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57

57화 시간의 실타래 (2)

57화 시간의 실타래 (2)

카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간의 실타래 속에 갇힌 아이.

그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었다.

“너는 어떻게······.”

“이제야 아이다운 얼굴을 하는 것이더냐.”

디네베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돌연, 표정을 바꿨다.

“많이 괴로웠더냐.”

카인의 마음속에서 파도가 일었다.

디네베의 눈동자는 오랜 세월과 함께 깊은 애처로움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외로웠더냐.”

카인의 뺨이 실룩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외로움이 담겨있는 듯했다. 가슴이 뛰고 숨이 차올랐다. 왜지.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지.

그동안 카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카인의 내면을, 아니 본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집스럽게 닫아두었던 마음의 빗장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열 살배기 어린아이 앞에서.

“부끄러워 말거라.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으니.”

카인의 머리에 손을 얹은 디네베가 마치 어른이 아이를 쓰다듬듯, 카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나는 네가 아는 디네베가 아니다. 그러나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단다. 지금의 내가 너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단단한 껍질 안에 숨겨둔 짙은 슬픔과, 외로움뿐이구나.”

카인은 멍하니 디네베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데미안을 의지하는 것이더냐.”

의지라니.

당치도 않았다.

“그 아이가 너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더냐.”

카인의 가슴속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폭풍 같던 지난 삶이 머리를 스쳤다.

열일곱 번의 회귀. 그중 열 번의 회귀를 가문의 멸망을 막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노력의 결과는 사랑하는 모든 이의 죽음을 반복해서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치가 떨리도록, 무력하게.

“울지 말거라. 아이야.”

디네베의 자그만 손이 카인의 두 볼을 덮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단다.”

“나는······.”

카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단다. 다시 기회가 주어지면 더 나은 선택을 할 것만 같은 환상을 품게 되지. 하지만 잊지 말거라. 너는 매 순간에 늘, 최선을 다했단다.”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살아 돌아올 수 없으니까.

회귀의 분기점 이전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모든 것을 너의 잘못이라 여기지 말거라.”

디네베의 손끝이 카인의 눈 밑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오랜 시간 이 상태로 있을 수 없다. 하여 말하겠다.”

디네베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인간이 아닌, 식물처럼.

“기억하거라 아이야. 시간은 너의 편일 수도, 적일 수도 있단다.”

“그게 무슨······.”

“아무리 거대한 실타래라도 시작과 끝은 존재한다는 말이다.”

디네베의 속눈썹이 내려앉으며 반쯤 감긴 눈동자 위로 심연 같은 그늘이 드리웠다.

“네 스스로 실을 끊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시간의 되돌림은 결코 인위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녀의 입술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어쩌면, 그렇게 끊어진 실을 그 아이가 다시 이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데미안이······?”

“너 또한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카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득한 우주가 담겨 있었다.

“너와 그 아이의 시간은 엉킨 실타래처럼 엮여있으니 말이다.”

***

위험했다.

트리스탄은 나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솔직히 초반에 맥없이 당할 뻔했다. 우직한 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직선적인 검로를 예측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겠지.

거기에 더해 트리스탄의 검을 몇 차례 막으며 나는 레벨업했다. 물론 34레벨이 되었다고 내가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런데 그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붕어처럼 눈이 퉁퉁 부은 루나.

앞도 잘 안 보이는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오는 루나를 발견한 나는 서둘러 은월무를 카피했다. 물론 열화 버전인 1레벨 스킬로 카피됐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달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졌어.”

세실에게 패배했을 때의 루나처럼, 트리스탄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멍한 눈으로 나를 봤다. 많이 놀랐겠지. 아르테미스도 아닌 내가 은월무를 발현했으니.

“데미안! 데미안! 여기!”

아까부터 세실은 자기 좀 보라는 듯 두 손을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낯설다. 저런 모습의 세실이라니.

그에 반해 나머지 관중은 트리스탄과 비슷한 얼굴로 나를 봤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은월무였지?”

“저게 말이 돼······?”

그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나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나를 세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빌어먹을 카인 녀석은 어디를 간 거야.

“데미안, 너······!”

어느새 달려온 루나가 경악한 붕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눈으로도 봤구나. 내가 은월무를 발현하는 것을.

“어, 어떻게 한 거야? 방금 그거 은월무 맞지?”

“아닐걸?”

대충 얼버무리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너 지금 대충 얼버무리려는 거지! 내가 무슨 붕어인 줄 알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아?”

루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이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세실의 손을 잡고 인파를 헤쳐 나갔다.

“아앗! 어딜 도망가려고!”

루나가 나를 쫓아왔다. 관중의 틈에서 벗어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루나는 집요하게 물어왔다. 어떻게 한 거냐고. 혹시 저 아저씨가 밖에서 몰래 만들어 온 자신의 이복형제냐고.

“여, 역시······! 그래서 그렇게 뻔질나게 대륙으로 나돈 거였어! 막 씨뿌리고 다닐라고! 너, 너뿐만이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대륙에 내 이복형제가 수백 명은 있을지 모른다고!”

루나가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가리며 아악! 비명을 질렀다. 뭉크의 절규 같았다.

“너, 너 생일 언제야!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남동생보다는 오빠가 좋······ 아니, 이게 아니고! 이, 이 씨뿌리기 대왕 수염 괴물! 즉시 처단해 주겠어! 확 단검으로 자르고 터뜨려 버릴 거야!”

듣기만 해도 아랫도리에 힘이 쭉 빠지는 말을 내뱉으며 루나가 뒤돌아 달렸다.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저런 끔찍한 소리를 들은 남자라면 세상 누구라도 그럴 거다.

