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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6

55. 소꿉친구 – 열 번째 레오

레오는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섰다. 오한과 공포가 그를 뒤덮었다.

생각할 수가 없다. 정신 차리자.

“레오? 왜 그래? 너 표정이 이상해.”

레나가 눈앞으로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하는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어? 어어? 아니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레오는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거짓말했다.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그, 급한 일이 있어서.”

그리고는 허둥지둥 마을로 돌아갔다. 레나가 따라오며 “왜 그래?”, “레오. 너 괜찮아?”라고 물었지만, 그는 일일이 답해줄 경황이 없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그래. 안 따라와도 돼.”

마을 입구까지 따라온 레나를 뿌리친 레오는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평소에는 쓰지 않는 문고리까지 걸어 잠그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크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 10/20 ]

시야 오른쪽 아래에 떠오른 이 숫자는 눈을 감았다 떠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열 번. 아니지, 이번 회차까지 포함해 열한 번 남았다는 뜻일까?

침대에 엎어진 그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맨정신을 유지했다.

다행히 그는 레오였다. 만약 민서가 홀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괴성을 질렀을 것이었지만, 레오의 정신이 방파제가 되어 그의 정신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충격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거 클리어가 가능하긴 한가? 아냐, 불가능해. 이럴 리가 없어. 이래선 안 돼!’

이제는 해피엔딩을 보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클리어를 해내지 못하면 끝장이다.

하지만 지금껏 반복한 9번의 회차 모두가 실패했다.

그나마 가장 공주에 가장 근접했던 지난 거지남매 시나리오도 처참하게 끝났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현실을 부정해봤지만, 눈알에 박힌 숫자는 사라지지도 변하지도 않았다.

그는 발작하듯 분노했다가,

‘이런 개 같은 게임! 미친 좆망겜! 뭣 하나 주는 것도 없으면서 나더러 어쩌라고!”

행복회로를 돌리며 협상을 시도하다가,

‘아냐 아냐, 잠깐만. 다시 생각해보자. 10/20, 저 숫자가 다 찬다고 해서 뭐가 어떻게 되리란 법은 없잖아? 그렇지? 어쩌면 [ 이어 하시려면 과금이 필요합니다. ]라고 뜨면서 끝날지도 몰라.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2000원짜리 게임이었어. 한 판에 100원! 딱 맞네!’

머리를 쥐어뜯으며 체념했다.

‘씨발, 그럴 리가 없지. 하아… 게임 하나 잘못 클릭했다가 인생이 이렇게 종치는구나… 열심히 살걸… 채하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크게 한숨을 뱉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밥을 먹었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하루 내 온갖 감정이 휘몰아친 그는 무감각해진 표정으로 육포를 씹으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절망해서 주저앉아봐야 도와줄 사람은 없다.

‘아직… 열한 번이나 남았으니까…’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고작(?) 아홉 번 만에 그 대단한 후작의 양자로 들어갈 ‘뻔’하기도 했고, 지금껏 모은 보상이 어디로 사라져 없어진 것도 아니다.

‘가능… 하겠지?’

식사를 마친 레오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창가에 기대어 어둑해지는 바깥을 보며 고민을 이어갔다.

횟수 제한을 빼더라도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아있었다.

[ 업적 : ‘10’번째 레오 – 플레이어가 레오에게 동화되는 속도가 미약하게 빨라집니다. ]

‘어쩐지 동화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다 했어…’

업적에 적힌 ‘10’이라는 숫자는 분명 카운터였다.

지금껏 열 번째가 되지 않았기에 업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지, 저 카운터는 회차가 반복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올라가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각 회차에서 살아간 시간이 천차만별이고, 그 변화가 워낙 미약해서 동화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단정 짓지는 못했다.

하지만 묘한 위화감이 있었고, 한 번은 명백한 위기를 느꼈었다.

처음으로 죽었던 약혼관계 시나리오에서였다. 그 레오는 무려 8번째 레오였는데, 그는 마지막에 ‘민서라는 불순물’을 불쾌하게 여길 정도로 완전한 레오가 되었다.

레오는 다시 불안감에 휩싸여 머리를 박박 긁었다. 횟수 제한이 있는데 내 맘대로 플레이하지도 못한다.

‘설마 동화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사실 지금도…’

지금 생각 중인 그도 민서가 아닌 레오였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직후여서 민서로서의 생각이 잠시 이어지고 있을 뿐이지 레오는 레오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민서와 레오는 미묘한 관계에 놓여있었다.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민서와 반복되는 비극을 피하고 싶어 하는 레오들.

민서가 각 시나리오의 레나들에게 정을 느끼고, 레오들도 민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지금껏 협력할 수 있었다.

사실 협력이라기보다는 민서와 레오의 정신이 합쳐진 존재로서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 노력한 것이지만.

그런데 ‘10’번째 레오 업적의 카운터가 더 올라가면 나중에는 민서가 레오에게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완전한’ 레오가 된 그는 어떤 행동을 할까?

예를 들어 소꿉친구 시나리오의 레오는 레나가 사제 이벤트를 만나 떠나게 될 때 어떻게 반응할까?

그녀를 보내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민서가 영향을 미쳐서 그녀를 보내기도, 안 보내기도 했다.

물론, 레오들에겐 민서의 기억이 있으니 이전과 동일하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게임 클리어를 위해 움직여 줄지가 미지수라는 점에 있었다.

레오들은 레나를 공주로 만들겠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행복을 쫓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창가에 기댄 그는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도 대부분 레오가 스스로 움직이긴 했다. 하지만 아예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리라는 공포는 또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타인에게 넘겨주고 기다려야 한다는 불확실성을 감당하기 힘들다.

