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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9

58. 소꿉친구 – 하리에 가이단

잠시 머리를 굴린 레오는 레나의 의심스러운 눈총을 받아넘기며 어렵지 않게 답했다.

“코코렌을 잡아 왔었지. 그런데 재작년이 아니라 더 이전이 아니었어? 마을 사제님께서 새로 오신지 얼마 안 됐을 때잖아. 사제님께서 코코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셔서…”

“그리고 어떻게 됐었지?”

“엄청 혼났지. 촌장님께도 혼나고, 형들한테도 혼나고, 너희 부모님께도 혼나고…”

“그전에는 무슨 일 없었어?”

레나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물었다.

“글쎄…? 코코렌이 나무둥치에서 기생하니까 밥으로 물을 먹이겠다고 물통에 손을 담가줬던 거? 걔 배 터져 죽을 뻔했잖아. 이거 말하는 거야?”

무지에서 나온 발상이었지만, 아이들의 장난은 가끔 무섭다.

당시 코코렌은 쉽게 들어오는 물을 나무즙으로 착각하고 신이 나서 마구 빨아들였고,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레나는 그때 기겁을 했다.

레오는 확 밝아진 레나에게 능청을 떨었다.

“그런데 이런 걸 왜 묻는 거야?”

“아… 헤헤, 그냥 옛날 생각나서 물어봤지.”

레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그날’ 이후로 레오가 많이 달라져서 무언가에 쓰인 것은 아닌가 의심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건 우리밖에 모르는 추억이니까.

‘하긴 나도 레오도 곧 성년이니까 변할 때도 됐지.’

그녀는 언제 의심을 한 적이나 있냐는 듯 딴청을 피우더니 일하면서 은근슬쩍 얻게 된 간식을 레오에게 내밀었다.

의심해서 미안한 것을 나름 갚으려 하는 모양이다.

레오는 고맙다면서 그걸 받고는 코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위험했다.’

예전에 레나와 네비스로 향할 때 과거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여행 중에 레오는 그녀에게 술을 권했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물어봤었다.

레나와의 추억을 들을수록 ‘진짜 레오’가 되어가는 것 같은 충족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고맙게도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많아지는 레나는 알딸딸한 취기에 흥이 겨워 온갖 추억을 다 떠들어줬다.

그때 이야기를 잘 들어뒀던 것이 다행이다. 만약 방금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더라면 레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내 정체를 의심했겠지. 어쩌면 더는 날 믿지 않고 마을로 돌아가 버렸을지도…’

하나뿐인 친구가 떠나버리는 상상을 했더니 속이 쓰리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 소꿉친구 시나리오는 앞으로도 가망이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차를 반복한다고 해서 뭔가 계속해서 쉬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갈수록 레나가 알고 있던 레오와 달라지고 있었고, 이번 레나는 그 변화를 알아차렸다.

소꿉친구인 레나가 다른 레나들보다 눈치가 빨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착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머리가 좋고 호기심이 많아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면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이래서는…’

어쩌면 언젠가는 이 레나를 데리고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이 시나리오를 깨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일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 왕 ] – 이건 신분 상승이 클리어 조건이 되는 이 게임에서 신분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왕이 될 수만 있다면 클리어는 손쉽다. 레나를 공주로 지정하면 될 테니까.

설령 레나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해도 그 전에 그녀를 공주로 추대하면 만사가 오케이였다. 공주는 사제가 되는 것도 가능하니까.

이 계획에 문제가 있다면, 왕위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위업이라는 점이었다.

지금껏 어렵다, 불가능하다 등으로 불평을 늘어놨으나 왕위에 오르는 것에 비하면 레나를 공주로 만드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레나는 눈치가 너무 빨라서…

레오는 레나와 함께 달달한 간식을 나눠 먹었다.

비밀을 숨긴 남자와 관찰하는 여자. 둘이 먹는 간식은 같은 것이었으나 두 사람은 맛을 다르게 느꼈다.

