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61

60. 소꿉친구 – 남녀관계

근사하게 치장된 응접실에서 남녀 두 귀족이 눈을 맞췄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팔라스 테르탄이라 합니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하리에 가이단이라 합니다.”

팔라스 테르탄은 혼기가 찬 영애에게 보이는 예법을 취했고, 하리에 가이단도 곱게 인사했다.

한데 하리에 가이단이 보인 예법은 눈여겨볼 점이 있었다.

손으로 깊이 파인 가슴골을 가리지 않고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붙든 인사. 그건 남편, 또는 약혼자에게나 보이는 예법이었다.

팔라스는 안쪽까지 보이는 가슴골에 당황해 눈을 돌리고 헛기침했다.

하리에가 말했다.

“고작 저 같은 여자를 만나러 예까지 걸음하게 해서 송구합니다. 행여 불쾌하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럴 리가요. 이토록 아름다우신 영애를 뵙게 되어 무한한 기쁨입니다. 먼저 도착하셨다 들었는데, 저야말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리에는 얼굴이 붉어진 그를 보며 쿡쿡 웃었다.

이제 막 만났지만, 첫인상은 합격이다.

아니지, 내 처지에 합격은 무슨.

“차를 한 잔 드릴까요?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뭐든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엇! 그렇게 직접 따라주시지 않으셔도…”

“이래 봬도 다도를 조금 배웠답니다. 차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여기 있어요. 입맛에 맞으실런지…”

팔라스는 기울어진 그녀의 가슴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머금었다.

“향긋하네요. 처음 맛보는 차인데 입안이 상쾌해지네요.”

“신성왕국에서 온 ‘푸니타’로 달인 것이랍니다. 저희 오른 왕국은 제롬 신성왕국과 가까우니까요. 콘라드 왕국은 아이셀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혹시 들려주실 것이 있으신가요?”

“음- 저는 수도에만 있어서 아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일전에…”

하리에와 팔라스는 멀리 떨어진 두 왕국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리에는 신성 왕국의 검소하면서도 우아한 문화를, 팔라스는 마법 왕국으로 불리는 아이셀 왕국의 신비로운 문물을 꺼냈다.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소녀의 긴 잡담에 피로하셨을까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눈앞의 영애는 박식했고,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는 여자였다.

하리에는 입을 가리며 살포시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기쁘네요.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쉬었다가 저녁을 함께하지 않으시겠어요?”

“먼저 권해주시니 영광입니다. 곧 뵙겠습니다.”

“벌써 저녁 시간이 기다려지네요. 늦지 않을게요.”

하리에는 다시 한번 일전의 ‘그 예법’을 취했고, 팔라스는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하다가 조금 달라진 인사를 보였다.

가슴에 달린 스카프를 검지로 짚은,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라는 의미가 담긴 예법이었다.

하리에는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팔라스는 들뜬 심경을 가라앉히며 방으로 돌아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할아버지의 명을 떠올렸다.

– 예의상 보석만 건네주고 돌아올 것.

할아버지는 이 결혼을 거절하겠다고 하셨다. 어차피 거절할 것인데 왜 번거롭게 보석을 건네주라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결혼은 어른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하지만 예쁜데… 말도 잘 통하고…’

차분한 웃음과 우울함이 담긴 초록색 눈동자.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했음에도 어쩐지 처량함이 감도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인사. 그녀는 두 사람이 이미 혼약이라도 한 것 같은 예법을 보였다.

팔라스는 이제 집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듯한 그녀의 예의에 가슴이 찔린 느낌이었다. 그건 그녀의 처량한 분위기와 맞물려 뽑히질 않았다.

‘결혼하지도 않을 여자한테 이렇게 정을 주면 안 되는데…’

귀족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예법으로 몸을 꽁꽁 가린 채 정확히 필요한 것만 계획적으로 내보일 것.

아마 하리에 가이단이 보인 그 인사도 계획적인 것이겠지.

허나 방금 팔라스가 마지막으로 보인 인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든다.

‘어쩌지? 큰일 났네.’

앞으로 이 주일은 더 이렇게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두 귀족이 먼 길을 행차해 만났는데 고작 하루 이틀만 보고 돌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선전포고가 아니고서야…

팔라스 테르탄은 어지러워진 심경을 다그치며 시녀들의 손길을 받아 다시 근사하게 꾸며졌다.

그는 이제 시녀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 * *

“어이고, 무겁네.”

“거기는 술통이 잔뜩 들었으니까 조심해.”

레오를 포함한 스무 명의 하인들은 정말 오랜만에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들의 등과 양손에는 봇짐이 한가득히 들려있었다. 연초와 술, 수건, 속곳 등의 생필품들로, 모두 영주성에서 보급되지 않거나 부족하게 나누어지는 것들이었다.

