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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0

60화 축제의 밤 (2)

60화 축제의 밤 (2)

“보여주다니. 무엇을?”

디네베가 창틀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귀에 속삭였다.

“어서. 시간이 없어.”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순간 몇 초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디네베를 품에 안은 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추락하던 내 몸의 속도가 느려졌다. 중력이 수십 배는 약해진 느낌이었다. 이어 사뿐, 종잇장 떨어지듯 나는 지면에 내려앉았다.

“무서웠니?”

디네베가 나를 보며 웃었다.

그녀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하는데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삭제됐다.

나는 디네베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덤불 속을 지나고 있었다.

“비밀 통로야. 아버지도 애용하는.”

“아버지? 쿠훌린을 말하는 거야?”

“내 아버지가 쿠훌린 말고 또 있니?”

어색했다.

정말로 디네베라면 하지 않을 표현.

“너는 지금 은월목의 신녀인 거야?”

“응. 나는 지금 신녀야.”

덤불의 어둠이 사라지자 별하늘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높은 벽이 있었다.

우리는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지나온 것이다.

“놀라기는. 비밀 통로라고 했잖니?”

디네베가 내 손을 잡으며 앞장섰다.

달빛에 물든 그녀의 은백색 머리카락은 투명해 보였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피부까지도.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니?”

“응?”

“내가 미성숙한 육체에 깃들었다는.”

아.

“오래 걷기 힘들다는 이야기야.”

나는 디네베를 등에 업으려 했다.

디네베가 고개를 저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디네베가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아이같지 않은 미소였다.

“이리 나오렴.”

디네베가 손짓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먼지가 들판 위로 뛰어내리더니 디네베의 발치로 달려갔다.

그제야 나는 디네베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말한 디네베가 먼지 앞에 웅크려 앉았다.

“먼지야.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니?”

나는 또다시 시간이 증발하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1초마다 찍히는 사진처럼, 눈앞의 장면이 툭 툭 끊기며 이어졌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다.

먼지의 몸이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커졌다. 그렇게 예닐곱 장의 사진이 눈앞을 흘러갔을 때, 먼지는 커다란 은빛 늑대가 되어 있었다.

“내 손을 잡아.”

어느새 먼지의 등에 올라탄 디네베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자그만 손을 바라보는데, 세찬 바람이 눈을 찔렀다.

나는 달빛의 들판을 질주하는 먼지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이 아이의 진짜 이름을 아니?”

나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상황이 현실감이 없었다.

꿈일까.

아니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너는 이 세계에 대해 알고 있구나.”

알고 있다.

웹소설 무한회귀.

그러나 다르다. 내가 읽은 세계와 이 세계는.

“세계가 덧씌워지며 변수가 생겼어.”

변수.

떠오르는 것은 있었다.

첫 번째는 나. 두 번째는······.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가 덧씌워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도 몰라.”

먼지는 은빛의 언덕을 달려 오르고 있었다. 익숙한 곳이다. 불과 수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거의 다 왔어.”

속삭임 이후, 나는 달빛나무 아래 서 있었다. 디네베의 손을 잡고.

다시 작아진 먼지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헥헥 혀를 내밀었다.

“원래 ‘이 세계’의 신녀는 루나프레나가 될 예정이었어.”

“루나가······ 신녀?”

“네가 루나프레나를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있었다.

달빛나무 아래서, 마치 마법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던 모습.

왜 지금껏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지? 루나는 마법사가 아닌데.

“그때 루나프레나는 자신도 모르는 새 신력을 이어받을 뻔했어. 그것을 막고 루나프레나의 운명을 바꾼 것이 이 아이, 디네베야.”

“디네베가 왜······.”

“이 아이는 알고 있었으니까. 신력을 이어받은 자가 종래에 어떻게 되는지.”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네가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해. 디네베도 머리로 알았던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그때, 디네베는 본능적으로 알아챘어. 신녀가 된 루나프레나의 미래를.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가로챘던 거야. 루나프레나에게 닥쳤어야 할 운명을. 가엾게도.”

그녀의 눈동자는 투명하게 젖어 있었다.

“디네베는 신체(神體)로서 터무니없이 높은 잠재력을 지녔어. 그래서 루나프레나의 운명을 가로챌 수 있었지. 하지만 이 아이의 몸은 신체가 되기에는 너무도 미성숙했고, 그래서 모순되게도 신녀의 소임을 할 수 없게 된 거야.”

“디네베는 자기가 신녀인 줄 모르는 거야?”

“응. 이 아이는 자각하지 못했어. 지금 너와 함께 겪는 일도 흐릿한 꿈 정도로만 여길 테지. 디네베의 육체가 성숙할 때까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몸에 갇혀있어야 해.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오늘 너를 이곳으로 데려와야 했던 거야. 들어가자.”

들어가자고?

어디를?

“은월목 안의 이공간(異空間).”

디네베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세계수의 정원으로.”

나를 향해 웃는 디네베의 얼굴이 달빛나무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은빛의 기둥이 나의 시야를 덮었고, 모든 것이 새하얘졌다.

잎새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람 부는 은빛 들판 위에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달빛나무 언덕의 풍경이 수면 너머의 세계처럼 아른하게 보였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정원이야.”

디네베의 얼굴에서는 묘한 생기가 느껴졌다.

“너는 이 세계를 알고 있어.”

“······뭐라고?”

“가자.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아.”

