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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1

61화 겨울밤의 마법

61화 겨울밤의 마법

차가워진 바람이 청량한 향을 뿌렸다.

겨울의 입맞춤은 은월섬의 많은 부분을 희게 물들였다. 가끔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눈송이들이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별똥별이 쏟아지는 듯했다.

나는 40레벨의 벽을 넘었다.

◎ 데미안 라플라스 [15세], [Lv.41]

그에 따라 적성 레벨과 스킬 레벨도 올랐다. 그중에서도 검술 적성이 5레벨이 된 것이 가장 큰 쾌거였다. 물론 리메이크 발현을 위한 RP의 최소 보유량도 늘어났다.

[현 플레이어 레벨(Lv.41)에서 스킬 발동을 위해서는 최소 40의 RP가 필요하다.]

42레벨인 카인과는 1레벨 차이로 간극을 좁혔다. 루나도 2레벨 성장해 46레벨이 됐다. 반면 세실은 여전히 49레벨이었다. 세실이 50레벨의 벽을 넘으려면 블레이드의 봉인이 해제되어야 할 듯하다.

나의 빠른 성장에 많은 이가 놀라워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짐작 가는 이유는 있다. 디네베와 함께 경험한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정원. 그곳을 다녀온 뒤로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

‘이그드라실이 네게 힘을 줄 거야.’

그때 나는 새로운 혼돈을 포식했다.

아마도 세계수와 연관이 있는.

【■■의 파편을 포식합니다.】

나는 새로운 혼돈을 제어해 보려 했다. 그러나 갖은 방법을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 느껴지기는 했으나, 외부로 실체화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쉬웠다. 달빛나무 축제일에도 아스트레아의 천칭 메시지가 떠올랐기에, 나의 리메이크 위력은 최소 57퍼센트 감소했다. 혼돈의 제어가 더욱 절실하다는 의미였다.

엘리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음. 모르겠어. 나는 그 ‘혼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아니다. 분명 경험한 적은 있는데. 아아, 언제였더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아하하하!”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나는 이전보다 빠르게 레벨이 올랐다. 어쩌면 목표가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리아논과 디네베의, 그리고 향후 찾아들 루나의 은월병을 고치겠다는.

달빛나무 축제 이후 리아논은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은월병에 걸린 자는 점차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피부에는 은색 반점이 돌기 시작하고, 그 반점이 전신을 덮으면 사망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

“흐흑······! 흑······!”

루나는 자주 눈물을 보였다.

리아논의 병세가 악화된 데다가, 디네베마저 빠르게 병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오늘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렴. 가여운 디네베를 위해서라도. 루나프레나를 위해서라도.’

사실을 알게 되면 루나는 더욱 절망할 테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가자 카인! 오늘은 꼭 이기는 거야!”

울지 않을 때의 루나는 평소보다 더 활발했다. 요즘 우리는 2대2 대전을 벌였다. 나와 세실이 팀을 이루고 루나와 카인이 팀을 이뤄서.

트리스탄도 끼고 싶어 했기에 종종 케일라를 포함해 3대3 대전도 벌였다. 케일라는 입단 시험에서 카인에게 패배했던 녀석으로, 나는 그녀가 트리스탄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겼어.”

세실의 단골 멘트였다.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루나의 친화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줬다. 세실은 늘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다녔다. 나는 이제 예전만큼 카인을 경계하지 않는다. 카인의 표정과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카인은 특히 루나와 가까워졌다. 엄밀히 말하자면 루나가 카인을 은근슬쩍 따라다녔다. 소설에서도 루나는 카인에게 호감을 드러냈었다.

“아하하! 카인! 이것 좀 봐!”

그렇게 우리는 친한 친구처럼, 가족처럼 어우러졌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나의 현실 세계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니까.

때때로 나는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을 느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나에게는 섬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

“달빛나무 언덕이 환하게 빛나고 있겠군.”

창밖의 보름달을 보며 카인이 중얼거렸다.

늦은 밤, 카인은 할 말이 있다며 내 방에 찾아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침대에 누워 보름달을 바라봤다. 디네베와 함께 세계수의 정원을 향했던 날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창틀에 기대앉은 이가 디네베가 아닌, 카인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구경하러 갈까? 데미안.”

농담 삼아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카인의 표정은 진지했다.

“지금?”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카인은 웃고 있었다. 함께 퀵피를 탔던 날 처음 보았고, 요즘은 종종 드러내는 그의 순수한 미소.

“재밌을 거 같긴 한데, 쿠훌린에게 혼나지 않을까?”

“몰래 나가면 되지.”

“쿠훌린의 귀가 얼마나 밝은지 너도 알잖아. 정말 귀신같다니까?”

카인이 낮게 웃었다.

“걱정 마.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까.”

녀석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자신만만한지는 몰랐지만, 나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렸을 때 어른들 몰래 밤길을 다니며 느끼는 두근거림 같은.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실도 데리고 가자.”

“세실은 아마 가고 싶지 않을걸.”