[ 사망하셨습니다. 1/3 ]

[ 업적 : 최초의 사망 – 플레이어가 레오에게 동화되는 속도가 느려집니다. ]

민서가 이 불확실성에 대응할 방안은 ‘사망’ 업적밖에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동화 속도를 늦추는 방법. 이것도 횟수 제한이 있지만, 또 죽으면 동화 속도가 추가로 느려지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처음 죽었을 때만 뜨는 업적일 수도 있어. 그까짓 것을 확인하겠다고 사망 카운트를 올리는 건 멍청한 짓이야.’

그때, 민서의 생각에 딴지가 걸리며 급회전했다. ‘레오’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바뀌는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레오는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죽음을 기능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민서뿐이었다.

민서의 향기가 짙게 배어있는 레오, 그의 고민은 밤새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지 않아 다행이다.

* * *

며칠 뒤, 레나와 레오는 개울을 향했다.

오늘은 해가 유독 뜨거워서 더위도 식힐 겸, 자잘한 물고기를 잡으러 나왔다.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수확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몸이 편하고 둘이서 놀기도 좋았다.

벌써 네 번째로 해보는 일이어서 레오는 오늘 레나가 개울에 가자고 할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산열매를 따러 갈 준비를 미리 해놨다가 레나에게 한참이나 의심의 눈총을 받은 적이 있어서, 그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다.

아버지는 내일 돌아오신다.

물가에 도착한 레오는 덩굴을 길게 뽑아 잘랐다. 이것을 엮어 통발을 만들고 물고기를 꾀어낼 것을 안에 바르면 된다.

레오가 좋은 손재주를 십분 발휘해 통발을 빠르게 엮어내는 동안 레나는 수풀을 뒤져 ‘다네르’라는 열매를 땄다.

겉보기는 산딸기를 닮은 열매였는데 색은 블루베리 같은 어두운 파란색이었다.

다네르는 사람이 먹으면 속이 쓰리지만, 상당히 기름져서 물고기를 유인하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레나는 다네르를 잔뜩 모아서 개울가에 놓인 조약돌로 꾹꾹 짓이겼다. 이제 다네르 기름이 묻어 파랗게 물든 이 조약돌들을 통발에 넣으면 끝이다.

이윽고 레나는 물길과 수심을 이리저리 살핀 뒤, 완성된 통발을 물에 담갔다.

물론, 통발 하나로는 한참 부족했으므로 레오는 다른 통발을 엮기 시작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렸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지 며칠, 마음을 다잡은 그는 나름의 계획을 구상해둔 상태였다.

이번에는 제롬 신성왕국의 왕자인 ‘클레오 드 프리데릭’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클레오 드 프리데릭은 신성왕국의 수도 루테티아에 있었다.

이전에는 수도에 있으면서도 왕자를 만날 방안을 찾지 못했고, 교회에서 쫓겨나 절망한 레나를 위해 서둘러 결혼했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왕자를 찾을 방법이 생겼다.

지난 시나리오 보상으로 얻은 {추적술}, 이것은 정말이지 유용한 능력이었다. 특히 지난 회차에 동생을 찾으려고 두 개의 왕국을 헤집고 다닌 그에겐 더욱 감격스러운 보상이기도 했다.

이젠 레나와 헤어질 일이 없다!

절대로!

{추적술}은 특정 인물이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집어주는 능력이었고, 덕분에 레오는 고개를 돌아보지 않고도 레나가 지금 오른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차례로 동생 레나와 레나 아이나르를 떠올렸다. {추적술}은 두 사람이 작은 각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북쪽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세 개의 시나리오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레오들도 같은 방향에서 느껴졌으니까.

다만 이 능력은 한 번에 한 명의 위치만 집어낼 수 있는지 동시에 두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뭐 차례대로 떠올리면 되니까 이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 능력이 본인이 ‘만나본 사람’에게만 통할까 봐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그는 {귀족 사회} 정보를 통해 알게 된 7개 왕국의 모든 왕자들이나 소드마스터가 있는 방향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면 추적이 가능한 모양인데, {귀족 사회} 정보를 통해 알게 된 것도 포함된다는 건 무척이나 기꺼운 일이었다.

역시 시나리오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은 하나같이 유용하다.

딱 하나만 빼고…

‘이제 왕자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다!’

레오에게 희망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수도에 있어도 왕자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아가지 못했다.

당연히 왕자는 왕궁에 있겠지만, 그곳을 출입할 정도의 신분이 되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허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젠 왕자를 직접 찾아갈 수 있었고, 지난 소꿉친구 시나리오에서 클레오 드 프레데릭이 종종 사냥을 나간다고 들었다.

대장장이들에게 주워들은, 그리 신빙성 있는 정보는 아니었으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아마 맞으리라.

[ 업적 : 왕자와의 첫 만남 – 모든 왕자로부터 미약한 호감을 얻음. ]

그리고 레오에겐 왕자에게 호감을 얻는 업적이 있었다. 그러니 왕자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가 그가 나온 것 같거든 후다닥 찾아가면 됐다.

{추적술}이라는 편리한 능력 덕분에 새로운 길이 열리자 레오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스스로를 북돋기 위한 노래였다.

앞으로 11번? 충분히 그 안에 클리어할 수 있다.

레오는 막 완성한 통발을 탁탁 바닥에 쳐서 잔가지를 떨어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레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레나. 여기 하나 더 만들었어.”

“…으응.”

내밀어진 통발을 받지도 않고 레오를 말똥히 들여다보던 레나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레오, 너 레오 맞지?”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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