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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6

55화. 

난 유리에게 물었다. 

“너한테는 왜 그러는 거야?” 

유리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짜증나 죽겠어요.” 

둘이 처음 만난 건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유리를 보고 한눈에 반했는지 채민호는 사귀자고 했지만, 유리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연락처를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알아냈는지 계속 연락이 왔다. 차단을 했더니, 다른 번호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유리는 채명호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줬는데, 아주 가관이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사귀자는 기본이고, 백화점에 명품백 사러가자, 필요한 게 뭐냐, 원하는 거 다 사주겠다 등등. 

다른 애들이라면 모를까 유리한테는 쓸데없는 수작이다. 

명품백이 필요하면 주식 팔아서 사면 그만이다. 어제 보니까 한 주에 200만 원 넘은 것 같던데. 

“어지간히 널 좋아하나 보네.” 

내 말에 유리는 눈을 흘겼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미안.”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그러는 건 폭력이나 다름없다. 스토커 같은 걸로 신고 안 되나? 

우리는 일단 중앙도서관 식당으로 향했다. 난 학식을 먹으며, 민영이에게서 채명호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고준형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대 경영학과는 재벌집 자식들도 가끔 들어온다. 때문에 마스터치킨 회장의 장남이 신입생으로 들어온다는 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선배들은 각종 모임 때 공짜치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입생 놈이 완전히 안하무인이었다.  

OT에 참석해 정해진 스케줄 다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구는 건 기본이고, 선배들에게 반말하고, 술자리에서 여자애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였다. 

그 꼴을 군기반장인 규원 선배가 가만히 지켜볼 리 없었다. 

규원 선배는 애들 다 보는 데서 야단을 쳤고, 채명호는 반성하기는커녕 한 판 붙자는 식으로 나왔다. 

다행히 주위에 있던 선배들이 나서서 말렸고, 술 취해서 실수한 거라며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OT가 끝난 후 일어났다. 

규원 선배의 아버지는 작년에 명예퇴직을 하고, 퇴직자들이 흔히 하는 초고속 승진코스를 탔다. 

대기업 과장에서 치킨집 사장이 됐다는 얘기다. 하필 마스터치킨 가맹점이었다. 

휴일도 없이 닭을 튀기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는데, 갑자기 본사에서 위생 점검을 나왔다. 그리고 각종 위반사항을 적발해 열흘간 영업정지를 먹였다. 

당장의 영업정지도 치명적이지만, 식품위생으로 세 번 경고를 먹으면 가맹계약이 자동 해지된다. 

퇴직금을 전부 쏟아 부어 차린 치킨집이다. 온가족의 생계가 좁은 매장에 달려있다.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들어도 짐작이 됐다. 

“다른 선배들은?” 

민영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규원 선배 당한 거 보고 뭐라 할 마음이 들겠냐?” 

“고준형 선배는? 그 선배가 뭐라 하면 꼼짝 못하지 않을까?” 

“학교에 잘 안 나오잖아. 처음에는 선아에게도 들이대려는 것 같았는데, 준형 선배랑 사귄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깍듯하게 대하던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권력이다. 누구도 권력자와 안 좋은 쪽으로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채명호도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 게 친한 동기와 선배들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규원 선배네 매장이 이틀 만에 영업정지가 풀리고 갑자기 우수가맹점으로 선정된 게 대표적이다. 

자신에게 잘못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잘해주면 어떤 혜택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얘기를 들은 나는 기가 막혔다.  

“참 나······.” 

프랜차이즈의 갑질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대기업은 하청업체에 갑질하고, 프랜차이즈 본사는 가맹점에 갑질하고. 한동안 외국물을 먹었더니, 대한민국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난다. 

진짜 재벌가 자식이면 소문이 무서워서 그러지도 못한다.  

뉴스만 봐도 서성그룹이나 은성차그룹 자식들이 사고 쳤다는 얘기는 없지 않은가? 사고는 주로 애매한 놈들이 치기 마련이다.(재벌들의 언론통제의 영향도 있겠지만) 

민영이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겠어? 아까 보니까 그 자식 가만히 안 있을 것 같던데.” 

난 피식 웃었다. 

“지가 어쩔 건데?” 

나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적어도 생계를 걸고 일하는 자영업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 * * 

개강파티 장소는 학교 후문 쪽에 있는 작은 호프집이었다. 오늘 하루는 통째로 경영학과가 전세 냈다. 

