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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9

EP.508 19. 아테레나 노천극장의 시험 (14)

울펜슈타인 백작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열성적이지만, 그 외의 일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놔두면 그녀는 밥을 굶는 건 기본이고 씻지도 않고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다니곤 했다.

극 중에서 집사가 백작의 목욕 시중을 드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이면 몰라도 극 중의 백작은 성인이었다. 그런데도 일과표에 목욕 시중이 있는 것은 원더스타인에게 어린 백작을 키워오는 과정을 겪게 함으로써 몰입감을 높이려는 한트케 교수의 전략으로 보였다.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침대에서 기어 나오는 엘라는 평소의 그녀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언제나 활발하고 성실한 그녀가 이렇게 늦장을 피우는 꼴은 처음 봤다.

“씻기 전에 우선 간단히 아침이라도 드시죠. 제가 주방에 부탁해서 빵과 음료를 챙겨왔습니다.”

“귀찮아.”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했다. 얼굴에 피로에 찌든 기색이 완연한 것이 정말 밤새 책이라도 읽은 것 같았다.

“밥을 안 챙겨 먹으면 점점 건강이 나빠질 겁니다. 세상에나! 제가 세계 최고의 의사에게 이런 조언을 해야 합니까?”

원더스타인은 기가 막혀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머리로 생각해서 말을 하는 게 아닌 가슴에서 말이 알아서 솟구쳐 나오는 것은. 배역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다 보니 순간적으로 그 인물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엘라는 늘 듣는 잔소리가 지겹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침대맡에 등을 기대고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떠먹여 주든가.”

“정말 곤란한 분이군요.”

원더스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의자를 끌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빵을 작게 찢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아파서 몸을 못 가눌 지경이라고 해도 이런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울펜슈타인 백작이었다. 엘라로서 하지 않을 행동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 변명하며 그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때로는 일부러 그의 손가락을 깨물거나 핥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울펜슈타인 백작의 캐릭터와 아무런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고양이를 키운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녀가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삼키는 것을 확인한 원더스타인은 씻기 싫다고 칭얼대는 그녀를 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 안의 물을 데우는 동안 그는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발을 씻겨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발을 주무를 때마다 그녀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렸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질색했을 테지만 지금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엘라가 아닌 울펜슈타인 백작이었으니까. 그리고 설정상 집사는 어릴 때부터 그를 돌봐준 큰 오빠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발을 씻기고 머리를 감기고 양치까지 시켜줬다. 정말로 고양이를 기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갈아입을 가운과 수건을 두고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일어섰다.

“어, 그냥 나가는 거야?”

그에게 질문한 사람은 울펜슈타인 백작이 아닌 엘라였다. 그녀의 연기가 뛰어난 덕분에 원더스타인은 그 둘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도 그녀에게 맞춰 잠시 단장으로 돌아와 말했다.

“어제 바텔 씨에게 목욕 시중은 어떻게 드는지 여쭤봤습니다. 주종 관계라도 해도 남녀 사이니까요. 바텔 씨께서 대본을 꼼꼼하게 읽어 보시더니 딱 여기까지 하고 나가라고 하시더군요. 백작과 집사의 관계로 봤을 때, 적절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쓰, 쓸데없는 짓을…… 아, 아니, 잘했어…….”

“그럼 편안한 목욕 되시길.”

집사는 그녀의 욕탕에 고형 입욕제를 넣고 이만 물러났다. 욕탕 안에서 입욕제가 녹으면서 향기로운 거품이 올라왔다.

엘라는 원더스타인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를 몸종처럼 부려먹지 못해서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유리병을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어제 나타샤에게 부탁해서 빌려온 몸에 바르는 아로마 오일이었다.

바닥에 나체로 누운 채 이걸 발라 달라고 할 계획이었는데…….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다시 찬장에 넣었다.

목욕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외출을 준비했다. 의상실을 통해 백작의 외출복을 불러오려 했던 원더스타인은 곧 그녀의 구박을 듣고 직접 옷을 입혀주었다.

“뭐야, 여자 옷을 왜 이렇게 잘 다뤄? 코르셋 잠금쇠 위치는 어떻게 안 거야?”

주인의 질문에 집사의 손이 멈칫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하게 유라크네와 아나이스의 속옷을 교보재로 썼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엘라는 그가 보인 순간의 동요를 알아채고 그를 돌아봤다. 원더스타인은 뻔뻔하게 웃으며 집사의 대표적인 대사 중 하나를 외쳤다.

“울펜슈타인 백작의 집사 된 자, 이 정도도 못 해서야 되겠습니까?”

“……흥. 저질.”

