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어디까지 가셔요?”

“엥? 주인이 바뀐 거요?”

“아,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이제 제가 운영해요. 저는 레베카라고 해요.”

생긋 웃는 레베카를 보며 쿠가 외쳤다.

“서쪽 경계까지!”

계산을 치른 쿠가 우리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지금 출발하실 거죠?”

“그렇소!”

귀를 쫑긋 세운 레베카가 긴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안내했다.

.

.

.

부드러운 금빛 털.

호기심 가득한 푸른 눈.

날렵하고 긴 다리.

갈고리 같은 발톱.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타조를 닮은 거대한 생명체였다.

어찌나 큰지 건장한 성인 두어 명은 너끈히 탈 수 있을 정도였다. 아스트레아 대륙에 이런 짐승이 있었다고?

“와하하하! 뭘 그렇게 멍청하게 보고 있냐!”

놀란 내 얼굴을 보며 쿠가 하늘이 떠나갈 것처럼 크게 웃었다.

“바람노래 초원의 명물, ‘퀵피(Quickpee)’다. 카타이나족의 오랜 친구지.”

쿠는 우리 셋을 먼저 퀵피 위에 앉혔다. 카인이 가장 앞에, 그 뒤로 세실이, 가장 뒤에는 내가 앉았다. 레베카가 적당히 길이를 줄인 등자에 우리의 발을 하나하나 끼워주었다.

“발이 빠지면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예쁜 머리색을 가졌네? 꼭 퀵피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던 레베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말했다.

“어머. 눈 색도 비슷하잖아?”

준비가 끝나자, 내 뒤로 훌쩍 쿠가 올라탔다.

“도착하면 고삐와 등자만 잘 정리해 주세요. 그러면 퀵피는 알아서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쿠가 양팔을 뻗어 퀵피의 고삐를 쥐었다.

레베카가 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퀵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퀵피의 긴 다리 탓에 땅이 너무 많이 멀어진 것이다. 기습적으로 쿠가 외쳤다.

“달려라! 퀵피! 하하하하하!”

퀵피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세실과 카인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세실이 퀵피의 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엄청난 바람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폭풍이 밀려오는 듯했다.

곧 목소리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목에서 쉭쉭거리는 소리를 낼 기운마저 사라져 버릴 즈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을 떠.”

처음에는 어렴풋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해졌다.

“눈을 떠, 꼬마들아. 고개를 들어 봐.”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목소리의 울림은 바람마저 멀리 날려버린 듯했다.

어느새 폭풍 같던 바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고개를 들었다.

솨아아아아아아!

초록빛 풀잎의 바다가 온 시야를 메우며 물결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같은 초원이었지만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초지는 저 멀리 하늘의 경계까지 선명하게 보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은 저물어 가는 태양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났다.

눈이 부셨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서 싱그러운 내음이 났다.

“어때 꼬마들아. 멋지지?”

대답할 생각도 못 했다.

눈앞의 장대한 풍경과 하나가 된 쿠의 목소리는 내 가슴에 묘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선택지는 잔혹하지. 고통, 혹은 그보다 더한 고통뿐이니까. 하지만 잊지 마. 우리는 그중에서 어떤 고통을 받아들일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나는 쿠의 몸이 내 등에 밀착되는 것을 느꼈다. 세실과 카인의 몸도 나와 가까워졌다. 쿠가 우리를 품에 안듯 두 팔로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두려울 때는 어깨를 펴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거야. 그러면 볼 수 있어. 삶의 고통이라는 먹구름 뒤에 숨어있던 작은 달빛을 말이야.”

마법처럼 밤이 찾아왔다. 나는 달빛에 물들어 가는 초원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래. 그렇게 마주하는 거야. 마음껏 부딪쳐도 괜찮아. 너희들의 뒤에 항상 내가 있을 거라는 걸 잊지 마.”

나는 내 등에 맞닿은 쿠의 가슴에서 부드럽고 강인한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울림은 내 앞의 세실에게, 그리고 아마도 그 앞의 카인에게 차례로 전해졌다. 맞닿은 네 개의 심장은 마치 하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공명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세실이 나를 돌아봤다. 그 너머에서 카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답지 않은 아이 같은 얼굴.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카인도, 세실도 웃었다. 우리의 입가가 위로 솟으며 어금니가 드러났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들의 미소는 쿠의 미소와 닮아 있었다.

.

.

.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

“오랜만이구나! 내가 돌아왔다! 푸른 바다여!”

쿠의 요란한 외침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러나 쿠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바다를 향해 계속 무어라 지껄였다. 부끄러워진 우리는 쿠와 거리를 두며 딴청을 부렸다.

