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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49. 거지남매 – 연극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쾌청한 주말, 소이린이 허둥지둥 뛰어내려왔다. 그녀의 오렌지빛 머릿결이 찰랑거렸다.

패밀리 저택 정문에서 기다리던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저도 막 내려왔어요. 갈까요?”

그는 소이린과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동생이 아프다는 핑계로 데이트를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레나의 상태는 많이 호전됐고, 그저께 레나가 부스럭부스럭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소이린이 봐 버렸다.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라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그는 옷을 단정히 차려입었다.

소이린은 방긋 웃었다.

늘 꽉 묶었던 머리를 늘어뜨리고 연지를 바른 그녀의 미소는 화사했으나, 어디선가 수심이 묻어 나왔다.

두 사람은 마차를 잡아타고 오르빌 동쪽에 위치한 ‘아릴레이 극장’을 향했다.

“저는 연극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극장에 다녀온 이후로요.”

마차에서 소이린이 말했다.

“근사한 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님을 어찌나 귀찮게 했는지, 결국 아버지께서 절 극단에 데려다주셨어요.”

레오는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평소에는 적당히 흘려넘기곤 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극단에 들어간 저는 기뻤죠. 그런데 웬걸, 극단에서 제게 맡기는 건 볼품없는 배역뿐이었어요. 대사도 없는 다섯 번째 시녀 같은… 하다못해 강가에서 손빨래하며 여주인공의 험담을 늘어놓는 아주머니 역이라도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많이 힘들었겠네요.”

소이린은 그의 대꾸가 생경했는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전 금방 포기했거든요. 연기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아무나 세워두기만 하면 되는 배역을 맡기고… 당시에는 우습게도 부모님을 원망했어요. 내가 더 예쁘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요. 그러면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을 거라 생각했었죠.”

“믿기 어렵네요. 이렇게 예쁘신데… 어느 극단인지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빈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녀는 찡긋 윙크하곤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제 노력이나 열정의 문제도 아니었죠. 저는 점점 연극 자체에 관심을 두지 못했어요. 저에게 좋은 배역이 떨어지기만을 바랐죠.”

“……”

“그때는 왜 그랬는지… 지금은 괜찮아요. 좋은 경험이었고, 이렇게 연극을 즐기러 오는 손님으로 만족해요. 아! 도착했네요.”

마차가 극장 앞에서 멈췄다.

레오는 재빨리 내려 소이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기쁘게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렸고, 두 사람은 극장에 들어가 앉았다.

연극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평민들을 위한 극장이니만큼 연극에 사용된 소품들은 하나같이 조악했고, 배우들의 잔 실수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몇몇 주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아카이아 왕국을 세운 인류 최초의 왕, ‘토들러 아키우넨’ 역을 맡은 배우는 제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그는 위풍당당했고, 목소리는 정의로웠다.

그의 적수로 등장한 마왕의 연출도 놀라우리만치 빼어났다.

무수히 많은 깃발을 활용해 장면을 전환한다든지, 마왕의 어마무시한 힘을 강조하기 위해 객석 중간중간에 앉아있던 연기자들이 벌떡 일어나 합창할 때는 옅은 전율이 흘렀다.

소이린은 깜짝 놀라서 옆에 앉은 레오의 손을 엉겁결에 붙들기도 했다.

극장 앞에서 홍보하는 소년에게 받은 팜플랫을 읽어보니, 이건 모두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다고 적혀 있었다.

위대한 왕이자 최초의 소드마스터, 토들러 아키우넨이 인간을 위해 이종족들을 물리치고 악을 멸했다는 전설이었다.

물론, 아카이아 제국의 정통성을 짙게 물려받은 벨리타 왕국은 이를 전설이 아닌 역사로 받아들였다.

레오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연극을 감상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배우가 있었다. 아니, 배우라 칭하기도 어려운 역할을 맡은 사람이었다.

성별을 알아볼 수 없는 그 배우는 마왕의 졸개를 연기하는지 볼품없는 까만 포대기(포대기라는 표현 외에는 이걸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를 뒤집어쓴 채 팔다리를 한껏 휘저으며 열연을 펼쳤다.

레오는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배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다.

그, 혹은 그녀가 몸을 웅크려 토들러 아키우넨으로부터 숨는 척했을 때는 조마조마했고, 마왕의 명을 받아 우르르 달려나갈 때는 저놈의 포대기 때문에 발이라도 엉켜 넘어질까 안달이 났다.

그의 연기에 진심이 묻어있었기 때문일까? 이 느낌은 마치…

“와! 저것 좀 보세요. 위에요!”

그때, 소이린이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무대 위, 천장에서 새하얀 태양이(솜을 채워 넣은 이불이 틀림없는)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주신의 등장이다.

만약 여기에 신학을 배운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 장면에서 틀림없이 딴지를 걸었을 터였다.

십자교회는 토들러 아키우넨이 주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묘한 일이었다.

토들러 아키우넨은 모두에게 추앙받는 영웅이었으므로 그의 영광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주장해서 나쁠 게 없을 것인데도.

신학을 모르는, 그리고 솜으로 만든 태양에 관심이 없던 레오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눈길을 끌던 배우를 찾았다.

한데 그 졸개는 주신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마왕만 살아남아 절규했고, 토들러 아키우넨이 그의 가슴에 빛나는 검(평범한 검이었으나, 뒷배경에 번쩍번쩍 빛나는 검이 그려진 깃발이 있었다.)을 꽂아 넣었다.

