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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8

58화 망자

58화 망자

쿠훌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염색이라면, 머리색을 바꾸고 싶다는 말이냐?”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색으로?”

“······은색.”

세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쿠훌린이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아르테미스의 은발에는 무척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루나 때문인 거냐?”

쿠훌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세실은 용기를 내어 더듬더듬 설명했다.

다행히 쿠훌린은 데미안보다도 세실의 말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루나가 너무 예뻐서 부럽다고?”

세실이 입술을 움찔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미안이 은빛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세실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머리색은 중요하지 않아.”

타이르는 듯한 쿠훌린의 말에 세실은 망토를 꼭 쥐었다.

역시 안 되는 거였어.

세실은 쿠훌린의 말을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세실. 데미안을 좋아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실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세실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미안에게는 계속 숨길 생각이야?”

“······무엇을.”

“데미안은 네가 남자아이인 줄 알고 있잖아.”

쿠훌린이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처럼 헝클지 않고, 부드럽게.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는 거야?”

“사실. 을······.”

“그러면 루나와도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될 거야. 진짜 자매처럼. 내 딸이기는 하지만 루나는 꽤 괜찮은 아이거든. 분명 네게 좋은 가족이 될 수 있을 거야. 물론 디네베도.”

‘가족’이라는 말이 세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어쩌면, 데미안과는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 지금과 다른 의미로.”

“다른. 의미?”

쿠훌린이 씩 웃었다.

“데미안이 너를 여자아이로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세실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데미안이 나를 여자아이로 좋아하게 된다고?

숨이 가빠졌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행복한 상상은 길지 않았다. 루나를 바라보던 데미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루나를 이길 수 없어.’

덜컥 겁이 났다.

만약 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데미안에게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데미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테오와 족제비와 덩치처럼, 그런 소중한 친구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친구들을 두고 가지 않아.’

언젠가 데미안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의 세실은 테오와 족제비와 덩치를 버려서라도 데미안을 구하려 했었다. 쿠훌린에게서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그때 데미안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싫어. 요······.”

고개 숙인 세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웠다.

잠시의 침묵 후, 쿠훌린이 물었다.

“카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카인에게는 빚이 있다고. 이 마음만은 절대로 바뀌지도, 버리지도 않을 거라고.

“흠······.”

낮은 한숨을 뱉은 쿠훌린이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만약의 일인데 말이다. 데미안과 카인이 사이가 안 좋아져서, 그래서 서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세실, 너는 어떤 선택을 할 거야?”

왜 이런 물음을 하는 걸까.

데미안과 카인이 서로 싸운다고? 무엇 때문에?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이야기였다. 세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그런 세실의 어깨를 쿠훌린이 다독였다.

“신경 쓰지 말거라.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어 쿠훌린은 말했다. 염색을 가장 잘하는 마법사는 엘리샤니까, 엘리샤에 섬에 올 때까지 조금 더 고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마침 다가오는 가을에 섬에 큰 축제가 있고, 그때쯤 엘리샤도 섬으로 돌아올 거라고.

세실은 그러겠다고 했다.

***

시간은 나는 듯이 흘러, 은월섬에는 가을이 찾아왔다.

오렌지빛, 붉은빛, 금빛의 나뭇잎들이 서로 어우러져 무지개 같은 색감을 뽐내는 섬의 가을은 절로 신비로운 기분을 자아내게 했다.

얼마 전 마을에서는 장례가 치러졌다. 쿠훌린을 포함해 마을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 참석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듯 분위기는 시종일관 엄숙했다.

◎ 데미안 라플라스 [15세]

나는 15살이 됐다. 스테이터스 창을 확인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덕분에 내 생일을 알게 되었다. 이제 1년만 지나면 이 세계에서 성인으로 인정받는 16세가 된다. 그러고 보니 테오와 덩치는 이미 성인이 되었겠구나.

놀라운 점은 나와 세실, 카인, 루나의 생일이 모두 같았다는 거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우연이! 우리는 정말로 운명인가 봐!”

루나가 무척 좋아했다. 그러고는 언제까지나 친하게 지내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다. 그때의 루나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안타깝게 바라봤다. 루나는 종종 눈물을 보였다. 리아논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아논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방 안에서만 보냈다. 성 밖으로의 외출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루나는 우리 앞에서 더욱 밝게 행동했다.

“달빛나무 축제가 열릴 거야! 이번 보름달이 뜨는 날 밤!”

“축제? 뭘 하는 건데?”

내 물음에 루나는 못 견딜 정도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더니, 빙글빙글 자리를 맴돌았다.

“섬이, 달빛나무 언덕이, 그리고 하늘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날이야!”

급기야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월의 모든 단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야!”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신나게 떠드는 루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인이 피식 웃었고, 나와 세실도 웃었다.

루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며칠 뒤 증명됐다.

“어이 금발! 오랜만이네! 아하하하!”

엘리샤가 마을에 나타났다. 엘리샤는 루나와 매우 가까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둘의 말투가 조금 비슷한 것 같다.

