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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2

62화 다시 대륙으로

62화 다시 대륙으로

성으로 돌아온 나는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카인의 제안에는 답하지 못했다.

이전 같았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오늘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의 경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카인의 과거를 봤고, 시선을 공유했고, 감정을 느꼈다.

이것도 혼돈의 힘일까.

이그드라실로부터 얻은 혼돈이 달빛나무와 결합하며 어떤 화학 작용 같은 것을 일으킨 걸까.

[새로운 스킬을 해금하기 위한 조건이 충족되고 있습니다.]

나는 시스템 창에서 묘한 메시지를 발견했다.

‘조건이 충족되고 있다고?’

아까의 경험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저 새로운 스킬은 대상의 과거를 보거나, 시선을 공유하거나, 감정을 느끼는 스킬인 건가? 어쩌면 셋 모두일 지도.

‘그런 스킬이 가능하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지닌 스킬들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투성이였다.

나는 복잡해진 머리를 흔들며 잠을 청했다. 내 의식은 금세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튿날, 축제 이후 섬을 떠났던 라이칸이 돌아왔다.

***

“새로운 신녀는 아직입니까.”

이른 아침부터 성의 회의실에는 세 사내가 모여 있었다. 쿠훌린, 벨락, 그리고 라이칸.

라이칸의 물음에 쿠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리아논과 디네베의 병세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으니까.

쿠훌린은 치유법을 찾기 위해 섬을 떠나려는 고민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섬을 떠나면 더는 리아논과 디네베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차라리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단장답지 않습니다.”

라이칸은 쿠훌린의 얼굴만 보고도 생각을 읽은 듯했다.

“당신은 포기하는 자가 아니라 해결하는 자입니다. 늘 그래오지 않았습니까.”

쿠훌린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벨락과 라이칸. 그들은 쿠훌린과 형제처럼 자랐다. 아니, 친형제나 마찬가지였다.

“하센베르크에 관한 새로운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대륙의 이상 현상이 다시 발견됐습니다.”

대륙의 이상 현상.

이 또한 신녀의 예언 중 하나였다.

쿠훌린과 라이칸을 포함한 몇몇 단원이 끊임없이 대륙을 유랑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이 세계는 병들고 있다.

“흥미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흥미로운 소식?”

“대륙의 이상 현상을 찾아다니는 자가 있습니다. 세계의 빛이 꺼져가는 곳마다 검은 후드를 눌러쓴 검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흑기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흑기사.

오랜 세월 대륙을 유랑했던 쿠훌린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루베르 자작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티롤 왕국에서 오를리안 왕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듯합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오를리안은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잃었다.

국경을 맞댄 티롤 왕국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일 테지.

“하나 더. 최근 포착된 대륙의 이상 현상은 모두 티롤 왕국에서 벌어졌습니다.”

쿠훌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티롤 왕국의 영토가 병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전쟁은 단순한 침략이 아닌, 생존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루베르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지.”

“참전입니까.”

쿠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베르와는 선대 때부터의 오랜 인연이 있고, 지속해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다.

무시할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단장께서 굳이 참전할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티롤 왕국의 소드마스터는 셋. 오를리안 왕국도 셋입니다. 제가 단장 대리를 맡아, 필요한 인원을 선발해 떠나겠습니다. 루베르 자작도 납득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단장.”

제멋대로 결정한 라이칸이 벨락을 돌아봤다.

벨락이 씩 웃으며 쿠훌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막내한테 한번 맡겨 보자고. 그러니까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쿠훌린.”

벨락은 어린 시절처럼 말하고 있었다. 쿠훌린은 벨락과 라이칸을 돌아봤다. 일순이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소년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쿠훌린은 두 형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들을 마주 보는 그의 입가가 씩, 어금니를 드러냈다.

***

“뭐라고요? 또 섬을 나간다고요? 지금 제정신이에요?”

루나가 어이없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이어 바락바락 소리치기 시작했다.

“말 좀 해봐요! 지금 제정신 맞냐고요! 엄마가 저렇게 아픈데! 디네베도 저렇게 됐는데!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있는데!”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리아논과 디네베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그래서 식사 자리에는 나와 세실, 카인, 루나, 그리고 쿠훌린만이 있었다.

루나는 급기야 악을 썼다.

“언제까지 바깥으로 나돌 거냐고요! 가족을 내팽개치고!”

그저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루나는 펑펑 울었다. 그러면서 쿠훌린의 가슴을 마구 주먹으로 내리쳤다. 쿠훌린이 루나를 안으려 했지만, 루나는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어냈다.

