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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3

EP.502 19. 아테레나 노천극장의 시험 (8)

한트케 교수는 탁자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펼쳐 놓은 편지들을 날짜순으로 차곡차곡 상자 안에 채워 넣었다. 그런데 마지막 편지를 집는 순간, 그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하나를 놓친 기분이었다. 미심쩍은 생각이 든 그는 상자 안에 넣으려던 마지막 편지를 다시 펼쳤다.

편지는 아까 읽었던 그대로였다. 크리스티앙이 누군가의 이름을 붙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신경이 쓰인 것은 바로 그녀가 지었다는 그 이름이었다. 그것을 읽은 한트케 교수는 그 이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은 지 15년 가까이 지났는데……. 그만큼 자신이 이 기억을 깊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이 이름을 본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신문이었던가 잡지였던가? 분명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여기에 뭔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기억을 거칠게 헤집던 그는 어느 순간 머리통 안쪽을 간질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 그가 영감을 받을 때 오는 신호였다! 답은 가까이 있었다! 흥분한 그가 막 뭔가를 떠올리려는 순간, 방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랄프입니다.”

“망할 키르쿠스! 이런 구닥다리 연출가 같으니! 하필 이 타이밍에?”

한트케는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3초, 아니, 1초만 더 있었어도 기억이 떠올랐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분명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했는데? 별일 아니기만 해 봐라. 이틀 밤낮 잠도 안 재우고 자료 정리를 시킬 테다!’

그는 심호흡해 흥분을 가라앉힌 뒤, 제자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래. 무슨 일인가, 랄프 군.”

“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교수님…….”

스승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랄프는 방금 방안에서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에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한트케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네. 응? 프란츠 군이 같이 있지 않군. 어디 갔나?”

“아, 저기 그게…… 프란츠는 지금 응접실에서 손님들과 있습니다.”

“손님들?”

스승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랄프는 놀라서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교수님을 꼭 만나 뵙고 싶어 하는 분들이라서요……. 아니, 그게 사정을 들어보니 또 딱하더라고요……. 긴 무명 생활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길을 걷는 모습? 그런 게 우리랑 통하는 면이 있다고나 할까……. 연기에 대한 열정도 커 보이고……. 하도 계속 매달리길래 어쩔 수 없이…….”

랄프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주춤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스승이 눈빛을 한 번 번뜩일 때마다 그의 어깨는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한트케 교수는 그런 그를 보며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만하면 됐네. 손님들 용건이나 말해보게. 어제 그렇게나 욕을 먹었는데도 또 손님을 데려온 것을 보면 분명 중요한 용건이겠지?”

“어, 저기, 그, 그게…….”

랄프는 스승의 표정을 살피며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한트케는 그런 제자가 답답했는지 버럭 소리쳤다.

“어서 말하라니까!”

“저…… 그, 그러니까…… 아, 알겠습니다. 말할게요. 그게…… 서커스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측에서 교수님을 연출가로 섭외하고 싶다고…….”

랄프가 예상한 대로 한트케 교수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몇 칸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원더스타인 일행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행들에게 음료를 따라주던 프란츠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 한트케 교수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교수의 언성이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 천장에 앉은 먼지가 떨어져 내릴 정도로 폭언이 연이어 쏟아졌다.

“여전하시군.”

도스빌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학생 시절 한트케 교수의 강의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신사답게 절도 있는 태도를 보이는 그였지만 조금이라도 심사가 뒤틀리면 저렇게 호통을 쳐댔다.

“이 머저리 자식들아! 내가 왜 너희를 다른 연구실에 추천 안 했는지 알아? 가서 또 바보짓이나 할 것 같아서야! 내가 너희들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지? 이 자식들아, 너희들 인맥이 얼마나 넓길래 시내에 있는 결혼식장마다 나타나는 거냐? 설마 하객으로 위장해서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냐?”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잠시 후, 응접실의 한쪽 문이 열리며 잔뜩 풀이 죽은 두 사람과 함께 한트케 교수가 나왔다.

그는 게임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고 마른 체형에 모히칸 형태의 곱슬머리, 그리고 고집스럽게 튀어나온 턱과 딱 턱 끝에 자란 짧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용건은 들었습니다. 연출가가 필요하다면서요?”

“네. 반갑습니다. 저는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인…….”

원더스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개하려 했다. 그러나 한트케 교수는 그전에 바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저는 지금 남의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제안은 안타깝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자들이 뭘 모르고 당신을 안내해준 것 같군요.”

인사를 잘라먹고 자기 할 말만 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도스빌 남작이 민망한 듯 입맛을 다셨고, 니카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클라라만이 울컥해서 그에게 따지려고 했다. 그러나 원더스타인이 재빨리 그녀를 제지했다.

여기서 괜히 그와 다퉈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그의 성질머리는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한트케는 게임에서도 주인공들을 마구 갈구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다가도 주인공들을 상당히 헌신적으로 돕기도 했다. 혹시나 이대로 깨끗이 물러나면 자기 말고 괜찮은 연출가라도 소개해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교수님의 시간을 뺏고 말았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죠. 저희도 일이 급해서요. ”

원더스타인이 웃으며 넘어가자 당황한 건 오히려 한트케 교수였다. 보통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자신의 명성 때문에 말을 못 할 뿐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 만난 지몬이라는 남자도 그랬다.

