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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50화 달빛의 공주

50화 달빛의 공주

밤의 바다는 고요했다.

배에 부딪는 파도 소리만이 아련하게 귓가를 스쳤다. 검푸른 바다 위로 수많은 은빛 조각이 서로 부딪치며 합쳐지고, 다시 갈라졌다.

우리는 갑판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흰 새들은 모두 사라졌다. 한 마리만을 남기고.

남아있는 하나의 새는 뱃머리 위의 높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날갯짓할 때마다 뿌려지는 빛의 가루는 꿈결처럼 반짝이는 별빛이었다.

“여기들 있었구나. 피곤하지 않은 거야?”

쿠가 물었지만, 왜인지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난생처음 배를 타고 광활한 바다 위를 떠가는 신비한 경험 탓인지도 몰랐다.

“쿠. 새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쿠가 웃으며 우리 곁에 앉았다.

그의 눈길이 하늘 위의 새를 바라봤다.

“흰 새들은 우리가 깊은 바다에 들어설 때까지만 배의 모습을 감춰주는 거야. 배의 존재와 우리들의 존재, 그리고 지금 우리가 향하는 곳을 아스트레아 대륙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거든. 알아서도 안 되고.”

“어디로 가는 거예요?”

쿠가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뒤이은 말은 없었지만 어렴풋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가 보면 알아. 가 보면. 하하하.

“쿠. 이름.”

세실의 물음에, 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맞아. 내 이름은 쿠훌린이야. ‘쿠’는 친구가 지어준 별명이지. 좋은 녀석이었어. 그리고 엄청나게 강했지.”

별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그럼 우리도 앞으로 쿠훌린이라고 불러야 해요?”

“하하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쿠가 편하다면 지금처럼 쿠라고 부르면 된다.”

쿠훌린이 평소의 씩씩한 얼굴로 돌아왔다.

“새 한 마리가 남아 있는 이유는 뭐예요?”

“항로를 알려주는 거야. 이 근처는 강한 결계로 묶여 있거든.”

“결계요?”

“그래. 결계에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휘몰아치는 폭풍에 바닷속으로 수장되고 말아. 저 새는 우리에게 결계의 틈새를 안내해 주는 거야. 틈새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기 때문에 흰 새의 도움 없이는 우리도 이쪽 바다를 항해할 수 없어.”

“아스트레아 대륙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에요?”

꼭 대답을 듣고 싶은 질문이었다.

소설대로라면 쿠훌린은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에 살해당한다. 그뿐만 아니라, ‘은월’의 모든 단원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아마 엘리샤와 라이칸도.’

그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는 네몬이 범인일 거로 예상했다.

물론 네몬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겠지.

가장 설득력 높았던 가설은 감마와 델타가 모종의 이유로 네몬에게 협력했으리라는 것이었다.

“글쎄.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킨 쿠훌린이 우리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도록 해라. 도착하면 한동안 정신이 없을 거야.”

나는 멀어지는 쿠훌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와 함께한 새로운 여정은 끝나가고 있다. 어떤 곳일까. 쿠가 우리를 데려가려는 곳은.

밤하늘로 눈을 돌렸다. 흰 새의 날개에서 뿌려지는 빛의 가루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며 다짐했다. 이 세계에서 쿠훌린 아르테미스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

“아버지!”

세실과 비슷한 체구의 소년이 하얀 모래 위를 달려왔다. 짧은 흑발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벨락의 어릴 적 모습이 꼭 저렇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게 하는 소년이었다.

은월호는 육지에 당도했다.

쿠훌린은 이곳을 ‘은월섬’이라고 불렀다.

“어엇, 이 녀석. 언제부터 와있던 거냐.”

벨락이 소년을 안아 올렸다. 신나는 얼굴로 깔깔대던 소년은 바닥에 내려서기 무섭게 쿠훌린에게 달려갔다.

“영광이에요! 쿠훌린!”

소년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저 소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훗날 루나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는 ‘트리스탄 헤카테’.

벨락의 아들이었구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아버지를 쏙 빼다 박았어. 와하하하!”

쿠훌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어 우리를 눈짓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나는 트리스탄! 트리스탄 헤카테야!”

“카인이다.”

“세실.”

카인과 세실은 성씨를 밝히지 않았다.

당연히 밝히기 어렵겠지. 특히 세실은 더욱.

“데미안 라플라스야.”

이렇게 말하며, 나는 오랜만에 나의 성씨를 남에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성씨를 알린 것은 세실을 처음 만났을 때뿐이었다.

‘난 데미안. 데미안 라플라스.’

‘데미안. 라플라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조금 소름이 돋았다. 그날 나는 세실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묘한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벨락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쿠훌린이 툭, 어깨를 치자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트리스탄은 아버지와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달려왔는데, 우리 꼬마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거야 원. 부럽군 벨락! 하하하하!”

“아마 나보다는 자네가 보고 싶어서 왔을 거야.”

쿠훌린은 트리스탄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앞장서 걸었다. 그 뒤를 벨락이, 그리고 은월호의 선원들이 따랐다.

트리스탄은 신이 난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넘치는 기운을 스스로도 주체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아주 잠시 족제비를 떠올렸다.

‘활쏘기 연습 열심히 하고 있으려나.’

완만한 언덕을 넘자, 저 멀리 마을의 전경이 보였다. 유려하게 굽어진 강이 마을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뒤편에는 아담한 크기의 성도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은빛의 깃발이 여기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마을 입구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쿠훌린의 눈이 빠르게 그들을 훑었다.