영주성으로 끌려와 두 달 가까이 일하면서 생활에 불편함을 겪은 하인들과 시녀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생필품이 부족해요. 지금 입고 있는 속곳만 한 달은 입은 것 같아요. 수건도 턱없이 부족하고요.”

“맞아요. 술이랑 연초 배급도 너무 적고… 이제 가을인데 담요도 필요합니다.”

“갈아입을 옷도 부족해요!”

본래 하인과 시녀가 많지 않던 영주성에서 두 귀빈을 모시느라 사람들을 끌어모으면서 생긴 문제들이었다.

총관과 집사도 나름대로 필요한 것들을 미리 챙겨놓고 배급해주었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제야 집사는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돈을 내어주었고, 레오를 포함한 하인들에게 물건을 사 오라고 지시했다.

물론, 이 주일 내로 다들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며 담요까지는 사주지 않았다.

영주성으로 돌아온 하인들은 짊어지고 온 물건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레오도 봇짐을 다 털어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따로 챙겨둔 것이 있었다.

레나에게 전해줄 생필품들이다.

레오는 물건을 사는 김에 사비를 조금 써서 기왕이면 질 좋은 것들을 따로 구입했다.

보드라운 수건과 속곳들, 레나가 좋아하는 몇 가지 간식거리, 얇은 담요와 신발 같은 것들이었다.

‘레나가 좋아하겠지?’

그는 시녀들의 숙소 앞을 잠시 서성이며 레나를 기다렸다.

{추적술} 덕분에 그녀가 있는 ‘방향’은 언제든 알아낼 수 있지만, 실내에서 그걸 따라가느니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교대해 돌아온 레나가 물었다.

“레오! 무슨 일이야? 벌써 일이 끝났어?”

“레나, 이거 받아.”

“이게 다 뭐야?”

“오늘 집사님이 생필품을 구해오라고 돈을 주셨거든. 네 것은 따로 사 왔어. 잘했지?”

“생필품? 난 많이 챙겨와서 괜찮은데… 여튼 고마워. 그런데 뭘 사 왔길래 이렇게 많아?”

“여기 담요도 있고, 신발도 있고…”

“신발은 또 뭣 하러 사 왔어. 잠깐, 너어? 여행경비로 쓰겠다는 돈까지 썼구나! 으이그.”

“헤헤, 괜찮아. 여기서 일하면서 돈을 좀 벌었으니까. 그리고 여기 수건도 있고, 속곳도 있…”

“꺄악!”

레나는 얼굴이 벌게지면서 레오의 손에 들린 속곳을 빼앗았다.

“레, 레, 레, 레오! 이, 이런 건 왜 사 왔어!”

“어? 다른 시녀들이 쓸 속곳을 사면서 같이 샀지. 좀 더 좋은 거로 골랐…”

레나는 그만 말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귀엽다.

“아, 알았으니까 빨리 가.”

“왜 이래? 아무튼, 전해줬으니까 난 간다. 이따 저녁 같이 먹을 거지?”

“그, 그래.”

레오는 ‘아이고 늦었다. 혼나겠네.’라고 생각하면서 떠났고, 레나는 숙소로 돌아와 화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질했다.

‘하유. 왜 이런 걸 사 와서는. 부끄럽게.’

그녀는 레오가 사다 준 물건들을 하나씩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담요는 여기에 놓고, 신발은 지금 바로 신어보고(어머! 딱 맞네!), 수건도 잘 개어서 침대 머리맡에 두고, 속곳은…

다시 부끄러워하면서 속곳을 개어놓는데,

‘…잠깐만.’

레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눈동자를 위로 들어 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아까는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레오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속곳을 집어 들었다.

‘……’

레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레오와 레나는 어렸을 때는 손을 잡고 다니다가 언제부턴가 손을 놓고 서로 이성적으로는 낯을 가리는 사이였다. 가끔 같이 일하다가 손이 스치거든 한동안 눈을 못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데 방금 레오의 행동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오에게는 속곳을 건네주는 게 특이하다고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레오는 레나와 두 번이나 결혼해봤다. 데모스 마을에서 결혼 전까지 신혼집을 차려보기도 했고, 수도 루테티아에서 화장실만큼 작은 집에서 함께 살다가 결혼하기도 했다.

반면 레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레오는 그녀에게 풋풋한 소꿉친구였고, 함께 여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배우자가 되지 않을까 설레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레오는 결코 속곳을 덥석 집어서 여상히 내밀 사람이 아니었다. 담요에 숨겨두고 건네준 다음에 도망쳐버렸으면 모를까…

레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습관도 변하고, 인간관계도 변하고, 성격까지 변해버린 레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지만 그동안 “너 어딘가 바뀐 것 같아.”라고 여러 번 물어보았음에도 레오는 얼렁뚱땅 넘어가기가 일쑤였고, 속 시원한 대답을 한 적이 없었다.

