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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0

59. 소꿉친구 – 필라스 테르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영주성의 업무는 점차 잦아들었다.

귀빈들을 맞을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녀들의 업무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 항상 노기가 어려있는 시녀장이 다섯 명의 시녀들을 따로 뽑아냈다. 그녀는 그들을 횡으로 줄 세우고 말했다.

“이제 너희는 하리에 가이단님을 모셔야 하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

한 달간 지켜보면서 나름 똑똑하고 성실한 애들만 골라낸 것이었지만, 귀족을 모셔본 경험이 없는 것들을 쓰려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영애께서는 뭐가 그렇게 급해서 시녀를 딸랑 두 명만 데리고 오셨을까?

시녀장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있으면 혼쭐이 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뽑힌 시녀들은 얼굴이 핼쑥해졌다.

하필이면 귀족을 모시는 일을 맡게 되다니. 넉넉한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까닥 잘못하면 몰매를 맞고 쫓겨나는 일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시녀장의 훈계와 회초리질을 동반한 교육을 받는 동안 시녀 중에서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은 레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무섭기도 했지만 조금 흥분하기도 했다.

‘귀족이라니! 그것도 영애!’

귀족들의 찬란한 삶이 궁금했었다. 그들은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할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들었는데 저번에 보니까 그럴 것 같지는 않던데. 어쩜 그렇게 피부가 새하얄까? 수도에서 오셨다는데 수도는 어떤 곳일까?

레나는 귀족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교육에 성실히 임했고, 시녀장은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얼마 뒤, 레나는 하리에 가이단의 전속 시녀가 되었다.

가이단 영애가 데려온 두 명의 시녀가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이어서 급히 공백을 메워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녀장은 빠릿빠릿하고 눈치가 좋은 레나를 먼저 그 자리에 넣었다.

가르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빨리 배운 녀석을 동원할 수밖에…

이른 아침, 레나는 조심조심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영애님, 씻을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셔도 좋아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리에 가이단은 막 일어났는지 침대에서 몸을 쭈욱 펴고 있었다.

‘어머어머. 역시 귀족들은 잘 때 가운을 입는구나. 저건 내가 아직 세탁해보지 못한 건데… 수도에서 가지고 오신 걸까?’

레나는 눈동자를 굴려 이리저리 관찰하면서도 따뜻한 물을 침상 옆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수건을 든 채 얌전히 섰다.

하리에는 웬 처음 보는 시녀가 들어와서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를 또록또록 굴리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미묘하고 알쏭달쏭한 예법에 숙달되어있는 영애들은 아주 작은 몸짓도 예민하게 잡아냈다.

하리에 가이단은 결코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귀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으로 주위를 샅샅이 훑으려 노력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홀랑 벗어 던졌다.

“어? 어? 영애님, 아침에는 세안만 하신다고…”

“어제저녁에 씻긴 했는데, 밤새 땀을 흘렸나 봐요. 몸이 끈적하니 씻는 걸 도와주시겠어요?”

레나는 반라가 되어 스툴(stool, 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서양식의 작은 의자)에 앉은 하리에를 보며 진땀을 흘렸다.

큰일 났다! 난 아직 몸을 씻겨드리는 건 배운 적이 없는데!

‘그, 그냥 수건에 물을 적셔서 닦아드리면 되는 건가? 어딜 먼저 해야 하지? 그리고 어디까지 해야 하지?’

레나는 허둥지둥하며 그녀의 몸을 닦기 시작했고, 하리에는 빙그레 웃었다.

‘귀엽다.’

엉거주춤 서서 그녀의 몸을 닦는 이 시녀는 가까이서 보니 꽤 귀여웠다. 턱과 뺨 사이에 작게 볼록 솟은 젖살이 귀여워서 콱 꼬집어보고 싶을 정도다.

‘내가 좀 심했나? 얘 땀 흘리는 것 좀 봐.’

하리에는 조금 미안해져서 차근차근 일을 일러주었다.

“저기 탁자에 향수가 있어요. 노란색 것을 골라서 물에 풀어주시겠어요? 그리고…”

다행히 레나는 당황한 와중에도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들었고, 하리에는 눈앞의 시녀가 마음에 들었다.