그런데 그는 조금의 싫은 티도 내지 않았다. 한트케 교수는 머쓱한 기분에 괜히 헛기침했다.

“크, 크흠, 잠시만!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근처에 일이 없는 연출가가 있으면 소개라도 해드리고 싶군요.”

기대했던 답변이 나오자 원더스타인은 반가움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 원더스타인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어쨌든 죄송하게 됐습니다. 들어오는 소식이 있으면 전해드리죠, 원더스타인 단장님.”

손님들을 떠나보낸 한트케는 제자들에게 그가 아는 연출가들의 연락처를 던져주고 안부 전보를 날려 보라고 명령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다시 혼자 있게 된 그는 소파에 앉아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아까 읽던 마지막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사색에 빠져 봐도 뭔가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영감이란 원래 한순간의 번뜩임으로 내려오는 법이었다. 1초만 더 있었으면 답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는 건 자신의 착각일 가능성도 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편지를 상자 속에 넣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강렬한 전류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 그는 넣으려던 편지를 재빨리 다시 펼쳤다.

오늘만 3번째 읽는 이 편지. 그는 거기서 제일 아래에 있는 문장을 바라봤다.

‘그 이름은 바로 프랑크 원더스타인이랍니다!’

프랑크 원더스타인. 그것은 바로 방금 자신의 명함을 남기고 간 괴물서커스단의 단장 아닌가!

한트케는 그제야 그의 이름을 어디서 읽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남긴 ‘환상의 13번’이 발견되었다는 소식 때문에 한창 시끄러웠을 때 기사에서 봤던 이름이었다.

크리스티앙-그녀가 지어준 이름-환상의 13번-서커스 그랑프리……. 얼기설기 엮여 있던 끈들이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모였다.

프랑크 원더스타인! 회색빛 조형물로 가득 찬 그의 머릿속에서 색이 번져 나갔다.

***

원더스타인이 도스빌, 니카, 클라라를 데리고 연출가를 섭외하러 간 사이, 엘라는 나머지 단원들과 랫맨들을 이끌고 마당에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울펜슈타인 백작>의 연습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6대 극장 중 하나인 크리스티앙 기념관은 엘라의 고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에 있었다. 그곳은 연중무휴로 크리스티앙의 12개 극본들을 원본으로 상연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의 작품은 깊게 숙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대를 직접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물론 크리스티앙의 무대는 이전에도 학교 친구들끼리 몇 번 만들어 본 적 있었다. 그러나 10대 아이들 학예회 수준의 무대를 서커스 그랑프리에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그 황금 카니발과 바퀴의 서커스인데 말이다.

당장 연습을 위한 공간은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노천극장에서 연출할 무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시간은 너무 촉박했고 할 일은 너무 많은데 그녀의 몸은 하나였다.

“이반 씨, 조명을 분필로 X자 쳐둔 구역에 두라고 했잖아요. 뭐요? X자가 없었다고요? 슈슈, 내가 지시한 곳에 모두 안 그렸어? Y자? 그건 환상을 띄울 위치고! 잠깐, 조명은 또 왜 확산식 조명이야? X 옆에 숫자를 봐! 1이 확산 조명이고 2는 직선 조명! 나타샤 씨, 시종들 복장 디자인은? 아냐, 이건 아냐. 시종들이 등장하는 배경을 설명하지 않았어? 안 했나? 색이 묻으면 확 티가 나는 흰색 상의에…… 아니, 잠깐! 거기 멈춰! 크레인을 왜 거기다 배치하는 건데? 거긴 3막 무대에 쓸 장소란 말이야! 크레인 활용은 2막 무대지! 그리고 나중에 병사들 등장 경로에 방해 안 되게 무대 뒤 11시 방향에 배치해! 그리고 여기는 문이 반대로 설치됐잖아? 문을 박차고 백작이 들어오는 장면인데 안으로 열리게 해두면 어떡해? 그리고 문에 페인트칠 다시 해! 색은 맞는데 광택제를 안 발랐어! 그리고 또…….”

사방에서 쏟아지는 일거리에 엘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모든 걸 그녀가 기획하고, 명령하고, 감독하려니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뇌와 눈과 입이 각자 다른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다 일이 꼬이는 경우도 잦았다.

그녀는 그만 비명을 질며 뒤로 드러눕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시험까지 38일이나 남았는데 벌써 지친 티를 닐 없는 노릇이었다.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신이 처리해야 했다.

그때, 그녀의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남자가 숙소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못 본 척하다가 그가 가까이 오자 일부러 비틀거리는 척했다.

그러자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의 몸을 받쳐주었다. 엘라는 평소처럼 뾰로통한 말투로 그를 대하며 그의 손길을 쳐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몰래 만족감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남들 다 있는 장소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실수였다. 너무 일에 치여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깜빡하고 말았다.

우몬과 미키는 자신들끼리 쑥덕거리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고, 마야와 레이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엘라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내 몸은 걱정하지 마. 예전처럼 쓰러져서 민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잘 안 됐습니다. 보니까 그 교수님은 황금 카니발의 제의도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그래?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도스빌의 다른 인맥들은?”

“모두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모르지. 단순히 우리 서커스단에 들어오기 싫어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예전에 알렌과 조가 그랬듯이.”

“그래도 다행히 한트케 교수님이 다른 연출가를 소개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명성 있는 분의 중개니 어쩌면 당장 내일이라도 좋은 소식이…….”

그때, 숙소 앞에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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