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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5. 약혼관계 – 전쟁

눈이 녹기 시작한 에이브릴 성에 싸늘한 급보가 도착했다.

아스틴 왕국이 대륙 중앙에 있는 벨리타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아스틴 왕국은 항상 따뜻하고 풍요로운 중부를 탐냈다.

전쟁 소식을 접한 데호르만은 침중한 안색으로 가족들과 레오, 노엘 덱스터를 불러 서론 없이 본론을 던졌다.

“전쟁이 났네. 제롬 신성 왕국이 이번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우리 성에서도 병력을 차출해야 한다더군.”

에이브릴 성은 벨리타 왕국보다 제롬 신성 왕국에 더 가까웠다. 신성 왕국이 발을 빼지 않았더라면 에이브릴 성은 방어를 위해 병력을 내버려 뒀겠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게 흘렀다.

데호르만의 말에 푸념이 섞였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는데 전쟁은 왜 벌이는 건지… 귀족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병력을 차출한다는 이야기에 침묵이 흘렀다. 에이브릴 성의 병사 일부와 아이나르 부족 전사 일부가 전쟁터로 향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전쟁에 응하는 것은 전사로써 명예로운 일이었다.

모두가 불편한 까닭은 다른 데에 있었다.

“레나는…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대전사의 자녀가 전사라면, 아이나르 부족의 관례상 전쟁 시에 반드시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대신해 참전해야 했다. 전사인 자식을 두고 대전사가 참전하는 것은 자식에게나 부모에게나 모두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레나도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차라리 잘 됐어요. 전쟁에서 무훈을 쌓으면 기사 서임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그녀는 오히려 의욕을 불태웠으나 데호르만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전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딸이 전장에 나간다.

그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레나를 몇 달만이라도 사냥에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했다.

모인 가족들은 각자 내려앉은 심정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직 출병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레오는 지난 {사냥} 이벤트를 떠올렸다. 만약 레나가 노구화호를 상대하다 다쳤다면 전쟁에 불참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전쟁을 미리 알았어도 도전할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둘이서 노구화호를 잡는 건 불가능했다.

‘레나가 떠나는 {이벤트}가 또 있네…’

전에는 사제가 되기 위해 떠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쟁터를 향했다. 레나 아이나르는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레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데모스 마을의 레나는 레오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떠나지 않았지만, 이번엔 강제적인 징병이었고 그녀도 거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레오는 고민 끝에 노엘의 방을 찾았다. 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다.

“아버지. 저도 참전하고 싶어요.”

병사도 아니고 부족의 전사도 아닌 레오는 레나와 달리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다.

병사들의 가족들은 징병이 면제됐다. 이미 성에 소속된 병사 중 일부가 전쟁에 참여하기 때문인데, 노엘 덱스터는 성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은퇴한 기사였으므로 덱스터 가문에는 완전한 면책권이 있었다.

그래도 지원은 언제든 가능해서 레오는 레나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노엘은 책을 탁! 세게 덮으며 말했다.

“안 돼. 지금 너는 가면 반드시 죽는다. 절대로 안 돼.”

노엘이 보기에 아들의 검술은 형편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근시안적인 눈으로 허점을 찌르려는데 급급했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했다.

안정성이 결여된, 무작정 휘두르는 칼. 전쟁에 나간다면 요행으로 적을 몇 번 잡더라도 결국 죽을 터였다.

아버지의 단칼 같은 거절에 레오는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제발요. 전 꼭 따라가야 해요.”

“안 된다면 안 돼!”

“전쟁에 나간다고 다 죽는 건 아니잖아요.”

“넌 전쟁을 몰라!”

노엘은 전쟁터의 난장판을 잘 알았다. 이 멍청한 아들은 전쟁터에선 앞뒤를 가리지 않고 검이 날아온다는 것을 모른다. 기마병이라면 좀 낫겠지만, 보병에겐 방어적인 검술이 필수였다.

“한 번만 더 가겠다는 헛소리를 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다리를 분질러버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못 가!”

레오는 노엘의 고함과 함께 방에서 쫓겨났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로 전쟁에 참전할 수 없었다.

아버지 몰래 지원해 봤지만, 성에 소속된 기사인 노엘은 그 사실을 알아버렸고, 그날 레오는 죽도록 맞았다. 다리를 분질러버린다는 협박은 허언이 아니어서 레오는 며칠 동안 다리를 절었다.