엘리샤의 곁에는 라이칸도 있었다.

“라이칸!”

트리스탄이 달려와 라이칸의 팔에 매달렸다. 알고 보니 라이칸의 풀네임은 ‘라이칸 헤카테.’ 트리스탄의 숙부이자 벨락의 동생이었다.

라이칸이 특유의 입꼬리만 올리는 미소를 지으며 트리스탄에게 말했다.

“할머니는.”

“아직도 막 날라다니셔! 내 생각에 할머니는 나보다 오래 사실 것 같아!”

나는 이제 스카자하가 쿠훌린의 스승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쿠훌린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사실 나를 포함해, 섬에 사는 이 중에서 스카자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루나도 스카자하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스카자하!”

“검술 훈련은 열심히 하는 게냐. 루나.”

“무, 물론이죠!”

“듣자 하니 세실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지?”

“······.”

스카자하는 루나를 볼 때마다 검술 훈련을 소홀히 한다며 꾸중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루나는 입단 시험에서 세실에게 패한 뒤로 무척 열심히 훈련했고, 1레벨이 올라 44레벨이 됐다.

나는 36레벨이 됐다. 내가 빠르게 두 단계나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카인 덕분이었다. 나와 가장 레벨이 비슷하면서도 내게 호승심을 가진 녀석은, 나에게는 아주 좋은 대련 상대가 됐으니까.

“아무리 긴장을 풀고 싸워도 네게는 지지 못하겠군. 데미안.”

물론 대련을 마칠 때마다 저런 재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어서 빨리 카인을 따라잡고 싶었다. 그러나 3레벨의 격차가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세실은 여전히 49레벨이었다. 그럼에도 섬의 또래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했고, 루나의 훌륭한 대련 상대가 되어 주었다. 매번 세실에게 도전하지만 패배하는 루나를 볼 때마다 카인에게 두들겨 맞는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크흑······! 데미안에게 또 지다니······!”

그 와중에 트리스탄은 나의 좋은 위안거리가 되어 주었다. 녀석은 아직 40레벨의 벽을 넘지 못했고, 그래서 나와 카인의 샌드백 역할을 훌륭하게 해 주었다. 물론 방심할 수는 없다. 녀석이 40레벨이 되는 순간 입장은 바뀔 테니까.

“아하하하! 트리스탄 또 진 거야?”

“시, 시끄러! 너도 세실에게 졌잖아!”

“뭐얏! 너 이리 와봐!”

“아악! 그만 때려! 아파!”

트리스탄은 루나에게도 좋은 샌드백이었다.

저러면서도 둘의 사이는 무척 가까웠다. 루나가 리아논의 일로 눈물을 보이는 상황은 대개 트리스탄과 있을 때였다. 그때마다 트리스탄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루나를 위로했다. 때로는 함께 울기도 했다. 어쩌면 루나는 트리스탄 앞에서만 본연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이 금발. 술이나 한잔할까?”

“저 아직 미성년인데요.”

엘리샤는 섬에 온 이후 술병을 달고 살았다. 예전에 돼지 오줌보 여관에서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

***

“요즘 매일 술주정을 하며 돌아다닌다지? 엘리샤.”

스카자하의 말에 엘리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엘리샤, 라이칸, 스카자하, 벨락, 그리고 쿠훌린은 성의 1층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아, 그게요. 하하. 어쩌다 보니······.”

“미안하구나. 네 어미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말이다.”

스카자하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엘리샤는 아하하!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잠시 후, 훌쩍훌쩍 제 코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라이칸이 말했다.

“신력의 계승자는 아직입니까. 단장.”

쿠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보자를 좁힐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 이렇다 할 변화가 감지된 이가 없다.”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본래 이전 세대 신녀의 몸에서 빠져나간 신력은 그 즉시 ‘피’를 이은 다른 이에게로 계승된다. 다만 신력이 새로운 신체(神體)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은 대개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두 달을 훌쩍 넘어 석 달이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혹여 신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은.”

“쓸데없는 소리는 삼가거라. 라이칸.”

이전 세대의 신녀는 엘리샤의 어머니였고, 얼마 전에 장례를 치렀다. 기실 예정된 일이었다. 신력을 잃은 신체는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쿠훌린은 신녀가 신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엘리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엘리샤는 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은월병(銀月病).

신녀가 된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피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그 불치병을 치유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엘리샤는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먼저 섬으로 돌아온 쿠훌린 또한 그랬듯이.

“알아본 일은 어떻게 됐지?”

머릿속 잡념을 털어내며 쿠훌린이 물었다.

그는 섬으로 돌아오기 전, 라이칸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었다.

‘하센베르크의 흔적을 조사하도록. 무덤 속의 시체까지. 남김없이.’

“단장의 명대로 모든 흔적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물론 제대로 된 무덤이 아니었기에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결과는.”

“하센베르크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쿠훌린을 바라보는 라이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카인 하센베르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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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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