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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5

54. 카트리나 외전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캔버스들이 벽에 기댄 채 줄지어 놓이고 온갖 크기의 붓들이 늘어진 방. 바닥에는 초록색, 주황색, 흰색 할 것 없이 다채로운 색의 물감이 묻어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 같았다.

그 방에서 한 남자가 막 완성한 그림을 놓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됐어.”

그는 그림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젤(캔버스를 올려두는 삼각대)을 끌어 창가에 두었다.

살살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물감이 마르라고 옮긴 것이었는데 햇볕을 받지 말라고 창문을 등지고 세워두었다.

“이제 카트리나가 오기 전에 요리를 해둘까.”

그는 작게 혼잣말하고 절뚝거리며 주방을 향했다.

조금 있다가 저 그림을 숨기는 것도 잊지 말아야지. ─ 라고 생각하면서.

카트리나가 잠시 장을 보러 나간 사이에, 엘런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다.

오늘은 우리에게 정말 특별한 날이 될 거다.

카트리나의 연인, 엘런은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며 그녀를 떠올렸다.

엘런과 카트리나는 삼 년 전에 만났다.

그것도 아주 운명적으로.

부유한 상인의 둘째로 태어난 엘런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다.

선천적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게 태어나 활동적으로 놀지 못하니, 차선책으로 그림을 끄적이던 것에 재미를 붙였다.

너그러운 아버지와 어머니, 후계자인 형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는 꽤 훌륭한 스승님께 그림을 배웠고, 나름의 화풍을 정립하면서 수도로 상경했다. 건축물이 아름다운 오르빌에서 혼자 살면서 수십 점의 그림을 쏟아낸 엘런은 처음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초짜 그림쟁이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행히 전체적인 화풍이 목가적이면서도 사소한 부분에서 화려함을 담은 그의 그림은 나름의 호평을 받았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시회에 올린 그림들은 기본적으로 판매가 가능했으나, 몇몇 작품은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전시회 측에 미리 고지해 둔 것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몇 년이나 보지 못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 속의 검소한 어머니는 색이 바랜 자줏빛 원피스를 입고, 아침 해처럼 밝은 붉은색 머릿결을 흩날리며 드넓은 초원에서 황혼을 등지고 다소곳하게 서 계셨다.

그것은 어릴 적 엘런의 눈에 포착된 찰나의 초상이었다.

엘런은 그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몸을 떨면서 좋아했다. 자신의 머릿속 풍경이 정말이지 온전히 담긴 그림, 이걸 선물로 보내면 어머니는 기뻐하시겠지.

그는 그 초상화를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팔렸다.

전시회 측의 실수로 팔지 않겠다고 했던 그림 몇 점이 팔려나갔다. 엘런은 화가 나서 따졌으나 초짜 그림쟁이는 위압적인 사과만을 받았고, 그들은 그림을 수거해주지 않았다.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어머니의 초상화만큼은 어떻게든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엘런은 그 그림을 샀다는 사람을 찾아갔다.

– 똑똑

그가 찾아간 집은 문틀과 창가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사람이 사는지도 의심스러운 곳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드나드는 문틀에 먼지가 쌓일 수가 있지?’를 의아해하며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지 주소를 다시 살피는데, 안에서 매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문이 벌컥 열리며 고개를 내민 사람은 저녁노을 같은 붉은 머릿결을 뒤로 묶은 여자였다.

눈썹까지 붉어 매서워 보이는 여자, 놀란 엘런은 더듬거리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게 엘런과 카트리나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카트리나에게 그림을 되팔아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물었고, 카트리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거절했다.

그녀의 변은 이랬다.

“나를 꼭 닮은 것 같아서 마음에 드는데 내가 왜 이걸 돌려줘야 하지? 난 정당하게 돈을 내고 샀다구.”

섬세한 엘런은 그 말을 듣고 부들거렸다.