진행자 역할을 맡은 남학생이 소리쳤다. 

“선배님들은 신입생들과 섞어서 앉아주세요.”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으니, 양쪽 다 신입생이다. 

“자, 술잔 다들 채우셨죠? 그럼 개강을 축하하며 건배!” 

난 신입생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한 명씩 얼굴을 익혔다. 신입생들과는 무려 4살 차이다. 생각해 보니, 나 고등학생일 때 얘들은 초등학생이었구나. 

난 몇 잔 마시다가 민영이와 경일이가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언제 왔는지 선아가 같이 앉아있었다. 

저번에 보고 1년만인가? 

여전히 한눈에 시선을 잡아 끌만큼 매력적인 모습이다. 

선아는 날 보며 말했다. 

“잘 지냈어? 올해는 복학했네.” 

“어.” 

고준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선배는?” 

“좀 있다 오기로 했어.” 

난 자리에 앉았고, 동기들끼리 다 같이 잔을 부딪쳤다. 

선아가 물었다. 

“왜 바로 복학 안 했어?” 

“이거저거 하느라 좀 바빴어.” 

선아는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좀 흐르자, 친한 그룹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유리는 황지혜를 포함한 몇몇 여자동기들과 웃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민영이는 호프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은 안 왔네.” 

“그러게.” 

그런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프집 앞에 검은색 벤츠 S클래스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더니 운전석에서 채명호가 내렸고, 조수석에서는 규원 선배가, 그리고 뒷좌석에서 여학생 셋이 함께 내렸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혜미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차 너무 좋다. 역시 벤츠는 S클래스가 진리야. 내 동기 중에는 오타쿠 같은 경차 끌고 다니는 애도 있는데. 이런 게 진짜 클래스 차이라는 거구나.” 

“······.” 

얘도 아직 졸업 안 했구나. 

채명호는 손가락으로 차키를 돌리며 호프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유리의 옆자리에 앉았다. 

“같이 한 잔 해요, 선배.”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랑 마시기 싫은데.” 

채명호는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에이, 튕기는 여자 별로 매력 없는데.” 

난 그 모습을 보고 녀석이 연애를 권력 관계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통행하는 것이다. 

“자자, 어서 마시자.” 

채명호는 몸을 가까이 가져가며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유리는 그 손을 쳐냈다. 

난 더 이상 허튼 짓을 하기 전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자리 좀 비켜줘, 유리야.” 

내 말에 유리는 기다렸다는 일어났고, 난 그 자리에 앉았다. 

“나랑 한 잔 하자.” 

채명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또 선배예요?” 

“응. 또 나야.”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괜히 끼어들지 마시고, 그냥 다른 데로 가시죠.” 

“에이, 튕기는 남자 별로 매력 없는데.”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규원 선배가 다가왔다. 

“야, 강진후······.” 

채명호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규원 선배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녀석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오는 길에 혜미 선배한테 들었는데, 선배 집 쫄딱 망했다면서요? 용케 복학하셨네요.” 

역시 이혜미.  

얘는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은지 모르겠다. 

“너 나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난 앞에 있는 잔을 잡고 맥주를 마셨다. 

“애들한테 들었는데 너 술자리 게임 잘한다며? 나랑 게임이나 하나 하자.” 

녀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게임?” 

“방금 전 내가 만든 게임인데, 규칙은 간단해. 시간 정해놓고 테이블 위에 현금을 쌓아서, 많이 쌓는 쪽이 이기는 거야. 진 사람은 벌칙으로 자퇴하기. 어때?” 

채명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누군지 몰라요?” 

“알아. 너 돈 많다며? 그런데 그 돈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난 주위 애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여기서 집에 금송아지 한 마리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내가 그 동안 재산을 숨겨서 그렇지 사실 집에 몇 십억 달러 정도 있는데.” 

당연히 헛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선배 지금 실수하는 거예요.” 

난 도발하듯 말했다. 

“자신 없어서 그래?” 

“제가 왜 그런 쓸데없는 게임을 해야 되는데요?” 

쉽게 넘어오지는 않는구나. 

어떤 조건을 내걸며 꼬드길까 고민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유리가 말했다. 

“선배가 지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순간, 채명호의 눈이 빛났다. 