출병일은 시시각각 다가왔다. 모두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고 떠들었지만,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묘한 아련함이 떠돌았다.

* * *

잡초가 돋아나기 시작한 공터, 레오는 레나에게 다가가 목검을 내밀었다.

내일 레나가 떠난다.

“한판 붙어보자.”

레나는 출전을 앞두고 묵묵히 검을 휘두르다 그의 도발에 싱긋 웃으며 진검을 버리고 목검을 잡았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 나 몸 상태 완전 좋아.”

레나도 목검을 내밀었다.

조심스러운 대치, 레오는 검 끝을 살살 흔들어 레나를 유인했지만, 그녀의 검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의 검을 따라 흔들렸다.

어떻게 하든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 ─ 라는 듯한 움직임에, 레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선공을 취했다.

역시나 그녀는 부드럽게 레오의 검을 흘렸다. 두 목검이 서로 핥듯이 긁히며 가가각 거친 소리를 뱉었다.

레나는 머리 위로 팔을 돌리며 내리쳤다. 레오는 성큼, 앞으로 깊숙이 다가서며 검 손잡이 끝으로 그녀의 손목을 쳐냈다. 자연스럽게 레오의 목검은 그녀의 가슴을 겨누었고, 레나는 그걸 피해 몸을 회전하며 그의 복부를 걷어차려 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레오는 옆걸음을 쳐서 발차기를 피하고 검을 위에서 아래로, 전력으로 내리그었다.

– 타악!

두 목검이 강하게 격돌하면서 찰나 간의 힘 싸움이 있었다. 검 뒤로 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레나는 굽힌 무릎을 펴며 레오를 세게 밀어내고는 칭찬을 했다.

“어쭈. 많이 좋아졌는데.”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니까.”

둘은 씨익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격돌했다.

허나 짧은 칼부림 끝에 레오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레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그의 발목을 쓸듯이 걷어찼다.

나동그라졌다.

레오는 재빨리 자세를 잡으며 일어서려는데 목에 둔탁한 것이 닿는 걸 느꼈다. 레나는 그의 목을 목검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레오, 네 희한한 검술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어.”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그의 패배였지만 레오는 치밀어오르는 아쉬움에 몸을 벌떡 튕겨 레나의 허리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두 사람은 검을 놓치고 공터를 뒹굴었다.

소리 없는 힘겨루기와 공방이 오고 갔으나 끝내 레오는 힘으로 레나를 제압해 내리눌렀다.

“야! 레오! 이거 반칙이야!”

“알아!!”

레오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래에 깔린 레나는 레오를 멀뚱히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더니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졌다.

“멍청하긴… 살아 돌아올 테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어.”

레나는 양팔로 그의 목을 감싸 끌어당기며 키스를 해왔고, 레오는 피하지 않았다.

내일 레나가 떠나는데, 나는 검술 실력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따라가지도 못한다. 한심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자칫 전장에 나가는 전사를 슬퍼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서 꾹 눌러 참았다.

두 사람은 그대로 겹쳐 누운 채 한동안 공터에서 포옹하다 맥주를 한 잔 나눴다.

레나가 레오를 밀쳤다.

* * *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레나는 방에 없었다.

흩어진 옷을 챙겨입고 내려가 보니 그녀는 이미 전신 무장을 마친 채 아침을 먹고 있었다.

곁에서 아침을 먹던 데호르만이 그를 보더니 화통하게 소리쳤다. 슬픔을 감추려는 듯한 그 어색한 외침에는 근심과 사랑이 담겼다.

“이 결혼도 안 한 연놈들이 아주 대놓고 사고를 치네. 둘 다 다리 몽둥이 부러지고 싶냐? 크하하하!”

“아, 거참. 출전하는 사람 다리를 부러뜨린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너무하시네.”

레나는 눈을 흘겼고, 민망해진 레오는 레나 옆에 앉아 말없이 식사했다. 그녀는 아침을 다 먹고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가족 모두 배웅을 나왔다. 마을 공터엔 전사들과 병사들이 우글거리며 행군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레나는 가족들과 포옹했다.

“딸아. 부디 몸조심하렴.”

“싹 다 죽여버리고 와라. 하하… 하아.”