‘어딜 봐서 닮았다는 거야! 눈에 거슬리는 건 다 때려 부술 것 같은 여자가!’

그는 입가를 참을 수 없이 씰룩이며 “이것은 내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이고, 어머니께 선물로 보낼 것이었다. 꼭 좀 돌려줬으면 한다.”라는 말을 전했다.

보통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면 되돌아오는 말도 길고 정중하기 마련이었는데 그녀의 답변은 짧고 간단했다.

“그럼 나는 어쩌고.”

그녀에게 엘런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는지 카트리나는 말똥한 눈으로 되물었다.

살짝 기분이 상한 엘런은 ‘댁은 댁이 좀 알아서 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발 물러섰다.

그는 카트리나의 초상화를 따로 그려주기로 하고 어머니의 그림을 돌려받기로 했다.

물론, 카트리나는 그림을 그려준 다음에야 어머니의 초상화를 돌려주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하필 팔려도 저런 사람에게 팔리다니.

엘런은 마음이 급해졌다. 저런 무식한 여자가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간 그림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어휴, 저 더러운 창틀 좀 봐라.

그 이후로 엘런은 절뚝거리며 카트리나의 집을 종종 찾아가 그녀를 화폭에 담았다.

한데 그녀가 원하는 초상화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맨 처음, 엘런은 보이는 그대로 강인한 여기사의 모습을 그려 내밀었으나, 카트리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거절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좀 더 여성스럽고 부드럽게 그려지기를 원했다.

‘이것도 많이 순화해서 그린 건데!’

여기서 더 부드럽게 그리면 초상화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어머니의 초상화만 돌려받으면 되니까. 엘런은 고객을 만족시키려는 미소를 억지로 지으면서 다시 그림을 그렸다.

“이건 날 안 닮았는데?”

그리고 거절당했다.

아주 지당하고 타당한 반론이었다.

엘런이 보기에도 수정된 그림은 그녀를 전혀 닮지 않았다. 빨간 머리에 붉은 눈썹을 가진 여자가 전부 카트리나가 아닌 것처럼.

‘대체 어쩌라는 거야…?’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미술의 영역이 아니라 창조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을 깨달은 엘런은 낙담하며 다시 오겠노라 밖으로 나왔다.

그때, 카트리나가 그를 불러세우며 말했다.

“야. 너 다리도 아픈데 앞으로는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어디 살아? 시간은 지금 시각에 맞추면 되지?”

그녀의 말에 엘런은 의외라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집을 청소하지도 않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을 “야.”라고 부르는 무례한 여자. 그 와중에 왕실의 기사여서 자기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고 다니는 공인된 깡패, 이게 카트리나에 대한 그의 인상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엘런으로서는 멀리까지 걷기가 힘들어서 정말 감사한 제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주지(로젤린 대로 두 번째 골목길의 파란 지붕)를 알렸고, 카트리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의 집에 들렀다.

“아이고~ 집 꼬라지가 이게 뭐야.”

그녀는 그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엘런의 집은 미술도구와 캔버스들을 제외하면 휑하니 비어있었다. 아무래도 다리가 불편한 탓에 생활용품이나 식재료를 갖춰 놓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는데…

‘댁 집을 생각해!’

적어도 엘런의 집은 깨끗했다.

카트리나는 각종 생필품은 잘 사다 나르면서도 청소하는 것은 귀찮아하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엘런이 화를 삭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화가가 돈이 없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 정도였어?”

“…아니요.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안 사다 놓은 것뿐입니다. 돈은 있어요.”

“흐음~ 그래?”

그 이후로 카트리나는 그의 집에 들를 때마다 몇몇 생필품을 가져왔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그녀는 배달비도 내놓으라면서 그에게서 돈을 더 뜯어갔다. 돈 많은 화가가 기사한테 적선하라면서.

이게 말이야 방구야.

