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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4

64화 꼭두각시 (2)

64화 꼭두각시 (2)

이튿날, 우리는 1층 식당에 모였다.

라이칸과 단원들은 새벽에 먼저 출발한 듯했다. 남은 이는 나, 세실, 카인, 루나, 쿠훌린, 그리고 엘리샤가 전부였다.

“말도 안 하고 가버리다니. 서운해.”

루나가 아랫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엘리샤가 깔깔 웃으며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든든히 아침 식사를 한 후, 말에 올라탔다.

“곧 돌아올게요! 브란델!”

루나가 히죽 웃으며 브란델에게 손을 흔들었다. 브란델도 껄껄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도시의 해안에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다의 향을 품은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선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활기차게 움직였다.

“카인! 저기 봐! 배가 엄청 많아!”

루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긴, 태어나 처음으로 은월섬을 벗어난 거니까.

“와······. 진짜 대단해.”

루나는 입을 헤벌린 채 주위 풍경을 감상했다.

그런 루나를 보며 우리는 미소를 머금었다. 루나의 쾌활함에는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아······.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도시를 벗어날 때가 되자 루나가 아쉬워했다.

“저는 페르디나로 가겠습니다.”

카인의 말에 쿠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가 슬쩍 카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전쟁이 끝나면 은월섬으로 돌아올 거지? 카인.”

카인이 물끄러미 루나를 바라봤다. 너무 빤히 보는 카인이 부담스러웠는지 루나가 시선을 피했다.

카인이 눈동자를 굴려 나를 봤다.

“응. 돌아갈게.”

루나가 헤헤 웃었다. 어느새 카인의 눈은 루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소설에서 읽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렸다.

지금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소설 속의 루나는 카인의 자신감과 카리스마에 호감을 드러낸다. 카인도 점차 루나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카인이 루나를 살해함으로써.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세실.”

카인의 물음에 세실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어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처럼 내 눈치를 봤다.

잠시 그렇게 나를 보던 세실이 힘없이 말고삐를 당겨, 카인의 옆에 섰다.

“고맙다. 세실.”

세실은 카인을 선택했다.

.

.

.

“으으······, 추워.”

루나의 볼은 빨갰다.

은월섬에 비해 대륙의 겨울은 추웠다.

게다가 우리는 북쪽으로 말을 달리고 있다.

“얼른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어.”

안타깝게도 루나의 바람은 당분간 이뤄질 수 없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여기서 한참 더 북쪽에 있으니까. 루나가 무엇을 상상하든, 더 북쪽에.

“앗. 아앗! 고마워 데미안!”

나는 아공간에서 담요를 꺼내 루나의 등을 덮어 주었다. 일행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번 여정을 대비해 많은 물건을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

세계수의 정원에 다녀온 후, 아공간은 갑자기 두 단계가 레벨업해 4레벨이 되었다.

‘너는 이 세계를 알고 있어.’

세계수의 정원에 들어섰을 때 디네베가 했던 말이다.

또 그녀는 그곳이 ‘은월목 안의 이공간(異空間)’이라는 말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먼지의 아공간이 세계수의 정원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따뜻하다. 헤헤.”

루나는 이 세계에서 신녀가 될 운명을 피했다.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루나도 은월병에 걸릴 것이다.

은월병은 음(달)의 기운이 지나치게 짙어질 때 발생한다. 소설에서는 그 밖의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짐작한다.

내 생각에 ‘이그드라실의 피’를 지닌 자의 일부는 음의 기운을 안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듯하다. 혹은 너무 과하게 흡수하는 거겠지. 디네베처럼.

‘디네베는 신체로서 터무니없이 높은 잠재력을 지녔어. 그래서 루나프레나의 운명을 가로챌 수 있었지. 하지만 이 아이의 몸은 신체가 되기에는 너무도 미성숙했고, 그래서 모순되게도 신녀의 소임을 할 수 없게 된 거야.’

신녀에게서 무조건 발병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신녀는 세계수 이그드라실과 교감하는 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음의 부하를 견뎌야 할 테니까.

따라서 은월병의 치유에는 ‘양’의 기운이 필요하다. 음양의 조화를 도와줄 ‘별’과 ‘그림자’의 기운 역시도.

‘태양의 풀, 별의 샘물, 검은 백합.’

은월병의 치유제를 만들기 위한 재료다.

이 재료들을 배합해 만든 치유제를 소설 속의 루나는 ‘별의 엘릭서’라고 불렀다. 사족이지만 검은 백합 대신 황금 백합을 넣으면 ‘해의 엘릭서’가 만들어지며, 훗날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치유제 중 하나가 된다.

이중,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별의 샘물’이다.

“어이 금발. 너 혹한의 땅에 가본 적은 있어?”

엘리샤가 혹한의 땅에 관해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별의 샘물이 혹한의 땅에 있기 때문이다.

혹한의 땅에 가려면 슈타인탈 왕국의 북쪽 국경을 넘어야 한다. 흰 새 여관이 있는 항구 도시 브리즈가 바로 슈타인탈 왕국에 속한 도시다.

즉, 우리는 지금 슈타인탈 왕국에 있다. 그리고 슈타인탈 왕국에는 카인의 고향인 ‘하센베르크 백작령’도 있었다.

“안 가봤어요.”