그런데 의외로 세실은 아무렇지 않게 호다닥 루나를 쫓아갔다. 그런 세실을 보며 나는 경외감을 느꼈다. 너는 정말로 강하구나. 세실.

그러나 루나의 발을 멈추게 한 것은 세실이 아니었다.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카인. 카인의 품에는 식물처럼 늘어진 디네베가 안겨있었다.

“디네베!”

루나가 방향을 꺾어 카인에게 달려갔다. 나도 엉금엉금 기다시피 루나를 쫓아갔다. 카인이 말했다.

“잠들었다. 깨워 봤지만 안 일어나더군.”

***

“······역시 라플라스가 맞군. 쿠훌린.”

벨락은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그의 옆에 선 스카자하 역시도. 그러나 쿠훌린은 데미안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은월검도 발현했었다.

“루시엔과 같아.”

루시엔 라플라스.

아르테미스가 아니면서도 은월의 마력을 발현했던 검사(劍士).

그리고 자신에게 ‘쿠’라는 별명을 지어줬던 친구.

관중의 틈새로 사라지는 데미안의 뒷모습을 쿠훌린은 한참 동안 바라봤다.

***

입단 시험이 끝났다.

시험 결과는 승패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저 참가자들의 대전을 보며 쿠훌린을 포함한 섬의 수뇌부들이 입단 여부를 결정했다. 그래서 토너먼트식의 승자전은 없었다.

나와 세실, 카인, 루나는 모두 입단 시험을 통과했다.

“아하하하하!”

루나는 은월의 망토를 두른 채 다시 마을의 밤거리를 뛰어다녔다. 우리 세 사람도 끌려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트리스탄도 시험에 통과했다. 그는 루나의 옆에서 함께 망토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트리스탄 헤카테. 훗날 ‘흑월의 소드마스터’로 불리며, 루나의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한 충성스러운 검사. 그는 루나를 죽이려는 카인을 최후의 최후까지 막아서던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은월의 단원이다!”

“맞아 트리스탄! 아하하하!”

신나게 소리치던 루나는 늦은 저녁 식사 시간에 커다란 한방을 터뜨렸다.

리아논에게, 내가 쿠훌린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푸우우우우!”

당연하게도 쿠훌린은 입 안에 든 수프를 테이블에 뿜었다. 루나가 지저분하다며 화를 냈고, 쿠훌린은 말도 안 되는 음해라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자 늘 웃는 모습만을 보였던 리아논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쿠훌린을 째려봤다.

“오해야! 오해라니까!”

결국 리아논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린 후에야 일은 마무리됐다. 자애로운 어머니상의 표본처럼 보였던 리아논에게 저런 장난스러운 모습이 있었다니. 나는 리아논을 볼 때마다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저것이 어머니라는 존재구나.

결국 루나도 헤헤 웃으며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식사 자리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세실도, 디네베도 킥킥 소리 내어 웃었다. 오직 카인만이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

.

.

오늘도 우리는 잠들기 전에 옹기종기 한 방에 모였다.

루나는 하루 중 이 시간이 가장 즐거워 보였다.

“데미안. 근데 진짜 어떻게 한 거야? 은월무 말이야.”

루나가 다시 물어왔다.

어떻게 대답할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나는 ‘쿠훌린이 전투하는 모습을 보며 틈틈이 연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나는 쉬이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치만 은월무는 몇 번 따라 한다고 되는 게 아닌걸.”

손짓으로 우리를 불러 모은 루나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이거 너희들한테만 살짝 알려주는 건데, 은월무는 블러디드야. 너희들 블러디드 알아? 피를 통해 이어지는 힘.”

당연히 이 자리에 블러디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하나같이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쉿.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루나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우리는 알았다고 했다.

루나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 생각에 데미안, 너에게는 아르테미스의 핏줄이 조금 섞인 것 같아. 그 수염 먹보 아저씨랑 닮지 않은 걸 보면 뭐, 확실히 내 오······ 아니 남동생은 아닌 것 같고. 가만.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랑 눈 색이 비슷한데?”

루나가 다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하길래 나는 잽싸게 받아쳤다.

“아니야. 이거 봐봐. 나는 금발이잖아. 너처럼 예쁜 은발이 아니라고.”

“응? 아 뭐······ 내 머리색이 예쁘긴 하지. 헤헤.”

루나가 뒷머리를 긁으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굳이 ‘예쁜’이라는 말을 포함한 이유는 소설 속의 루나가 은빛 머리카락을 칭찬받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조금 얼굴이 붉어진 루나가 대뜸 카인에게 물었다.

“근데 카인. 오늘 왜 그렇게 말이 없니?”

“나는 항상 이랬다.”

“아니야. 묘하게 분위기가 다른걸?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러자 카인은 디네베를 보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디네베. 정말로 잠들기 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디네베가 카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디네베 핑계 대기는. 나는 카인이 저러는 이유를 안다. 그래서 공개했다.

“저 녀석은 나와의 내기에서 졌거든. 그래서 꽁해있는 거야.”

이후, 무엇에 대한 내기였는지 캐물어 알게 된 루나가 내게 빽빽 소리쳤다.

***

친구들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온 세실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사실은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데미안이 한 말 때문이었다.

“······.”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세실은 몰래 방을 빠져나가 2층으로 내려갔다. 후우, 심호흡한 세실은 쿠훌린의 방문을 두드렸다.

쿠훌린이 하품하며 문을 열었다.

“음? 세실. 무슨 일이냐.”

“······할. 말이.”

“응?”

세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세실을 멀뚱히 바라보던 쿠훌린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주춤주춤 방으로 들어오는 세실을 본 리아논이 싱긋 웃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방 안에는 세실과 쿠훌린, 둘만 남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세실은 두 손으로 꼬옥 망토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열었다.

“······염색.”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