* * *

가을이 찾아올 무렵, 콘라드 왕국에서 온 귀빈이 보스포에 도착했다.

테르탄 공작가를 상징하는 붉은 방패가 양옆으로 매달린 마차, 한 청년이 그 마차에서 내리며 총관의 인사를 받았다.

오래된 나무껍질 같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다듬고, 그와 비슷한 흑갈색의 눈동자를 빛내는 그 젊은 귀빈은 ‘팔라스 테르탄’. 테르탄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는 매우 젊은 후계자였다.

콘라드 왕국의 정계를 움켜쥔 라퍼트 테르탄 공작의 손자인 그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

내년에야 성년이 되는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교육을 받았는지 깍듯한 예의를 보였다.

“반갑습니다. 팔라스 테르탄이라 합니다. 한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모심에 빈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피로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시다면 가이단 영애를 먼저 만나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방으로 안내해드리죠.”

긴 여행으로 몸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멋진 모습으로 영애를 뵙고 싶다는 팔라스의 요청에, 총관은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팔라스 테르탄을 따라온 열다섯 명의 호위기사도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 각자의 방을 배정받아 흩어졌다.

남은 두 명의 기사는 공작의 손자를 따라왔으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말에 문 앞을 지켰다.

혼자가 된 팔라스는 창가 탁자에 작은 보석상자를 놓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퓨우!” 여독이 섞인 날숨을 뱉었다.

소년의 익살스러움이 채 빠지지 않아 옅은 미소가 항시 걸려있는 그는 저의 반듯한 코를 꼭꼭 누르면서 생각했다.

‘왜 할아버지는 이런 부탁을 하셨을까?’

그의 할아버지인 라퍼트 테르탄 공작은 무척이나 자상한 분이셨다. 콘라드 왕국의 정계를 손에 쥐고, 유일한 왕자인 에릭 드 예리엘을 외손자로 둔 최고 실권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팔라스 테르탄을 예뻐해서 가능한 한 자신의 주변에 손자를 두려고 했다.

그 덕분에 팔라스의 아버지인 ‘미디언 테르탄’은 결혼한 후에도 공작의 저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귀족들은 아무리 후계자라 할지라도 결혼 후에는 다른 저택에서 생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그런 일반적인 상식은 공작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팔라스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비록 대귀족이어서 물질적인 풍요와 양질의 교육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가족 어른의 보살핌을 받는 것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건강하게 자랐다.

팔라스는 스스로도 자신이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예리엘 왕가를 제외하면 콘라드 왕국 최고라 할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가 가정도 화목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할아버지가 부탁한 일은 다소 뜬금없고 이상한 것이었다.

팔라스 테르탄은 라퍼트 테르탄 공작이 그를 방으로 부른 순간을 떠올렸다.

+ + +

팔라스는 늦은 시각에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았다.

이미 해는 떨어져서 제아무리 공작의 저택이라 할지라도 등불을 집중적으로 밝혀놓은 곳을 제외하면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일까? 아까 저녁도 같이 먹었는데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걸까?

찾아가 보니 할아버지는 본인의 집무실에서 귀한 얼음물을 달그락거리며 허공을 바라보고 계셨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마다 하는 할아버지의 오랜 버릇이었는데, 일렁이는 촛불에 비친 그의 주름살은 평소보다 더욱 깊고 어두웠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어서오거라. 늦은 시간에 미안하구나.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단다.”

할아버지는 자상하게 웃으며 긴 안락의자에 손자를 이끌어 앉히곤 말했다.

“실은 네게 혼약이 들어왔단다.”

“혼약이요? 음.. 하지만 제게 결혼은 이르지 않나요?”

손자의 반문에 할아버지는 정확하게 잘 말해주었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의 주름이 사방으로 번졌다.

“그렇단다. 아직 너무 이르지. 하지만 혼약을 청한 곳이 어디인지 아느냐? 오른 왕국의 가이단 후작가란다.”

“가이단 후작가요? 그… 저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그 가문이지요?”

테르탄 공작가는 콘라드 왕국 남부에 거대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팔라스의 아버지인 미디언 테르탄이 서부 변경백이어서 또 하나의 영지를 추가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륙 남서쪽에 있는 오른 왕국의 동부 변경백인 가이단 후작가와 대륙 동남쪽에 있는 콘라드 왕국의 서부 변경백인 테르탄 공작가는 서로 국경을 맞댄 사이였다.