카인의 목소리에는 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오늘은 둘이서 가자. 데미안.”

그렇게 말한 카인이 훌쩍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빌어먹을 녀석.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니 곤충처럼 벽에 달라붙은 카인이 나를 향해 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뒤, 카인과 비슷한 자세로 벽을 타고 내려갔다.

“이쪽이야.”

지면에 도달한 나는 카인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별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덤불 속을 지났다. 나는 디네베와 함께 이 덤불을 지난 적이 있다.

환한 달빛이 얼굴을 비췄다. 뒤를 돌아보니 그날처럼 높다란 벽이 보였다. 우리는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넘었다.

“우연히 알게 된 비밀 통로야.”

카인이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뭐야. 달이 뜨면 돌아버리는 뭐 그런 건가?

그런데 나도 오늘 밤에는 정신이 조금 이상한 모양이다. 어느새 카인을 따라 달리고 있었으니까.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얼어붙은 들풀이 부서지는 소리. 바람 소리. 들릴 리 없는 별과 달의 노랫소리.

카인이 큰 소리로 웃었다. 뽀얀 입김이 밤하늘을 녹이듯 퍼져 나갔다. 녀석은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언덕까지 경주다! 데미안!”

카인이 속도를 높였다. 나도 달리는 발에 힘을 주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얀 들판을 달렸다. 나도 큰 소리로 웃었다. 지금까지 살며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해방감이었다.

.

.

.

달빛나무 언덕은 찬란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영향인지, 이곳은 계절과 상관없이 늘 빛나는 들풀로 가득했다. 달빛누에나방의 자줏빛 광채는 없었지만, 여전히 고고하게 몸을 세운 나무와 하얀 들풀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우리를 위해 안배한 것처럼 보름달은 달빛나무의 머리 꼭대기에 매달려 있었다.

“올라가자. 데미안.”

카인이 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 올라가도 되는 건가?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나 역시 손과 발을 움직이며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문득 광산의 숲에서 나무를 오르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보급로를 질주해 오는 기마병을 발견했었다. 그래서 테오 일행을 찾아 정신없이 달렸고, 모든 동료의 죽음을 겪었다. 카인의 죽음까지도.

고개 들어 카인을 봤다. 그의 등 너머로 달빛나무의 곧은 기둥이 마치 은빛의 도로처럼 길게 이어진 것이 보였다. 카인은 쉴 새 없이 달을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잎새와 나뭇가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달만 바라보며. 그 밖의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솨아아아아······!

돌연 잎새 흔들리는 소리가 폭풍처럼 귀를 채웠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세계수 이그드라실이 환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를 가득 메운 은빛 잎새들이 서로 부딪치며 잘게 부서졌다. 그 너머로 어떤 풍경이 떠올랐다.

두 소년이 나무를 오르고 있었다. 금발 소년과 흑청색 머리카락의 소년. 처음에는 나와 카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소년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작았다. 뒷모습만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환각이 붉게 바뀌었다. 피로 물든 방.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시체들.

복도를 달리는 두 소년.

그들의 외침. 분노. 절규.

“데미안.”

목소리와 함께 환각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었다. 정상에 오른 카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은빛의 길은 끝났다. 달빛을 감추려 애쓰던 잎새들도 발밑으로 사라졌다. 다시는 그를 방해하지 못할 곳으로.

“나는 세상을 바꿀 거다.”

카인이 달을 올려다봤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빛나는 천체를 바라봤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믿기지 않지만 나는 카인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다. 환각의 잔향에 홀린 것처럼.

광활한 밤하늘. 그곳에는 수많은 별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카인이 바라보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이지만 아득히 먼. 저 밤하늘의 달과 같은 세상.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물결처럼 시야가 바뀌었다. 나는 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카인의 감정을 느꼈다.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나는 내 눈동자가, 아니 카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감각했다. 그는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회귀하고, 또 회귀하며.

하지만 실패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왜 그들이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걸까.

‘나와 함께 가자. 카인.’

쿠훌린을 따라 섬에 들어오고 알게 된 것이 있다. 섬에는 다툼도, 증오도 없었다. 쿠훌린이라는 질서 아래 섬사람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세상처럼.

그렇다면 대륙도 가능하지 않을까. 대륙도 결국은 커다란 섬일 뿐이다. 누구보다 강력하고 올바른 힘이 질서를 잡는다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데미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걸까. 이곳에서 루나와 함께하고 싶은 것일까. 데미안은 내가 가려는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지난한 길이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불행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마법처럼 시야가 변했다. 나는 카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가 느끼던 그의 감정이 썰물처럼 물러나며, 눈앞에는 오연하게 빛나는 그의 영혼만이 남았다. 나는 내가 경험한 신비로운 감각을 또렷이 기억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의 과거와 진심을 봤다.

카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소설 속의 표현처럼 한결 고귀하고 수려해진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희게 번졌다. 그의 눈동자에 결의의 빛이 서렸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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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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