“왜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거냐고요! 왜! 남인 것처럼! 엄마의 남편이잖아요! 디네베의 아빠잖아요! 그리고 나의······ 나의······!”

결국 루나는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인과 세실이 루나의 뒤를 쫓았다.

깊은 한숨을 뱉은 쿠훌린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데미안.”

쿠훌린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네가 그녀들을 신경 써주었으면 한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데미안.”

쿠훌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어진 내 말에 그의 표정은 완전히 변했다.

“저는 알아요. 은월병의 치유제를 만드는 방법을.”

***

루나는 방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리아논은 잠들었다. 루나는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엉금엉금 기어 방구석에 웅크렸다.

쿠훌린은 섬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루나는 너무 화가 났다. 딸이 그렇게나 울며불며 소리를 치는데도 들은 체도 않는 인간. 괴로운 일은 또 있었다. 카인과 데미안과 세실도 따라간다고 한다.

“흑······! 흐흑······!”

그동안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루나는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만 그들을 가족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들은 섬사람도 아닌데. 그 아저씨도 뻔질나게 대륙을 떠도는 몹쓸 인간일 뿐인데.

아니다. 루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엄마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대륙을 유랑했다는 것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루나는 엄마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래서 더욱 밝게 행동했다. 그러면 엄마가 행복하게 웃으니까. 그러면 혹시 엄마의 병이 나을까 봐.

헛된 바람이었다. 엄마의 병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됐다. 어린 소녀에게는 절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가슴에 쌓인 괴로움과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다.

“나는······ 바보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루나는 외로움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의지하던 이들이 내일이면 모두 떠난다. 성에는 아픈 엄마와, 디네베와, 무력한 자신밖에 남지 않는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나는 흠칫 놀라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나는 다가오는 이의 신발을 봤다. 데미안이었다.

“리아논.”

침대 앞에 멈춰 선 데미안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묘한 결의에 차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줘요 리아논. 내가 꼭 낫게 해줄게요. 디네베도.”

루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와 디네베의 병을 낫게 해준다고? 데미안이? 어떻게?

“그동안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은월병의 치유제를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있어요. 그 재료를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도. 하지만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했어요. 물론 지금까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나는 많은 준비를 했어요. 내가 아는 지식을 활용해, 어떻게 그 재료를 손에 넣어야 할지 고민했어요.”

루나는 홀린 것처럼 데미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나의 힘을 제어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해낼 거예요. 반드시.”

루나는 데미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엄마의 방으로 찾아와 저런 이야기를 할 리는 없었다.

“나는 쿠훌린도 지켜야 해요.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쿠훌린은 위험을 마주할지도 몰라요. 그의 삶에서 가장 큰 고비가 될 거예요. 그걸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데미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루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데미안의 저런 목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표현한 적은 없지만 친자식처럼 대해주신 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진심이에요. 나는 태어나 한 번도 리아논이 내게 주었던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데미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금은 거친 듯한 숨소리만이 공기를 울릴 뿐이었다.

이윽고 데미안이 침묵을 깨며 목소리를 내었을 때, 루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지막 인사를 남긴 데미안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

출발의 아침이 밝았다.

쿠훌린은 리아논과 디네베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춘 뒤 성을 나섰다.

루나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없었다.

마을을 벗어나며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혹시라도 루나가 울면서 뛰어나오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이 금발. 오랜만에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 하니 어때? 막 두근두근해?”

엘리샤가 실없는 말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이번에 대륙으로 떠나는 이는 많았다. 오를리안 왕국과 티롤 왕국의 전쟁 때문이었다. 카인이 함께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달빛나무에서의 일 이후, 카인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우리는 해안에 도착했다. 벨락도 함께 떠나고 싶어 했지만 섬을 돌볼 이가 필요했기에 쿠훌린이 억지로 남겼다.

“리아논과 디네베는 걱정하지 말게.”

쿠훌린과 벨락이 강하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은월호에 올랐다. 트리스탄과 케일라를 비롯한 섬의 아이들이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해안을 벗어난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겨울의 은월섬이 점점 눈앞에서 멀어졌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점처럼 작아졌다. 고작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을 머물렀을 뿐인데, 마치 고향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섬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난생처음 듣는 짐승의 울음소리.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카인과 세실도 귀를 기울이며 주위를 탐색했다.

소리의 진원지는 술과 식량 등의 물품을 싣는 나무통이었다. 나무통 앞에 모인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뚜껑을 열었다.

“우욱. 우웨엑······. 앗! 아앗······!”

뱃멀미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루나가 우리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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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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