“잘 알고 있구나. 그쪽에서 하리에 가이단이라는 어여쁜 아가씨를 손주며느리로 데려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단다.”

“으음…”

팔라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귀족의 의무.

아직 성년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 정도는 팔라스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가문일지라도 홀로서기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결국 쓰러지는 날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귀족 가문들은 혼약을 통해 서로의 등을 맞댈 우방을 구하는 것이 기본이었고, 그 의무는 젊은 후계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대가족의 품에서 곱게 자란 팔라스는 아직 영애들을 본격적으로 만나보지도 못했다. 그는 이제야 사교계에 발을 들일 시점을 찾던 중이었다.

그래도 결혼이라니!

팔라스는 어쩐지 부끄러웠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대륙 어딘가에 배우자가 될 여인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렜다.

그는 갓 청년이 된, 어쩔 수 없이 풋풋한 청춘이었다.

팔라스는 큼큼, 귀족의 의무를 떠올리며 수줍게 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가문에 보탬이 될 수 있다니 기쁘네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답변은 의외의 것이었다.

“너를 장가보내려는 것이 아니란다. 가이단 후작가가 대단한 가문인 것은 맞지만, 결국 외국의 가문이지. 혼약은 거절될 것이란다.”

“…그럼 제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죠?”

팔라스는 조금 실망한 투로 물었다.

어차피 혼약하지 않을 거라면 그냥 거절하고 알려주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사실 누가 이 테르탄 가문과 이어지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미 많은 청혼이 들어왔다가 거절되었을 텐데.

라퍼트 테르탄은 몸을 일으켜 한 책상 서랍에서 보석 상자를 꺼냈다.

“이걸 하리에라는 아가씨에게 전해주거라. 그래도 명망 높은 가이단 가문인데 혼약 요청을 맨입으로 거절할 수는 없잖니? 네가 가서 면전에 대고 거절하라는 뜻은 아니란다. 이것만 전해주고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와도 좋단다. 거절은 나중에 내가 할 테니까, 여행이라도 가는 셈 치고 다녀오거라.”

할아버지가 내민 보석 상자 안에는 어둠 속에서도 검붉게 빛나는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팔라스는 ‘이렇게 번거롭게 거절할 필요가 있나?’ 생각하면서도 그 상자를 받았다.

+ + +

팔라스는 창가로 들이치는 외국의 바람을 쐬며 의문을 이어갔다.

그는 어느새 커다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꺼내어 손에 쥐고 있었다.

‘아차! 보석을 이렇게 만지면 안 된다고 했었나?’

어떤 보석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간혹 손기름이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화들짝 놀라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쥐고 훑어봤으나 다행히 손자국은 남지 않았다.

한데 기묘한 보석이다.

이 검붉은 색의 보석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단단해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안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듯 빛을 반사하는 각도가 시시각각 변하였고, 팔라스는 먼 길을 오는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보석을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 똑똑

“팔라스님! 영애를 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중들 시녀를 들일까요?”

“들여보내세요.”

팔라스의 허락과 함께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시녀가 옷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테르탄 공작가에서부터 이곳까지 따라온 그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공자의 겉옷을 벗기고, 근사한 새 옷을 입힌 뒤, 스카프를 포함한 몇몇 장신구를 달아주었다.

머리를 빗질하고, 얼굴에 가벼운 분을 바르고, 보기 흉한 잔털이 어디 없는지 확인한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팔라스는 이런 시중을 받는 게 일상이라 익숙했지만 최근에는 조금씩 꺼려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성에 눈을 뜨고 있었고, 시녀들은 이쁘장한 젊은 여성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또래의 어느 귀족과 대화를 나누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시녀와 거사를 치른다니!

대가족에서 자란 팔라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계신 저택에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더군다나…

‘얘네들은 평민이잖아.’

테르탄 가문의 고고한 자부심은 평민과의 추접스러운 관계를 용납하지 않았다.

팔라스는 저급한 욕망을 이성으로 가볍게 짓누르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혼약이 오갔으나 어차피 거절될 영애를 향했다.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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