* * *

레오를 포함한 하인들이 평평하게 다진 길, 그곳에 깔린 하얀 카펫 위로 한 영애의 구두 굽이 닿았다.

레나와 여타 시녀들이 죽어라 세탁한 그 카펫은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으나 카펫을 밟은 영애는 그들의 노고에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양옆으로 도열한 사용인들을 스쳐 지나갔다.

평소라면 지나친 환대라며 한 마디 핀잔이라도 남겼을 테지만, ‘하리에 가이단’, 그녀는 지금 심경이 매우 어지러웠다.

‘…이게 내 마지막 기회야.’

속으로 각오를 다진 그녀는 오른 왕국의 동부을 지키는 변경백인 ‘하르베이 가이단 후작’의 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드시죠.”

도시 보스포를 관리하는 총관이 영주성 정문에 나와 고개를 숙여보이곤 그녀를 안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휑하기 그지없던 영주성은 총관이 꽤나 신경 써서 준비한 듯 곳곳에 휘장과 커튼이 잔뜩 걸려 있었다. 벽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고, 어디서도 먼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총관이 집사를 제치고 물었다.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간단한 요리만 방으로 내어주세요. 다른 분들과 인사는 저녁에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녁 만찬을 준비해두겠습니다. 그때 사용인들을 만나 뵈면 될 것 같습니다. 방으로 안내해드리죠.”

하리에는 발소리도 내지 않는 품위를 보이며 총관을 따랐다.

방에 도착한 총관은 그녀를 위해 문을 열고, 보스포에 오신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의 생활에 어떤 불편도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한 뒤, 다시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도착과 동시에 영주성의 특급 귀빈이자 안주인으로 등극한 그녀는 방을 휙 둘러보았다.

너무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은 그 방은 무슨 짓을 했는지 습도와 온도가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또,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절묘한 위치에 배치되어 편의성과 운치를 담았다.

‘잘 해두셨네…’

오랜만에 만난 총관의 깔끔한 예의와 자신이 좋아하는 하늘색으로 장식된 방 덕분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 하리에는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숨을 크게 내쉬며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천장을 바라봤다.

고개를 든 하리에 가이단은 누구라도 미인이라 칭송할 법한 여자였다.

화장했지만 굳이 하지 않았어도 새하얗게 빛났을 둥근 이마와 호선을 그리는 얇은 눈썹, 애처로와 보이는 입술을 가진 그녀는 그늘짐 없는 눈가 위, 초록색 눈동자에 우울함이 담겨 있어서 누구라도 등 뒤로 물려 세워 지켜주고 싶은 여자였다.

또한, 그녀는 혼기가 가득 차서 정략결혼이든 뭐든 간에 곧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될 여자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생활하던 그녀가 이 먼 동부까지 오게 된 까닭은 그놈의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니지, 다른 정략결혼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하리에는 자신의 위치를 매우 잘 자각하고 있는 영애였다.

접시 한 번 닦아보지 않고,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가 당연하고, 원한다면 언제든 대륙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귀한 신분. 이것들에 대한 대가를 언젠가는 치러야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이미 각오했었다.

귀족 영애의 의무라곤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고, 다른 영애들과 원만하게 소통하며, 언젠가는 결혼해 가문에 보탬이 되는 것. ─ 하리에는 이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저질스러운 남자를 만나고 싶진 않아. 둘 중 누구든 간에.’

하리에 가이단은 두 왕자들을 떠올리며 몸에 소름을 돋우었다.

오른 왕국을 지배하는 로그넘 왕가의 두 후계자, 애톤 드 로그넘과 앨제어 드 로그넘.

쌍둥이로 태어나 최근 성년이 된 그들은 부끄럽게도 견실한 인간말종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나치게 짓궂은 장난으로 세간의 우려를 한몸에 받았다. 그래도 성격이 포악하지는 않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기대는 왕자들이 성년이 되면서 박살이 났다.

성년이 된 그들은 본격적으로 음주가무를 즐기기 시작했고,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이용해 귀족 영애들을 희롱하기를 즐겼다.