“리아논!”

쿠훌린이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은백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환히 웃으며 걸어 나왔다. 그 옆에는 그녀와 같은 머리색을 가진, 커다란 하늘빛 눈망울의 소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아이는 누구지?

나는 소녀에게 통찰을 발현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섬의 사람들을 엿보는 것이 꺼려졌다. 특히 쿠훌린 앞에서는.

쿠훌린이 리아논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자그만 소녀를 안아 올렸다. 쿠훌린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작은 공주가 많이 자랐구나. 그런데 큰 공주가 보이지 않는데?”

품에 안긴 소녀와 리아논을 번갈아 보며 쿠훌린이 물었다.

리아논이 어색하게 미소 짓자, 소녀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답했다. 구슬이 구르는 듯한 맑은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는 달빛나무 언덕으로 달려갔어요.”

쿠훌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 큰 공주는 여전하구나. 하하하!”

이럴 수가.

저 아이는 루나의 여동생이었다.

놀라웠다. 나는 루나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까.

쿠훌린이 소녀를 안은 채 마을로 들어갔다. 곧, 칼날처럼 매서운 눈빛을 가진 늙수그레한 여자가 쿠훌린에게 다가섰다.

“오랜만입니다. 단장.”

“오랜만입니다. 스카자하.”

쿠훌린의 어투에는 평소와 다른 정중함이 묻어 있었다.

“긴 여행에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시지요. 내일 성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여자가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쿠훌린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 싫은 일을 앞둔 게으른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데미안. 세실. 카인. 따라오너라.”

순간 나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눈을 몇 번 크게 깜빡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다시 정면으로 얼굴을 돌렸다.

머지않아 우리는 성에 다다랐다.

마법처럼 은빛으로 빛나는 성이었다.

쿠훌린이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친구들과 함께 달빛나무 언덕에 다녀오너라. 아버지도 함께 가서 큰 공주를 보고 싶지만 어머니와 할 이야기가 있거든. 그리해 줄 수 있지?”

소녀가 쿠훌린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는 길에 인사 나누도록 하고.”

재차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우리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다시 몇 차례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커다란 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속삭이듯 소녀가 말했다.

“가자.”

.

.

.

“내 이름은 데미안이야.”

“세실.”

“카인이다.”

마을을 벗어나 들판을 걷던 우리는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디네베.”

소녀와 함께 걸으며, 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이 조그만 소녀 때문은 아니었다.

이 소녀를 따라 달빛나무 언덕이라는 곳에 가면, 루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루나를 직접 만나는 날이 오다니.’

루나는 웹소설 무한회귀의 공식 히로인이다.

물론 성격이 많이 까칠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늘 올바른 길만을 걸었던 고결한 검사(劍士).

나는 세실의 옆얼굴을 흘끗 돌아봤다. 남자인 세실도 저렇게 예쁜데 루나는 어느 정도일까.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는 소설에서 묘사된 루나의 생김새를 떠올렸다. 귀밑에서 찰랑이는 은빛 머리카락. 무심하지만, 그 안에 별을 품은 것처럼 빛나는 레몬빛 눈동자. 살짝 짧은 듯하면서도 오뚝하게 솟은 코. 도톰한 복숭앗빛 입술.

‘체구가 큰 편은 아니었지. 그래서 단발머리와 잘 어울린다는 표현도 있었고.’

달빛나무 언덕으로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그렇지만 루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 언덕을 올라가면 돼.”

디네베의 말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왜 이곳이 달빛나무 언덕이라고 불리는 거지? 드문드문 보이는 나뭇잎도, 바닥의 풀잎도, 모두 평범한 초록빛인데.

조금씩 기울던 해는 언덕을 오르는 동안 자취를 감췄다. 동쪽 산마루에서 떨어져 나온 달빛이 은은히 공기를 밝혔다. 그러던 중 사락, 나의 콧등에 무언가 내려앉았다.

‘응?’

은빛의 잎새였다. 이런 색의 잎이 있었나 생각하는데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잎새가 떨어져 내렸다.

은빛의 잎새는 이제 눈꽃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그 너머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정상에 솟아오른 모습이 보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나무. 기둥도, 가지도, 잎새도 모두 은빛이다. 떠오르는 달빛을 머금기 시작한 나무는 점점 더 밝게 빛났다.

그 아래로 무언가 보였다.

사라락.

가느다란 은(銀)의 실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소녀가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빛 머리카락의 소녀. 소녀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은은한 광채가 감도는 두 손은 살포시 가슴에 얹은 채였다.

바람이 일며 수백의 잎새가 희게 흩날렸다. 소녀의 등 뒤에서 나풀거리던 은빛 머리카락도 중력을 거스르며 휘말려 올라갔다. 나는 홀린 듯이 소녀를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발을 멈추고, 두 눈을 의심했다.

[아스트레아의 천칭이 크게 기울어집니다.]

소녀는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태곳적부터 이어진 오랜 꿈속에서 깨어나려는 달빛의 공주 같았다. 디네베의 발소리가 들렸는지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소설에서의 표현처럼, 별을 품은 듯한 레몬빛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달빛의 소녀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으며 디네베에게 미소했다. 매끈한 목덜미 위에서 달싹이는 입술은 싱그러운 복숭앗빛이었다.

우리를 돌아본 소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중력을 회복하지 못한 은빛 머리카락이 그림처럼 흔들거렸다. 나의 눈도 흔들렸다. 내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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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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