레오와 레나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어젯밤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음에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데도 그립다. 이대로 계속 안고 싶었지만 레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포옹이 끝났다.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걱정하지 마! 돌아올 땐 기사가 돼 있을 테니까.”

그녀는 호기롭게 떠났다.

에이브릴 성에서는 떠나는 병사들을 위해 북을 힘차게 울렸고, 아이나르 부족은 뿔피리를 길게 뽑았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라는 듯 쿵쿵거리는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병사들이 고개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울려 퍼졌다.

레오는 한참 동안 성문을 떠나지 못했다.

그 이후로 그는 죽어라 검을 휘둘렀다. 아버지께 인정받을 정도로 검술이 늘면 참전해서 레나를 쫓아갈 요량이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될 때까지 레오는 쉬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여느 날처럼 땀을 흘리던 레오의 눈앞에 단조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 레나가 죽었습니다. ]

글자는 메마르게 레나의 전사를 알렸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이 멀어지며 새까맣게 물들었다.

[ 레나 키우기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레나 아이나르 ]

[ 최종직업 : 아이나르 부족의 전사 ]

[ 결혼 상대 : 레오와 약혼 ]

[ 레오 덱스터 ]

[ 최종직업 : 기사 ]

[ 결혼 상대 : 미혼 ]

[ 약혼관계 엔딩 : 명예로운 죽음 ]

– 에이브릴 성에서 태어난 레나 아이나르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이나르 부족의 대전사인 아버지와… (중략) …간의 전쟁에 참전한 레나는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으나 벨리타 왕국 제2 기사단의 기사 카트리나의 손에 전사했다. –

– 수도 바르나울에서 태어난 레오 덱스터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아스틴 왕국 제1 기사단의 기사였던 아버지와 함께… (중략) …한 그는 끝내 결혼하지 않고 에이브릴 성을 지키는 기사로 살다 일찍 죽었다. –

지난번과 똑같이 어둠 속에서 글자들이 떠올랐다.

레나가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장면도 빛바랜 삽화가 되어 함께 떠올랐다.

기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던 그녀는 귀환하지 못했다.

사실 전쟁에 나가기엔 조금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전사가 나이를 핑계 드는 건 수치였고, 누구보다 전사다웠던 레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거다.

레오는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최소한 그녀와 함께했어야 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 저 세계에 남은 레오도 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일찍 죽었을까?

레오는 서서히 사라지는 그녀의 엔딩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부끄러움과 자책으로 몸을 비틀다 레나의 사진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민서의 정신이 전면으로 떠올랐다.

여자친구 채하와 부모님도 함께 떠오르면서 속이 뒤틀렸지만, 한 번 겪어본 일이어서 그런지 전처럼 미칠 듯 괴롭지는 않았다.

희망도 생겼다.

‘검술을 조금이나마 배웠다. 다음엔 좀 더 나을 거야.’

이게 민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첫 시나리오에서 배웠던 사냥 실력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검술도 머릿속에 남았다. 이대로 무한히 반복돼도 언젠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여차하면 힘으로 무쌍 찍고 다 때려잡으면서 엔딩까지 끌고 가면 된다.’

남성들이 게임을 할 때 가장 즐겨 하는 몰살 루트였다.

정상적인 루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를 엄청나게 강하게 키워서 눈에 보이는 것을 모조리 때려잡는 길.

괜히 ‘다 죽이면 암살이야.’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몰살 루트를 가슴에 품고, 기다렸다.

[ 레나 키우기를 클리어하지 못하셨습니다. ]

[ 레오, 당신은 기사가 되어 평생 에이브릴 성을 지켰습니다. 그 업적으로 레오의 {검술} 능력이 일부 계승됩니다. ]

[ 다시 시작됩니다. ]

민서가 정확하게 원하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김없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인트로 영상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아… 진짜. 또 다른 거네.’

이번 인트로 영상은 넓은 들판을 가르며 웅장한 도시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거대한 성문을 지나니 멀리 화려한 왕성이 보였다.

그대로 직진해서 왕성까지 갔으면 좋으련만, 시점은 중간에 방향을 틀어 왁자지껄한 시장을 지나 어둡고 지저분한 골목길에서 멈췄다.

그곳엔 꾀죄죄한 거지 남매가 있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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