“뭐? 너 그러면 혹한의 땅에 그 별의 샘물인지 뭔지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요.”

“허! 단장! 요 당돌한 녀석 좀 봐요! 얘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혹한의 땅에 가본 적도 없대요!”

쿠훌린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엘리샤를 봤다. 그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는 출발 전에 머리 염색을 했는데 또 새치의 부작용(?)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엘리샤가 내게 귀엣말로 ‘단장을 괴롭히는 것이 너무 즐겁다’며 깔깔댔다.

루나는 염색하지 않았다. 절대로 머리색을 바꾸지 않겠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루나는 얼굴의 반을 덮을 정도로 후드를 눌러쓰고 있다.

“데미안. 거짓말 아니지? 그치?”

루나가 불쌍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물었고,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루나가 헤헤 웃었다. 대륙에 온 이후 루나가 나를 더 살갑게 대하는 것 같다. 내가 은월병의 치유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근데 혹한의 땅이라는 곳 말인데, 여기보다 추워?”

“응. 더 추워.”

“으으······!”

부르르 몸을 떠는 루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세실이 떠올랐다. 한동안 세실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만난 인물 중에서 세실을 가장 가깝게 여기는 걸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제일 오래 붙어있었으니까.

세실이 카인을 따라간 것이 서운하지는 않았다. 사실 예상한 일이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테오와 덩치와 족제비가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카인 녀석이 세실을 괴롭히지는 않겠지?’

나중에 세실을 만나면 꼭 물어봐야겠다.

***

가울은 9인의 트리플 블레이드와 함께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얼굴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예감이 좋지 않다.

그러나 대가가 너무 달콤했다.

‘이번 사냥에 성공하면 쿼드 블레이드를 갖게 해드리지요. 물론 수장께는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네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쿼드 블레이드가 되면 네몬도 더는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 형님께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득 미스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이 차가 많은 여동생.

무뚝뚝한 형님은 늦게 태어난 여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자신 또한 그랬었다.

‘어릴 때는 귀여웠지.’

형님 몰래 조그만 여동생에게 격투를 가르치던 일이 생각났다.

미스트가 첫 번째 블레이드를 발현했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한 가울이었다. 하지만 미스트는 금세 가울을 추월해 쿼드 블레이드가 됐다.

‘가울!’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방에 뛰어 들어온 여동생에게 가울은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다. 화를 내며 매몰차게 쫓아냈다. 가울은 그때 여동생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미스트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몰래 격투를 가르쳐 주던 어릴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변한 것은 가울이었다. 귀여워하던 동생을 향한 열등감이, 뛰어난 형님을 가진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들 사이에서 발버둥 치던 조급함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쿼드 블레이드를 가질 수 있다면,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가울.”

귀에 익은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가울은 발을 멈췄다. 뒤따르던 아홉 살수도 발을 멈췄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왜 이자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네몬.”

네몬은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곁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깊게 눌러 쓴 후드 아래로 검붉은 입술이 선명하게 보였다.

가울은 여자에게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도와주러 온 것인가.”

“오메가는 이곳에 없습니다.”

“낌새를 눈치채고 떠났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이어진 네몬의 말은 가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오메가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뭐라고?”

가울은 혼란스러웠다. 이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큭큭큭큭큭······.”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몬이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기괴한 표정으로.

검은 로브의 여자가 부드럽게 팔을 저었다. 그러자 가울과 아홉 살수를 가두는 어둡고 거대한 구체가 생성됐다. 가울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는 이 상황에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네몬의 웃음소리는 길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가울. 그리고 당신들은 이곳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모두 죽는 겁니다.”

***

세실은 말을 달리며 흘끔흘끔 카인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긴장 때문에 살이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인과 단둘이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심지어 페르디나에 도착할 때까지 죽 함께해야 한다.

‘네 생각은 어떻지? 세실.’

은월호의 갑판에서 카인은 그렇게 물었었다.

세실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는 있는 걸까.

나는 꼭두각시인 걸까.

‘쿠. 쿠훌린.’

결국 세실은 흰 새 여관에서 몰래 쿠훌린을 찾아가 물었다.

카인과 함께 페르디나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데미안과 함께해야 하는지.

쿠훌린은 카인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네 생각은 어때?’

세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두렵고, 답답했다.

누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했다.

이끌어줬으면 했다.

‘진정으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세실.’

사실 세실은 데미안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인을 도와야 했다.

세실은 카인 대신 데미안을 선택한 적이 있다.

그때의 죄책감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다.

“왜 나를 따라온 거지? 세실.”

갑작스러운 물음에 세실의 사고가 정지했다.

세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렸다. 데미안도, 쿠훌린도, 루나도 없는 상황에 카인과 대화하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고마워. 세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카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데미안을 어디에서 만났지?”

세실의 눈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당장 말머리를 돌려 데미안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나는.”

“데미안이 너를 무척 아끼는 것 같던데.”

“데미안이. 나를······.”

“설마 몰랐던 거야?”

카인이 웃었다.

이렇게 친근한 모습의 카인은 처음이었다.

“조. 조금. 알기는······.”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카인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데미안이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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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The Remaker of Infinite Regression

Status: Ongoing
The protagonist, an infinite regressor, found himself possessed within a novel where the original protagonist had gone mad and turned dark. Now, with my unique abilities, I must write a new ending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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