의심스럽다. 그리고,

‘뭘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거지?’

서운하다. 언제부터 우리 사이에 비밀이 있었다고!

그녀의 서운함이 실망으로 넘어가려 할 때, 다른 시녀가 숙소로 들어와 말했다.

“레나, 교대시간 다 됐어.”

레나는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후다닥 가이단 영애의 방을 향했다.

영애는 의자에 등을 깊이 묻어 몸을 쉬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하리에 가이단은 며칠째 팔라스 테르탄과의 만남을 반복해서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요즘 그 더러운 왕자들에게 시집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팔라스 테르탄은 정말 괜찮은 남자였다. 성년도 되지 않아서 나이가 세 살이나 차이나지만, 그게 뭐 대수냐. 그는 보기 드물게 건실한 귀족이었다.

처음에는 가슴골 좀 보였다고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귀여웠는데 며칠 대화해보니 그의 진면목은 따스한 마음씨에 있었다. 어쩌다가 테르탄 공작가만 한 대가문에서 그렇게 말랑한 심성을 가진 귀족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은연중에 새어 나오는 그의 진심과 올곧은 성품에 빠르게 매료되고 있었다.

‘귀족답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도 귀족스러운 남자…’

먼 옛날, 아카이아 제국 시절의 귀족들이 그랬을까?

정정당당한 예법을 보이고, 이종족들에게 괴롭힘당하는 평민들을 위해 재산을 털어 군대를 모집하고, 몸소 선봉에 서던 귀족들…

‘훗, 내 눈에 콩깍지가 쓰이긴 쓰였구나. 과장이 심해졌는걸?’

하리에는 등받이 의자에 몸을 깊이 묻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때, 최근 마음에 든 시녀가 불퉁한 얼굴을 들고 나타났다. 이름이 레나였었지? 왜 저러지?

그 시녀는 하리에를 다시 치장해주기 위해 다가왔으나, 하리에는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어요. 많이 피곤하네요.”라고 말했다.

시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곁에서 대기했다.

평소처럼 호기심에 휩싸여 눈동자를 굴리지 않고 눈을 불만스럽게 뜬 시녀의 모습에 의아해진 하리에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어쩐지 화난 것 같아 보이네요.”

“네?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혹시 힘들어서 그러신가요?”

“전혀요! 집사님과 시녀장님이 잘 챙겨주셔서 힘든 일은 결단코 없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말해보세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도움을 드릴게요.”

하리에는 평소와 달리 시녀의 개인적인 사정을 물었다.

귀족들은 평민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살아가는 세상이 워낙 다르고, 대다수의 평민은 불평불만을 토로할 뿐이어서 깊이 있는 대화의 상대로 삼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간혹 평민 출신의 집사, 기사 또는 자신을 길러준 유모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귀족들이 있다고 들었으나, 하리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과 말을 섞어 무슨 즐거움이 있다고?

그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평민들을 괴롭히지 않는 정도면 충분히 친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은 아카이아 제국 시절의 귀족들을 떠올리고 조금 감성적이 되었을 뿐이다.

이 시녀는 마음에 들기도 하고.

한데 그 시녀는 친구가 조금 변해서 고민일 뿐이라며 하리에의 도움을 거절했다.

몇 마디의 대화를 더 나눠보니 남자친구와 관련한 이야기였다.

‘내가 나서서 도와줄 문제는 아니었구나.’ ─ 라고 생각하며 하리에는 그녀를 격려해주었다.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남녀관계라는 게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Raising the Princess to Overcome Death

A Princess Is Raised After Death, Desperately Making Her a Princess, Princess is Raised by Death, RPOD, The Princess Is Raised After She Dies, 正規エンディングまで異世界ループ転生, 공주는 죽어서 키운다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19 Native Language: Korean
Minseo was trapped in [Raise Lena]. With the emotionless text, “[Starting Raise Lena]” he became Leo and was imprisoned in an unfamiliar worl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Uh-huh?” “Leo? Why the long face? You! Are you messing with me again?” There, he met his childhood friend, Lena, skillfully picking berries. The lovely Lena. Leo marries her in a peaceful mountain village… [Lena is married! Congratulations.] [You have failed to clear Raise Lena.] [Restarting.] The happiest moment. Lena disappeared. And…. “Leo! Are you listening to me?” “Huh? Lena!” “Why have you been spacing out? And why are you looking at me like that? You wanna get beat up?” Lena, clad in thick leather armor and a sword on her shoulder, stared at him with unwavering eyes. It was a different scenario.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