연회 자리에서 세련된 예법과 음탕한 말로 마음에 드는 영애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한 영애는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젖가슴이 만져지거나, 품위를 내팽개치고 무작정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거든 왕자들은 파하하 웃으며 예의도, 품위도, 유우머도 없는 여식이라며 그녀를 깎아내렸다.

하리에 가이단도 놈들의 수작에 걸려들어 몸을 허락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착한 언변으로 빠져나왔고, 뒤에서 왕자들이 제법이라며 키득거리는 걸 들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오른 왕국의 귀족들은 왕자들을 초청하지 않고 연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불쑥 얼굴을 내비쳐 연회장을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런 행태가 지속되자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귀족들의 만남은 조금씩 뜸해졌고, 네비스의 사교계에는 승냥이같이 왕자에게 빌붙는 귀족들만 판을 쳤다.

‘추잡스러운 놈들.’

나라가 망할 징조가 있다면 왕자들이 보이는 행태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왕가에서는 보기 드문 형제의 친분을 과시한다며 한다는 짓거리가 더 가관이었다.

성노예를 사다가 둘이서…

생각조차 하기 싫다.

기분을 완전히 잡쳐버린 하리에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왕자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그녀는 두 왕자 중 하나를 택일해 시집가야 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하리에 가이단은 아버지께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저를 그런 놈들한테 보내지 말아 주세요.”

“아빠, 제발요. 부탁이에요.”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면 안 되나요? 어디든 갈게요. 누구든 상관없어요.”

“왜! 왜! 하필이면 제가 가이단 가문에서 태어나서 그런 끔찍한 인간들을 만나야 하는 거예요!”

애원과 분노를 쏟아내 봤으나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아니, 꿈쩍도 하지 않는 척을 하셨다.

대귀족치고는 마음이 따뜻하고 딸을 애지중지하던 아버지는 상처를 받으셨을 터였다.

아버지도 분명히 그 왕자들을 싫어하셨다. 그럼에도 그녀를 돌연 그들에게 시집보내려 한 것은 아버지가 변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바뀐 탓이었다.

가이단 후작가는 정치적으로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그 왕자들은 정말 싫다!

울며불며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보지 않을 거라고 외치곤 식음을 전폐하던 그녀는 묘안을 떠올렸다.

‘꼭 우리나라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

하리에 가이단은 그 길로 아버지께 달려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르베이 변경백은 눈을 질끈 감더니 생각해보겠노라 답했고, 얼마 있지 않아서 결과가 나왔다. 그녀를 부른 아버지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어투로 말했다.

“테르탄 공작가에 연락을 넣었다. 마침 너와 연배가 비슷한 후계자가 있다고 하니… 한번 만나보거라.”

하리에는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어렸을 때처럼 그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그런 행동은 다 큰 영애가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니까. 이미 울고불고 떼를 쓰긴 했지만…

침대에 누운 하리에 가이단은 입술을 꾸욱 아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는 타국의 공작가문의 후계자와 접선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고, 부디! 제발! 그 남자가 멀쩡한, 아니,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이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데려가 주기를..

하리에는 마지막으로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쓰레기 왕자들에게 시집가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아버지께 외쳤으나, 사실 그건 거짓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작의 후계자와 연이 맺어지지 못한다면 그녀는 어쨌든 왕자를 만날 것이었다. 가문을 위해 딸이 시집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정말이지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 똑똑.

그때, 그녀가 요청한 ‘간단한’ 요리가 도착했다.

하리에는 벌떡 일어나 “들어오셔도 좋아요.” 허락을 내렸다.

그러자 다섯 명의 시녀들이 차례로 들어와 탁자에 새하얀 식탁보를 깔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것들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따뜻하게 데워진 값비싼 도자기와 은제 식기, 잘 숙성된 과실주, 식욕을 돋우는 시큼한 애피타이저와 멋과 맛을 단번에 잡은 근사한 음식들…

하리에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우아하게 식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갈하고 우울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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