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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2

52화 맹주의 결정

52화 맹주의 결정

나는 놀랐다.

그녀의 말이 본질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회귀’라는 이름의 이 소설 속 세계는 리메이크 중이니까.

그렇게 다시 쓰이고 있으니까.

“왜 말이 없니?”

내게서 얼굴을 뗀 디네베가 나를 흘겨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열 살 소녀가 지을법한 웃음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고 하는데? ‘먼지’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먼지를 알아본 것을 넘어, 이름까지 파악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혼란스러운 모양이구나.”

“······너는 누구지?”

소녀가 동글게 눈을 뜨며, 마을 앞에서 처음 봤을 때의 그 표정으로 말했다.

“디네베.”

그러고는 덧붙였다.

“은월목의 신녀.”

“······은월목? 달빛나무를 말하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단다.”

디네베의 말투는 또 바뀌어 있었다.

“그 신녀라는 건 뭔데?”

“흐응.”

디네베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봤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 검지를 뻗어 내 턱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내가 조금 더 힘을 회복한 뒤에 하자꾸나.”

그 말이 내 정신의 스위치를 건드린 것처럼, 졸음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아이야. 너는 혼돈을 품고 있구나.”

나는 내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카인. 그 아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

눈을 뜨자 익숙한 연녹빛 눈동자가 보였다.

“깼어? 데미안.”

창밖은 환하고, 푸르렀다.

“잠꾸러기.”

세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일어나. 식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자 쿠훌린이 껄껄 웃으며 외쳤다.

“이제야 내려오는 거냐 데미안!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하하하하!”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루나가 빼꼼 고개를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잘 잤니? 데미안.”

“으하하하! 우리 큰 공주가 데미안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데미안! 내 딸은 절대로 줄 수 없다! 큰 공주는 내가 평생토록 끼고 살······!”

“저 아저씨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안 그럼 저 먹보 아저씨가 다 뺏어 먹는단 말이야.”

루나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건 생존 경쟁이야.”

쿠훌린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껄껄 웃으며 아구아구 음식을 먹었다.

“우리 큰 공주 말이 맞다! 빨리 안 먹으면 이 수염 먹보 괴물이 다 빼앗아 버릴 거다! 으하하하하!”

“먹을 때 웃지 말라고요! 침 튀잖아요!”

“으하하하하하!”

“엄마아아!”

아침부터 쿠훌린은 음식을 뺏어 먹으려 하고, 우리는 저항하고, 루나는 엄마를 찾고, 리아논은 어제처럼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활기찬 아침 식사였다. 세실이 쿡쿡 웃었고, 카인도 녀석답지 않게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람노래 초원에서 함께 퀵피를 탄 이후 카인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다.

나는 디네베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디네베는 지난밤의 모습이 무색하리만치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오물오물 식사하고 있었다. 역시 간밤의 일은 꿈이었던 걸까.

“잘 먹었습니다!”

크게 외친 루나가 디네베의 손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고개 돌려 외쳤다.

“카인! 데미안! 세실! 날 따라와!”

우리를 성 밖으로 데리고 나간 루나가 잔디를 뛰어다니며 깔깔 웃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신나게 웃던 루나가 돌연 입가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휴. 봤지? 그 아저씨 정말 못 말린다니까?”

“그런데 왜 쿠훌린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야?”

내 물음에 루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술을 앙다무는 것이, 조금 화가 난 듯 보이기도 했다.

“아. 괜찮아. 이유를 들려주지 않아도.”

그러자 루나는 다시 생긋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얼른 마을 구경하러 가자! 내가 안내해 주기로 했었잖아!”

루나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쿠훌린을 싫어하는 듯이 말하지만, 루나의 행동이나 표정, 말투는 완전히 쿠훌린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사실 루나는 쿠훌린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소설 속의 루나는 쿠훌린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성격이 바뀌기까지 했으니까.

“가자!”

디네베의 손을 쥔 루나가 개선장군처럼 앞장섰고, 우리는 졸병처럼 뒤를 따랐다.

***

세실은 친구들과 마을 구경을 했다.

마을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모두 활기찼고, 친절했고, 행복하게 웃었다. 루나처럼.

세실은 흘끔흘끔 루나를 쳐다봤다.

루나라는 저 아이는 정말 너무 예뻤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같았다.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니?’

어제 루나가 그 말을 했을 때 세실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데미안의 팔을 꽉 쥐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세실은 남자아이야.’

데미안이 그렇게 말한 순간, 세실은 하마터면 사실을 이야기할 뻔했다.

‘그치? 세실.’

때마침 데미안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저기 봐! 방앗간이야!”

해맑게 외치는 루나의 옆얼굴을 보며 세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루나는 태양 같은 아이였다. 그 빛이 너무도 밝아서, 세실은 자신의 그림자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친구들과 함께 있지만 자신만이 홀로 어둠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저 눈부신 아이 곁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세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인 기운을 머금고 있다는 것만은 알았다. 세실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돼. 루나는 좋은 아이야. 데미안이 푹 빠지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

세실은 어제 데미안이 멍하니 루나를 응시하는 모습을 봤다. 그때의 데미안의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기가 우리 마을의 학교야!”

어느 공터 앞에서 루나가 외쳤다. 공터 너머로 자그만 2층 건물이 보였다.