우리는 ‘항구 도시 브리즈(Breezeport)’에 도착했다. 며칠 전, 퀵피의 등에서 내린 우리는 스트라이더와 세 마리 말을 다시 만났다. 이후 신나게 말을 달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때. 빨려 들어갈 것 같지 않아? 바다야말로 사나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가장 매혹적인 존재지. 하하하!”

“여기. 쿠. 고향?”

“그건 아니야 예쁜 꼬마. 하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는 점은 같지.”

바다는 아름다운 광채를 발했다.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한 모습이 보였다. 덩치 큰 선원들이 활기차게 물건을 옮기는 광경도 보였다. 제법 큰 상선부터 작은 어선까지, 다양한 종류의 배들이 항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쿠. 배!”

“하하하! 저런 건 제대로 된 배라고 할 수 없어! 예쁜 꼬마, 진짜 배에는 말이다.”

세실이 쿠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날개가 있다.”

“날개?”

“그래. 날개가 있지. 반짝이는 은빛의 날개가.”

세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늘. 날아요?”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니지만.”

쿠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러고 보니 쿠에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의 등 뒤에서 펄럭이는 은빛의 날개가.

휘날리는 은빛 망토 너머로 쿠가 힘차게 입가를 올렸다.

“바다를 난다.”

.

.

.

우리는 쿠를 따라 인적이 없는 해안선을 걸었다.

스트라이더를 포함한 말들은 ‘흰 새’라는 이름의 여관에 맡겼다. 쿠는 여관 주인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어디 가는 거예요?”

“배를 타러 간다.”

“배는 항구에 많았는데요?”

쿠는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모래사장을 넘어서자 우툴두툴한 자갈밭이 나타났다.

그 뒤로는 우거진 숲이었다.

“이쪽이다.”

쿠의 어깨 너머로 동굴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금세 시야가 새까매졌다. 한동안 걸으니 저만치에서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그 빛의 틈새로 쿠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우리는 서둘러 그를 쫓았다.

통로 안쪽에는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있었다. 내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저 멀리 해가 비치는 출구로 이어지는 해수면 위에, 거대한 범선이 서 있었다.

“어이, 쿠훌린! 이게 얼마 만인가!”

쿠와 버금갈 정도의 덩치를 가진 사내가 크게 외치며 다가왔다. 쿠도 큰 소리로 웃었다.

“벨락! 하하하하!”

두 사내가 강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어 벨락이라는 사내가 속삭이듯 물었다.

“치유법은 찾았나?”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은 쿠가 나직이 말했다.

“리아논은.”

“······아직은 괜찮아 보이네. 그러나 시간문제일 테지.”

굳은 얼굴로 답한 벨락이 우리를 보며 표정을 바꿨다.

“저 아이들인가?”

그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인사하자, 벨락도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이제 배에 오르세, 쿠훌린. 너희들도 따라오거라.”

두 사내를 따라 범선에 올랐다.

선원들이 두 팔을 들며 환호했다.

“오랜만입니다! 단장!”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보고 싶었습니다!”

활기찬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쿠와 벨락처럼 은빛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데미안. 세실. 카인.”

쿠가 손짓하며 우리를 불렀다.

나는 조금 놀랐다. 미스트를 물리쳤을 때의 한 번을 제외하면, 쿠는 나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특히 세실과 카인을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출항한다!”

“은월호! 출항합니다!”

벨락의 외침에 선원들이 크게 답했다.

끼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뱃전에 우뚝 선 쿠의 머리카락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이어 배가 동굴을 빠져나가는 순간, 눈부신 빛이 배를 휘감았다.

“이게 바로 진짜 배야.”

쿠의 얼굴이 정면을 바라봤다. 그는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쿠의 우렁찬 외침이 바닷물을 가르듯 울려 퍼졌다.

“돛을 내려라!”

거대한 은빛 천이 펼쳐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바람이 불어와 팽팽하게 돛을 밀어냈다. 배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머리 위를 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빛을 내는 새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새들이 날개를 움직일 때마다 흰 가루가 허공에 흩어졌다.

휘이이익!

쿠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흰 새들이 하강해 배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새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났다. 흰 새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며 하늘을 가르는 물결을 만들었다. 마치 날개처럼.

새의 빛이 변해갔다. 몸도, 날개도, 허공에 뿌려지던 흰 가루도 모두 은빛으로 빛났다. 이내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은빛의 돛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자신의 색을 주위에 물들이고 있었다.

“은빛의 날개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세실도, 카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바람을 가르는 거대한 은빛의 날개를 바라봤다.

쿠의 말이 맞았다.

배는 하늘을 날지 못한다.

그렇지만 은월호는,

바다를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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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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