디네베의 손길이 부드럽게 나를 이끌었다.

수많은 은빛 나무가 우리의 곁을 스쳤다. 나는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가끔 나무나 들풀 사이에서 처음 보는 형태의 그림자들이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바라봤다. 동물인가? 아니면 인간?

“그들과 너무 오래 눈을 마주치지 마.”

“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야. 과거의 어떤 순간을 살았던, 아니면 미래의 어느 날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린 자들.”

디네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심연 속의 울림처럼.

“혹은 이 세계가 덧씌워지며, 원래는 사라졌어야 했는데 기형적으로 존재를 잃지 않은 자들. 그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해.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영원히 잃어버렸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이렇게 불러. 세계를 잃어버린 자.”

디네베가 나를 돌아봤다.

“너는 그들을 만난 적이 있어.”

“내가? 그들을?”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이유는 우리가 덧씌워진 세계에서 왔기 때문이야. 그들의 관점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세계를 지워버린 침략자인 거지. 그들에게 이성은 존재하지 않아. 오직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는 본능과, 자신들의 세계를 사라지게 만든 이를 향한 복수심만이 남은 자들이지. 그래서 그들은 늘 세계의 비틀림을 찾고 있어. 그러다가 미세한 비틀림을 찾아내면 집요하게 달려드는 거야. 자신의 세계를 찾기 위해.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디네베의 말뜻을 깨달았다.

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날, 광산의 숲에서 균열을 파괴할 때부터.

“그래. 그들이야. 카인이 ‘차원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그렇다면 세계의 비틀림이란.”

“카인이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이 세계에는 어쩔 수 없는 비틀림이 생겨. 아마도 이 세계가 덧씌워진 것과 연관이 있겠지. 그렇게 카인의 회귀가 반복될 때마다 비틀림은 중첩되고, 종래에는 균열이 일고 마는 거야. 균열이 발생한 뒤의 ‘그들’은 더욱 무서운 존재가 돼. 시간이 되감길 때마다 더 증오하고, 더 많은 무리를 이루고, 더 빠르게 목표를 추격하지.”

그랬던 거였다.

카인이 회귀할 때마다 차원의 그림자가 더욱 강해지고, 더 빠르게 등장했던 이유는.

“나는 네게 하는 말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야. 카인에게도 그랬듯이.”

“카인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했어?”

“말해줄 수 없어.”

“왜?”

디네베가 살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니까.”

무슨 의미일까.

“그때의 내가 한 말을 지금의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미성숙한 신체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렴.”

디네베가 멈춰 섰다.

눈앞에는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은빛의 나무가 서 있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이야.”

나는 세계수의 끝을 보려 했지만 볼 수 없었다.

어찌나 높이 솟아올랐는지, 마치 뿌리처럼 보이는 수많은 나무줄기는 멀고 먼 밤하늘 속으로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미래를 보고 있니?”

“미래?”

“내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알겠느냐는 뜻이야.”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까 네가 말했었지? 덧씌워진 ‘이 세계’에서, 원래는 디네베가 아닌 루나가 신녀가 될 운명이었다고.”

“응. 맞아.”

“신녀가 된 자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어.”

디네베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그드라실의 저주. 은월병으로.”

은월병.

“오직 신녀만이 겪는 저주는 아니야. 은월병은 세계수의 혈족인 ‘이그드라실’에게 무작위로 찾아드니까. 다만 신녀가 된 자에게는 예외가 없을 뿐. 얼마 전에 장례를 치렀던 ‘엘리샤 이그드라실’의 어머니처럼.”

“엘리샤 이그드라실? 엘리샤가 세계수의 혈족이라는 말이야?”

“맞아. 엘리샤는 이그드라실 혈족이야. 이그드라실의 피가 진한 이들은 리아논과 디네베처럼 은백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 엘리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엘리샤는.

“엘리샤는 마법으로 색을 바꿨으니까.”

그랬던 건가.

“디네베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이 아이에게는 벌써 은월병의 징조가 드러나고 있어. 너무도 진한 ‘피’를 지닌 탓에, 그리고 너무도 어린 나이에 신력을 받아들인 탓에.”

“리아논보다도······ 먼저?”

나는 쿠훌린과 벨락이 처음 만났을 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치유법은 찾았나?’

‘리아논은.’

‘······아직은 괜찮아 보이네. 그러나 시간문제일 테지.’

“그래. 리아논보다도 먼저.”

그제야 나는 디네베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은월병.

나는 그 병에 대해 알고 있다.

소설 속의 루나도 걸리는 병이니까.

“이제야 알았니?”

디네베가 웃었다.

“데미안. 너만이 이그드라실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어.”

나는 소설 속의 루나가 어떻게 은월병을 극복하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소설에서 루나의 가족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은월병의 치유에 성공한 루나가 왜 그렇게 가슴을 쥐고 오열했던 것인지.

“이그드라실에 손을 얹어보렴.”

나는 세계수의 기둥에 손을 얹었다.

나의 머릿속에 수천, 수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마도 그것은 세계의 기억.

세계의 고통.

혼돈.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렴. 가여운 디네베를 위해서라도. 루나프레나를 위해서라도.’

거대한 힘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했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의 시선을 느꼈고, 어딘가로 이끌리는 감각을 느꼈다.

나는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전에도 이것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포식한 적이 있다.

‘이그드라실이 네게 힘을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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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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