‘오늘도 수업 잘해!’ 하며 루나가 디네베에게 손을 흔들었다. 디네베도 마주 손을 흔들며 학교로 들어갔다.

“디네베는 아직 어려서 학교에 다녀야 해. 나? 나는 진즉 졸업했지! 글자도 읽을 줄 알고, 산수도 잘하는걸!”

으스대듯 말하는 루나에게 누가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어제 인사를 나눴던 소년, 트리스탄이었다.

“아하하! 얘는 바보라서 우리랑 동갑인데 아직도 학교에 다녀!”

“바, 바보라고 하지 마!”

“바보 맞잖아! 아직 구구단도 모르면서!”

“무슨! 구구단 알거든!”

“구구?”

“팔십육!”

루나가 배를 잡으며 웃었고, 트리스탄은 툴툴대며 학교로 들어갔다.

“수업 잘해! 트리스탄!”

언제 놀렸냐는 듯 루나가 트리스탄에게 손을 흔들었다. 트리스탄도 히죽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가자! 이번에는 분수대를 보여줄게!”

루나는 신이 나서 달렸다.

요정처럼 사뿐히 발을 옮길 때마다, 아기새처럼 고개를 갸웃할 때마다, 그리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마다 마법처럼 빛을 내며 흔들리는 은빛 머리카락.

세실은 부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

쿠훌린은 착잡한 얼굴로 회의실에 서 있었다.

“신녀께서 신력을 잃으셨다고?”

“그렇네 쿠훌린. 공교롭게도 어제, 우리가 섬에 들어올 무렵.”

은월목의 신녀는 세계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

그동안 신녀는 이 세계의 비밀을 일부 들여다보고, 섬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쿠훌린을 비롯한 은월섬의 수뇌부는 알고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세계에 큰 재앙이 닥치리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쿠훌린이 데미안과 카인을 섬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단장. 신력은 사라지는 힘이 아니니까요. 분명 ‘피’를 이은 누군가에게 옮겨졌을 것입니다. 다만 새로운 신체(神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쿠훌린은 여러 감정이 담긴 눈으로 스카자하를 돌아봤다.

이제는 본래의 검은 머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센 머리카락.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어린 날의 쿠훌린이 ‘빌어먹을 마녀 교관’이라 부르던 그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 스카자하 헤카테는 쿠훌린의 스승이자, 잃어버린 부모의 역할을 해준 사람이었다. 쿠훌린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대륙의 아이들을 데려오셨더군요.”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 호칭은 이제 그만 쓰기로 하셨습니다. 단장.”

“대략적인 내용은 라이칸을 통해 들었네. 소서러일 가능성이 있다고?”

벨락이 끼어들었고, 쿠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샤가 확신하더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네. 데미안과 카인은 소서러야.”

“그렇다면 예언과는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신녀께서는 새로운 소서러가 둘이라고 말하지 않으셨네.”

그 말대로다.

신녀는 소서러의 등장을 예언했지만, 둘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벨락. 하지만 신녀께서는 이렇게도 말하셨지. 새롭게 등장할 소서러는 이 세계에 파멸을 불러올 수도, 구원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야.”

“······설마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들어맞지. 예언의 소서러가 본래부터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면. 그래서 둘 중 하나는 파멸을 불러올 존재이고, 다른 하나가 그 파멸에 대항해 세계를 구원할 존재라면.”

“흥미로운 가정이군요. 그렇다면 단장께서는 이 섬에 파멸과 구원, 둘 모두를 들여온 것입니까.”

스카자하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리듯 위를 향했다.

“참으로 무책임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단장.”

“어머니.”

“잠자코 있거라. 벨락.”

스카자하가 쿠훌린을 노려봤다.

“묻겠습니다. 단장께서는 그 아이들이 이 세계에 파멸을 불러오지 않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십니까.”

“노력할 것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하센베르크’와 ‘라플라스’이기 때문입니까?”

그 말에 쿠훌린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하나 더. 세실이라는 아이는 무엇 때문에 데려오신 겁니까.”

스카자하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 아이에게는 어둠이 섞여 있더군요.”

역시 스카자하였다.

그녀는 어제 잠깐 세실을 마주한 것으로, 세실이 블레오파드라는 걸 간파했다.

“그 아이는 위험합니다. 아니, 위험한 것으로 따지자면 세 아이 모두 쉬이 우열을 가릴 수 없겠군요.”

스카자하의 어투가 꾸짖음으로 바뀌었다.

“단장께서는 너무도 큰 위험을 섬에 들이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변명할 말이 있으십니까.”

쿠훌린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스카자하는 스승이었고, 어머니였고, 아버지였다. 쿠훌린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하지만.

쿠훌린은 심호흡했다.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며, 스카자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변명 같은 것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눈에 흔들림 없는 기개가 맺혔다.

“이것은 은월섬의 맹주인, 제 결정입니다.”

얼음 같은 냉기를 발하던 스카자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도 쿠훌린처럼 과거를 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아이.

반항기 가득했던.

가족의 사랑을 믿지 않았던.

그래서 더욱 눈에 밟혔던, 그 아이가.

그 시절의 미숙했던 소년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은월섬의 일곱 가문을 책임지는 강인한 맹주가 서 있을 뿐이었다.

고개 숙이는 스승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이 맹주로서 내리신 첫 결정이라면, 마땅히 따라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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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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