그와 함께 종막이 내렸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아, ‘레이시아’가 등장할 때는 어찌나 아름답던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소이린은 흥분했는지 한동안 연극에 대해 떠들다가 점차 차분히 가라앉았다. 터벅터벅, 레오와 소이린의 걸음이 엇박으로 갈렸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근처에 식당이…”

“아니요. 전 괜찮아요.”

소이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레오.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저도 그래요. 연극이 이렇게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자박자박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러다가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면서 나란히 걷던 레오와 소이린이 서로 바짝 붙었다.

어쩐지 더 어색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소이린의 생각은 달랐는지 레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있잖아요. 실은… 당신이 저한테 관심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

“그리고 아직 축하드린다는 말씀도 못 드렸네요. 축하드려요. 어제 레나한테 들었어요. 후작가의 양자로 들어가신다면서요?”

답변을 바라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레오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오늘 연극을 보러 온 까닭은 인연을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다.

소이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레오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또 그럴 상황도 아니어서 늘 귀찮게 생각했었다.

누군가의 호감을 받는 건 보통은 기쁜 일이지만, 때로는 성가신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레오는 그녀를 멀리했고, 다른 가족들에게 그러했듯이 소이린에게도 자신이 후작가로 떠나게 됐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면 말없이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베르와 레나가 가족들과 이별하며 보이는 태도가 그를 움직였다.

그들은 진심을 담아 아쉬움을 표현했고, 그간 털어놓지 못했던 속내를 보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확실히 그건 가슴 먹먹하게 따뜻한 이별이었다.

해서 레오도 비록 밋밋하더라도 소이린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짝사랑이 말없이 끝나버리지 않도록.

소이린과 레오는 오래 걸었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갔던 길을 걸어 돌아왔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는 레오 타티안 님이라 불러야겠네요.”

“그냥 레오라 불러주세요.”

“에이~ 그랬다가는 곤장을 맞을 텐데요? 귀족 나으리들은…”

소이린은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난 듯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귀족을 놀리는 짓궂은 장난을 쳤고, 레오는 짐짓 모욕받아 분노한 귀족을 연기해줬다.

소이린은 깔깔 웃었다.

레오도 빙그레,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패밀리 저택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종종 꽃집에 들르겠노라.’라는 약속을 제외하면 구차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 * *

며칠 뒤, 레오는 후작의 저택을 찾았다. 제법 오랜만에 다른 귀족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최근 후작은 자신이 아는 귀족들은 다 소개해줬는지 지난주에는 남매를 부르지 않았다. 마침 그즈음부터 레나가 아프기 시작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한데 오늘은 다른 귀족들을 만나는 날이고 레나는 쾌유했지만, 레오는 그녀를 데려오지 않았다.

몸살이 겨우 나은 애한테 어깨와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서히, 레오가 되어가고 있었다.

레오는 괜찮다는 동생을 억지로 침대에 눕혀놓고 약속 시각보다 훨씬 이르게 후작가를 향했다.

레나가 못 오는 것을 후작에게 알려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야 다른 귀족들한테 후작이 적당히 둘러대지.’

자칫하면 그의 아들이 ‘또’ 말을 안 듣는다는 인상을 남길 수가 있었다. 그건 후작의 자존심을 건들지도 모르는 일이어서 미리 양해를 구해둬야 했다.

레오는 익숙하게 대문 앞에 섰고, 집사가 나왔다.

“어, 어서오십시오.”

“음? 무슨 일이 있나요?”

집사의 행동이 이상했다. 겉보기로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는 평소와 달리 대문 계단 ‘중간에서’ 인사를 건넸다.

“아니요. 약속하신 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하셔서… 그런데 영애께선 어디 계십니까?”

“레나가 아파서 오늘은 저 혼자 왔습니다. 후작님께 미리 양해를 드리고 싶네요.”

“…그렇군요. 들어오시죠.”

레오는 의아해져서 짝눈을 떴다.

‘이게 이렇게 당황할 일인가?’

그는 몇 달 동안 이 집사를 만났음에도 이처럼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별다른 것은 아니었으나 마치 기계처럼 동일한 행동만을 보였던 그가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레오는 의아해하며 안으로 들어서려 하는데, 멀리 저택 정문에 서 있는 여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일전에 레오가 토턴 타티안을 암살하려 할 때 마차 문을 걸어 잠가서 훼방을 놓았던 그 여기사였다.

이렌느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항상 레오를 피하는 모습을 보여 왔는데, 지금 그녀는 멀리서도 알아볼 정도로 흥분해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이렌느의 이글거리는 눈을 본 순간, 레오는 손을 저으며 그를 안으로 안내하려던 집사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너무 일찍 왔으니 후작님께 동생이 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씀만 전해주세요. 저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오겠습니다.”

적당히 둘러댄 그는 집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성급히 몸을 돌렸다.

불길하다.

‘쟤가 날 왜 저렇게 쳐다보지? 집사도 뭔가 이상하고…’

레오는 일단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가 타고 온 마차는 이미 가버리고 없어서 레오는 다른 마차를 잡기 위해 걸음을 서두르는데, 누군가 그를 뒤에서 불러세웠다.

“레오 님. 어디 가십니까?”

돌아보니 전에 레나와 함께 만났던 게스타브 페테르 백작이었다.

그는 막 도착한 자신의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첫인상은 검소한 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의 마차도 주인을 닮았는지 장식 하나 없이 단출했다.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도 모두 흑마였다.

페테르 백작도 후작에게 용무가 있어 찾아온 모양이다.

레오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집사와 어느샌가 대문 철창 뒤로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는 이렌느를 경계하며 말했다.

“아. 백작님, 오랜만에 뵙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럼 저는 이만.”

그는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등을 돌렸다.

그러자,

“왕자님. 또 도망가십니까?”

레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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