“정말이지?”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돈 많은 남자 좋아해. 그러니까 이겨봐.” 

채명호는 재빨리 승낙했다. 

“좋아요. 하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민영이와 경일이가 나를 말렸다. 

“취했어? 왜 그런 짓을 해?” 

“빨리 취소해, 임마.” 

“걱정하지 마. 이기면 되잖아.” 

채명호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과연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 * *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오는데, 앞에 선아가 서있었다. 

“어쩔 생각이야? 정말로 자퇴할 거야?” 

“지면 그래야지.” 

선아는 한숨을 내쉬듯 물었다. 

“이길 방법은 있어?” 

“니가 돈 좀 빌려줄래?” 

“뭐?” 

“농담이야.” 

“넌 대체······.” 

선아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난 그녀를 지나쳐서 걸어갔다. 가운데 테이블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 앞에는 채명호가 앉아있었다. 

과 애들이 구경을 하듯 주변을 둘러쌌다. 

난 자리에 앉기 전 유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면 진짜 쟤랑 사귈 거야?” 

유리는 생긋 웃었다. 

“어차피 선배가 이길 거잖아요.” 

“······.” 

대체 얘는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난 맞은편에 앉아 다시 한 번 규칙을 설명해주었다. 

“제한 시간은 두 시간. 그 안에 테이블 위에 현금 많이 쌓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자. 자기 돈, 부모 돈, 남의 돈, 빌린 돈 상관없어. 외화는 가능하지만, 수표, 유가증권, 현물 안 돼. 진 쪽은 등록금 아까워하지 말고 내일 당장 깔끔하게 자퇴하자. 잘 들었지? 나중에 딴말

하기 없기다.” 

“선배나 딴말하지 마시죠.” 

“유리야. 타이머 좀 맞춰줘.” 

“네.” 

유리는 핸드폰으로 두 시간 후로 타이머를 맞춘 다음 테이블에 놓았다.  

규원 선배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다들 핸드폰 집어넣어. 사진 찍다 걸리면 알아서 해.” 

이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난 민영이와 경일이에게 말했다. 

“애들 사진 못 찍게 규원 선배랑 같이 감시 좀 해줘.” 

입으로 소문이 퍼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사진 같은 증거자료만 없어도 신빙성이 확 떨어진다. 

“내가 먼저 시작할게.” 

난 방금 전 ATM에서 뽑아온 현금과 지갑에 있던 현금을 다 꺼내 테이블 위에 쌓았다. 

ATM 일일 출금한도가 600만 원이란 걸 오늘 처음 알았다. 

“645만 원이다. 쫄리면 뒈지시던가.” 

채명호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참 나, 무슨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정 비서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 * * 

호프집 앞에 검은색 세단이 멈춰 섰다.  

양복을 입은 중년남자 둘이 일명 007가방으로 불리는 아타셰케이스 두 개를 들고 왔다. 

딸깍! 

비밀번호를 맞추고 가방을 열자 그 안에서 5만 원짜리 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돈다발 200개가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한 다발에 500만 원이니, 총 10억 원이다. 

시끌벅적한 호프집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살면서 10억을 현금으로 직접 보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나조차도 현금으로 쌓인 10억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계좌상의 숫자로는 질리도록 봤지만. 

누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평생 벌어도 저만큼 모을 수 있을까?” 

직장인이 평생 열심히 일하면 10억 정도는 벌 수 있다. 연봉 4천씩 받으며 25년을 일하면 되니까.  

그러나 10억을 모은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난 채명호 쪽에 있는 10억 원과 내 앞에 있는 645만 원을 번갈아 보았다.  

이러니 내 645만 원이 너무 초라해 보이잖아! 

첫판부터 10억을 쌓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평범한 대학생이 아무리 돈을 끌어 모아 봐야 몇 천만 원 되지 않을 것이다. 

1억만 쌓아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애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 의도가 먹혔는지, 호프집 안에 있는 모두는 10억이라는 돈 앞에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계속 하실래요?” 

시작한지 이제 겨우 30분 지났을 뿐이다. 

난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지금부터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An Investor Who Sees The Future

미래를 보는 투자자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re may be great entrepreneurs, but there are no great investors. That’s the reality of this country.”

One day, something started to appear before my eyes.
What could I possibly do with this 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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