그런데 그녀가 가져오는 생필품에는 항상 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홀로 수도에 올라와 친구가 없고, 혼자서는 술을 즐기지 않는 엘런이었기에, 그의 집에는 술병이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에 찾아온 카트리나는 개봉도 안 된 술병들을 보고선 본인의 성의를 무시했다며 성질을 부렸다. 엘런은 돈까지 다 뜯어가 놓고 왜 화를 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일단 사과했다.

그의 마지못한 사과에 분이 풀린 카트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나랑 마시자. 불쌍한 녀석. 다리도 저는 게 친구도 없네.”

엘런의 미간에 혈압이 솟구쳤으나 카트리나는 그의 어깨를 펑펑 치면서 앉으라고 재촉을 했다.

깡패 같은 여자.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술자리는 매일같이 이어졌고, 엘런은 점점 카트리나라는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본인의 성질머리에 휘둘리고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뱉는 사람이었으나, 의외로 정이 많고 여린 사람이었다.

카트리나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그림 속의 어머니같이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엘런이 그녀를 이해해 가면서 카트리나의 초상화는 빠르게 완성이 되어갔다.

강인하고 불같은 성질은 붉은 머리와 눈썹에 담으면서도 눈빛만큼은 따사롭게, 검을 쥔 손 모양도 단정하게, 옷차림에는 강렬한 색을 담으면서도 하늘하늘 부드럽게 그려주었다.

드디어 초상화가 완성된 날, 엘런은 그 그림을 카트리나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퇴짜를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의 초상화를 어루만지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안 와도 되겠네. 고생했어.”

카트리나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아쉽다는 표정조차 숨기고 휙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엘런의 어머니를 그린 초상화는 깨끗하게 닦여 문 뒤에 놓여있었다.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한 다음 다시 가져가려 했던 모양이다.

여려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

엘런은 절뚝거리며 쫓아가 그녀의 어깨와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카트리나는 기사이면서도 그 힘을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허용했고, 둘은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렇게 그들은 연인이 되었다.

엘런은 흐뭇하게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냄비에 각종 재료를 쏟아부었다.

고기가 잔뜩 들어간 스튜, 고기는 엘런이 몰래 절뚝거리며 나가서 사 온 것이었다.

카트리나는 분명 좋아할 거다.

최근 전쟁터에서 어깨를 다치고 돌아온 그녀는 스트레스가 쌓인다며 고기를 즐겨 먹었는데, 엘런의 섬세한 눈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임신했다.

삼 년의 오랜 동거생활에도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

카트리나가 쓰는 공격적인 검술은 몸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것이었고, 사방팔방 날뛰며 연습하는 그녀의 뱃속에는 아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한데 전쟁터에서 어깨를 다치고 돌아와 훈련을 밥 먹듯이 빼먹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 부쩍 고기를 찾았고, 엘런은 드디어 그들에게 축복이 내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카트리나에게 기사단은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했고, 검술이 크게 퇴보해 불만이 쌓인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엘런의 말을 따랐다.

어제, 카트리나가 기사단을 그만두었다.

본인의 명예로웠어야 할 은퇴식에 동료들과 선배들은 모두 전쟁터로 나가버려서 없고, 갓 입단한 초짜들만 병풍마냥 어색하게 서 있었다는 불평을 늘어놓는 카트리나를 보며 앨런은 결심했다.

그는 오늘 청혼할 것이었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고 알려주면 그녀는 무척이나 기뻐하겠지. 카트리나는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기를 꿈꿨으니까.

그런데 성질이 급한 그녀가 과연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었다. 엘런은 요리하면서 쿡쿡 웃음 지었다.

그때, 멀리서 억눌린 비명이 들렸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 엘런은 놀라서 쩔뚝이며 창가를 향했다.

불길하다.

벌컥 열린 창문으로 돌풍이 몰아쳤는지 창가에 세워둔 캔버스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떨어진 그 캔버스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배가 조금 부른, 저녁노을 같은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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