엘라는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한 번 지어 보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더스타인은 백작이 저런 눈빛과 대사를 던지는 캐릭터였던가 고민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숙소를 나가는 길에 그들은 다른 단원들이 한창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 중 몇은 자신들처럼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고, 몇은 한트케 교수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 주로 우등생과 열등생이 한 조가 되었다. 원더스타인이 엘라의 연기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집사 시그왈트’ 역에 몰입할 수 있었듯이, 우등생에 속하는 레이나, 스벤, 미노바, 니카가 유라크네, 루엘로, 마야, 트라이머리와 짝을 지어 상대방의 몰입도를 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한트케 교수로부터 직접 훈련을 받는 사람은 알렌, 조, 우몬 세 사람이었다. 그들이 이번 연극에서 맡은 역할은 각각 정원사와 경호원, 기사였다. 우연히도 그들 서커스단에는 해당 직업 출신이 셋이나 있었다. 각각 가스통, 칼슨, 이반이 선생이 되어 그들에게 해당 직업의 기초적인 몸가짐을 가르쳤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이런 훈련이 과연 도움이 될까 긴가민가했던 원더스타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훈련을 시작한 지 불과 4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일주일 동안 대본을 달달 외었을 때보다 느끼는 게 훨씬 많았다. 이 훈련을 계속 이어간다면 분명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엘라는 평소처럼 앞으로의 일정에 떠들어대지 않았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도 오로지 챙겨온 책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원더스타인은 눈앞의 소녀가 자신이 알던 그 엘라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안경을 쓰고 있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무심한 눈빛이나 무뚝뚝한 표정, 냉소적인 혼잣말 등은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도 엘라는 자신의 배역에 충실했다. 가게 앞에서 점원이 인사를 건넸을 때, 평소의 그녀였다면 반갑게 받아줬겠지만, 오늘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악의 없이 무례를 저지르는 그녀의 모습은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극 중 모습 그대로였다.

백작은 주변 눈치라는 것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그녀는 다른 사람과 부딪치거나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지나가는 일은 예사였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읽던 책을 뺏어서 읽기도 했다.

“이 무슨…….”

“죄송합니다. 저희 주인님께서 무례를 저질렀군요.”

그때마다 원더스타인은 그녀 대신 나서서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귀족 소녀와 그녀를 따라다니며 뒷수습을 하는 말쑥한 차림새의 젊은 남자. 그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사정을 전달하는 힘이 있었다.

“쯧쯧, 고생이 많구려.”

“됐소. 어쨌든 이곳을 찾는다는 건 우리처럼 책을 좋아하는 괴짜라는 거니.”

“어디 출신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늑대 바위 성.”

누군가가 말을 걸어도 그녀는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는 법이 없었다. 대답도 단어 두 개 이상을 쓰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의 그런 태도는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또 원더스타인이 나서서 부연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집사로서 그가 겪는 고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복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단정하지 못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단정히 빚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거나 거치적거리는 단추 몇 개를 풀기도 했다.

“주인님! 밖에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응? 뭐가? 아, 참. 우리 외출 중이었지. 난 아까부터 서재에 있다고 생각했어.”

사방에서 크고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서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연기자였다. 그녀의 말투, 손짓, 표정 모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녀가 만약 이곳에서 하녀 연기를 했다면 부산스러운 말괄량이 흉내로 사람들의 혀를 차게 했을 것이다. 그녀가 만약 이곳에서 공주 연기를 했다면 고귀함을 애써 숨기는 그녀의 정체를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것이다. 그녀가 만약 이곳에서 광대 연기를 했다면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길지 않은 외출이었지만, 원더스타인은 배역에 대한 이해가 또 한층 깊어진 느낌을 받았다. 서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니 집사가 던지는 짤막한 대사 몇 줄이 다시 보였다.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어땠어, 내 연기?”

숙소로 돌아온 그들은 일정을 종료했다. 방금까지 울펜슈타인 백작이었던 소녀는 다시 부단장 엘라가 되었다.

“훌륭했습니다. 물론 극 중에 등장하는 백작과는 조금 달랐지만요.”

“눈치챘어? 당신에게 맞춰준 거야. 집사 역할에 몰입 좀 하라고 일부러 몇 년 어린 백작이 되어 봤지.”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다른 단원들도 다들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한껏 고무된 그들은 저녁을 먹고 바로 예행연습에 돌입했다. 첫 연습을 끝낸 이후로 20시간 만에 다시 시도하는 것이었다.

과연 어제보다 훨씬 나은 결과가 나왔다. 다들 확연히 자신들의 연기가 향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감이 붙은 그들은 매일 상대를 바꿔가며 역할극을 진행했다. 때로는 셋 이상 모이기도 했고 혼자서 일과를 수행하기도 했다. 한트케 교수는 매일 그들이 무대 위에서 보이는 모습을 관찰하고 나서 다음 날의 일정을 짰다.

그의 적절한 지도 덕에 그들의 실력은 매일 가파르게 상승했다. 2주 정도 지나니 그들의 실력은 일류 배우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해당 배역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왜 다른 배우들은 이 방법을 잘 쓰지 않는 걸까요?”

“익히는 데도 벗어나는 데도 오래 걸리니까. 너만 해도 봐봐. 당장 1주일 뒤에 다시 괴물 연기를 하라면 할 수 있겠어?”

그녀의 질문에 질문한 우몬을 비롯한 괴물 단원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연기했던 적혈귀니 거미 여인이니 역병 미라니 하는 캐릭터에 대한 기억이 매우 희미했다. 자신들이 그런 연기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것을 넘어 전생이나 꿈속에서 겪었던 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무섭네요.”

“맞아. 뭔가 정신계 마법에 걸린 기분이야.”

“그래. 그나마 이런 것도 한두 번이니까 그렇지. 몇 작품 넘어가면 정체성 혼란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릴걸? 괜히 비주류가 된 방법이 아니야. 무엇보다 우리가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트케 교수님 정도 되는 분이 딱 옆에 붙어서 우릴 지켜보고 일과를 짜줬기 때문이라고. 무작정 일상에서 그 인물처럼 산다고 이렇게 실력이 늘진 않아.”

엘라의 설명에 다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험까지 15일이 남았을 무렵, 한트케 교수는 다음 단계의 훈련을 들고 나왔다.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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